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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大川 博(1896년 12월 30일 ~ 1971년 8월 17일, 향년 74세)일본의 사업가, 영화제작자, 프로야구 구단주.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사 토에이를 사실상 창립한 인물이며, 토에이 플라이어즈의 구단주와 퍼시픽 리그 초대 회장을 지낸 야구인이기도 하다.
2. 생애
2.1. 공무원
1896년 12월 30일 니가타현 니시칸바라군[1]의 촌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와쿠라 철도학교를 거쳐 주오대학 법과를 졸업했으며 대학 재학 중 철도성에 취직하여 사무관으로 일했다. 철도성 시절 상사로 나중에 총리대신을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가 있었다.2.2. 사업가
1942년, 철도성 선배이자 도쿄급행전철 창업주인 고토 케이타의 권유를 받고 도큐[2]로 이적하여 사업부장, 전무이사를 거쳐 1951년 도큐 부사장에 취임, 고토의 오른팔로 수완을 발휘했다.1948년 구 오다큐 전철 사원들을 중심으로 도큐의 분리를 주장하는 운동이 벌어지자 오카와는 분리 찬성파와 반대파 양 쪽의 의견을 잘 조율하고 3일 밤낮을 철야하면서 도큐의 체제를 개편하는 계획을 작성했다. 이로 인하여 도큐는 케이오 테이토 전철, 오다큐 전철, 게이힌 급행전철, 사가미 철도가 독립하여 나갔고, 그 뒤로 오카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도조 히데키 내각의 운수통신 대신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 추방당한 고토 케이타를 대신하여 도큐 그룹의 경영을 총괄 관리하면서 회사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1951년 2월, 오카와는 거액의 채무에 시달리던 계열사 토에이[3]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토에이를 어떻게든 도큐 그룹의 주축회사로 키우고 싶었던 고토의 의향을 따른 오카와는 철저한 재무관리와 수익구조 개선을 추진하고 토에이의 주요 자금원을 사채에서 시중 은행으로 서서히 바꾸어 나갔다. 그 결과 토에이의 실적은 극적으로 호전되었고 때마침 불어닥친 사극 영화 열풍에 편승하여 토에이가 제작한 사극은 연신 흥행에 성공하며 재무구조는 더욱 탄탄해졌다.
1953년 미국 시찰여행 도중 TV가 성황을 이루던 미국의 현실을 보고 "앞으로 일본에도 TV 시대가 열릴 것이다"라며 예측한 오카와는 일본으로 돌아온 후 영화 사업에만 의존하지 않는 경영 다각화를 전개하면서 1956년 토에이 애니메이션을 설립하여 애니메이션 시장에 진출했다. 이는 장차 TV 애니메이션이나 CM 제작을 염두에 둔 사업 개편이기도 했다. 또한 1959년에는 니혼교육TV(현 테레비 아사히)를 개국하여 니혼게이자이신문과 공동으로 운영했다. 그 외에도 TV 프로그램 제작업체와 호텔, 부동산 등 다방면의 사업 분야로 발을 넓혀 나갔다.
1964년, 토에이는 도큐 그룹에서 독립하여 나왔고[4] 오카와는 토에이 그룹의 총수로서 영화와 TV 등을 중심으로 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갔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TV 보급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 반작용으로 영화 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지만, 토에이는 임협영화[5] 붐을 일으키며 회사의 기반은 지킬 수 있었다. 1971년 간경변으로 입원한 오카와는 병상에서도 각종 서류 및 장부와 씨름하며 토에이의 경영 정상화에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오카와는 간경변을 이기지 못하고 1971년 8월 17일 향년 74세로 작고했다. 후임 사장은 토에이의 영화 프로듀서 출신 임원 오카다 시게루가 취임했으며, 오카와가 죽은 이후 급속히 기운 토에이의 사세를 살리기 위해 오카다는 부동산과 주식 매각 등으로 근근히 버텨 나갔다.
