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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9:23:46

유채영/활동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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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창기 활동
1.1. 잡지 모델로 연예계 데뷔, 가수 데뷔 과정1.2. 그룹 어스(US)로 선풍적인 인기, 그리고 첫 솔로 음반1.3. 발매되지 못한 비정규 1집 《A High Speed 1996 : 快速1.4. 무산된 아무로 나미에와의 듀엣 프로젝트
2. 솔로 데뷔
2.1. 정규 1집 《Emotion
2.1.1. 뒤늦게 예능가에서 역주행에 성공하다.
2.2. 아쉽게 끝나버린 정규 2집 <A Secret Diary>2.3. 발매되지 못한 솔로 3집과 수억대의 사기 피해
3. 방송인로서 제2의 전성기
3.1. 예능가의 핫이슈로 떠오른 유채영
3.1.1. 수년만에 생긴 팬클럽 <가디스>
3.2. 8년만의 가수 복귀, 디지털 싱글 <좋아>
4. 이후 행보
4.1. 점점 줄어드는 활동
5. 별이 지다

1. 초창기 활동

1.1. 잡지 모델로 연예계 데뷔, 가수 데뷔 과정

유채영은 무남독녀로 집안에서 태어났고, 성장 과정동안 아버지 없이 어머니 슬하에서 홀로 성장했다. 그랬기에 아버지의 얼굴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으며 어머니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살아왔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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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유채영의 모습.
얼마 뒤 그녀는 홍콩배우 왕조현을 닮은 외모로 연예계에 입문한다.

유채영은 어렸을때부터 발레리나의 꿈을 갖고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배웠는데 본인이 가수가 될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홍콩배우들이 한창 인기를 끌었는데 유명 홍콩배우의 사진을 코팅해서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책방을 많이 다니게 됐는데 단골책방의 주인아저씨가 쪽지를 부모님께 갖다드리라고 하셨고 그게 바로 하이틴 잡지 '여학생' 잡지표지모델 추천서였다.

알고보니 그 분이 잡지 '여학생'의 편집장이었고 당시 대뜸 유채영을 보고 "넌 방송을 해야겠다"며 회사 약도를 그려주었는데 이후 그 회사와 인연이 닿아 1989년 3월호 '여학생' 잡지 모델로 데뷔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데뷔를 94년 "쿨"로 기억하고 있어서 모르지만 첫 연예계 데뷔가 무려 1989년이었다. 당시 나이 17살. #

빼어난 외모와 끼로 연예계에 발을 들인 유채영은 첫 잡지가 발매되자마자 여러 연예기획사에서 콜이 왔고 이후 <하이틴>, <주니어> 등의 인기 잡지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가수 이상은의 제작자에게 픽업 되어 1990년 그룹 푼수들의 2기 멤버로 가수 데뷔를 하는데 당시에는 예명 "유채영"이 아닌 본명 "김수진"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했다.

이 그룹은 지금의 아이돌 형태로 제작된 그룹이었으며 여자 4명의 남자 멤버 1명의 구성으로 댄스 장르를 선보인 그룹이었다고 한다. 타이틀 곡은 "써핑 산타"라는 곡이었는데 캐롤에 하이틴곡을 섞은 듯한 특이한 구성으로 대중들에게 나타났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들이 첫 콘서트를 열었는데 겨우 몇십명만 와서 펑펑 울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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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푼수들> 시절의 유채영.

이후 푼수들은 해체되고 몇년간의 공백기를 가지게 됐는데 이때 유채영은 안양예술고등학교 무용과를 진학했다. 졸업 후 성인이 된 유채영은 본격적으로 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서 여러 클럽 가를 전전하며 춤을 추고 다녔는데 워낙 몸선이 이쁘고, 끼가 있어서 당시 가수 지망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1994년 어릴때부터 친구 사이였던 이재훈에게 멤버가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 그룹 데뷔를 3개월 앞두고 합류하게 되는데, 본래 쿨에 데뷔할 예정이었던 여성 멤버가 탈퇴하게 되자 이재훈이 유채영을 떠올려서 그 빈 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유채영도 춤을 추고 다녔고 멤버 오빠들도 아는 사이여서 한번에 오케이를 했으며, 그렇게 1994년 혼성그룹 쿨의 홍일점 멤버로 데뷔하게 된다.

쿨이 MBC에서 첫 TV 데뷔를 하게 되는 날, 유채영의 오랜 친구는 느닷없이 유채영에게 쿨의 멤버가 되고 싶다면서 자기도 껴달라는 부탁을 했고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 유채영은 그럴 수 없다고 친구를 말렸지만 이때 그 친구는 "너가 지금 쿨에 들어가면 우린 절교하는거고, 그렇지 않으면 평생 친구가 되는거다"'라고 드립을 펼쳤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유채영은 친구의 말을 듣고 잠적해버린다.

