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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화 이글스 1기 시절
1998년부터 연수를 마친 이상군은 1군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다만, 1999년부터 2001년 5월까지는 플레잉 코치였기 때문에 불펜에서 몸 풀다가 등판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1998년에 한화 성적은 8팀 중 7위를 기록했지만, 구대성, 한용덕이 분전하면서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99년부터 한화 투수진은 허술함이 많이 보이게 된다. 우승을 했지만, 당시 패턴은 선발투수 3명(정민철, 송진우, 이상목)과 구대성 1명이 주축이고 나머지 비는 이닝들은 이상군, 한용덕, 나머지 쩌리 투수들로 대충 때우고 넘어가는 것이었다(...).[1]2001년 5월, 선수 은퇴를 선언한 이상군은 완전히 투수코치 생활을 시작했으나 맡은 팀의 투수들의 구속과 구위가 급감하며 투수코치로써의 평가는 굉장히 좋지 않다.[2] 삼성 라이온즈의 정현욱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역대 최악의 투수코치로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3] 이상군이 투수코치를 하던 시절 팀 평균자책점을 보면 2001년 4.82(5위) - 2002년 4.79(8위) - 2003년 4.37(6위)로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2001년은 구대성 1명 빠지니 밑천이 제대로 드러났다는 것이 정설이고, 2002년에는 한용덕, 이상목의 부진과 일본에서 돌아온 정민철 역시 상태가 나빴다. 2003년도 비슷한 양상이었고, 심지어 송진우가 피코타의 불안한 실력 때문에 시즌 말미에는 마무리 투수로 보직까지 바꿨을 정도였다.
2. LG 트윈스 시절
2003년까지 한화 코치로 있다가, 이순철의 부름을 받고[4] 2004년부터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하지만 LG 투수진은 계속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프런트가 친히 이상훈을 내쫓아버리고(...), 전승남은 혹사의 여파로 부진, 환자였던 이동현은 이순철 감독의 "재활은 마운드에서 하면 된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에 힘입어 2004년에도 1군에서 굴려졌다. 이상군 - 김용수 체제에서 유망주 정재복, 서승화가 기회를 잡지만 둘 다 실력은 시원찮았고 1군 10승 투수는 장문석 혼자였다.2005년도 다를 거는 없어서 최원호의 부활(13승 6패)만 특기할 부분이었고, 나머지 선발진은 전멸에 가까웠다. 김광삼은 성장이 더뎠고 이승호와 왈론드의 부진으로 인해 선발진 상황이 극악이었다. 이동현은 시즌아웃, 전승남은 입대로 인해 팀을 떠났다. 류택현, 경헌호, 장문석이 계투진에서 버텼지만 이미 선발이 박살난 이상은(...) 결국 2005 시즌이 끝나고 코치진이 대폭으로 갈리면서 해임되었다.[5]
물론 LG 투수진의 몰락을 다 이상군의 잘못으로 보기엔 어렵다. 2001~2002년 LG 감독은 투수 갈아먹는 것으로 악명 높은 김성근이었다. 2002년에 김성근 감독은 이동현, 장문석, 이상훈, 류택현을 신나게 굴려댔고 이동현은 포스트시즌까지 합치면 88경기 148이닝 등판이라는 정신나간 혹사를 당했다. 68경기 118이닝을 던진 장문석, 63경기 103이닝을 던진 이상훈, 이닝 수는 적지만 86경기에 올라온 류택현도 정상적인 스케줄이 아니었다. 2003년에는 감독이 이광환으로 바뀌었고, 가을야구를 안 했지만 전승남이 68경기 106 2/3이닝을 던지고, 이동현은 33경기에 올라 95 2/3이닝을 던졌다. 시범경기 성적을 더하면 둘 다 미친듯이 굴려진 셈이다. 장문석도 여전히 100이닝 넘게 던졌고, 이승호가 포텐셜이 터졌지만, 그 간 계투요원으로 던지다가 선발로 가서 200이닝 가까이 던진 것을 감안하면 무리한 운용에 가까웠다. 또한 투수코치였던 정삼흠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투수진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다.
