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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21:51:06

의빈 성씨/승은 거절 및 승낙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의빈 성씨
1. 개요2. 승은 거절 및 승낙3. 거절 이유
3.1. 공식적 이유3.2. 실제 원인에 대한 가설
3.2.1. 승은 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3.2.2. 궁녀 신분인 것이 후궁 신분인 것보다 낫기 때문3.2.3. 영조 눈치가 보여서3.2.4. 정조를 사랑하지 않아서3.2.5. 자신이 승은을 입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해서3.2.6. 정조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승은(=잠자리=임신)을 거절한 것?3.2.7. 정조의 두번째 승은은 사실 승낙한 것이다?3.2.8. 혜경궁 홍씨의 수양딸(=정조의 의붓여동생) 비슷한 위치라서3.2.9. 궁인 시절 웃전이 효의왕후라면?

1. 개요

의빈 성씨정조승은을 두 차례 거절한 것과 이후 승낙한 것에 관한 문서이다. 문서가 길어져 분리되었다.

2. 승은 거절 및 승낙

1766년(영조 42)에 정조가 처음 그녀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납득하고 물러났다.

1779년(정조 3)에 첫 번째 간택 후궁 원빈 홍씨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1] 화빈 간택 이후[2]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며 승은을 받아들였고[3] 상의(尙儀)[4]가 되었다.

3. 거절 이유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2번이나 거절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추측들이 있다.

다만 이 항목에 쓰여진 가설들은 이와 관련된 흥행 작품인 옷소매 붉은 끝동의 영향이 강한 설들이 많으니, 공식적인 이유 외에는 순전히 재미로만 보자. 실제로 본 문서의 양이 배 이상 급증하고 따로 문서로 분리되기까지 한 시점이 2022년 1월 드라마 종방 직후다.

원래 여인의 입장이나 감정은 그가 설령 왕실의 일원이라 해도 기록 편찬자들에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의빈성씨의 거절의 경우도 운 좋게 정조가 직접 남겨 알 수 있는 공식적인 이유와 왕과 궁인 사이라는 점, 그 외 사서에서 보이는 몇몇 삶의 단편 외에는, 거절 당시의 정황이나 둘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즉, 한중록처럼 본인이 직접 쓴 기록이라도 발견되지 않는 한 모두 상상의 영역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읽도록 하자. 꼭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에서 제기된 추측뿐 아니라 당대 사회상에 부합하는 가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3.1. 공식적 이유

성덕임이 '감히' 왕의 청혼을 거절한 공식적인 이유는 (당시만 해도 왕과 사이가 서먹하고) 슬하에 자식도 없던 효의왕후를 배려하는 차원에서다. 여러 기록을 통해 의빈 성씨와 효의왕후 김씨의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는 사실과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의빈 성씨가 1753년 7월 생, 효의왕후는 1753년 12월 생인 동갑내기로[5] 입궁 시기도 10살이었던 1762년에 들어왔다. 서로 비슷했으니 어릴 때부터 친했을 가능성도 꽤 있다. 또 어제의빈묘지명에 나오다시피 죽기 전날에도 정조에게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라고 하며 정조에게 효의왕후의 처소에 자주 들러서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했다고 하고[6], 의빈이 죽은 이후 효의왕후도 친자매를 잃은 것처럼 울며 슬퍼했다고 한다.

3.2. 실제 원인에 대한 가설

3.2.1. 승은 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

실제로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수락하기 이전 조선 후기의 승은 궁녀/후궁들을 보면물론 숙종의 후궁인 명빈 박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와 영조의 후궁 귀인 조씨처럼 조용하고 평탄하게 산 승은 후궁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들의 삶도 공식 기록상에서만 다른 후궁들에 비해 비교적 평탄했다는 것일 뿐, 실상은 후궁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앞의 예시들처럼 기본적으로 신변에 대한 위협이 따르게 된다. 때문에 든든한 집안이 받쳐주며 지지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욕이 딱히 없는 일반인 입장에서는 두렵고 기피되는 것도 당연하다. 당장 현대에도 신변 문제까진 아니지만, 가치관 차이 등으로 답답한 재벌가 며느리 생활은 하기 싫다는 식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널렸다. 덕임도 제약 많고 위험한데다 부담스러운 후궁 생활보단, 비교적 자유로운 궁녀 생활을 더 선호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

