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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01:04:47

의직

義直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

1. 개요

삼국시대 백제의 장군. 의자왕 대의 장군이다. 성씨는 불명. 삼국사기에 몇 차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647년, 보기 3천명을 이끌고 신라 서부의 무산성[1]에 주둔하고, 감물[2]-동잠[3] 2성을 공격했다. 그러자 신라는 김유신을 필두로 보기 1만을 보내 맞붙게 하는데 1만의 신라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비령자 등의 희생과 김유신의 결사항전으로 백제군은 대패, 의직 본인만 겨우 살아서 돌아갔다. 일단 이 기록은 백제 본기, 신라 본기, 김유신 열전으로 나뉘어 있는걸 조합한 것으로 백제 본기에는 백제군 숫자, 의직이 패해 혼자 돌아왔다는 내용이 적혀있고, 신라 본기, 김유신 열전에는 신라군 숫자, 비령자의 분전, 신라군이 취한 수급이 3천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냥 패전도 아니고 군을 완전 전멸당할 정도의 대패를 당한 의직이 처벌받기는커녕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신라를 공략해 들어간 것을 볼 때 백제군 전멸은 김유신의 전공을 띄우기 위한 김유신 열전[4]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지만 김유신 열전을 제외하더라도 패전했다는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648년 3월, 다시 군사를 이끌고 요거성(현재의 상주) 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 그 기세를 몰아 4월 옥문곡으로 진격했으나 김유신과 두 번 싸워 패배하였다. 신라 본기에서는 김유신이 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협격해 이겼다고 적고 있다. 반면 김유신 열전에서는 백제, 신라 본기 내용과 달리 김유신이 백제를 침공한 것으로 적고 있다.[5] 신라군이 백제군을 옥문곡으로 끌어들인 뒤 복병으로 격파하고 1천의 수급을 베고 장수 8명을 사로 잡았다. 이때 사로 잡은 백제 장수들과 김품석, 고타소 부부의 유골을 교환하고 기세를 몰아 성 20개를 함락시키고 3만의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김유신 열전이라도 세부적인 차이는 있어도 본기와 큰 줄기는 같은데 유독 이질적인 두 부분 중 하나.[6] 전 서술에는 자기 구역에 성을 잃은 책임을 덮으려는 서술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정작 다음해인 649년 은상과의 전투에서 7개의 성을 함락당한 건 별 윤색 없이 적고 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군신회의에서 의직은 당군을 먼저 선공하자는 주장을 했으나 상영이 당군은 일단 저지만 해 두고 신라군을 먼저 선공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의자왕은 누구의 말을 따를까 머뭇거렸는데 결국 의직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백강에서 당과 전투를 치르기 했지만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거나 기습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의 관등은 최고 관등인 좌평으로, 백제 대성팔족 못지않는 고위 귀족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도학 교수는 의자왕 즉위 초부터 백제 멸망 시까지 줄곧 좌평직에 있었으며 의자왕의 이름인 '의자'와 이름 앞글자가 같으며 유교식 이름인 점을 들어 의직을 의자왕의 동생이라고 추측하였다.

백제 멸망 후 같은 관등의 좌평인 충상, 상영황산벌 전투 후 신라의 포로로, 좌평 각가, 사택천복, 사택손등, 국변성은 기록상 당의 포로가 되는데 의직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다. 전쟁 중 사비성 부근에서 나당 연합군과 백제군이 대규모 교전을 벌여 백제군 사망자만 1만여명에 달했는데[7] 이 과정에서 전사했거나 다른 관료들처럼 당군에게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3. 기타

신라를 침공해서 전공을 세웠으나 하필 격퇴하러 온 상대가 김유신이라 묻힌 감이 있다. 그래도 김유신을 고전시킬 정도였으니 뛰어난 용병술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의직이 1만의 군사로 당군을 요격하다가 전사했다고 주장했지만 문헌의 출처를 알 수 없어 신빙성이 낮다. 다만 대중에게 이 내용이 많이 퍼졌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이름이 '의진(義眞)'으로 나오는데, 안정복의 착오로 보여진다.

2006년 7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드라마 삼국기, 계백, 대왕의 꿈에서 등장하지만 모두 조연으로만 등장한다.

삼국기에서는 백제의 무장 양성 기관으로 설정된 수사의 부교관으로 등장한다. 훈련생들을 엄격하게 다루는 교관 윤충과는 달리 과묵하게 묘사되며 그만큼 비중은 적다. 동잠성, 감물성 전투에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김유신에게 패하며 진짜로 말 한 필 타고 혼자 살아오는것으로 처절히 묘사된다. 이런 대형사고를 친 장수가 곧바로 중요한 작전에 기용되는게 좀 개연성이 없다 싶었는지 648년의 전역에서는 뜬금없이 흑치상지가 지휘를 한다. 총사령관의 중책을 담당하기에는 당시 흑치상지의 나이가... 것보다 의혹을 왜 자꾸 백제가 불리한 쪽으로 푸는건지...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될 당시에 당나라 군대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전사한 것으로 그려진다.

계백에선 윤충, 은상과 함께 무왕때부터 활동한 숙장으로 그려진다.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충직한 근왕파지만 보유한 세력이 적어 일선 지휘관으로 활동할 뿐 내부정쟁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드라마가 연장 방영까지 해놓고도 제대로 못다루고 중간에 증발시켜버린 캐릭터들이 꽤 많았는데 윤충은 고증대로면 주요 지휘관으로 등장해야하는 642년 대야성 전투 한참전에 퇴장하고, 은상도 대야성 전투 이후 소리소문 없이 퇴장해 의직만 마지막까지 남아 의자왕을 보좌한다. 나당연합군의 침공때 당군을 막으러 1만의 군대를 이끌고 나섰으나 역부족이었고 계백이 황산벌에서 혈전을 벌일때 전사했다는 보고가 전해진다. 이 보고가 전해지면서 계백은 계백대로, 김유신은 김유신대로 급해진다.

대왕의 꿈에선 648년 대야성 전투에서 윤충과 함께 전사하여 광탈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이 과장서술의 의혹을 받는 마당에 사극은 한 술 더 뜬다.

현재는 서비스 종료된 계백전이라는 게임에선 궁기병으로 나온다. 처음엔 계백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점차 계백을 인정하게 된다.

5. 관련 문서


[1]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2] 지금의 경북 김천시[3] 지금의 경북 구미시[4] 열전은 김해 김씨 가문에서 내려오던 행록에서 발췌한 내용이라 같은 삼국사기의 본기와 상충되는 내용이 많다.[5] 이때 신라 백성이 편하게 지낸 지 오래되어 싸우기를 바랐다고 한다. 이에 김유신이 때가 되었다고 느껴 왕에게 청하고 싸움에 나섰다는데, 당시 신라는 몇 해 마다 처들어오는 백제를 감당할 수 없어서 주변 각국에 동맹을 청하고 있었고 바로 1년 전에는 내전까지 겪었고,의자왕 즉위 이후 백제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6] 다른 하나는 황산벌 전투. 김유신 열전에는 황산벌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다.[7] 위치 미상. 이도학 교수는 당군이 사비성을 공략하기 위해 금강 남안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두고 군산시 오성산으로 비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