3. 한화 이글스 2기 시절
LG에서 잘린 이상군은 1년간 KBO에서 명예직인 육성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6년 11월에 한화로 돌아온 뒤 한화 투수진도 박살내버렸다(...). 특히나 이상군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답게 제구력 상승 위주로 투수들을 코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문제는 이 와중에 투수들의 구위와 구속이 프로에서 도저히 통하지 않을 정도로 하락하였다는 점이다.한화 이글스로 복귀한 후에는 2군 투수코치로 선임되었으나, 정작 2군에서 유원상, 양승진 등 유망주들을 망가뜨리고 있었고, 김인식에 의해 무리하게 굴려져 재활 중이던 윤규진의 투구폼에도 무리하게 손을 대며 오히려 구위가 떨어지고 자주 부상에 시달리게 되는 등 기량 하락의 원인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7년 8월, 1군 투수코치를 맡던 한용덕 코치가 투수 기용 문제로 인해 김인식 감독과 충돌을 빚으며 2군으로 밀려나자 대신 1군으로 올라오며 남은 시즌 동안 1군 투수코치를 맡았는데, 한용덕 코치가 있었을 당시에 상위권이던 평균자책점이 꼴찌로 급 추락해버리며 큰 대비를 보여줬으며, 이 때 용덕매직과 대비되는 단어인 '상군매직'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상군매직 : 1년차, 약간의 제구력 상승과 급속한 구위하락. 2년차, 제구력 하락. 3년차, 시 to the 망.[7][8] 대표적인 상군매직의 피해자론 유원상이 꼽힌다. 이후 선배투수의 은총으로 어찌어찌 버텨나갔지만, 결국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된 후 2012년에 반짝했으나 2013년에는 정작 팀의 비밀번호 탈출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2009년 꼴찌를 할 때까지 팀에 꾸준히 머물러 있었고, 이 때문에 팀의 최강 파벌인 북일고 출신에 북일고 출신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 북일고 파벌의 수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에 북일고 파벌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다만, 이 라인이 없었다면 같은 북일고 출신이었던 한용덕 코치가 부활할 기회도 잡지 못했을 거란 아이러니는 있지만...[9][10]
결국 2009년 하반기에 한화 이글스 2군으로 내려갔으며, 시즌이 끝나고 프런트로 이동, 잠시 이인영 대리와 함께 스카우터로 일하다가 다시 2군/재활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다만 유창식의 등판경기에 이인영 대리와 함께 모습을 나타낸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 걸 보면 둘 다 같이 업무를 봤던 것으로 보인다.[11] 2011년 말부터 현장을 떠나 9개월 가량 구단 운영팀장을 맡았다.
4. 한화 이글스 3기 시절
4.1. 김응용 감독 재임기
결국 한대화 감독 경질 전 후로 해서 3군 감독(육성군, 잔류군, 재활군 담당)으로 전보되었다. 그리고 김응용 감독의 부임 이후에도 용케 잘리지 않고 살아남았다.[12] 정말 질기다.4.2. 김성근 감독 재임기
결국 김성근 감독 취임 후에도 김재현, 김정준 등 김성근 사단 코치진이 취임하고 대부분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코치한화 이글스의 팬들에게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이상군은 단지 코치로서의 능력이 부족할 뿐이지 명예욕/권력욕이 심하거나 딱히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 팀 케미스트리를 망가뜨리거나 감독의 팀 장악을 방해할 성격은 아니라는 평이 많다는 것.
이러한 추측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이 이상군은 한화그룹의 전대 회장이 직접 손을 써서 데려왔고 현 회장의 술친구인 동시에 전대 회장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한 4명 중 1인일 정도로 오너 일가와의 친분이 각별한 인사이다. 본인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SK의 신영철이나 민경삼, 두산의 김태룡, 요즘 핫한 롯데의 배재후, 이문한, 공필성 같은 인물들은 애교로 보일 수준의 막장 깽판을 부리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그런 적은 없다. 선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은 몰라도 선수단과의 불화, 직접적인 갈등/마찰을 빚은 적은 없다는 것. 때문에 1군 요직이 아닌, 직함은 거창하지만 실권은 거의 없는 사실상의 명예직 정도로 타협하면 딱히 팀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타입이므로 어찌어찌 감수하고 안고 갈 수는 있는 부류의 사람이긴 하다. 일단 2015년 보직은 육성군 총괄만 맡고 육성군을 담당하는 투수코치는 이정호로 확정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나갔다.