기록상에서도 덕임은 궁녀로서 가깝게 지내는 동무도 많았고 궁 생활에 적응을 잘했던 듯 하며, 당장 자신이 지척에서 모셨던 혜경궁 홍씨와 그외 영조사도세자를 비롯한 왕실 일원들의 순탄치 않은 인생을 함께 겪었다.[10] 이러한 상황에서 후궁이 될 시 자신의 입지가 100% 보장되는 조건은 왕에게 적자가 없음+장자 출산+그 장자가 원자-세자를 거쳐 왕이 됨+그 왕이 안정적으로 통치+이 시기까지 생존이라는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된다. 이렇게 모든 조건이 달성되면 자신은 왕의 생모가 되고 왕은 적서관계 없이 왕비의 아들이 되므로 족보상 자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모이기에 받는 취급은 당연히 친어머니 수준이기에[11] 나름 일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다. 물론 역사를 아는 후대인의 입장에선 만일 의빈 성씨가 정조 사망시까지 살아있었다면 의빈 성씨 소생의 문효세자는 정조의 장남이었고 중전인 효의왕후도 자식이 없었기에, 이후 수빈 박씨가 낳은 아들인 순조보다 문효세자가 훨씬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걸 알지만 당시 의빈 성씨 입장에서는 모든게 안갯속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왕실내 권력 다툼에서 살아남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다면, 애초에 궁에 갇혀 살아야 하는 답답한 후궁 생활은 영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12]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이 설과 후술된 궁녀 신분이 낫기 때문을 메인으로 채택해 이야기를 진행했는데, 작중 성덕임이 이산을 연모하면서 왜 후궁되긴 거부하냐는 질문에, "전하는 나에게 소중한 분이지만, 난 나의 삶 역시 소중하다."며 거부 이유를 밝히기도 한다.

3.2.2. 궁녀 신분인 것이 후궁 신분인 것보다 낫기 때문

상기한 상당수 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다는 설과 비슷한 맥락이긴 한데, 의빈은 몰락한 중인 집안 출신의 궁녀로, 이재난고에 따르면 혜경궁 홍씨로부터 사실상 수양딸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총애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 궁인들이나 혜경궁의 딸들과도 매우 사이가 좋았다. 즉 궁녀로서 남 부럽지 않을 입장이었던 것이다. 궁녀는 각자 맡은 소임, 즉 할 일이 있었으며 의빈 성씨의 신분과 웃전과의 관계를 볼 때 높은 직급에 속했을 확률이 크다. 또한 동료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고 궁 밖으로의 출입도 (후궁에 비해) 자유로웠다. 의빈이 만약 후궁이 되지 않았더라면 익숙한 궁인으로서의 직장생활을 무난히 이어가 나름대로 안정적인 인생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후궁이 되면 인생이 급변하며 예측불가가 된다. 기존에 가족처럼 가까웠던 오랜 동료들과 웃전들과의 사이도 단박에 불편해지고 모든 행동에 큰 제약이 가해지는 것은 물론, 사대부 출신의 간택 후궁같은 높은 신분의 여인들과 비교되는 처지가 되어 낮은 서열 탓에 권력 다툼을 피할 수 없다. 권력 유지와 안위 보장을 위해서는 왕의 아이를 낳아야 할 텐데 왕의 총애라는 것은 가늠 불가이고, 막상 무사히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를 자신이 마음대로 기르거나 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또한 가깝게는 정조의 이복동생들과 더 위로 올라가면 왕자 시절의 영조처럼, 원래 후궁의 자식들이란 자칫하면 역모에 휘말리기 십상이였다. 아들인 왕자가 역모에 휘말리면 당연히 그 모친인 후궁과 후궁의 친정 가족들까지 폐서인 및 귀양 혹은 사사를 당할 것이고 설령 목숨을 부지해도 죽느니만 못한 여생을 보내게 될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정실이었던 혜경궁 홍씨마저도 삶의 굴곡이 극심했고,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도 세손 시절 정조랑 사이가 그닥 좋진 않았다.[13] 첫번째 가설에서도 나오듯 (꼭 승은후궁이 아니더라도) 왕가와 엮여버린 여성의 삶이란 언제나 위태로운 처지인 것이다. 즉, 궁녀 신분일 때 그나마 누리던 바를 왕의 배우자가 되면 전부, 평생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의빈은 이를 원치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3.2.3. 영조 눈치가 보여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젊은 시절부터 궁녀들을 취해 후궁으로 삼아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는 그렇게 태어난 서손자들(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청근옹주 등)마저 싫어할 정도로 세자의 행동을 못마땅해했다.[14] 또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받은 것은 윗전의 궁녀들을 함부로 취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 때문도 있었는데, 의빈 역시 공적으로는 모자관계가 아니라지만 친어머니인 혜경궁의 궁녀였다. 이렇게 보면 정조 역시 아버지의 전철을 따라 어릴 때부터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면, 영조의 눈밖에 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의빈이 거절한 게 아니냐는 것. 다만 영조 때문이라는 것은 첫 번째는 이해한다 치더라도, 영조가 사망하고 정조가 즉위한 후인 두번째 승은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15]