심지어 그 친구는 대뜸 부산으로 내려가자고 해서 짐을 챙기고 아예 부산으로 내려가 버렸고, 거기서 놀고 있었는데 결국 소속사 사장님과 멤버들이 찾아와서 유채영을 급하게 데려갔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등장한 유채영은 아주 파격적인 삭발 헤어를 선보여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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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그룹 <쿨>의 멤버로 데뷔한 유채영.
삭발 헤어로 일약 붐을 일으켰다.

당시 소속사 사장은 이재훈과 유채영이 누가 남잔지 모르는 컨셉트를 잡았는데 웬만큼 짧게 해서는 티가 안나니까 유채영이 "제가 밀게요"해서 삭발을 했다고. 무용를 전공했기에 머리를 짧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해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고 한다.

유채영의 삭발 헤어는 여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하도 여학생들이 유채영을 따라서 머리를 밀어 젖히다 보니 전국의 학교에서는 삭발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가수 김현정 역시 TV에 나오는 유채영이 너무 멋있어서 삭발을 했다가 학교가 난리났었다는 에피소드를 말하기도 했다. 김현정은 유채영은 당시 여학생들의 워너비였다고 언급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결국 당시 방송국에서는 유채영을 외계인 취급해버려서 여러 오해도 많이 받았고 모 방송국에서는 3개월 간 정지도 당한적이 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뉴스에 쿨이 나와서 잘 돼서 그런 줄 알았더니 '유채영을 따라 교복 입은 여학생이 막 밀어 제껴서 사회에 문란을 일으켰다'라는 식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1994년 쿨 1집 <너 이길 원했던 이유>

쿨 1집은 신인치고 괜찮은 성적을 보이긴 했지만 상술한 내용때문에 방송 활동보다는 행사를 더 많이 했다고 하며, 실질적으로 유채영의 삭발 헤어나 이재훈의 비쥬얼로 적당한 인기를 얻었을 뿐 가수로서 정점을 찍지는 못했다.

사실 유채영은 가수에 대한 의지가 대단해서 노래 한 소절이라도 꼭 하고 싶었는데 쿨 1집을 들어보면 유채영의 파트는 거의 없고, 활동 당시에도 신비주의 컨셉을 제시해 말 한마디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정도로 본인 분량이 적어서 유채영은 노래를 정말 하고 싶었다고 한다. 결국 소속사 사장에게 노래 한소절이라도 하고 싶다고 용기내어 말했지만 이내 소속사 사장이 "그럼 나가!"라고 해버려서 유채영은 "한국의 마돈나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며 바로 문을 벅차고 나와버렸지만 문을 닫은 직후부터 후회했다고 하며 이 시점부터 유채영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쿨의 매니저는 방송인 정준하였고, 정준하는 시간이 흐른 뒤 유채영이 예능가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저런 모습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1.2. 그룹 어스(US)로 선풍적인 인기, 그리고 첫 솔로 음반

쿨을 탈퇴한 이후 별다른 활동 없이 매일 음악을 들으러 다니던 유채영은 홍대에서 음반 라이선스를 하는 중국인을 만나게 된다. 그 사람은 유채영에게 "음악을 좋아하면 노래를 하지, 왜 음악만 들으러 가냐"고 했고 유채영은 그럴만한 상황이 못돼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럼 같이 음악을 한번 만들어볼까?" 라고 제안해왔고 유채영은 그 사람과 함께 어스(US)라는 그룹을 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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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여름, 그룹 어스(US)로 다시 등장한 유채영.

당시 해외 음반 라이선스를 하던 제작자와 함께 음반을 제작했기 때문에 그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유로 댄스곡들을 녹음하게 되었고, Samira의 'When I Look Into Your Eyes'를 번안한 "지금 이대로"가 타이틀로 선정됐다. 처음에 유채영은 이 노래가 과연 타이틀이 될지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당시에는 드물던 오리지널 유로댄스풍의 장르여서 한국식 댄스 곡과는 정 반대의 느낌이라 조금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2]

하지만 주변인들에게 이 곡을 들려준 결과 많이들 좋아했고 객원 랩퍼로 참여하게 되는 신정환(대니 신)[3]과 함께 활동에 나서게 된다. 초반 PR력이 너무 부족해서 전혀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라디오를 통해서 이 노래가 흐르자 95년 여름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모 방송국의 '행운의 스튜디오'라는 복권 추첨 프로그램에 섭외가 된다.[4]

그 당시 '행운의 스튜디오'는 복권 추첨을 하면서 가수가 나가는 형식인데 신인 가수들끼리 경쟁을 하며 점수를 매기고 1등한 팀이 다음 주에 또 나올수 있는 형식의 방송이었다. 총 3차로 진행되는데 3차까지 1등을 할 경우, 주말 음악 예능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옵션이 있었고 결국 US가 우승하면서 주말 예능 프로그램을 나오게 되었다. 당시 어스가 이긴 팀은 바로 패닉이었다고 한다.
1996년 US 1집 <지금 이대로>

주말 예능 방송에 출연한 이후부터 가요톱텐등의 방송에서 섭외가 왔고, 특히 이 노래는 당시 가요계에서 접하기 드물었던 매우 빠른 템포의 유로 클럽댄스 곡으로 잘 뽑힌 싱글이었기에 클럽가를 강타하며 이후 자연스럽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US는 인기의 날개를 달고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차트에도 상위권에 진입하는 등 사랑받았다.

