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아시아 | |||||
대한민국 | 중화권 | 카자흐스탄 | 우즈베키스탄 | 키르기스스탄 | ||
타지키스탄 | 티베트 | |||||
유럽 · 아메리카 · 오세아니아 | ||||||
러시아 | 튀르키예 | 미국 | 캐나다 | 호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아시아 | ||||||
대한민국 | 일본 | 대만 | 몽골 | 중국 | |||
인도 | 부탄 | 위구르 | 오키나와 | ||||
아메리카·유럽·오세아니아 | |||||||
미국 | 러시아 | 호주 | |||||
과거의 대외관계 | |||||||
청나라 치하 티베트 |
위구르 | 티베트 |
[clearfix]
1. 개요
위구르와 티베트 사이의 역사적 관계와 현재의 상호 관계를 정리한 문서이다.2. 역사적 관계
2.1. 토번 제국과 위구르 제국
중세 티베트의 대장장이 가문 중 하나인 가르 가문은 흉노가 월지(토하라인)를 공격할 때 서쪽 대신 남쪽으로 피난한 소월지 후손이라고 한다. 중세 초 전성기의 토번 제국은 알티샤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당나라, 돌궐(서돌궐), 압바스 왕조와 전쟁을 벌였다. 토번이 654년대부터 676년까지 이 지역으로 팽창하며 타림 분지를 점령하고, 우전도독부와 소륵도독부를 무너트리자, 당나라 조정은 안서도호부 본진을 다시 현 투르판의 서주(구 고창으로 옮겨야 했다. 얼마안가 670년 티베트 제국의 명장 가르친링 첸드로가 이끄는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티베트는 한동안 타림 분지에서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토번 제국은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의 공격으로 다시 타림 분지를 상실했으나 당나라가 카를룩의 통수로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서역 지역이 바로 이슬람화가 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토번 제국 때문이었다. 토번 제국은 압바스 왕조 군대가 토번과 인접한 트란스옥시아나 일대를 정복하자 이를 경계하여 튀르크계 동맹군 튀르게시(돌기시)를 지원하여 소모전을 벌이도록 만들었고, 토번 제국 역시 압바스 왕조 군대와 직접 여러차례 전투를 벌여 승전하였다. 이 때문에 탈라스 전투 이후에도 압바스 왕조 군대는 티베트 대신 타림 분지를 장악하는데 실패하였다.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병력들이 철수한 덕분에 토번, 그리고 돌궐 대신 새로이 흥기한 위구르 제국이 다시 패권쟁탈전을 펼쳐 이 지역을 장악하였고, 안사의 난 한 세기 이후 위구르 제국 난민들이 몰려와 타림 분지 일대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점령하고 정착하여 원주민인 토하라인과 통혼 혼혈해 현대로 이어지는 위구르인과 동투르키스탄으로 만들기 전까지 해당 지역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투르판 분지를 중심으로 정착한 위구르인들은 이른바 고창회골로 불리는 코초 위구르를 건국하였다. 위구르인 난민들이 오지 못한 호탄 왕국 역시 토번이 약해진 틈을 타서 9세기 중반 조공을 끊고 다시 독립 왕국이 되었다.