3.2.4. 정조를 사랑하지 않아서

정조가 의빈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만[16], 의빈의 정조에 대한 감정을 기록한 사료는 없다. 소설 필사본도 남길 정도로 글도 잘 썼던 의빈이라 한글 서간같은 걸 썼을 법도 한데, 발굴이 안 된 건지 안 쓴 건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바는 없다. 고로 이런 설도 나오는 것.

다만 그녀가 정조를 사랑하지 않거나 나아가 미워했다는 식의 서간도 없기에 모든건 상상의 영역이긴 하다. 물론 전근대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왕에 대한 호불호를 함부로 쓸 순 없겠지만 말이다. 정치적으로 트집 잡히지 않게 조심스럽고 현명한 처세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의빈 성씨기에 더 그렇다.[17] 결국 오늘날 의빈과 정조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정조의 관점에서만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18] 의빈도 확정적으로 정조를 사랑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하다. 어찌됐든 일국의 왕이 승은을 내리려 해도 거부할 정도였고 사실상 정조의 강압으로 후궁이 된 것이라 여러모로 의문이 남는다.[19] 다만 서로 사랑했다고 가정한다면, 애초에 정략결혼이 판을 쳤던 그 시절에 연애결혼 건덕지라도 있는 게 특이한 사례긴 하다.

3.2.5. 자신이 승은을 입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해서

정조가 묘사하는 의빈의 성품은 항상 자신의 처우가 과분하다고 여겨 몸가짐을 극히 조심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가능한 가설이다. 특히 의빈 성씨는 집안이 유력가도 아니라, 소위 말하는 뒷배도 없는 처지였기에 더 자신의 처신에 신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윗사람의 말은 일단 몸을 낮추고 사양부터 하는 게 겸양의 미덕인냥 몸에 베어있었을 확률도 높다.

또 혜경궁 홍씨한테 자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녀의 아들과 결혼하는 게 뭔가 은혜에 상충되거나 이용해먹었다는 오해를 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할 수도 있는 노릇. 그러다보니 임금의 청혼조차 자신을 떠보는 것 혹은 노처녀인[20] 자신에게 가당치도 않은 것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3.2.6. 정조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승은(=잠자리=임신)을 거절한 것?

의빈은 1780년 첫 승은을 입고 1786년 사망할 때까지 사서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약 6년간 임신을 최소 3번[21]~최대 5번[22]이나 한 것으로 추측된다. 임신기간과 산후조리 기간까지 고려하면, 의빈 입장에선 잠자리가 피곤할 법도 하다. 정조가 정말 많이 좋아하긴 했나보다. 게다가 한번 성관계하면 다른 중전이나 후궁들은 생기지도 않는 애가 쑥쑥 생기니 무서울법도. 실제 의빈의 몸이 약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다만 이건 결혼한 이후에 문제지, 의빈 성씨가 왜 승은을 거부했는지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긴 하다. 굳이 각색을 하자면, 이런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예상을 하고 무서운 맘에 지레 겁을 먹고 승은을 반대했다는 게 더 그럴듯하다. 실제 의빈 성씨는 궁녀 신분으로 다른 남정네와 잠자리를 가져본 적도 없었을테니 소녀마냥 더 잠자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왕의 아이를 임신하면 그 전에 누리던 인간관계와 자유를 대폭 잃어버리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도 커질 수 있는데다, 당시 부족했던 의료 기술 때문에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죽거나 크게 아플 확률이 현대에 비해 많이 높았다.