당시 US는 가요톱텐 기준으로 7위까지 랭크되었으며 어떠한 대형 기획사의 홍보력 없이 대중들이 좋아하면서 자연스레 순위권에 진입했다. 그리고 1집 음반은 15만장~2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올려 준수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1집 앨범은 번안곡이 수록되어 앨범에 RCA 마크(미국의 음반 레이블)가 붙어있으며 배급사 역시 BMG Korea였다. 당시 앨범에 수록된 '무관심' 등 전체적으로 당시 드물던 비트가 강렬한 일렉트로니카를 선보여 신선한 사운드를 선보였고 95년에 발매된 앨범이지만 그 당시로선 세련된 사운드를 보여주고 있다.

활동 후반부에는 '지금 이대로'를 리믹스한 음원으로 활동하여 1집 재판 버전에 수록하여 재발매하기도 했고 정식 후속곡은 아니지만 '끝없는 사랑'이라는 곡으로도 무대에 올랐다. 유채영이 가수 활동을 하면서 가장 인기를 누렸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 이 시절 유채영의 스타일링이나 댄스 실력이 최근 들어 다시 재평가 되기도 하는데, 채리나를 연상시키는 느낌있는 춤 실력과 그루브 그리고 힙한 스타일을 선보여 당시에도 여성 팬들에게 큰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때 한 극성팬이 다짜고짜 유채영에게 달려들어 귀를 자를 속셈이었는지, 가위를 귀에 들이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95년 US 1집 <끝없는 사랑>

하지만 US로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던 와중 US가 돌연 활동 중단 해버리는 일이 발생했는데 원래 이 그룹 자체가 프로젝트 식으로 결성되기도 했고 유채영과 랩퍼 대니 역시 각자 하고 싶은 음악이 있었기에 '지금 이대로'가 히트하자 마자 팀이 해체되어 버린다.

당시 여러 연예 가십 기사에 유채영이 잠적했다 혹은 US 불화설[5]등의 얘기가 자주 나돌았다고 하며 유채영 역시 솔로에 대한 욕심도 있고, 대니도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이 있었기에 결국 후속 활동 없이 US가 잠시 해체되어 버린다.

그 뒤 유채영은 쿨 시절 함께 활동하고 같이 탈퇴했던 최준명('날개 잃은 천사'등을 작곡한 최준영과는 다른 인물.)과 기타 작곡가들의 도움을 받아 1996년 솔로로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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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US에서 탈퇴하고 솔로 데뷔를 위해 독립한 유채영.

참고로 대니는 여성 멤버인 장보영을 새로 영입해 2집 앨범인 '자유'로 활동했지만 별다른 히트를 치지 못하면서 해체되었으며 그 뒤 장보영은 U-two의 멤버로 활동했다.[6]

1.3. 발매되지 못한 비정규 1집 《A High Speed 1996 : 快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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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무산된 아무로 나미에와의 듀엣 프로젝트

첫 솔로 앨범이 흐지부지되고 유채영은 이모가 계신 일본에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는데 그 시절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아무로 나미에를 유채영 역시도 무척이나 좋아했고 일본에서 많이 보고,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문화를 느끼며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때 한국에서 UP를 제작했던 조선 음향에서 일본의 에이벡스가 공동으로 주최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는데 바로 그게 아무로 나미에와 한국 가수가 듀엣으로 싱글을 내는 프로젝트였고 당시 에이벡스 임원들이 모두 한국에 와서 오디션을 개최하게 된다. 이 시절 조선음향이 일본과의 여러 프로젝트를 타진하던 시절이라 이 프로젝트의 한국 진행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7]

그러나 이 오디션에 지원하기에는 나이가 두살 정도 많아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나이에서 벗어났지만 원가 아무로 나미에의 팬이라서 꼭 그녀와 함께 듀엣을 하고 싶어했던 유채영은 무리해서 이 오디션에 참가한다. 당시 오디션 조건이 일본 곡 세곡을 준비하고 안무도 짜야하는 상황인데 워낙 베테랑이었던 유채영은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하고 오디션 장에 찾아간다.

이때 다른 것은 다 괜찮다며, 나이가 두 살 정도 많지만 제발 보게해달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주최 측에서 안된다고 하다가 하도 유채영이 부탁을 해서 결국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래서 결국 오디션 현장에는 유채영이 초대 손님으로 소개되는 형식으로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KMTV 공개홀에서 진행된 이 오디션에는 정말 많은 지원자가 왔고 3차로 진행되는 오디션을 진행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유채영과 가수 지망생 한명이 후보에 올랐고, 이 둘중에 하나가 뽑히면 바로 일본에 넘어가는 상황에 이른다. 이때 유채영은 정말 기뻐했고 일본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한다.

