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0-27 00:35:15

이종률(1910)

파일:이종률(1910).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명 이상(李象)
필명 임괴(任傀)·신호(申皓)·이일구(李一九)
이명 이남철(李南鐵)·태양(太陽)·남철(南鐵)
철생(銕生)·이균(李鈞)·옥교량
도성(度聲)·산수(山水)·선교공남(汕僑空男)
정약당(靜若堂)
본관 경주 이씨[1]
출생 1910년 6월 6일[2]
경상북도 청하군 죽남면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사망 1989년 3월 13일
부산직할시 동래구 명륜동 자택[3]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496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2.1. 일제강점기2.2. 광복 정국2.3. 제1 공화국2.4. 제2 공화국2.5. 투옥과 말년
3.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언론인, 통일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1910년 6월 6일 경상북도 청하군 죽남면 북동대산(北東岱山) 밑 산촌 농가에서 부친 이규환(李圭煥, 1860 ~ 1925)과 모친 벽진 이씨 이점실(李占實)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빈농은 아니었지만 중농 수준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한다. 선대는 경주부 안강현(현 경주시 안강읍·강동면) 일대에서 세거하였으며, 조부 대부터 동대산 밑으로 이주하여 향반의 지위로 살아 왔다. 이종률 본인은 자신의 집안을 '빈반(貧班)'으로서 가통을 유지해 왔다면서, 문약한 문중, 열사가 없는 문중, 매국노 없는 문중, 문장가 없는 가문, 예술가 없는 가문, '잘난 따님' 없는 가문, 상속부 없는 가문이 바로 자신의 가계라고 밝혔다.

이종률은 어렸을 때 부친으로부터 전통적인 한학 교육을 받아 '충군애국' 사상을 전수받았으며, 성삼문세조에게 벌겋게 달군 쇠로 고문당할 때 '이 쇠 차다. 다시 구워오라'고 항거할 정도의 기개가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일생 내내 지속된 투옥과 모진 고문을 이겨내는 원천적인 힘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가통'이라는 것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었으며, 집안에서 주는 전통의 분위기를 철저히 거부했다. 가통론에 입각한 가족제도의 부인을 시도하려 했고, 부친이 전해준 사회적인 사물관의 의식을 전면적으로 재비판해야 한다고 봤다.

심지어 부친이 지어준 자 '도성'과 호 정약당을 기존의 가통이 주는 의식을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모두 버리고, 자신의 실천적 삶과 연관 지어 필명 또는 호를 직접 지어 사용했다. 필명의 하나로 사용한 '선교공남'은 산수선경에서 살아야 할 자신이 풍파가 심한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와서 '공짜배기 사나이'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1917년 영일군 일대에 전염병이 유행하자, 이를 피해 가족 전체가 의성군으로 이주했다. 이곳에 살면서 1918년 박명진(朴明璡)[4]이 조직한 유년독립군 예비단체 중 하나인 호경체육회에 가담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신식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호경체육회에서 활동하면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1921년에는 점곡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되면서 신교육을 처음으로 받았다. 얼마 후 이상룡의 아들 도목 이형국(李衡國), 박곡 유동붕(柳東鵬), 도산 이지호(李遲鎬) 등 등 민족운동가들이 운영하던 안동의 사립 동명학교로 옮겨 민족교육과 인도주의적 또는 자연주의적 낭만을 배웠다. 그 뒤 그의 집안은 1920년대 중반 영덕군 남정면 남정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다.

