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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공화국의 주 | ||
우타르프라데시 UR : اتر پردیش HI : उत्तर प्रदेश Uttar Pradesh | ||
지방 | 북부 | |
면적 | 243,930 km² | |
주도 | 러크나우 | |
하위 행정구역 | 75지구 | |
시간대 | UTC +5:30 (IST) | |
인구 | 2억 5,705만명 (2024년 추계) | |
공용어 | 우르두어, 힌디어 | |
종교 | 힌두교 79.7%, 무슬림 19.3%, 시크교 0.3% 기독교 0.2%, 자이나교 0.1%, 불교 0.10% | |
HDI | 0.583 (35위) | |
1인당GDP | 961$ | |
GDP | 2,231억 $ | |
지역번호 | 0542 | |
차량코드 | UP | |
주지사 | 아난디벤 파텔 | |
주총리 | 요기 아디티아나트 | |
주부총리 | 케샤브 프라사드 마우리아 브라제쉬 파타크 | |
웹사이트 | 우타르프라데시 주정부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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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 북부[1]에 위치한 주로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행정구역.[2] 주도는 러크나우지만 가장 큰 도시는 칸푸르. 면적은 243,286㎢로 한반도보다 약간 더 넓으나 주 하나의 인구가 무려 2억5천만 명이 넘는다.[3] 이보다 인구가 많은 행정구역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고 이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도 중국과 인도, 미국, 인도네시아[4] 밖에 없어서 국가로 따져도 5위에 해당한다.[5][6] 공용어는 힌디어와 우르두어로 힌디어가 주로 사용된다. 예전에는 우타라칸드[7]를 포함한 더욱 큰 주였지만 지금은 우타라칸드가 분리되었다. 주민의 다수는 힌두교인으로 인구비율이 81.5%이고, 무슬림은 17.4%에 불과하다.[8]2. 지리
주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갠지스 강과 그 지류들이 흐르며 대부분이 평야 지대이다. 아열대 기후를 띄는 지역이 많으며 주도 러크나우의 경우 1월 14.7℃, 6월 32.9℃의 기온을 띄며 북인도의 많은 지역처럼 우기와 겨울, 그리고 혹서기가 존재한다. 강수량은 1,014㎜로 이 중 5-10월에 94%가 편중되어 있다.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 성지로 유명한 바라나시[9], 그리고 칸푸르, 러크나우, 알라하바드, 델리의 위성도시인 노이다, 가지아바드 등 많은 대도시가 존재한다.
3. 역사
북인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지역 중 하나로 고대부터 수많은 왕국이 존재했으며 펀자브, 비하르와 함께 고대부터 북인도의 중심 지역을 이루었다.3.1. 베다 시대
우타르프라데시 서부, 델리, 우타라칸드 서부를 아우르는 갠지스강-야무나강 경계지(doab)는 고대부터 매우 비옥한 지역이었다. 이곳에 베다 시대 중기인 기원전 12세기 무렵 형성된 인도아리아계 쿠루(Kuru) 왕국과 판찰라(Pañcāla) 왕국을 아우르는 쿠루-판찰라 지역은 이후 점차 북인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고학적으로 쿠루-판찰라는 PGW 문화(Painted Grey Ware culture, 기원전 1200년 전후~기원전 500년 전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쿠루의 주요한 두 도시로 인드라프라스타(오늘날의 델리)와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가 꼽히는데, 후자는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 지역에 있다.마하바라타는 상당 부분 허구적이지만, 그 핵심 사건 쿠룩셰트라 전쟁(쿠루 평원의 전쟁)은 리그베다에 언급되는 '십왕(十王) 전투'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베다에 따르면 쿠루 왕국은 십왕 전투의 결과로 성립되었다. 이 쿠루 왕국 또는 쿠루족은 베다 시대 중기 및 후기를 다루는 문헌에서 여러 번 주요 행위자로 등장한다. 후기 베다 시대(기원전 1100년~기원전 500년) 쿠루와 그 주요 동맹 판찰라는 북인도의 핵심 세력이었고, 이 시기 이들을 비롯한 인도아리아인의 세력은 펀자브, 우타르프라데시, 비하르 등 북인도 지역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정착했다. 주로 펀자브에서 약 기원전 1500년~기원전 1000년 무렵 성립한 리그베다를 비롯한 베다 성전은 베다 시대 후기 북인도의 여러 인도아리아인 정착지에서 받아들여져 보존되었다.