그런데 일본 측 관계자들은 숙소 및 생활할때 필요한 모든것들을 지원해줄테니 열심히 하라고 했고,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것이 "한국사람인것을 밝히지 않고 활동하라"는 조건이었다. 이 조건을 들은 유채영은 내심 마음에 걸렸고 이유를 물어보자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지만, 최정상에 올라가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밝힐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때 유채영은 나중에 이 사실이 밝혀지면 파장이 심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자존심이 상해서 결국 '내가 고생을 하더라도 차라리 한국에서 해야지, 나중에 기회가 또 있겠지' 하는 생각에 거절했다. 그렇게 이 프로젝트 자체도 무산되어 버렸는지, 아무로 나미에와 한국 가수가 듀엣한 싱글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유채영은 한국에 돌아와 어두운 지하실에서 열심히 연습을 이어가게 된다.

이후 유채영은 이모가 계신 일본에 왔다 갔다하면서 아무로 나미에의 춤과 패션, 그리고 문화를 배우며 나중에 있을 솔로 데뷔를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고 한다.

2. 솔로 데뷔

2.1. 정규 1집 《E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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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뒤늦게 예능가에서 역주행에 성공하다.

사실 1999년 발매 당시에는 20위권 정도로 그냥 보통의 인기를 누린 곡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Emotion>이 예능가에 자주 흘러나오고 대부분 삼지창 댄스 정도는 다 알정도로 유명해진 계기가 있는데, 발매된지 몇년이 흐른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고등학생 두명이 이 노래에 맞춰 굉장히 재미나게 춤을 추는 영상이 흥행하면서부터였다.
일명 <두 여자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의 패러디 영상.

SBS 예능 프로그램 <자아도취 노래방>에서 두 여자 고등학생이 "두 여자쇼"[8]라는 이름으로 이 <Emotion>을 춘것이 화제가 되어, 무려 2005년도 유튜브 초창기 시절에 이 영상이 크게 화제가 된 것인데 이 영상은 <Korea Madness>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유튜브에 존재하는 영상이고, 댓글을 살펴보면 해외 네티즌들이 "내 첫 유튜브 영상이었음"이라는 식으로 성지순례를 할 정도로 당시 한국 문화가 지금처럼 유행하지 않던 시절에 먼저 화제가 될 정도로 유행을 탔던 원조 한국 UCC였다. 나중에 유명세를 탄 영상은 그 유명한 춘브라더스의 중화반점 정도다.

현재까지 조회수 1000만회를 달성한 이 영상을 계기로 다시금 <Emotion>이 암암리에 사랑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2007년부터 유채영이 각종 예능 버라이어티에서 전성기를 누리자 자학개그 식으로 유채영이 여러 방송에서 "삼지창"을 쓰고 부르는 모습이 히트가 돼서, 당시 수많은 연예인들이 삼지창을 쓰고 <Emotion>을 패러디 하기에 이른다.

그 연예인들만 해도 이효리, 김나영, 버스커버스커[9], 한상진등이 었으며 한동안 예능가에서 이 <Emotion>이 큰 인기를 모았다.

하도 여기저기서 Emotion을 해대는 바람에 강호동은 유채영에게 "이 노래 당시에 1위 했죠?"라고 물어볼 정도로 뒤늦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유채영은 멋쩍은듯이 이정현에게 밀려 중국으로 날아갔다고 센스있게 받아쳤다(SBS 야심만만 2008년 12월 15일 자 방송본에서 확인할 수 있음)(...).[10]

어찌보면 발매 당시에 걸림돌이 됐던 삼지창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후 주영훈은 불후의 명곡에서 이 곡을 불운의 명곡으로 소개하기도 했고 유채영 또한 이 노래를 아주 좋아해서 많이 아쉽게 생각했다고 한다.

2.2. 아쉽게 끝나버린 정규 2집 <A Secret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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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발매되지 못한 솔로 3집과 수억대의 사기 피해

유채영은 2003년 본인 회사를 차려, 3집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각 분야의 스탭들을 직접 섭외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때 유명 작곡가들과 감독들이 유채영을 상대로 엄청난 사기 행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아주 끔찍할 정도로 악질적이었다. 앨범의 프로듀서로 섭외된 모 유명 작곡가는 유채영에게 곡을 주기도 전에 작사와 작곡비를 선불로 요구했고 이 금액이 1억 5,000만원이었다.

그 이후부터 프로듀서는 연락이 잘 안되기 시작하더니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워낙 유명한 작곡가라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유채영은 그를 철석같이 믿었고, 일단 앨범 활동을 위한 매니저도 섭외에 나선다. 매니저는 아는 지인을 통해 소개받았는데 그 매니저가 케이블 부터 홍보를 돌려야겠다며 3,000만원 입금을 요구했는데 이 조차도 아는 지인에게 소개 받았기에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보내줬다고 한다.