또 기록상 의빈 성씨는 입궁하기도 훨씬 전인 어린 나이에 친모가 일찍 사망했는데, 과거 여성들의 천수를 누리지 못한 사망이라면 산고나 산후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 죽었다면 그에 대한 공포가 더욱 컸을 것이다. 당시에는 피임 방법도 마땅치 않고 무려 용종을 낙태하기도 불가했으니, 결국 정조를 거부했다기보다 잠자리를 거부한 것이라는 추론. 결과적으로 의빈 성씨는 짧은 기간 내에 잦은 임신 및 출산으로 낳은 아이들이 연이어 요절하고, 그 충격으로 결국 만삭인 상태에서 현대의 임신중독증세로도 추측할 수 있는 급병으로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에 사망한다.

3.2.7. 정조의 두번째 승은은 사실 승낙한 것이다?

어제의빈묘지명》에서 정조는 의빈을 추모함과 동시에 자신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점도 거리낌없이 썼는데, 이는 사후 의빈의 지위가 위협당하지 않도록 작성한 정치적 목적의 문서 성격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추론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숙종 시대 이래로 승은 후궁들은 정치적 사건에 나서다가 화를 입거나, 역으로 가만히 있었지만 괜히 휩쓸려 비극을 겪은 경우가 유난히 많았다. 당장 의빈도 생전에 화빈 윤씨의 세력 등에 의해 수차례 정치적 공격을 당했다.[23] 생전에도 의빈은 여러 소문의 당사자였고 사후에는 아예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으며 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은 화빈 윤씨의 강등을 검토한 기록까지 있으니, 정조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일한 '승은 상궁'이었던 의빈에 관한 정치적 소란이 충분히 존재했고 이를 정리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전제군주제인 조선에서는 왕의 승은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죄로 간주되어 재수없으면 사형까지 처해질 수 있었기에, 왕의 승은을 거부한 적이 있음을 나름 공적 문서였던 어제문에 구태여 밝힐 필요도 없었다.[24] 더군다나 정조가 무수리방자 등으로 추정되는 의빈의 하인에게 내린 벌이 무엇인지는 아예 적혀있지도 않다. 정조 입장에선 이미 의빈도 세상을 떠난 마당에 본인 맘대로 미화해서 떠들어대거나 그냥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을 본인 스스로 불리하게 진술한 것인데, 이에 대해 첫번째 승은 거부 때의 상황 묘사와 달리 어떤 상세한 해명도 하지 않았다.

결국 종합해서 추론해보면, 정조가 의빈 관련해 두번째 승은을 거부한 사건과 하인을 벌준 사건 모두를 사실 여부를 떠나 직접 언급한 것은, 자신이 사랑한 '승은 후궁 출신' 의빈의 사후 명예가 떨어지는 것을[25] 차단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그녀는 애초에 승은을 입어 정치적 권력을 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중전에게 한결같이 정성스러웠으며 혼인은 오직 임금인 내가 강력하게 원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거나 꾸며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벌 받은 하인이 존재한다면 하인 본인이나 아니면 그걸 보거나 전해들은 주변인을 통해 입소문이라도 퍼질법한데 관련된 정사는 물론 야사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의빈의 친정은 그녀의 살아생전이나 사후에도 권신 가문이 될 리 없는 한미한 출신이였는데, 의빈 개인에 대해 과연 그런 대외적인 거짓말이 필요할 정도로 큰 정치적 음해가 뒤따랐을진 의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장 의빈의 사망 3개월 후 일어난 은언군의 독살설 관련 처리 내용을 적은 실록 기사에도 '궁빈 하나 죽은 것이 큰 일은 아니지만' 이라는 문구가 버젓이 존재한다.[26] 궁인 출신 후궁의 성품이나 승은을 입게 된 배경보다는 문효세자의 사망 이후, 그 세자의 친모인 후궁이 다음 아이를 임신한 채로 갑자기 사망한 부분이 훨씬 쟁점이기 때문이다.