2.3. 야구인
1946년 도큐는 프로야구 세네터스 구단을 인수하여 도큐 플라이어즈[6]를 창단했고, 오카와가 구단주 자리에 올랐다. 뒤이어 1950년 오카와는 퍼시픽 리그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갓 시작한 양대 리그의 기틀을 잡았다. 1954년 플라이어즈의 경영권을 토에이로 이관시키며 구단명은 토에이 플라이어즈로 변경되었다.1959년 시즌을 앞두고 영입한 오사카 나니와 상고 출신 유망주 장훈이 외국인 선수 보유한도[7] 때문에 1군 출장이 어렵게 되자 오카와는 구단주 회의에서 규약 변경을 강력히 주장하여 출생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던 선수는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규약을 변경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전에 오카와는 장훈에게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여 자신의 양자로 들어오지 않겠냐고 권유했지만, 장훈이 어머니 박순분 여사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가 야구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라며 호통만 들었다고 하자 오카와는 생각을 바꾸어 "역시 한국 여성은 강하구나. 그렇다면 어떻게든 자네가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해보겠다" 라며 규약 변경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그렇게 힘들여 데리고 온 장훈이 프로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오카와는 마츠키 켄지로를 전담 코치로 붙여 그를 개막전 4번 타자로 출장시킬 수 있도록 키우라는 엄명을 내렸고,[8] 이를 바탕으로 장훈은 일본 야구계의 레전드가 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62년 일본시리즈 우승 연회장에서 담소를 나누는 오카와 구단주와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이 때 오카와는 우승 기념으로 등번호 100번의 유니폼을 입고 나왔다.
이후 오카와는 팀 성적을 올리기 위해 당대의 명 감독 미즈하라 시게루에게 삼고초려 급 예를 표하며 그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고, 1962년 퍼시픽 리그 제패에 이어 일본시리즈 에서도 난적 한신 타이거스를 물리치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미즈하라를 영입할 당시 오카와는 "돈은 얼마든지 내겠지만 입은 내지 않겠다(金は出すが、口は出さない)", 즉 현장에 대한 간섭을 줄이고 투자는 적극적으로 실시하겠다며 공언했지만 정작 구단에서는 1962년 일본 제일을 차지한 이후 모 기업의 자금 사정을 이유로 오히려 투자를 줄이고 더 이상의 전력 보강은 원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카와는 구단주로서 플라이어즈에게 지속적인 애정을 가지고 팀을 경영하였다.
1971년 오카와가 사망하자 후임 토에이 사장 오카다 시게루는 오카와의 아들인 다케시에게 구단주 직을 맡겼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야구에 대한 흥미가 거의 없던 인물이었다. 결국 플라이어즈는 2년 후인 1973년, 부동산 업체인 닛타쿠홈에 매각되었다.
[1] 현 니가타시 니시칸구.[2] 이 당시에는 케이힌 급행전철과 오다큐 전철 등 일본 내 유수의 철도회사를 모조리 흡수하여 다이도큐(大東急)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3] 당시 회사명은 도쿄영화배급.[4] 당초 도큐 그룹의 오너 고토 케이타는 오카와가 토에이를 재건한다면 차기 그룹 경영권을 오카와에게 넘길 것이다 라고 약속했지만 고토의 장남인 노보루가 회사를 장악해 버렸고, 이에 반발한 오카와는 토에이를 뚝 떼어서 이탈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고토 노보루가 세상을 떠나기 전 차기 그룹 경영권을 자신의 장남인 고토 테츠에게 넘겨주려 하자 도큐의 임원들이 "오카와의 사례를 기억하십쇼" 라며 크게 반발했고, 결국 테츠를 도큐 부동산의 전문 경영인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합의하면서 도큐 그룹은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하였다.[5] 야쿠자를 소재로 한 영화.[6] 1948년 다이에이 영화사 대표인 나가타 마사이치가 공동으로 구단 경영에 참여하여 팀명이 큐에이 플라이어즈로 바뀌기도 했지만, 나가타는 불과 1년 만에 킨세이 스타즈를 인수하고 발을 빼면서 도큐 플라이어즈로 원상복귀 되었다.[7] 당시 3명 보유에 1군 등록은 2명까지 가능했다. 토에이는 이미 외야수 잭 래드라, 하와이 출신 내야수 스탠리 하시모토를 보유 중이었다.[8] 실제로 장훈은 1959년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개막전에 6번 좌익수로 출장하였고, 이후 토에이의 4번 타자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