이후 매니저와는 통화만 하고 서로 얼굴은 마주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어느날 매니저는 지금 거의 홍보 준비가 다 되었는데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하며 2,000만원을 추가로 요구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미 유채영은 돈을 거의 다 써버린 상태였고 일처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에 고민했지만 이 부족한 PR비 때문에 또다시 활동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결국 2천만원을 보내줬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날부터 매니저는 연락두절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행방을 알아보니 이 사기범은 해외로 도주했다고 한다.

한편 연락이 잘 안되던 작곡가는 어느 날 타이틀 곡이라며 곡을 두 곡을 겨우 보내줬는데 가사도 멜로디도 없이 "붐붐붐"하다 끝나는 말도 안되는 트랙들을 보내주었고 이 곡을 가지고 빨리 뮤직비디오를 찍으라고 말해서, 뮤직비디오 감독 또한 지인에게 소개받아 진행하게 된다. 그렇게 감독을 소개를 받고 뮤직비디오 회의를 하는데 준비에 필요하다며 2,000만원 송금을 요구했다.

그렇게 2,000만원을 간신히 모아서 보내준 다음 촬영 현장에 가보니 세트장이 스티로폼으로 되어있었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인 세트를 준비해 뒀다고 한다.

말도 안되는 세트장이었지만 일단 해야해서 억지로 춤을 췄는데 얼마 안가 모두 부숴져버렸고 결국 유채영은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 이 사기 피해를 다시 정리해도, 정말 있을 수 없는 악질적인 사기 행각이었으며 더 안타까운 것은 유채영이 당시 누구한테 조언을 구할 사람이 없어서 이 수억대의 피해금을 고스란히 사기범들에게 먹히고 어떠한 보상 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재산을 투자한 3집 앨범이 모두 물거품이 돼버린 유채영은 강아지 사료조차 줄 돈이 없었고 하루하루 쌀 걱정을 해야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당시 사기 피해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는 유채영

이 앨범은 당연히 어떠한 형태로도 발매되지 못했으며, 이후에도 여러번 회사를 옮기며 R&B 음반도 준비해보고 가수 활동에 나섰지만 회사가 망하거나 사라져버려서 한동안 음악 활동을 못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발매된 앨범은 2장(Emotion, Shake)지만 모 인터뷰에서 사적으로 갖고 있는 앨범은 4장 정도 된다고한다.[11]

사실 2003년쯤에 자신의 초대 팬카페[12]에도 곧 3집이 발매된다고 기대해달라는 글을 몇번 썼었는데 이때 사기를 겪고나서 팬카페에 더이상 글을 올리지 않았다. 이후 이 피해 사실을 밝히고 사기 행각이 뒤늦게 알려지자 많은 팬들과 대중들이 분노했다.

이후 인터뷰를 통해 이 시기를 긍정적인 어머니 덕에 겨우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하며 자신의 긍정적인 성격으로 이 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했다. 여담이지만 유채영이 3집 앨범을 구상할 당시 주영훈이 건넨 곡이 훗날 김종국의 히트곡이 된 '사랑스러워'였다고 한다. 이 노래가 여러 가수한테 오고 갔는데 그 중 한명이 유채영이었다고 한다.

3. 방송인로서 제2의 전성기

3.1. 예능가의 핫이슈로 떠오른 유채영

3집 앨범의 사기 사건 이후 침체된 기간을 겪던 유채영은 다행히 이 시기를 잘 이겨내 재기를 꿈꿨으며, 영화 색즉시공을 토대로 선보인 코믹 연기를 기반으로 여러 드라마에 단역, 조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별다른 활동이 없었지만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유채영의 용기는 대단했고, 가수로서 다시 활동하기 위한 그의 굳건한 의지도 있었다.

이 시절 방송 스케쥴이 없어서 들어오는 섭외마다 마다하지 않고 했었는데 어느 날은 술을 먹으며 토크하는 방송에 섭외가 들어오자, 술 한잔도 못하는 유채영이 방송을 못하게 될까봐 술을 아주 잘마신다고 말하고 이 방송에 출연했다. 그랬는데 주는 데로 받아마시다가 결국 PD가 "유채영씨 개인기 좀 해주세요, 개인기!"라고 말하자 취한 유채영이 "그렇게 잘하면 너나해~!"라는 주옥같은 멘트를 날려 한동안 방송을 쉬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후 유채영은 여러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해 찰진 연기력을 선보여 조금씩 대중들에게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하는데 tvN 케이블 드라마 <쩐의 전쟁>에 출연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연기를 펼쳐 여러 곳에서 호응을 얻었다. 이 영상에서 선보인 주옥같은 욕 연기는, 정말 말그대로 연기이며 실생활에서 유채영은 욕을 거의 쓰지도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더더욱 고평가 받는 영상. #

