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프로야구 1기 시절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1998년 OB 베어스의 2차 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 고교졸업 당시에는 실력에 자신이 없었는지, 프로에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고모부가 운영하는 기계 공장에서 들어가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 당시 좌완투수가 없던 OB가 좌완 보강을 위해 고민하다 결국 이혜천을 스카우트 하게 된다. 2년째부터 팀의 중간계투로 활약하였다. 전성기가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김인식과 김경문 감독을 거치면서 엄청나게 혹사당했는데, 99년 77게임 119이닝 , 00년 78게임 84.1이닝, 01년 53게임 142이닝, 02년 78게임 79이닝, 03년 83게임 55이닝, 04년 79게임 52이닝으로 6년 동안 443게임에 등판하여 굴렀다. 게다가 99, 00, 01, 04년에 두산이 포스트 시즌까지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심각한 수준으로 혹사당한 것이다.[2] 이에 본인은 90경기 등판이라는 기록이 욕심이 있었는데 아쉽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05년 시즌부터는 주로 선발 투수로 출전했다. 지금은 믿기 어렵겠지만 2006년에는 시즌 중후반까지 평균자책점 1위 경쟁을 하며 류현진의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할 대항마였을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승복은 없어 10승 이상을 기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허나 2006년 시즌을 끝으로 혹사와 부상 여파로 인해 구위와 제구력이 모두 줄어들면서 그 이후로는 좋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6년 5월 27일 잠실 롯데 자이언츠전에 등판해 최연소 500경기 출전 기록(만 27세 1개월 15일)을 세웠는데, 전성기동안 엄청나게 구른 덕에 세운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허리 부상으로 군대 면제를 받았다.
2007시즌 내내 등판하지 못하다가 포스트시즌에서만 나왔다. 당시 한국시리즈의 향방을 바꾼 사건으로 평가받는 3차전 벤치 클리어링의 주역이었다.[3]
프로데뷔 전부터 제구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고 프로데뷔해서도 제구력이 좋았던 해가 거의 없다. 본인 스스로도 제구가 되었다면 메이저 갔을거라고 농담할 정도. 2000년대 초중반 한창 활동할 당시 WHIP가 1.4~1.6을 넘나들 정도로 원래 제구력이 썩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 다만 선발로 전성기를 맞았던 2006년이 WHIP 1.23으로 그나마 좋았을 뿐이다. 이 해에 이혜천은 하체의 집중적 훈련과 투구동작의 테이크백을 간단하게 가져가는데 성공하면서 제구력을 개선한다.
어쨌든 2008시즌 종료후 FA자격을 얻었고, 2008년 11월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2년 계약을 맺었다. 대부분의 두산팬들은 ⅓이닝용 투수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종합해 말하자면 커리어로 보나 스타일로 보나 양준혁조차 두려워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가을까치 김정수의 완벽한 후계자.
2. 일본프로야구 시절
야쿠르트 시절. 참고로 이듬해에 유니폼이 바뀌어서 저 유니폼을 입고 뛴 적은 없었다.
이혜천은 동경을 연고로 하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2년 계약 연봉 80만달러와 계약금 100만달러 등 총 260만달러(플러스 옵션)에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영입을 노렸으나, 요미우리 특유의 상황 등을 감안하면 안 간 것이 다행이었다. 본인 말에 의하면 요미우리는 2군에서 시작해서 올라오는 조건이었고 야쿠르트 쪽이 바로 1군 즉전감으로 쓰는 조건이었다고 한다.[4]
사실 이혜천의 영입은 임창용의 후광효과에 가까웠다. 임창용을 겨우 30만불로 데려와 어마어마한 가성비 대박을 친 것에 고무되어 KBO 뽕맛을 못 잊은 야쿠르트가 비슷한 투수를 찾아 한번 더 로또를 긁어본 것. 좌/우완이라는 차이를 빼면 이혜천 또한 거의 사이드암에 가까운 낮은 스리쿼터에서 나오는 공끝이 지저분한 강속구 투수라는 점이 굉장히 비슷했다.
일본 진출 당시에 김성근 감독은 좌완 파이어볼러라는 이혜천의 장점을 높게 쳐서 잘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그 예상은 반 정도 맞았다.