2015년 8월 1일 1군 불펜코치로 1군에 복귀했다.
다만 2015년의 한화 이글스는 김성근 감독이 전권을 가진 왕조 형태이고, 사실 불펜코치가 하는 건 그냥 전화 받아 투수 보내는 역할 정도라 사실상 뭐 명예직이긴 하다. 그리고 2015 시즌 종료 후, 김성근 사단의 일본인 코치 니시모토 다카시, 아베 오사무, 후루쿠보 겐지, 다테이시 미쓰오와 김응용 사단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전종화, 팀 프랜차이즈 출신 이영우의 해임이 확정되었다. 역시나 이상군은 또 살아남았다.
이 항목이 더 길어지지 않기를 바랬지만... 2016년 7월 2일 은근슬쩍 정민태와 자리를 바꾸어서 1군 투코로 올라왔다. 사실 이 정도 기사가 뜨면 굉장히 난리를 피우면서 망했네 어쩌네 소리가 나오는 게 일상적이지만, 정민태 역시도 무능은 마찬가지고 결정적으로 이 팀 마운드가 개판이 된 건 이런 이유나 저런 이유 때문이라...
이상군이 1군 투수코치로 컴백한것에 대해 두가지 이유로 예측 가능한데, 첫째는 정민태 코치가 바른 소리를 하다가 잘려나갔다는 것. 그러나 이 경우에는 다른 코치가 아니라 왜 굳이 이상군이 올라왔느냐는 반박이 가능하다. 둘째는 김성근 감독의 견제용으로 올라왔다는 것. 이상군 코치는 한화그룹 최고존엄님의 비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도 감히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따라서 이 견해가 신뢰를 얻고 있다. 팬들은 제발 이상군 코치가 김성근 감독에게 투수운영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를 바라는 중.
뭐 어쨌든 이 분 성격이 원체 좋아서 쓴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자 구단에서 김광수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내정했고 김 수석코치가 이를 고사하자 이상군 투수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선임되어 잔여 시즌을 치르게 되었다.
5. 한화 이글스 감독 대행 시절
자세한 내용은 이상군/감독 대행 문서 참고하십시오.10월 4일 2017년 시즌 종료 이후 엠스플 전수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최근 거론되는 이상군 대행의 내년 거취를 포함한 질문에 감독 선임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답했다. 이상군 감독대행은 자신이 감독실을 쓸만한 그릇이 아니라며 중요한 손님이 방문할 때를 빼면
프런트와 현장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소통'이라고 말하였고 올 시즌 최대 수확인 김재영에 관해서 김재영이 볼넷이나 안타 맞으면 덕아웃만 쳐다봤는데[18] 요즘은 자신감이 생겨서 안 쳐다본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었다. 더욱이 혹사를 없애기 위한 건강야구에 관해서 "당장 눈앞의 성적에 연연하면 결국 피해는 선수들이 입게 됩니다. 어느 감독이든 당장의 승리가 더 달콤하기에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곤 하는데 옛날 기억만 떠올리고서 팀을 운용해선 안 됩니다. 많이 던진 선수가 있으면 최대한 쉬게 해줘야 합니다."[19]라며 전임자와는 전혀 정반대적인 가치관이 담긴 발언 및 행동을 통해 2년 내내 전 감독의 만행에 절망해 왔던 반 김성근 성향 한화 팬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다.
시즌이 끝나고 임수민, 전대영, 신경현 등 프랜차이즈 출신이나 권영호, 박영태, 윤재국 등 잔존 김성근 사단 코치진 11명이 정리되는 와중에도
6. 북일고등학교 감독
202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천안북일고 출신선수가 한 명도 지명이 안되자 한화그룹의 주도로 2020년 11월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10년대부터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내지 못하며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지명 선수 0명이 된 모교 야구부의 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21]2021년 청룡기에서 1회전 덕수고를 만나 2-9 7회 콜드게임패를 당했다.