이종률은 1924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가회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이승만의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 2학년 보결시험에 합격하여 편입했다가 학자금 부족으로 1925년 11월 자퇴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6년 봄에 경신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는데, 이 기간 공학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3학년 때 공학회 활동을 하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연행되기도 했다. 공학회는 1925년 9월 합법성을 취득하면서 조선학생과학연구원으로 개편되었고, 1926년 6.10 만세 운동 때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종률은 6.10 만세 운동 당시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어 취조받던 중 한용운을 만나 크게 감화를 받았다. 그는 후에 한용운이 "애국자가 되려면 사형을 당하는 의기보다도 고문을 견디를 각오를 다져야 한다"고 한 말이 일생의 민족혁명운동 과정에서 적어도 고문에서 실패하지 않은 힘의 원천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6.10 만세 운동 이후 1926년 7월 경신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그는 1927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부 시타도쓰카정(下戶塚町)에 거주하면서 와세다대학 예과 정치학과에 진학하였으며, 그해 신간회 동경지회 결성에도 참여했다. 또한 국내외를 왕래하면서 항일민족전선으로 조직된 재일본조선인단체협의회 부인부 부장을 맡았다. 1928년에는 '재일본 조선학생스트라이크옹호동맹'을 결성하고, 서울의 휘문고보 김운선, 보성고보 이태우, 경신고보 유추운, 중앙고보 곽용칠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의열단 비밀단원이자 민족주의자인 박건[5]도 이 과정에서 만났다. 박건은 국내 신간회 본부 서기장이었던 황상규를 밀양에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종률은 황상규로부터 중국의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여러 사정이 있어 따를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28년 와세다대학에서 '우리말연구회'에 참여한 일로 체포되었다가 그해 말인 12월 21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받아 출옥했으나, 와세다대학 당국에 의해 출학당했다. 1929년에는 학생운동조직인 성진회에 참여하여 격문 240매를 인쇄, 우송 배포와 동맹휴학 지도 혐의로 체포되어 1929년 3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예산공립농업학교 독서회 사건의 배후로 연루되어 구속되어 며칠간 취조받다가 그해 4월 9일 대전지방법원 검사국 공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이의 전말을 자신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간행하였던 월간잡지 <이러타>에 보도 형식으로 상세하게 전했다. 그는 신간회 해소가 총독부의 사회주의 세력들에 대한 회유 공작에 사회주의자들이 놀아났기 때문에 야기된 사건이라고 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이 신간회를 없애버리는 흉계로서 그들이 가진 매수자금과 폭압적 권력을 움직여 신간회대회에 대의원으로서 출석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 세력들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라 하면서, 민족단일당 신간회 해체를 극력 반대하였다.

1936년 천민들의 신분해방투쟁인 형평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며 형평청년동맹을 조직했다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936년 11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형(원심미결구류일수 중 900일을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약 3년 동안 경성 일대의 민족무산자 자녀들을 배움터인 고학당에서 강의하였으며, 1938년 또다시 출판법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한 달 복역하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고, 석방 후에도 조선총독부로부터 보호관찰을 받았다. 1940년 이후에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가일리에서 몇몇 동지와 함께 숯을 구워 판매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1944년 8월 10일 조직된 조선건국동맹과 협력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건맹은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의 조직이 아니라 일제가 물러서면 그때 건국을 한다는 조직이니, 행위 이전에 이름을 걸 필요가 없고 건국사업이 전개되면 가평군 일 하나만은 저희들이 담당하겠다"며 조선건국동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이후 가평에서 숯구이 생활에 참여한 사람들 중심으로 조직된 '가일리회의'를 정치적 회의로 발전시키려 하였으며, 8.15 광복 직후에는 고려민족공화국을 수립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2. 광복 정국

8.15 광복 이후, 한반도에는 수많은 정치단체들이 생겨나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종률은 이 가운데 조선민족혁명당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가장 가치성이 있는 정치조직의 명의로는 1945년 12월 이후의 신한민족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비록 조직 세력은 한미하지만 가장 역사적, 정치적인 가치성을 지닌 것은 바로 조선민족혁명당이며, 이 당이야말로 역사 여정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정립되는 민족혁명노선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책임자로서 그 전위당의 명칭이라고 봤다. 1945년 12월에는 도봉 박진과 조윤제 등과 함께 민족전위당으로서 사책당의 조직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적 및 이론적으로 개조시키려 하지만 실패했다. 그는 이에 대해 좌우 세력의 협공으로 민족혁명당은 단순한 중간당 성격의 조선인민공화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종률은 1945년 8월 16일 조선학술원 창립에 참여하였고, 학술원의 중추기관인 서기국의 회원이자 상임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3월에는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이 주최하는 '맑스 서거 63주년 추모 강연회'에 학술원 대표로 참여하여 강연하였고, 민족문화연구소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에스페란토를 전폭 지지하여 1945년 12월 15일 에스파란토조선학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강좌 개설 등을 통해 에스페란토어의 선전과 확산에 힘썼다. 하지만 그가 해방 정국에서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바로 민족건양회였다. 1946년 1월 5일 박진, 문한영 등과 함께 민족건양회를 발기한 그는 좌우 대립의 격화와 분단을 막고 변혁 운동을 주도할 전위당을 건설하기 위해 이 단체를 수립했다고 밝혔다. 민족 건양은 ‘민족 사회를 혁명적으로 건설하여, 이를 보다 높은 역사 단계로 지양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명칭이다.