허나 개인의 추측을 떠나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화빈 윤씨가 엄연히 의빈 성씨를 모함한 정황이 있고[27] 심지어 독살설이 퍼져 조사했다는 기록도 있을만큼 당대 의빈의 적대세력은 분명 존재했으며,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를 낳은데다 금세 다시 자식을 잉태할만큼 총애받은 의빈 성씨는 왕실 여인들 중 가장 돋보이는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자랑하는 의빈에 대한 정치 상황을 별거 아니라고 함부로 재단할 수도 없긴 하다. 게다가 그녀가 혜경궁 홍씨가 어릴 적부터 키운 수양딸같은 존재였다고 본다면, 그녀에 대한 비판은 정조의 외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문제인 것.

3.2.8. 혜경궁 홍씨의 수양딸(=정조의 의붓여동생) 비슷한 위치라서

혜경궁 홍씨가 실제로 수양딸처럼 그녀를 길렀고, 의빈 성씨 역시 본인의 정체성을 그렇게 인식하고 자랐다면, 정조를 의붓오라비 비슷하게 생각해 도리에 어긋난다 여겼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원래는 궁녀의 승은 거절이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었겠지만, 성씨에게는 오히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28]

성씨 입장에선 웨스터마크 효과가 있었을 수도 있다. 쉽게 말해 정조를 남자보단, 양반집 얼녀 입장에서의 친족 도련님 정도로 본 것.[29] 반면 정조 입장에선 혜경궁 홍씨나 의빈 성씨 입장에서나 수양모녀관계지 본인의 누이로 자란 건 아니므로 여자로 봤지만, 의빈 입장에선 딸처럼 키워준 분의 아들과 맺어지는 것은 당시 유교관념에선 근친상간에 가까운 거부감이 큰 일이었을 수 있다. 다만 그걸 공개적으로 밝히자니 자신은 공식적인 양녀는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을 오라비처럼 여기는 것 자체가 불경이므로 이러한 것을 공식적인 이유로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3.2.9. 궁인 시절 웃전이 효의왕후라면?

공식적인 정조피셜 거절 이유인 '효의왕후가 임신하지 않아서' 의 문제는, 1번째는 그렇다 치더라도 15년이나 지나 후궁까지 간택한 후인 두번째 거절에 대해 적용하기엔 아귀가 안맞는 부분도 있다. 허나 여기에 의빈의 궁인 시절 모시던 인물이 효의왕후였다는 가정을 하면 이 문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의빈의 혜경궁 홍씨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정조나 효의왕후 둘 중 하나를 섬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효의왕후와 공교롭게 일치하는 입궁 시기도 혜경궁 홍씨가 며느리를 위해 또래인 궁녀를 함께 입궁시킨 것이라면 깔끔해진다. 또는 정조에게 붙여준 경우도 왕과 달리 동궁 내외의 처소는 보통 같은 공간에 바로 붙어있기에 (협소한 동궐 영역내에 내외가 거처해야 하므로 떨어져봤자 바로 옆 건물이어야 한다. 경복궁의 동궁의 경우 아예 자선당 한 건물이 내외의 처소다.) 꼭 효의왕후에게 붙여준 궁녀가 아니더라도 사실상 정조와 효의왕후를 함께 섬긴 셈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공식적인 첫 거절 이유와도 잘 합치하면서 두번째 이유 또한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다. 죽는 순간에도 효의왕후와 후사를 낳으라 언급하고 효의왕후도 친자매를 잃은 듯 슬퍼했을 정도로 친밀했다는 기록도 이런 가설에 어느정도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다른 추측들은 왕의 승은 거절이라는 목숨을 걸 정도의 행위를 두번이나 택한 명분으로는 너무 현대적이거나 사소해보이는데 반해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며 모셔 왔던 웃전과의 의리라는 명분은 시대상에 적절하고 승은을 거절해도 처벌받지 않을 만하다.