2022년 2차 신인드래프트에서 외야수 박찬혁이 1라운드 키움으로 투수 양경모가 4라운드 한화 지명받으면서 2021년 드래프트당시 무지명 굴욕은 피하는 성과는 얻었다. 그래도 대통령배 8강에 다시 진입할 정도로 팀을 어느정도 수습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다음 2022년 성과물이 어느정도 될 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2022년 전국명문고야구열전 대회에서 탄탄한 마운드를 바탕으로 C조 1위를 하면서 준결승까지 올라와 D조 1위 경남고와 붙게 되었다.
신세계 이마트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침체되었던 북일고등학교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어느덧 드래프트까지 한 달 남은 시점에서 현 북일고 에이스 최준호가 어디든 지명[22]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면서 무지명 굴욕은 올해도 넘길것으로 보인다.
최강야구의 캐스터 정용검의 평으로는 투수 왕국을 건설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시즌 이후 2023년 전국드래프트에서 최준호가 두산 1지명, 이후 3명의 선수가 더 지명되면서 4명을 프로로 진출시켰다.
2023 시즌은 이상군에게 운이 없었다. 22시즌 전국체전이 끝나자 김휘건의 갑작스러운 휘문고 전학, 에이스 역할을 해주던 좌완 이현욱은 미국 뉴멕시코 군사학교로 시즌 도중 유학으로 장기로 비유하면 차포 둘 다 갑작스레 사라진데다가 2022시즌에 애지중지 키우던 진민엽 또한 한계를 느꼈다며 공부로 선회해 퇴부[23][24]함으로써 23시즌에 자연스럽게 북일고의 중심이 되어줄 선수들이 갑자기 공중분해된 만큼 좋은 성적을 못 거뒀다. 최악의 경우 2021 드래프트 재림이 될 정도로 하위라운드 지명을 통해 프로 진출자가 나와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포수 이승현이 프로팀으로 지명받는데 그치면서 무지명은 피했다.
[1] 대신 공격력이 우수했는데, 1루수 로마이어, 3루수 강석천, 좌익수 이영우, 중견수 데이비스, 우익수 송지만, 지명타자 장종훈으로 이어지는 타선은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주전 2루수인 임수민도 2할 7푼을 쳤고, 유격수인 백재호와 포수 조경택이 공격력이 상당히 약했으나 적당히 커버가 되었다.[2] 감독대행 이상군은 평가가 괜찮지만 투코 이상군은 현재도 재평가가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투코계의 빌 버베이시, 백골퍼. 그나마 저 둘처럼 극심하게 말아먹은 건 아니지만 이쪽은 커리어가 워낙 길어서...[3] 삼성 라이온즈의 정현욱의 경우 이상군만큼이나 사람 좋은 코치로 유명해서 오랜 기간동안 삼성 라이온즈에 붙어있고, 이상군 이상으로 구시대적인 코칭으로 인하여 선수들의 제구, 구위 등 모든 방면에서 완전히 초토화된 기량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상군처럼 투구폼을 천편일률적으로 바꾸는 코칭을 이상군의 10~20년 뒤인 2020년대에 시행하고 있다. 일단 투수진 성적도 ERA+나 WAR상 이상군이 맡은 팀들보다 정현욱이 맡은 2023년 삼성이 더 좋지 않고, 이 시기는 개인별 투수 육성 시스템이나 메이저리그발 야구 혁명이 완전히 도래한 시기라 정현욱이 더 질이 나쁘다는 여론도 상당히 많다. 그래도 인지도상으로는 여전히 상군매직이 1위. 현재는 누적 전체로 보자면 오랫동안 뛰며 투수들을 망친 이상군이 더 안 좋은 평을 받으나 2023시즌 한정으로는 정현욱이 충분히 능가하고도 남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타격코치 한정으로는 LG 트윈스의 암흑기를 만든 서용빈이 최악으로 여겨지며, 이상군은 이 둘과 함께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코칭스태프로 평가받는다.