얼마 뒤부터 유채영은 영화 색즉시공2에 출연하고 여러 예능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KBS 불후의 명곡 시즌1[13]에서 엄청난 코믹 액션과 애드립을 선보여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고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정말 엄청난 애드립과 코믹 댄스를 선보이자 여러 방송계에서 유채영을 섭외하기 시작한다.
2000년대 후반 예능가를 접수했던 유채영

여러 방송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입담과 춤을 선보인 유채영은 이내 수년만에 소속사를 찾아 안정적인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위의 불후의 명곡 출연 당시 유채영은 소속사가 없던 상황이라, MC들이 국내 소속사 사장들에게 한마디 하라고 하자 이 방송을 본 현영의 소속사 봄날 엔터테인먼트는 긴급 회의를 열고 어떻게든 유채영을 데려오자고 회의할 정도로 당시 유채영이 방송가에서 상당한 이슈를 몰고 다녔다.

또한 2008년에는 수년간 교제하던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리며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전성기를 누렸고 유채영 본인도 지금이 자기 인생의 전성기인거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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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유채영의 모습.

결혼을 위해 남편하게 프로포즈 하는 모습을 담은 방송 "체인지"에서 보여준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많은 공감과 감동을 주어 이 시점부터는 마냥 웃긴 연예인이 아니라 어딘가 마음이 편안하고 정감 가는 호감 연예인으로서의 인식도 있어서 폭넓은 지지를 받아 안티가 거의 없는 연예인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3.1.1. 수년만에 생긴 팬클럽 <가디스>

그렇게 유채영이 여러 곳에서 활발히 활동하자 하나 둘씩 새로운 팬들이 생겨났고 기존의 팬들도 하나 둘씩 유채영을 응원하기 시작하면서 다음에 유채영 팬카페 <가디스>가 개설되었다. 과거 다른 이름의 팬카페가 존재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정전 상태에 접어들었었고 이후 유채영이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자 생겨난 새로운 팬클럽인 셈.

그 후 다음 카페측에서 이 카페를 홍보해주고, 당시 유채영과 측근들도 가입하는 등 단기간에 유채영을 응원하는 팬들이 많이 가입하였으며 얼마 뒤 본인이 진행하던 방송 <오늘밤만 재워줘>에서 유채영은 오랜만에 팬카페가 생겼다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이 모습이 방송을 타자, 기하급수적으로 회원수가 늘어나 무려 1만명이 넘는 회원수를 거느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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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만에 팬카페가 생겼다는 얘길 듣고 결국 눈물을 흘린 유채영.

당시 긍정적인 이미지로 사랑받는 연예인이었기에 이 팬카페는 많은 접속자와 회원수가 생겨났고 유채영 역시 지독한 컴맹이였지만 이 카페에 큰 애정을 두고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접속하기도 했다.

유채영을 부르는 팬들의 호칭은 대표곡 <Emotion>을 딴 이모였으며 유채영 역시 이 별명을 아주 좋아했다.

훗날, 유채영이 사망하고 모 커뮤에서 이 팬카페가 생긴 이유가 유채영을 조롱하면서부터 생긴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려 가디스에 가입했던 멀쩡한 회원들이 들고 일어서고 운영자가 반박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상식적으로 고인이 생전 애정을 갖고 행복한 기억을 가진 팬카페를 왜곡하여 글을 올리는 일은 하지말자. 이후 반박글이 올라오자 최초 유포자는 자취를 감추는 치졸한 행보를 보였다. 유채영 팬카페의 진실이라고 떠도는 헛소문에 대한 반박문.[14]

현재도 이 팬카페는 계속 방문하는 팬들이 있으며, 몇년동안 자리를 지키는 회원들이 있다. 그리고 그 회원들은 설립 초반부터 있던 회원들이고 전혀 헛소문속에 등장하는 커뮤니티 회원도 아니고 유채영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팬이다.

3.2. 8년만의 가수 복귀, 디지털 싱글 <좋아>

몇년만에 봄날 엔터테인먼트[15]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을 이어가던 유채영은 2001년 <Shake> 이후 8년만에 앨범을 발매한다. 사실 회사와 계약하면서 가장 부탁했던 것이 앨범 활동이었기에 더욱 더 값진 컴백이었다. 당시 주가를 올리던 신사동호랭이가 작곡한 복고 풍의 <좋아>가 타이틀 곡이었고, 디지털 싱글로 발매하기로 결정된다.
2009년 디지털 싱글 <좋아>

사실 앨범 작업 당시 구상한 컨셉은 70~80년대 복고풍이었고 가사에 등장하는 요일이 "토요일"이어서 노래 제목도 <토요일 좋아>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같은 녹음실에서 컴백을 준비한 손담비컨셉도 일치하고 심지어 요일까지 일치해서 결국 일주일 먼저 컴백한 손담비와 겹치지 않기 위해 제목도 수정하고 컨셉도 수정한다.