민족건양회 조직은 수석의장 김창숙, 의장 이시영, 부의장 안경근, 총책임간사 박진, 사학연구부 책임간사 조윤제, 총무간사 문한영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사학연구와 정당의 창립을 준비하기 위한 민족정치 소집결 단체의 성격을 표방했다. 민족건양회는 ‘민족의 혁명적 건설과 이를 보다 높은 역사의 차원으로 준비하는 과정인 서민적 자본 민주주의 민족 혁명과 민족자주의 외세영어를 통한 통일건국으로 가는 것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라 하고, 그 다음 단계는 역사의 길대로 전진하는 것이라는 민족건양사론을 제시했다. 이종률은 마르크스 사론에 대해 "계급투쟁설은 좋게 말하면 사심사욕이 없는 사회사상의 열정적인 선동적 표현으로 인간평등을 실현하자는 것이고, 다른 말로 말하자면 사실과 상이한 비과학자의 사론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류의 역사는 태초부터 계급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있을 것도 아니며, 그 투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있을 것도 아니며, 동시에 시대가 있을 것도 아니며, 사학이 있을 것도 아니다"면서, 영원한 계급투쟁을 주장한 마르크스 사론을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역사는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그치지 않고,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설에 국한되지도 않으며, 민족혁명은 인간혁명으로 연결이 된다는 민족건양사론에 배울 바가 있다고 봤다. 민족건양사론은 외국 근세사시대의 내실 후진성지역 사실로서 민족의 생성적 건설과, 그것의 보다 높은 역사 차원에로의 지양적 전진을 위한 능변유물사관에 기초한 인간사 방향의 인간성능 사회화 체제로의 지양, 발전을 지향했다. 이 사론은 기계적 계급투쟁설의 볼셰비즘 사회주의도 아니고, 민주사회주의 등도 아니었다. 민족혁명은 구체적으로 민족삼반, 즉 반매판, 반외세, 반봉건을 실천해가는 과정이며, 외압과 봉건제와 민족매판과 그 자본 집중을 반대하는 민족주의인 민족적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민족건양회의 외세에 대한 입장은 1945년 12월 말 발표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내용에 대한 이종률의 견해에서 잘 드러난다. 이종률은 삼상회의 결정의 전문 뜻이 잘못 전해진 것을 빌미로 발생한 좌우 대립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탁'이란 영어로 trustship를 말하지만, 러시아로는 oΠeka(오페카)라고 명시되며, 그 뜻이 '후견'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강조했다. 그는 국제우호를 귀중히 여기는 곳에 민족자주는 가능한 것이며, 민족자주성을 귀중히 여기는 곳에서만 국제우호를 효과화시킬 수 있다고 봤다.

한편, 이종률은 조선공산당이 '좌익기회주의적 정치무모'라고 평가했고, 한국민주당은 '우익무원칙주의적 정치무모'라고 봤다. 그는 좌우 어느 노선도 과학적 정치노선이 될 수 없다면서, 자신은 '비좌비우' 정치학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박헌영의 심복비서 조두원으로부터 조선공산당에 입당하라고 권유받았으나 거부하였으며, 가까운 사이였던 윤행중과 박화로부터도 같은 권유를 받았으나 역시 거절했다. 또, 여운형 계열의 조선인민당에서 김진우, 이기석 등이 입당을 권유했으나 거절했다. 한국민주당에서도 장덕수, 조헌영 등의 입당 권고가 있었으나 거절했다. 그에게 심정적으로 가까운 정당은 안재홍이 당수로 있던 한국국민당이었으나, 이 역시 기호 양반들이 중심이 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한계를 느낀다며 입당하지 않았다.

1947년, 이종률은 영구 분단을 막기 위해 이극로, 정이형 등과 함께 민주주의 독립전선을 결성했다.[6] 민주주의도긻전선은 조선독립을 미소공위의 조속한 성공과 동시에 자주적 입장을 견지한느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또한 그는 김규식이 명예사장을 맡고 신익희 등이 고문을 맡던 <민주일보>의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역임하며 언론 활동도 전개했다. 1948년 4월에는 김구, 김규식 등이 평양으로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은사 박곡 유동봉에게 그들이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미국과 소련을 대상으로 한 민족자주 노선을 협상에서 관철시켜달라는 자기 뜻을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2.3. 제1 공화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가을, 이종률은 용공분자 명목으로 투옥되었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났다. 이후 대구 청구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던 중 6.25 전쟁을 맞이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반도에 심한 참화가 벌어지는 것을 목도하고, '동경통일론'을 집필할 때 전쟁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나의 눈으로서 겨레의 총알이 겨레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그 총알 맞은 겨레가 피를 뿜으며 엎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나의 눈으로 겨레의 총알에 의하여 또는 겨레의 고발 내지 무고에 의하여 죽어 넘어지게 된 시체가 눈을 감지 못하고 누워 있는 광경을 여기 저기서 보았다. 화려해야 할 조국의 삼천리 강산이 전운과 전풍의 전율 속에 싸여 있는 광경을 나는 나의 오관으로 체험했다.