[4] 2003년 10월 20일에 코칭스태프 보직 확정 발표가 났는데, 28일에 LG 영입 기사가 떴다(...). 결국 한화는 은퇴를 선언한 김정수 투수를 2군 투수코치로 바로 영입했다.[5] 이 때 1군은 황병일 수석코치, 이건열 타격코치, 장재중 배터리코치, 2군은 이광환 감독, 손상득 배터리코치, 김용국 수비코치가 해임되었다.[6] 그와 관련된 일화로, LG 투수코치 시절 어떤 유망주가 이상군에게 제구력을 잡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자 이상군은 자신의 현역시절 비디오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선수 시절 자신의 투구폼을 참고하면서 답을 찾자는 의미였겠지만... 애초에 저렇게 폼을 천편일률적으로 바꿔봐야 제구가 잡힐 리도 없고, 그 투구폼이 이상군 본인을 제구의 마스터로 만들어준 투구폼이라 할지라도 유망주가 그 투구폼으로 바꿨을 때 더욱 제구가 안 좋아질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물론 저 당시는 개인별 투수 육성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니 감안해야 하지만.[7] 제구를 잡기 위해 팔스윙을 느리게 가져가니 구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팔스윙을 느리게 가져가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당장 잡힌 듯하던 제구도 시간이 지나면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8] 와중에 몸상태도 느리게 던지는 데에 익숙해지면서 구속도 당연히 떨어지고,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9] 하지만 한화에 실제로 북일고 파벌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된 적이 없으며, 경남고 - 부산고 - 용마고 등의 파벌이 설치는 다른 구단 사례를 가지고 추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10] 실제 이상군은 감독 제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자신은 감독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와 관련해 당시 김상국 북일고 감독이 이상군의 한화 감독 취임을 기정사실화하고 북일고 감독직을 버렸다는 설이 있었으나, 사실은 사생활 문제(도박)가 드러나 해임된 것이었다.[11] 사실 코치 겸 스카우터라는 상황은 비정상적인 상황이 맞다. 애초에 이상군을 2군으로 보낼거면 코치로만 쓰거나, 아니면 프런트로 보내서 스카우터만 시켜야 하는데, 둘 다 시키면서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되었다. 더군다나 한화 2군의 상황을 보면 얼마나 구단이 육성에 인색한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12] 김승연의 술친구라는 위의 글을 생각하면 짤리는게 더 이상한 걸지도...[13] 사실상 예전 3군 감독과 같은 자리다.[14] 김응용 사단에서는 김종모, 이종범, 오대석, 이선희, 신용균이 해임되었고, 프랜차이즈 스타들 중에서는 송진우, 강석천, 조경택이 해임되었다.[15] 그나마 잔류에 성공한 게 장종훈, 이상군, 정민철, 이정훈, 신경현, 임수민인데, 정민철은 10월 30일에 스스로 재계약을 포기한 뒤 MBC 해설위원으로 옮겼고, 장종훈도 이종운 감독의 부름을 받아 롯데 자이언츠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프런트에 있던 한용덕마저 계형철과의 악연으로 인해 두산 베어스로 옮겼다.[16] 80~90년대까지 대부분 밥먹듯이 혹사를 당했던 투수들이 지도자를 하는 경우 나는 연투에 200이닝+도 밥먹듯이 해봤는데 너는 왜 못하니 혹사에 꽤나 둔감한 경우가 많은데, 이 분야 최고로는 혹사당해 선수생활이 끝장나고도 감독으로 선수 여러 명의 팔을 믹서기에 갈아넣은 김성근, 선수 생활부터 감독 생활까지 마찬가지의 행보를 보여준 김인식 등이 대표적이다. 