노래도 상당히 잘 뽑혔고 유채영이 가장 주목받던 시절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별다른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몇주간의 방송활동을 끝으로 활동을 종료했다. 그래도 활동 기간동안 여러 음악방송에 참여했으며 곡 퀄리티도 상당히 호평받은 바 있다. 특히 가수 생활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을 선보여서 본인도 뜻깊은 활동이었다고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Emotion>때도 그러더니 <좋아>때도 대형 여가수와 컨셉도 겹치고 시기도 귀신같이 겹쳐서 의도치않게 유채영이 안타까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쯤되면 운이 지지리 없어도 너무 없는 케이스였다.

여담으로 안무 디렉터가 오랜만에 춤을 추는 유채영이 잘 따라올까 생각했는데 예전 그 춤실력은 어디 안간다고, 생각보다 너무 빨리 습득해서 굉장히 놀랬다고 한다. 또 싱글 앨범에 Emotion 리믹스를 비롯한 세곡(최종적으로 신곡은 두곡 수록된 셈.)이 들어갔는데 PR용 비매 CD를 보면 공식적으로 발매되지 않은 미공개 곡의 가사가 대신 실려있다. 아마 신곡 3곡을 녹음했는데 한곡이 누락된듯.

이 당시 행사 무대에 오를때 최소 3곡 정도는 준비가 돼야 하는데 곡 수가 부족해 <좋아>와 <Emotion 2009 Ver.> 두 곡과 더불어 아유미의 '큐티하니 (Cutie Honey)'를 재녹음해 부르기도 했다. 같은 소속사였던 현영이 똑같은 이유로 행사에서 자신의 곡 누나의 꿈, 연애혁명과 더불어 큐티하니를 부른 일화는 몇몇 방송에서도 직접 소개했었는데, 유채영 역시 같은 해당 곡으로 무대의 부족한 곡 수를 채웠다.

4. 이후 행보

4.1. 점점 줄어드는 활동

싱글 <좋아> 활동 이후, 계속 예능 활동을 이어가던 유채영은 2011년쯤부터 방송가에서 활동이 조금씩 줄기 시작한다. 사실 그 시기 기존 소속사 봄날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만료되고 다른 소속사로 이적했기 때문이며, 당시 측근의 말에 따르자면 일이 물밀차게 들어오던 이때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가 힘들다보니 결국 일을 잘 잡아주던 이 회사와 일을 정리한 뒤 규모가 작은 소속사로 이적했다고 한다.

이후 유채영은 몇몇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고 가끔씩 예능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한동안 방송 활동이 기존 소속사 시절보다 많이 뜸해져갔다. 이 시기 출연한 드라마는 천명, 패션왕 등이 있다.

2013년에는 tvN 더폰 코리아에 출연했는데 당시 앨범 제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출연했다고 밝혔으며 연예인임에도 과감히 출연 의지를 불태웠다고 알려졌다. 제작진에 따르면 유채영은 새 음반을 발매하고 싶었으나 곤란을 겪어왔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도 유채영은 가수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후 유채영은 MBC 라디오 "좋은 주말 김경식, 유채영입니다"를 진행했고 거짓말처럼 이 방송이 유채영의 유작 방송이 되어버렸다.

5. 별이 지다

그러던 2014년 7월 21일, 언론을 통해 유채영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도 위암 초기가 아닌 말기였으며 아주 위독하다는 얘기여서 그 전까지 이 사실을 모르던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유채영은 2013년 10월부터 투병 생활을 했고, 항암치료를 하며 라디오를 진행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몸이 굉장히 약해졌음에도 끝까지 방송을 위해 매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중들은 더욱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7월 22일, 고비를 넘겼고 연예계 동료들과 대중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유채영의 호전을 기원했으나......

이틀 후, 그녀는 결국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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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난 그녀를 많은 대중들과 연예계 인물들이 추모했으며 장례식에는 수도 없이 많은 동료들이 마지막 가는 길을 찾아왔다. 특히 절친했던 김현주와 동료 방송인 송은이, 박미선도 함께 임종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고 별다른 유언은 없었지만 남편과 김현주, 가족들을 차례대로 쳐다보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과거 동료들은 유채영이 생전 너무 착했고, 너무 믿기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으며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와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말을 전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친구사이였던 DJ DOC김창열은 당일 라디오를 진행하다 오열했고, <좋은 주말 김경식, 유채영입니다>는 고인의 목소리를 담은 추모 방송을 내보냈다. 유채영이 떠난 7월 24일은 실제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하늘마저 유채영이 떠나간 것을 슬퍼하는 듯 보였다.