주로 중간계투로 나왔으며 2009년 시즌에는 45경기 37이닝 1승 1패 1세이브 12홀드 평균자책점 3.65로 꽤 호투하였다. 팀 동료인 임창용의 활약에 비해서는 묻히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냥 계투와 마무리는 스포트라이트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니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 시즌 초에는 부상을 입어서 많이 나올 수 없었지만 중반에 복귀하여 보탬이 되어주었다. 보직은 승리조~추격조와 원 포인트 릴리프정도를 오갔다. 셋업맨까지는 아니었지만 좌완 강속구 투수라는 특성상 원포인트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벤치 클리어링 중 쌍욕을 박는 이혜천 |
일본에서는 사구가 나올 경우 투수가 모자를 벗고 사과하는 관습이 있는데, 모리노는 아마 '이걸 왜 안 했냐'면서 뭐라고 했었을 가능성이 높다.[6] 이 경기 후 모리노가 당시 2군에 있던 이병규에게 '이혜천이 무슨 말을 한 거임?'이라고 물어봤고, 이병규는 이혜천에게 그대로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하긴 한국말, 그것도 걸쭉한 욕 한 바가지였으니…. 어찌 됐든 다음날 서로 앙금을 풀었다고 한다.
단순한 항의가 아니었던 티가 나는 게, 백인이나 흑인 선수도 아닌 동양인 선수인 데다 겉보기엔 사람 좋아 보였고 자기보다 한 살 적었던 이혜천을 만만하게 보고 모리노 마사히코가 이혜천 앞에서 기세를 올려 잡아보려 했던 것 같다.[7] 그런데 막상 이혜천이 달려들자 모리노는 말 그대로 쫄았다.
2007년 한국시리즈 3차전 당시 모자를 찢으며 퇴장하는 이혜천 |
2010시즌엔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1군과 2군을 오르내렸다. 그리고 2010시즌 후 야쿠르트와 계약이 만료되고 국내 복귀를 전격 선언하였다.
여담으로 이 시기 부진한 이유가 빠칭코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물론 일종의 카더라 통신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야구 관계자들이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빠칭코 때문에 일본에서 부진했다는 설이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 최훈, 김정준, 이용균 등이 필진으로 참여한 2012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에서도 이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다루기도 했다.[9]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일단 빠칭코를 좋아했던 건 맞지만 끽해봐야 휴식일에 한두시간씩 일년에 열번 갈까말까한 수준이었으며[10] 휴식일에 술 마시고 하는 것보다 한 두시간 기계랑 노는게 훨씬 나았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부진의 직접적인 원인은 잦은 보직 이동과 계약에 관련된 문제들이었다고 한다. #
3. 한국 프로야구 2기 시절
3.1. 두산 베어스 시절
3.1.1. 2011 시즌
2010년 12월 8일 두산과 계약금 6억원, 연봉 3억5000만원, 옵션 1억5000만원 등 총액 11억원에 계약했다.#시즌 초에는 선발 두 경기 나왔다가 아주 탈탈탈 털리면서 결국 중간계투로 내려갔는데 그마저도 아주 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표적으로 4월 28일에 두 번의 폭투로 0이닝 0피안타 1볼넷을 던진 후 강판당했다. 이에 힘입어 두산은 삼성 라이온즈에 11:0으로 패. 그 이후로도 꾸준히 불펜으로 나오지만 안정적인 느낌은 없다. 오히려 상대 타선 안정에 도움을 주는 등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두산 팬들은 이혜천을 핵폐기물 취급하며 혜르노빌이라고 깠다. 결국 2011년 8월 2일 2군으로 내려가 2011년 시즌 끝날 때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시즌 성적은 34이닝 1승 4패 1세이브 4홀드 평균자책점 6.35. 그야말로 완전 폭망했다. 일본 유학 효과 같은 거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 실제로 이혜천 본인도 몇년뒤 인터뷰에서 일본가서 배운게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듯이, 일본에서 억지로 제구 잡히려 시도하다가 2년차때 딱히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걸 감안하면 그냥 2년동안 던져주고 간듯 하다.