혹시 이상군도? 그런데 어느 팀이든 감독과 코치가 알력이 생겨 파워게임을 하면 그 팀 이미지와 분위기는 망가지기 십상이다. 당장 롯데에서 공필성이 욕먹던 이유가 무능함도 있지만 프런트의 앞잡이로 파벌을 만들거나 다른 코칭스탭과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 물론 방관한 점에서 이상군도 책임이 있지만, 그렇다고 구단의 힘을 내세워 이래저래 간섭하고 월권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17] 그럴만한게 야구계는 1군 감독을 맡고나서 재계약을 하지 않는 한 임기가 종료되면 팀을 무조건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팀이나 다른 일을 하다가 감독직이나 수석코치, 2군 감독 등의 보직으로 동일 팀에 복귀하는 건 가능하지만 드문 편이다. 그나마도 지도자 돌려쓰기를 하는 롯데(김용희 - 감독 이후 수석코치, 2군 감독 역임, 양상문 - 감독 이후 2군 감독, 투수코치, 다시 감독 역임)에서나 흔한 일이었고.[18] 이와 관련해서 전임 감독은 신인 투수들이 조금만 흔들려도 바로 내려버리는 기이한 운영을 하였고 신인 선수들은 전임 감독의 눈치를 보느라 공을 제대로 못 던졌다는 썰이 있었다. 실제로 김재영도 2016년 시범경기 당시 인상적인 투구로 선발을 확정지었지만 첫 선발등판 당시 퀵후크를 당했고 바로 3일 뒤 선발로 나와서 다시 퀵후크를 당한 뒤 패전처리조로 강등당했으니 눈치를 볼 만도 하다. 전임 감독 경질 이후 1회 피안타율이 5할을 넘고 위기 상황마다 볼질을 일삼는 끔찍한 투구를 몇 차례 이어갔음에도 꾸준히 선발 자리를 보장받더니 9월에는 5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할 정도로 큰 성장세를 보였다. 가짜 야신 당신은 도대체... 근데 저러고 못 이긴 경기기 더 많다. 저랬으니 못 이긴 경기가 더 많겠지.[19] 이상군 대행의 평소 성품이 적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임을 고려하면, 딱히 특정 인물(특히 전임자)을 직접적으로 비난했다라기 보다는, 그저 개인적인 일반론을 말했다고 볼 수 있다.[20] 유승안, 유원상은 대체 누가 깠단 말인가? 더군다나 상군매직, 칰무원이라는 단어 역시 이상군이 LG에서 한화로 넘어온 이후 꽤 꾸준히 쓰였던 단어다. 아예 이러다 1군 감독까지 하면 꽤 재밌겠다는 비아냥도 많았는데 그분들은 타팀 팬?[21] 사실 이는 자율형 사립고 전환 이후 예전 같은 공격적인 투자를 하지 않는 게 큰 이유이다. 실제로 북일고는 2010년대 후반부터는 충청권 지역 유망주 위주로 선수 수급을 하고 있다. 그나마 지역 중학교 팜인 온양중, 천안북중 등에서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 다행.[22] 신세계배에서 활약하여 우승에 일조한 우투우타 투수로 190cm에 달하는 장신에서 나오는 고타점 투구가 인상적인 선수로 이 외에도 최고 구속 147인 만큼 프로 입단후 체계적인 관리를 받으면 150을 찍을수 있는 투수로 평가 받고있다.[23] 장신 우완으로 높은 키에서 꽂는 트로이카 중 하나였다. 22시즌 이마트배에서 그리 활약을 못 한것에 프로로써의 생활이 불투명해져서 2학년 1학기가 끝나자 부모님에게 야구 그만두고 공부하겠다며 부모의 반대를 뚫고 공부에 매진, 기숙학원까지 다니며 선수 생활을 하면서 다져진 체력으로 공부에 매진한 결과 단 1년만에 전국모의고사 2등급으로 올리는 것도 모자라 수능에서 1.4등급을 받았으며 켄텍과 유니스트, 중앙대 전기학과 등 한국 공대분야 최고 명문대 5곳에서 전액장학금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24] 진민엽이 야구를 그만두겠단 선언을 한 시기가 2학년 1학기가 끝난 시점이었는데, 고등학교 생활의 딱 절반을 운동 선수로 보냈다 보니 내신으로 대학을 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던 탓에 야구부 퇴부를 넘어서 아예 북일고등학교를 자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