이듬해 봄 와세다대학 동창인 하기락이 이사장으로 있던 경남 안의중학교 교감으로 잠시 봉직하였으며,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1961년초까지 정치사상사, 한국정치사, 정당론 등을 강의했다. 1954년 무렵에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의 제자들을 모아 민족건양회 방향의 민족문화협회를 결성하여 강연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 당시 그는 1950년대 상황을 이승만의 무노선 방향의 정치와 일보의 혁신정치가 전개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1956년 당시 정치 형세를 2개의 대립 구도로 나누어 이해했다. 즉, 무력으로 북진통일을 이루자는 주장인 이승만과 정치 협상을 통한 평화 통일 주장인 신익희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익희 노선의 실현을 위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 후보 진영의 통일논거를 마련하고 관철하기 위해 신익희의 집에 기거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익희가 선거 유세 도중 급사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956년 대선 이후, 이종률은 부산대학교 강의를 일시 그만두고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잠시 강의하였다. 이해 연말에는 케인즈 경제학에 대해 'Keynes경의 인식을 위한 일 시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1950년대 중반 후진성지역인 한국에서는 경제학의 대가는커녕 소졸도 못되는 케인즈의 경제학은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하면서, 식민주의자 및 과두 민족매판자본인의 어용학자로서의 상학자이며 재정학자밖에 더 되지 못한 케인즈의 이론은 우리 현실에 맞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57년 부산대학교 학보사 주간을 맡았으며, 백산 안희제 선생 14주기 추모제 행사 등 반외세 민족자주사상을 고취시키는 운동을 부산·경남 일대의 지사들과 함께 전개하였다. 1958년 무렵, 동래구 명륜동의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남파 간첩 김창주(金昌柱)를 신고하지 않아 불고지죄로 연행되어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뒤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그가 간첩인 줄도 몰랐으며, 자신을 믿고 찾아온 분단 이전의 친구를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이때 부산대학교 동료 교수들과 와세다대학 동문들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다.

출옥 후에는 <부산일보>와 <국제신보>의 논설고문을 역임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여러 논설을 게재했다. 이 중 1958년 말부터 국제신보에 41화에 걸쳐 연재한 <백만독자의 정치학>은 자신의 민족혁명론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제시하려 한 대표적인 글이다.

2.4. 제2 공화국

4.19 혁명 시기인 1960년 4월 21일 서울에서 민족건양회 주최로 개최한 4월목요회에 참석한 그는 이 항쟁은 민족항쟁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역사의 효능적 전진을 위한 일원적인 당세의 성립을 위해 무엇보다 민족자주통일중앙 및 각 지역 협의회라는 전선체와 같은 각급 대중운동 조직이 건립되면, 이를 민족건양회의 확대, 강화된 '고려민족건양당' 또는 고려민족당이라는 당명의 민족당 내부로 해소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를 위해 빠른 시일 안에 조윤제, 임창순 등이 중심이 되는 서울의 교수단 데모를 조직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4.19 혁명 성공 직후인 1960년 5월, 이종률은 젊은 제자들과 함께 민주민족청년동맹을 창립하였다. 또한 1960년 10월 동지 박진, 박출원, 문한영 등과 함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 조직을 발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민자통의 노선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민자통 중앙위원회 통일논책심의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면서 핵심사업의 하나였던 통일논책을 사실상 마련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민자통은 창립의 기본노선으로 민족건양주체노선, 민족자주영어전략, 민족대아동승전술을 3대 통일건국 방침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960년 10월 민자통 발기대회에서 민자통을 민족혁명론 방향에서 조직한다는 4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1. 민자통의 통일은 공산주의 세력 확대를 위한 통일이 아님은 물론이요, 민족1, 공산1, 즉 민공 1:1의 제휴통일도 아닌 어디까지나 민족혁명적 민족통일이다. 그래서 민족사적 역사의 대도와 그 동포애적 또는 인간애적 정으로써 남북과 관민이 적극적으로 허심탄회하게 여기에 협력하기를 요한다.
2. 민자통의 조직은 민족혁명론 방향의 정당 사회단체와 특수 개인으로써 한다.
3. 민자통을 통일달성 과정에서 또 통일달성 마당에서 동포 자기끼리의 범행을 일체 잊어버린다.
4. 민자통을 통일달성과 동시에 '민주화복, 홍익인간' 사업을 행하는 애국자들에 대해서는 일절 그 전력을 묻지 않고 서로 협력한다.