이렇게 인도아리아인의 정착과 고대 국가 건설, 베다 성전의 성립으로 고대 인도 문명과 문화의 기본 틀이 갖추어졌다.
3.2. 십육대국
베다 시대가 저물고 기원전 6세기경 열린 십육대국의 시대에도 쿠루와 판찰라는 십육대국에 속했지만, 쿠루-판찰라는 내부에서 분열되어 이들의 정치적 중요성은 비교적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판찰라 동쪽,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 동부의 코살라와 오늘날 비하르 지역의 마가다가 주요 세력으로 대두해 세력 경쟁을 벌였다. 코살라는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의 출신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십육대국 가운데 마가다, 코살라 다음으로 세력이 강했던 밧사(Vatsa, 왓사. 주요 도시는 카우샴비)와 아반티(Avanti, 아완티. 주요 도시는 우자이니[우자인]) 가운데 전자도 우타르프라데시 동남부에 위치했으며, 후자는 오늘날 마디아프라데시 지역에 있었다.한편 우타르프라데시 서남부의 슈라세나(Śūrasena)도 십육대국 가운데 하나였다. 슈라세나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했으며, 슈라세나의 중심지는 바로 크리슈나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도시 마투라(Mathura)였다. 마투라는 북부 대평원의 무역로가 중부의 역사적 말와 지역(마디아프라데시 서부, 라자스탄 동남부) 및 인도 서해안으로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해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마투라는 기원전 300년 전후에 활동한 이방인 메가스테네스의 기록에서도 번영한 도시로 언급되었다. 심지어 오늘날 힌디어의 먼 기원이 되는 샤우라세니 프라크리트가 고대에 슈라세나 지역에서 쓰였던 입말에서 기원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주장을 증명할 방법은 거의 없다.
고대 우타르프라데시에서는 베다를 바탕으로 성립된 브라만교가 기본적으로 인도아리아인들의 종교로 받아들여졌지만, 십육대국 시대에 신흥 종교 불교가 등장해 널리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십육대국 시대부터 우타르프라데시 동남부 바라나시 근처에 위치한 고대 도시 사르나트(녹야원)는 북인도 불교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첫 설법을 한 곳이자, 붓다의 다섯 제자에 의해 불교 승가가 처음 생겨난 곳으로 여겨진다. 기원후 11~12세기에 도시는 약탈 및 파괴를 당하고 쇠퇴했지만, 그 전까지는 불교의 주요 순례지 가운데 하나였다. 사르나트는 자이나교에서도 신성한 도시로 여기며, 12세기 이후 한동안 불교도들의 발길이 뜸해졌을 때도 자이나교도들은 사르나트를 계속해서 순례했다.
십육대국은 고고학적으로 PGW 문화를 이어 등장한 NBPW 문화(Northern Black Polished Ware culture, 기원전 700년 전후~기원전 200년 전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3.3. 고대의 제국들
동쪽에서 벌어진 코살라와 마가다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마가다였다. 이를 바탕으로 강성한 마가다가 제국화하며 기원전 4세기 고대 제국 난다 왕조가 성립했다. 난다는 처음으로 마가다, 코살라, 쿠루-판찰라뿐 아니라 우타르프라데시, 비하르, 마디아프라데시 전체를 통합했고, 나아가 벵골과 오디샤 일부까지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난다의 뒤를 이어 성립한 새로운 제국 마우리아 왕조는 비하르-우타르프라데시-펀자브 지역을 핵심부로 하여 최초로 인도를 거의 통일했다.북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이후 슝가로 이어지는 거대 제국의 시대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우타르프라데시의 다른 지역은 제국의 영역이었지만, 마투라는 슝가 세력의 서방 한계지였다. 고고학적으로 관련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마투라는 슝가의 지배가 약한 지역이었거나 슝가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우리아 이후 기원전 150년에서 기원전 50년 사이 마투라는 토착 왕조인 마투라의 미트라(Mitra) 왕조가 다스렸다. 이들은 인도-그리스 왕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슝가의 약화 후 기원전 1세기 전후에는 인도-스키타이의 세력이 마투라와 우타르프라데시 서부까지 미쳤다. 인도-스키타이계 북사트라프(마투라 사트라프)는 이 시기 마투라 미트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마투라를 중심으로 우타르프라데시 서부에서 펀자브의 탁실라에 이르는 영역을 다스렸다. 이후 이들의 세력권은 인도 서북부의 강성한 제국 쿠샨 왕조가 접수했다.
