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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09:51:20

요코이 군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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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이 군페이
横井 軍平 | Gunpei Yokoi
파일:Gunpei Yokoi.jpg
출생 1941년 9월 10일
일본 제국 교토부 교토시
사망 1997년 10월 4일 (향년 56세)
일본국 이시카와현 코마츠시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직업 게임 디자이너
소속 닌텐도 (1965년~1996년)
주식회사 코토 (1996년~1997년)

1. 개요2. 생애3. 고사한 기술의 수평적 사고(枯れた技術の水平思考)4.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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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게임 개발자.

닌텐도의 도약기를 이끈 일등공신이자 휴대용 콘솔 게임기VR 게이밍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도시샤대학 공대의 성적 불량 졸업생 요코이 군페이는 대학 졸업 후 취직자리를 찾지 못하다 고향의 작은 회사였던 닌텐도에 공장 설비보수 및 점검역으로 입사한다. 이후 요코이가 일과 시간 중간중간에 취미 삼아 만든 장난감을 눈여겨 본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지시로 새로 설립된 개발팀 닌텐도 R&D1의 리더가 된다.[1] 팀의 리더가 된 그는 울트라 핸드, 광선총(재퍼) 등 어린이용 완구를 개발하며 부도 위기였던[2] 닌텐도를 살려내고 게임 & 워치를 개발, 4340만 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닌텐도를 반석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이때 게임&워치용 동키콩을 개발하면서 오늘날 컨트롤러의 표준이 되는 십자키를 고안해내게 된다.

회사가 패미컴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비디오 게임 사업에 매진하기 시작한 뒤로는 광신화 파르테나의 거울, 메트로이드, 파이어 엠블렘 등의 게임들을 프로듀싱했지만, 아날로그 장난감에 애착을 가졌으며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게임 개발의 본질'이라는 취지를 갖고 있었던 그는 점차적으로 성능이 높아져 가는 비디오 게임 산업과 그에 적응하고자 전자기술 회사로 변해가는 닌텐도에 회의를 느끼고, 후배인 우에무라 마사유키가 주도한 패미컴 개발부서와 갈등도 심화되며 어려운 시기를 겪는다. 이 때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보이의 개발을 시작했다. 개발 초기에는 액정 스크린 문제로 난항을 겪으며 자살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고생했으나[3], 게임보이는 1989년에 발매되어 패미컴을 뛰어넘는 인기를 누렸다.

1990년대 초에는 VR 기술에 감명받고 은퇴하기 직전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 VR 게임기인 버추얼 보이의 개발을 추진했다. 버추얼 보이에 대한 그의 집념은 대단했는데, 게임기의 액정으로 정식으로 상용화된지 얼마 안된 LED를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했고, 게임기의 명칭도 혁신적인 기기에 걸맞아야 한다면서 라이벌 기업인 반프레스토에서 특허 등록한 '버추어'라는 이름을 로열티까지 내서 사용했다고 한다.

게임보이 포켓의 개발을 마지막으로 퇴사.[4] 애시당초 커진 회사를 감당하지 못해 독립하고 싶어했으며 이후에 주식회사 코토를 설립했고, 반다이의 휴대용 게임기 원더스완 개발에 어드바이저로 참여했으며, 원더스완 소프트 군페이(GUNPEY)의 감수를 맡는 등 원더스완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 결실을 보기도 앞서 1997년 10월 4일, 향년 56세로 호쿠리쿠자동차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추돌 사고였으나, 차에서 내려 앞 좌석 운전자에게 가다가 뒤에서 오던 차에 치이는 2차 사고를 당했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 게임보이 컬러 이후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에는 스트랩을 달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요코이 군페이의 아이디어다. "어린이들이 갖고 놀다 떨어뜨려 망가지면 얼마나 속상하겠나. 스트랩을 달아 떨어뜨리지 않게 하자."는 취지였는데 게임보이 시절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의 사후 출시된 게임보이 컬러부터 그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적용되기 시작했다.