1961년 2월 25일 천도교 중앙본부에서 열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정식 창립대회에서, 민자통은 민족혁명운동 차원에서의 민족전위당임을 천명하였다. 이종률은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통일전선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통일론은 '남북동결통일론'으로 압축된다. 동경통일론은 남한과 북한 어느 한쪽의 우위에 의한 통일이 아니라, 전체 동포의 통합과 번영으로 발전하는 남북 공동의 승리를 추구했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는 통일 방안을 연구하기 위한 부설 기구로 통일방안심의위원회를 두었는데, 이종률은 통일방안심의위원회 위원으로서 남북 협상 통일론을 설파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그는 1960년 6월 '이일구'라는 필명으로 <현순간의 정치 문제 작은 사전>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간하여 민주민족운동의 개념과 운동 방향을 제시했으며, 1961년 2월 12일 창간호를 낸 <민족일보> 창간을 주도하였다. 그는 제대로 된 신문 창간에 전념하기 위해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한 후 명실상부한 민족적인 민족일보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당시 경향신문사 주필로 있던 팔봉 김기진을 편집의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일보 경영을 맡고있던 조용수가 이종률이 천거한 편집국원을 전부 부인하며 상황이 악화되었고, 이종률은 조용수가 친공계 혹은 조련계로 오해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보고 민족일보 창간호가 나온 직후 떠나야 했다.

2.5. 투옥과 말년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이 정변이 혁명의 방향으로 발전되어 나아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박정희를 위시로 한 군사정권은 남북협상과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고, 민자통 운동과 민족일보 창간이 깊숙이 관여했던 이종률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민족일보 사건으로 구속되어 일심에서 5년을 구형받았지만 무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민족자주통일방안심의위원회건으로 다시 구속하였고, 군사혁명특별재판에서 사형을 구형했다. 이종률은 사형 구형을 받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그대와 함께 청풍에 옷깃을 날리며 금강산에도 상상봉에 올라 조국의 남단인 한라산과 그 출렁거리는 푸른 바다와 조국의 북단인 백두산과 그 준령들을 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두고 가는 유한의 하나며, 내 그대와 함께 청풍에 옷깃 날리며 알프스에도 상상봉에 올라 전개되는 인류사 방향 아침해를 바라보며 시대도 인간의 자기상극도 아울러 사학도 없고 역사만 있는 그 인간정사 억천 억천만년의 광명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두고 가는 유한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사형을 받아들이지 않고 10년형을 선고했다. 이후 이종률은 감옥에서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집필했다. 민족혁명론의 이론적 정립과 역사적 체험기, 옥중일기 등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 분야에 걸쳐 집필했다. 그가 감옥에서 집필할 수 있었던 건 안양교도소 소장 서기석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석(徐其錫)은 이종률이 청구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 제자였다. 이종률은 교도관 역시 겨레의 일부이며 인간의 일부라는 신념하에 하급 교도관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965년 12월 25일 안양교도소에서 가출옥한 뒤, 1969년 경남 양산에 소재한 개운중학교를 인수하여 민족사와 인간사의 대도에 입각한 생산자의 인지용 영재의 육성을 목적으로 한 민족교육사업을 전개했다.

1971년 <조국사의 분열과 통일의 주조>를 출간하여 '성리학은 반민특권의 철학'이라고 주장하였으며, 1973년에는 이의 연장 집필물로써 <옳은 사학과 그 영남 및 그 조국의 인식을 위하여>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인쇄 직전에 수사 기관에 의해 압수당했다. 1974년에는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출신의 독립유공자 안희제의 사적을 답사하고, 인근의 부림면 손오리[7]에 있던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수병(李銖秉)의 본가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6년에 걸친 오랜 투병 생활을 했다. 그런 가운데 민족혁명운동의 전개를 위해 노력한 그는 여러 젊은 학도들을 교육하였고, <기미를 알자>를 비롯한 많은 미발표 원고를 직접 집필 혹은 대필로써 남겼다.

1989년 3월 13일, 부산직할시 동래구 명륜동 수곡의 자택 수일원에서 숙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7세. 죽기 직전에 "민족건양사로"와 "사책당"을 언급하였다고 전해진다.[8] 유해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산46번지 백운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21년 4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이종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참고 문헌



[1] 37세 종(鍾) 항렬.[2] 양력 7월 12일.[3] 당시 자택이 있던 명륜동 100-4번지는 현재 명륜2차아이파크 1단지아파트 부지에 편입되었다.[4] 중앙고등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했다.[5]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건(독립운동가)와 동명이인이다.[6] 이때 '이균'이란 이명을 사용했다.[7] 안민석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8] <민족사인 산수 이종률선생 영결식>(1989.3.17) 소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