다만 이재난고의 글을 신뢰한다면, 혜경궁 홍씨의빈 성씨를 직접 길렀다는 대목이 이 가설과 상충할 수 있다. 특히나 입궁 시기와 거의 겹치는 임오화변 이후 세손 내외는 경희궁에서 살았기에, 혜경궁의 거처와 멀었다. 이에 대해 굳이 변호하자면 이재난고의 저자인 황윤석이 왕실 사정을 아주 빠삭하게 알만한 위치는 아니었다는 점과, 수양딸처럼 키웠다고 하기에는 한중록에 의빈성씨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혜경궁 홍씨를 통해 입궁한 것이 어떤 이유로 곁에 두어 친히 기른 것처럼 와전되어 기록되었을 거라는 주장. 혜경궁의 두 딸이 출가하여 품을 떠난게 의빈의 입궁 시기보다 3~4년 후이기도 해서 입궁 시점에 굳이 궁녀를 수양딸처럼 키우기 위해 들일 동기가 없기도 하다. 물론 이 모든게 결국엔 그저 그럴듯하게 끼워맞춘 추측에 불과하긴 하다. 그냥 재미로 봐


[1] 《일성록》 정조 4년 경자(1780) 2월 21일(경오) 4번째 기사[2] "尹嬪當於正月 就舘設産室 則二月分娩之期明矣 或言 內人中又有受胎者 亦已多月云", 황윤석 《이재난고》 권33, 정조 4년(1780) 12월 8일(임자)[3]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 정조 《어제의빈묘지명》[4] 상의(尙儀)는 정 5품 하계 궁관직, 상계 궁관직은 상궁(尙宮)이다. 승은을 입었으므로 특별 상궁 직첩을 받은 듯하다.[5] 양력으로 따지면 의빈 성씨가 1753년 8월 생, 효의왕후는 1754년 1월 생으로 의빈이 1살 연상이지만 음력으로 날짜를 따졌던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둘은 동갑내기이다.[6] 실제 효의왕후는 이후 상상임신 소동까지 있을 정도로 임신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 종실인 정(楨)과 남(柟) 등이 방자하였으며, 정은 그 아우인 연(㮒)과 더불어 대궐(大闕)의 시녀를 간음하였는데, 정이 간음한 시녀(김상업)는 곧 선조(先朝: 현종)의 은혜를 입은 자였다. - 《숙종실록》 6년 7월 3일(경인) 1번째 기사.[8]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난 다음날 사망하였기에 자살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9] 정조 즉위년에 다시 양제 작호를 받았다.[10]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 일을 함께 겪은 정조 입장에서도 의빈은 몇 안되는 자신의 과거사를 알고 공감해줄 수 있는 아내란 소리도 된다. 효의왕후도 있지만 이땐 화완옹주가 대놓고 둘을 이간질했다니 넘어가자.[11] 순조의 경우 자신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가 죽자 예법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왕비에 준하게 장례를 치렀다.[12] 다만 일반 궁녀도 딱히 좋다고 할 순 없다. 병들기 전까지는 궁에서 계속 일해야 했고 병이 안 들어도 흉년 등으로 방출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궁녀라고 해도 권력다툼에서 벗어날 순 없는데 예를 들어 가깝게는 영조는 사도세자를 모시던 궁녀들을 죽인 바 있고 인조의 경우 민회빈 강씨를 잡을 때 그녀를 모시던 궁녀들을 고문하여 죽이기도 했고 더 멀리 보면 태종은 원경왕후에게 경고의 의미로 그녀를 모시던 궁녀들을 내치기도 했다. 즉 궁녀도 라인을 잘못 타면 잘못과 무관하게 망한다. 처신? 상관없다. 중종 시대의 풍가이처럼 신하들에게 어필할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나마 낫지만 그런 것도 없다면 처신과 무관하게 당한다.[13] 정조가 즉위하기 직전 스승을 지낸 홍대용의 계방일기에 따르면, 정조는 효의왕후를 스승들 앞에서 은근히 돌려 까기도 한 모양.# 효의왕후 문서에도 나오지만 한중록에 따르면 이 당시 정조는 조카에게 집착하던 고모 화완옹주의 이간질만 듣고 효의왕후를 냉대했다고 한다. (다만 해당 링크글에선 정조가 효의왕후를 포사 등에 빗대 욕을 했다고 해석하는데 저 레퍼런스의 본문을 보면 정조가 직접 효의왕후를 포사, 달기에 비유한 것은 아니다. 그저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는 홍대용과 홍국영의 말에 '포사, 달기같은 여자들조차 남자 하기 나름인 것이냐'며 비아냥댄 것에 가깝다.) 또 화완옹주가 사라지고 왕이 된 이후부턴 정조 역시 덕 있는 효의왕후를 존중해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고 한다.[14] 《실록》을 보면 영조가 적손주들인 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는 매우 아꼈지만, 그외의 서손주들은 거의 손주 취급도 안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애들이 뭔 잘못.