북사트라프와 쿠샨 시대 내내 우타르프라데시 동부는 서부의 제국에 통합되지 않고 군소 세력들이 할거했다. 쿠샨 제국은 기원후 100년 전후 우타르프라데시 동부로 세력을 뻗으려 시도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2세기 후반 무렵 쿠샨 제국의 동부 지배는 약화되었다. 한편 기원후 1세기부터 옛 밧사의 중심지 카우샴비를 중심으로 우타르프라데시 동부 일부를 다스렸던 세력으로 카우샴비의 미트라(Mitra) 왕조가 있다.
4세기, 새로운 거대 제국 굽타 왕조가 발흥해 마우리아 이후 오랜만에 북인도 전체를 통합했다. 굽타 제국에서는 고대 인도 문화가 크게 발전했으며, 힌두교가 새로운 형태로 거듭 변화했고, 인도의 기록 문화도 본격적인 틀을 갖추었다. 굽타의 지배는 5세기 후반에 약화되었고, 제국은 6세기에 점차 붕괴되었다.
고대 후기 우타르프라데시 서남부 마투라에서는 특히 시각 문화가 발달했다. 마투라는 약 기원전 2세기부터 굽타 시대까지 인도 미술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마투라 미술은 특히 인도 토착성이 강해 그리스의 영향이 짙은 간다라 미술과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3.4. 중세 전기
생산력이 높은 우타르프라데시는 북인도 주요 세력들이 탐내는 요충지였다. 상고대 판찰라의 중심지였던 카나우지는 굽타 제국의 붕괴 이후 새로이 북인도 역학 관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곳이 바르다나 왕조의 수도로 발전해, 기원후 7세기 북인도 최대의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세력이 카나우지에 눈독을 들였다.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카나우지는 서북인도의 구르자라-프라티하라, 데칸의 라슈트라쿠타, 벵골의 팔라 삼자 간에 벌어진 세력 경쟁의 축이었다.3.5. 중세 후기
가즈니 왕조를 시작으로 이슬람 세력이 11세기부터 신드와 남부 펀자브의 물탄을 넘어 북인도로 본격적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중세 후기 북인도의 핵심 국가 델리 술탄국(1206년~1526년)은 초기부터 중기까지 델리와 인접한 우타르프라데시 대부분 지역을 주요 세력권으로 지배했다. 그러나 델리 술탄국 투글루크 왕조가 쇠퇴하면서 우타르프라데시 동부의 자운푸르를 중심으로 자운푸르 술탄국(1394년~1493년)이 성립하여 우타르프라데시 동부와 비하르는 한동안 독립 세력이 들어섰다. 델리 술탄국의 마지막 왕조인 로디 왕조는 15세기 말 자운푸르 술탄국을 정복하고 우타르프라데시 동부를 되찾았지만 그 뒤로 왕조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이 시기 우타르프라데시와 그 주변 지역에서는 초기 힌두스탄어 작가들이 찬란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힌디-우르두 초기 고전 문학사를 장식한 툴시다스, 카비르, 아미르 쿠스라우 셋 모두 이 시기 우타르프라데시 출신으로 델리 술탄국, 자운푸르 술탄국, 혹은 (가장 나중 세대인 툴시다스의 경우) 다음 절의 무굴 제국 지역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부터 19세기 무렵까지 우타르프라데시와 델리는 힌두스탄어 문학의 중심이었으며, 문학어로 쓰인 주요한 힌두스탄어의 두 가지 방언은 우타르프라데시 서부에서 마투라를 중심으로 브라지(Braj) 지방에서 사용된 브라지 바샤(Braj Bhasha)와 우타르프라데시 동부에서 러크나우 등 아와드 지방에서 사용된 아와디어(Awadhi)였다.