2.2. 하서회골과 서하
위구르 제국 난민 중 중국 간쑤성 일대에 정착한 사람들은 처음에 토번에 통제를 받다 이후 독립하여 9세기 중반 하서회골을 세운다. 하서회골은 하서회랑(감숙주랑)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으나 11세기 탕구트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탕구트인들이 세운 서하 역시 속민인 하서 위구르인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요나라(서요), 금나라와 무역을 진행하였다. 서하 당시에는 과거 실크로드 동서무역을 장악했던 소그드인들이 이슬람화되어 타지크인, 위구르인 등등과 동화되어 무슬림으로 개종한 상황이었고, 서하의 위구르인들은 서쪽의 코쵸 위구르인들의 도움을 받아 동서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 유고족은 중세 하서 위구르인들의 후손으로 비정되며 티베트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를 믿어 20세기 초반 중화민국 시절에는 티베트인으로 분류되기도 하였었다.2.3. 근세
15세기에는 이슬람 수피 교단의 일파였던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이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영향을 받아 수피 스승이 제자에게 사후에도 영향과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주장으로 교단주의 영향력을 절대화하였다. 동모굴 칸국에서 실권을 차지하고 있던 낙슈반디야 교단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아파크 호자와 그가 이끄는 '백산당'이 경쟁자 이스하크 호자가 이끄는 흑산당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자, 아파크 호자와 백산당은 티베트로 도주하여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과정에서 아팍 호자를 따르는 백산당 일부가 라싸에 아예 정착하여 티베트계 무슬림 까체족의 기원이 되었다.[1] 아파크 호자는 달라이 라마 5세를 '브라흐민들의 셰이크'라고 부르고 아첨하면서 다시 자신을 동모굴리스탄 칸국의 지도자로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달라이 라마 5세의 겔룩파 티베트 불교 역시 낙슈반디야 수피 교리와 비슷하게 "종교 지도자들이 세속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교리로 무장하며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종교는 다르지만 삶의 방향이 흡사한데 따른 동질감 때문이었는지, 달라이 라마 5세는 아파크 호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준가르 칸국의 갈단 칸에게 아파크 호자를 도와 동모굴리스탄 칸국의 흑산당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 때 티베트 불교 승려로 수행했던 갈단 칸은 이를 즉시 받아들여 1678년 12만 명의 대병력으로 타림 분지 서부를 침공하여 백산당과 연합하여 흑산당을 몰아냈다. 그 결과 동튀르키스탄 무슬림들은 준가르 칸국에 예속당한다.갈단 칸은 아파크 호자와 그의 후손들을 달라이 라마 5세의 윤허 하에 타림 분지의 칸으로 임명한 후 준가르 칸국의 봉신으로 삼았다. 쫓겨난 흑산당은 이후 아파크 호자와 백산당을 배신자로 선전했으며, 지금의 위구르 독립 운동 세력에게도 아파크 호자의 평가는 매국노 수준이다. 위구르인 중 티베트인들을 영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티베트 불교와 이슬람의 차이 때문에 싫어한다기보다는 아파크 호자가 생각나서 싫어한다고 볼 수도 있다. 준가르 칸국이 위구르인들을 잔학하게 수탈한 것은 물론 결과적으로 준가르 토벌을 명목으로 한 중국의 개입을 불러일으켜 동투르키스탄, 티베트 모두가 청나라한테 정복당했기 때문. 물론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빌붙었다는 점 때문에 더 안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와는 별개로 카슈가르에 있는 아파크 호자의 묘는 중요 문화재로서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2.4. 현대
오늘날에는 해외 망명 위구르 운동가들 사이에서 티베트 망명정부처럼 체계적이고 구심점이 잡힌 망명 정부를 구성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의견이 모인 결과 독일에서 세계 위구르 회의라는 단체가 발족하였다.중국에서는 레비야 카디르를 대상으로 "위구르의 달라이 라마"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중국 정부 차원에서 달라이 라마라는 명칭을 오늘날의 중공 내에서 혐칭, 멸칭 수준으로 격하시키려는 운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9년부로 대만 언론은 세계 위구르 회의가 티베트 망명 정부에게 공동투쟁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레비야 카디르 및 여타 위구르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2017년부로 티베트 망명 정부와 연대 추진을 천명했다.# 그리고 2017년에는 레비야 카디르가 일본을 방문해 롭상 상가이의 강연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2021년 5월 세계 위구르 회의는 새로 티베트 망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펜파 체링에게 축하 메세지를 보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체류하는 티베트인 인구나 티베트 자치구에 체류하는 위구르인 인구가 워낙 소수이다보니 역사적 갈등 관계 및 불교도와 이슬람교도라는 종교적, 민족적 차이에도 불구 갈등이 불거지기는 힘들다. 2015년 통계 기준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 거주하는 티베트인 인구는 6,153명으로 자치구 전체 인구의 0.033%명이다. 다른 한 편 티베트 자치구 내 무슬림 인구는 전체 인구의 0.4% 정도인데 이들 대부분은 후이족이다. 티베트인과 후이족 사이의 갈등을 다룬 기사#1#2나 위구르인과 후이족 간의 갈등 관계를 다룬 논문이나 기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 위구르인이나 티베트인 사이의 갈등 관련한 기사는 보기 드문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