3. 고사한 기술의 수평적 사고(枯れた技術の水平思考)

우수한 기술이 우수한 게임을 탄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첨단 기술은 오히려 개발과 생산에 비용을 발생시켜 아이디어를 경직시킬 뿐더러 고가의 게임이 되어버린다. 기존의 기술을 다른 방향으로 활용하면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다. — 요코이 군페이

요코이 군페이의 1997년 인터뷰 기록

즉, 첨단 기술과 화려한 스펙으로 무장하는 것 보다 '즐길 거리'라는 게임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고 소비자들에게 검증이 완료된 기술의 새로운 활용법을 찾는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두 대표작인 '게임 & 워치'와 '게임보이'를 보면 '게임 & 워치'는 전자계산기의 CPU와 액정을 응용한 것임을 알 수 있고, 그 후속작인 '게임보이'도 이미 검증된 CPU인 Z80의 개량판[5]과 흑백 액정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9년 당시에도 컬러 디스플레이는 있었으나 저전력 설계가 불가능했기에 흑백을 채탁한 것.

이러한 그의 철학과 정면 대비되어 처참하게 실패한 기기가 버추얼 보이였다. 하지만 요코이의 철학은 그가 닌텐도를 떠난 뒤에도 줄곧 닌텐도의 방향성을 이끌고 있다.[6] 은행의 현금 자동 입출금기 등에서 자주 사용되는 터치 스크린을 게임기에 사용하여 라이트 유저들에게 어필한 닌텐도 DS, 모션 센서를 적극 활용하여 비디오 게임 사상 가장 대중적인 콘솔기기로 시대를 풍미한 Wii, 버추얼 보이의 3D 아이디어를 계승한 닌텐도 3DS, 피규어DLC를 연동시킨 아미보, 증강현실을 적용한 포켓몬 GO, 골판지를 이용한 닌텐도 라보 등이 그 예다.

그리고 이 말은 훗날 등장하는 AAA 게임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또한 게임 제작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가 프로듀스한 메트로이드 시리즈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의 횡스크롤 액션+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탐험이라는 소재를 조합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한 것이다.

4. 어록

게임 디자이너는 기술에 대해 능통해야 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라도 그러하다면, 디자이너들은 무언가를 시도조차 하기 전에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고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7]
출처
손을 잡는 것보다는 입을 맞추는 쪽이 점수가 높게 나옵니다.
- “애정도 측정기”라며 판매된 ‘러브 테스터’에 대해 한 말[8]


[1] 개발정보부 1팀. 2003년, 4대 사장인 이와타 사토루가 취임한 뒤에 우에무라 마사유키를 중심으로 하는 R&D2와 함께 해체되었다. 두 그룹의 사원들은 미야모토 시게루를 중심으로 하는 개발정보본부(약칭 EAD, 구 R&D4)와 기획개발본부(약칭 SPD, 신설팀)로 인사 발령이 났다. 이 두 팀은 2015년에 사내 구조개편을 겪으면서 EPD로 통합되었다.[2] 이 시기 닌텐도는 여러 사업을 시도했으나 모두 망하고 손실만 늘어난 상태였는데, 야마우치 사장이 본업인 화투 및 카드 사업을 싫어했던 것도 있었으나 미국의 USPC를 방문하면서 카드 게임의 시장이 보잘것없음을 깨달은 게 결정적이었다.[3] 액정 스크린 자체의 품질도 문제였지만 가격까지 타협하며 제작하려다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시제품을 막 완성하고 나니 시야각이 생각보다 너무 좁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서는 모든게 수포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2주간 제대로 먹지도 못하다가 영양실조로 실려가기까지 했다고. 다행히 이후 공정을 그대로 유지하되 게임보이 액정의 콘트라스트를 조절하는 버튼을 추가로 내장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고 게임보이는 무사히 발매될 수 있었다.[4] 버추얼 보이의 실패를 책임지고 퇴사했다는 설은 본인과 닌텐도 모두 부인했다. 출처[5] 1974년에 나온 것이니 게임보이 출시년도인 1989년 기준으로 15년 전 물건이다. 물론 해당 물건은 40nm 물건도 있을정도로 오랫동안 쓰인것도 감안해야한다.[6]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퇴사 후에 본인이 제작에 참여했던 원더스완은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서 결국 게임보이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7] 기획자와 개발자 간 구상의 출발점이 완전히 다름을 시사하고 있다. 기획자는 '창의성'을, 개발자는 '실현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을 포함해 규모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딜레마이다. 같은 닌텐도의 이와타 사토루 역시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기에 프로그래머 시절에는 '프로그래머는 No라고 말해선 안 된다'고 말하며 어떻게든 구현해 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져야 한다'라고 선을 그어둬서 프로그래머의 영역도 지켰다.[8] 그야 러브 테스터는 임피던스 측정기니 습기가 많은 입술이 전류량이 높은 것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