향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유채영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행복한 에너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
유채영이 사망한 이후 멤버들은 히든싱어 등의 방송을 통해 원년멤버 유채영에게 그리움을 전했고, 김현주 역시 다시는 유채영 같은 친구를 만나지 못할것 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김현주는 지난 2015년 ‘가족끼리 왜 이래’ 종영 인터뷰에서 “제일 친한 친구, 지금은 없다”며 “원래 유채영 씨와 제일 친했다”고 말문을 열었다.이어 “채영 언니는 나를 무한 애정의 시선으로 봐줬다”며 “늘 긍정적으로 봐주고 날 항상 지지해줬다”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아울러 “내가 어두운 터널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채영 언니의 힘이 크다”며 항상 곁에서 자신을 향해 긍정적인 발언과 아낌없는 사랑을 줘서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이 그립고 또 그런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생각이 든다”며 “그런 사람이 나한테 또 올지 남자친구보다 더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더불어 “남자도 그렇게 날 사랑해주진 않을 것 같다”며 “너무 고마운 사람이고 짧게 함께해서 아쉽다”고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故 유채영을 그리워했다.
생전 고인과 가장 각별했던 배우 김현주의 인터뷰 中

[1] 그러나 이후 유채영이 데뷔하면서 유채영을 찾아왔고 그 날은 솔로 1집 <Emotion>의 첫방송 날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본적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빠"라는 말이 절로 나왔고, 원래 아버지에게 원망이 많았지만 그때 아버지는 이미 간암 말기였다고 한다. 죽기전에 딸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왔고 유채영에게 사과하며 마지막 여생을 딸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는 1999년 간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살고 계신 부산에서 마지막 임종을 지켰다.[2] 원래 내정됐던 타이틀 곡은 "끝없는 사랑"이었는데, 막판에 교체되었다고 한다.[3] 1975년 5월 3일생으로 재미교포 출신이다. 한때 컨츄리꼬꼬신정환과 혼동하고 해외파 출신이었냐며 헷갈렸던 적이 있었다. 불법도박과 뎅기열 거짓말을 한 동명이인과는 달리 구설수는 물론 큰 사건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4] 3곡이 들어간 프로모션 싱글이 95년 봄부터 돌기 시작했고 앨범은 그해 8월전에 발매된 것으로 추정된다.[5] 다만 불화설은 사실이 아니며, 각자 하고 싶은 음악이 있어서 헤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두 사람간의 폭행설도 있었지만 이것도 사실 무근이다. 2014년 유채영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모 언론사에서 대니 신과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모두가 유채영을 사랑했으며 그녀가 호전되기를 바란다고 인터뷰했다.[6] US 해체 이후 대니는 힙합씬에 머무르며 여러 가수들을 제작했고 애프터스쿨 가희가 데뷔전에 참여한 힙합그룹 <DVS>로 활동도 하며 꾸준히 음악활동을 이어갔으며 해외가수 내한에 힘 쓰는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진다.[7] 그래서인지 이 회사에서 최초의 한일합작 그룹 Y2K써클 등이 데뷔하기도 했다.[8] 여담이지만 여기 나온 여학생 한 명이 악간 유채영 닮았다.[9] 본인의 장기인 어쿠스틱으로 편곡했다. 아무 위화감 없이 잘 어울린다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며 곡의 재평가에 일조했다.[10] 실제로 유채영이 영화배우로 활동할 당시 Emotion을 중국어로 번안하여 활동해 인기를 꽤 얻었다고.[11] 그 중 한장은 96년 쾌속이라는 앨범일듯.[12] 카페 명은 <유채영을 사랑하는 모임>이었고 다음 초대 유채영 팬카페였다. 그러나 2004년부터 카페가 정전상태에 접어들었고 2008년에 새로운 팬카페 <가디스>가 창설되어 많은 회원을 거느렸었다.[13] 시즌 1은 현재 신동엽이 진행하는 가수 경연 포맷이 아닌 컨츄리꼬꼬, 현영, 배우 김성은이 진행하던 노래방 예능 포맷 프로그램이었다.[14] 당시 모 커뮤니티에서 유채영을 드립용으로 쓰다 흥하자, 유채영 글이 너무 많아져서 여기가 유채영 팬카페냐며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의견이 등장했고 장난 삼아 팬카페를 만들어서 스탭들도 해당 커뮤의 회원들이었지만 얼마 안가 모두 탈퇴해버려서 카페가 정전되었다는 괴소문을 만들었다. 반박문은 보면 알겠지만 이 사실이 매우 웃긴게 언급하는 해당 커뮤니티의 회원들이 다 모여도 1만명이 넘는 <가디스> 회원수를 만드는거 부터가 말도 안되는 일이며, 당시 카페에서 스탭으로 활동하고 카페에 운영했던 사람은 이미 수년전에 개설되어 현재는 등업도 안되는 원조 유채영 팬카페 회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카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모두 금시초문이라는 내용이 흘러나왔고 "<가디스> 회원들의 추억을 부정시키는 찌질이의 소행에 모두 분노했다."[15] 현영, 김나영 등이 소속되었던 엔터테인먼트 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