[15] 후술된 혜경궁 홍씨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느 정도 해소는 된다.[16] 애초에 왕의 의중을 직접 알 수 있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사관의 시선이 아닌 왕이 직접 본인의 의중을, 그것도 후궁에 대한 감정을 직접 글로 남긴 것 자체가 의빈성씨,정빈 이씨에게 치제문을 남긴 정조, 영조 외엔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될 정도기 때문.[17] 애초에 후궁이 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를 적은 기록 자체가 현재로선 남은 게 없다. 심지어 왕이 비빈을 어떻게 여겼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성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도 드문데 하물며 왕실 여인이 직접 남기는 기록은 극히 드물 수 밖에..[18] 다만 본인한테 일견 불리한 진술까지 가감없이 쓸 정도면, 정조 입장에선 나름 본인을 미화하지 않는 선에서 진솔하게 썼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속사정까지 자세하게 썼으면 후대 역사학자들한텐 더 좋았겠지만.[19]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의빈은 정조를 과연 사랑했을까?'라는 식의 의문을 은근히 제시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정조가 의빈을 사랑했다는 건 확실하지만 정황상 의빈은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해당 드라마에선 의빈이 정조를 분명 사랑한 것으로 나온다. 사망할때 다음 생에는 후궁되기 싫다고 하면서도, 그럼에도 기어코 거부하지 않고 전하의 후궁이 된걸 보면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냐는 유언을 남긴다.[20] 2번째 고백 당시 정조는 29세, 성덕임은 28세로, 보통 10대에 결혼하는 당시 기준상 성덕임은 매우 노처녀였다. 반대로 말하면 그럼에도 정조가 다시 고백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그녀를 아꼈는지도 짐작 가능하다.[21] 실록 등 공식적인 기록에서 나온 횟수[22] 이재난고에서 나온 횟수[23] 시기도 묘한데 사실 화빈 윤씨 입장에서 보면 임금인 정조도 딱히 후궁 간택을 내켜하지 않다가 궁 내외의 압력으로 명문가 출신인 자신을 간택했지만 그다지 총애받지 못했고, 비슷한 시기에 덜컥 승은 후궁을 들이더니 그 후궁이 자신보다 먼저 왕자를 출산했고 심지어 화빈 자신은 상상임신 소동을 일으켜 입지가 급격히 좁아진 상황이였다. 중전인 효의왕후까지 질투할만큼 법도를 무시하며 막 나갔던 화빈이라면 의빈에 대한 질투심이 폭발할 법도 하다. 참고로 당시 화빈은 16세, 의빈 성씨는 28세였다. 또 사족으로 1780년은 홍국영이 1779년 정계에서 쫓겨난 시기 직후다.[24] 다만 의빈이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므로 정조가 이를 기록할 때, 감정이 격해 정치적 계산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25] 당대부터 의빈 성씨 관련한 루머는 여러가지가 나돌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화빈 윤씨 측에서 퍼트린 것으로 추정되는 방중술로 왕자를 낳았다는 소문 등..19세기 후반 조선에 머문 호러스 뉴턴 알렌의 알렌 문서에도 의빈이 언급되었기에, 외국인도 알 정도면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였다고 보여진다.[26] 이 말은 혜경궁 홍씨가 하교를 내리며 언급한 것이다.[27] 항목에도 있지만 그냥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저주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28] 어차피 혜경궁의 수양딸이면 정조는 어머니 입장 생각해서 승은 거절한다고 성씨에게 직접 벌을 내릴 수도 없다. 성씨는 아들과 의붓딸이 맺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일 혜경궁 입장 생각해서 오히려 거절이 도리라 생각했을 수 있다.[29] 얼녀의 경우 법적으로 천민이라 적자 오라비는 오라비가 아닌 하늘같은 도련님이었다. 신분이 엄청나게 다른 근친처럼 여겨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