3.6. 근세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며 통치 세력이 여러 번 교체된 북인도는 로디 왕조와 수르 왕조를 이어 16세기에 새로 발흥한 무굴 제국의 차지가 되었다. 무굴의 통치는 비교적 오래 안정적으로 지속되었으며, 무굴 시기에 지어진 아그라의 타지마할은 인도 이슬람 건축의 정점으로 꼽힌다. 우타르프라데시에 위치한 파테푸르 시크리, 알라하바드(오늘날의 프라야그라지), 러크나우, 칸푸르 등도 16~18세기를 다룬 글을 읽을 때 주요 지역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아우랑제브 사후 무굴은 급격히 쇠퇴했고, 러크나우를 중심으로 우타르프라데시 동부 지역에 존재하던 아와드 나와브국(아와드 수바)은 18세기에 정치적, 문화적으로 번영하며 북인도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인도사에서 유명한 이 시기의 아와드 나와브로 사프다르 장과 슈자 웃다울라가 있다. 그러나 1764년 아와드가 무굴, 벵골과 연합해 영국 동인도 회사와 싸운 북사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점차 영국 세력은 아와드를 종속시켰다.
한편 데칸계 힌두 제국 마라타 제국은 무굴의 약화를 틈타 18세기 중반부터 우타르프라데시 서부를 점령하고 델리를 세력권에 두었다. 특히 마라타의 역사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로힐라족의 중심지 로힐칸드가 우타르프라데시 서북부에 위치했다. 후기에 마라타 제국은 페슈와의 중앙 정권 외에 신데, 홀카르 등 여러 가문이 통치하는 지역들로 영토의 지배 구조가 분권화되었다. 마라타 영역에서 북부에 해당하는 델리, 우타르프라데시 서부, 라자스탄 지역은 신데 가문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1803년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에서 신데 가문이 영국군에 패배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가 델리를 점령했고, 이 전쟁 이후 우타르프라데시 대부분 지역은 영국 세력이 지배하게 되었다.
3.7. 영국의 지배
19세기 중반 영국 지배에 반발하는 인도 대반란이 벌어졌다. 반란 직전인 1856년 아와드가 영국 직할령으로 합병되었는데, 이에 반발한 아와드 지역은 폐위된 나와브의 아들을 새 나와브로 하여 반영 항쟁을 벌였다. 또한 대반란 시기 유명한 라니 락슈미 바이가 항쟁한 잔시 지역도 우타르프라데시 서남부에 위치했다. 19세기 말 인도 독립 운동에 있어서도 우타르프라데시는 중요한 지역이었다.4. 경제
한편 지금 우타르프라데시는 인도 내에서도 독보적으로 가난한 비하르를 제외하면 가장 소득수준이 낮은 지역들 중 하나로 경제가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다. 과도한 인구 때문에 우타르프라데시를 서부의 파스침프라데시, 동부의 푸르반찰, 남부의 분델칸드, 중부의 아와드프라데시로 나누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10] 2010년대에는 주 이름을 힌두스탄 주로 개칭하잔 움직임도 있다.[1] 힌디어로 우타르(उत्तर)가 북쪽이란 뜻이다.[2] 다만 주 전체가 갠지스강 유역의 힌두스탄 대평원에 속해 대단히 좋은 경작지이기 때문에 인구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3] 2024년 현재 257,054,568명. 출처[4] 2024년 추계로 2억8천만 명에 육박한다.출처[5] 2017년 기준으로 브라질도 추월했다. 심지어 파키스탄보다도 근소하게 더 많다.[6] 여담으로 2023년 기준으로 인도가 중국의 인구를 추월하였는데, 인구가 가장 많은 행정구역이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에 있고, 면적이 가장 큰 행정구역이 면적이 가장 큰 나라에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7] 2000년 분리 당시에는 우타란찰이란 이름이었으나 2007년부로 우타라칸드로 개칭되었다.[8] 하지만 저 인구에 17.4%면 4천5백만에 육박한다.[9] 바라나시(Baranasi)는 힌두 근본주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나렌드라 모디 현 총리의 하원 지역구.[10] 자세한 분할안에 관해서는 여기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