3.1.2. 2012 시즌
12시즌에도 변함없이 상대 타선 안정에 도움을 주면서 이핵천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개막전 바로 다음날 경기부터 몸에 맞는 공 작렬. 넥센전에서 송지만의 발등을 맞혔다.[11] 4월 8일 경기에도 출전하여 여지없이 1피안타 1몸에맞는볼로 1실점, 그리고 4월 14일 롯데전에서는 그전 2경기동안 1득점했고 그 날도 경기 내내 무득점으로 끌려다니던 롯데 타선에게 순식간에 3안타와 1몸에맞는볼을 조공하며 리드를 날려먹었다. 이혜천의 등장으로 안정을 찾은 롯데 타선은 다음날 16안타를 폭발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 계속 승리조로 등판하며 불안하긴 해도 무실점으로 꾸역꾸역 막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혜천의 이름이 전광판에 새겨지면 두산팬들은 단체로 멘붕, 댓글란에 절망적인 메시지가 가득 차는 걸 볼 수 있다.4월 19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한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본래 18일에 인터뷰를 하기로 했으나 그 날 갑자기 최재훈이 각성하여 잠재력을 대폭발시켰기 때문에 인터뷰가 밀려버린 것. 물론 팬들은 '이혜천이 수훈선수얔ㅋㅋㅋㅋㅋ'등의 반응이었으나 의외로 차분한 인터뷰를 보여주었다. 덤으로 댓글을 보고 상처입지 않느냐는 질문에 신경쓰진 않지만 팬들에게 죄송해서 등장 테마곡을 <미안 미안해>로 바꾸려고 했다는 말을 하여 시청자들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이번 인터뷰로 이혜천에 대한 인상이 좋아진 팬들도 많은 듯. 요새 괜찮으니 좀 덜 까면서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
4월 17일부터 4월 27일까지 6경기 5⅔이닝 무실점 4홀드를 기록했고 특히 4월 24일부터 4월 27일까지는 과감한 승부와 향상된 제구력으로 타자들이 타석에 서는 족족 아웃시켜서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도 '이혜천사'로 불렸다.
4월 28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홈 경기에서 팀이 4:6으로 앞선 7회초 무사 1, 3루의 위기 상황에서 선발 투수 김선우에 이어 등판했다. 이용규에게 볼넷을 허용했는데 포일이 나오면서 3루주자 홍재호가 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이혜천은 이날 이용규만을 상대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는데 김상현이 이용규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희생플라이를 쳐서 점수가 역전되었고 결국 팀이 이날 9:8로 졌기 때문에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5월 10일 SK 전에서 9회초에 무실점으로 막았고, 임재철이 끝내기 3루타를 치며 승리투수가 되었다.[12] 이 후 끝내기를 친 임재철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2군에 오래 내려가 있다가 콜업되어 6월 27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 중간계투로 출전하였다. 3:1로 팀이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첫 타자 장기영을 공 3개 던져서 삼진으로 잡아내며 모든 두산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런데 다음 타자 정수성 타석에서는 헤드샷[13]을 선보이더니, 정수성이 친 내야 땅볼 타구를 잡아 1루에 악송구, 정수성은 3루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뒤이은 이택근 타석에서는 폭투를 기록, 정수성은 홈을 밟는다. 그리고 박병호에게는 공을 던져서 발을 맞추며 몸에 맞는 공으로 내보냈다. 이 엄청난 참사에 두산 팬들은 포수 최재훈을 불쌍히 여기며 혀를 찼다. 그러나 오늘 이혜천이 딸을 본지라 평소에 비해 까임은 적었고 다음부터는 잘 하기를 기대한다는 약간은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넥센 팬들은 점수를 낸 것에 기뻐하면서도 송지만의 사례를 기억하며 박병호의 사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6월 29일 롯데전에서는 8회 무사 상황에 등판해서 손아섭을 삼진으로 잡아내고 마운드를 홍상삼에게 넘겼다.
7월 10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이용찬의 뒤를 이어서 7회 1사 1루 상황에 등판해서 장성호를 잡아내고 최진행의 도루를 잡아내면서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날 승리는 9회초를 무실점으로 막아낸 변진수가 차지했다.
7월 12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9회초에 등판하였는데 선두타자가 투수인 송창식이 대타로 나왔다. 제구가 잘 안잡혀 3B1S까지 갔다가 5구째에서 간신히 스트라이크를 잡고 6구째에 송창식이 헛스윙을 하며 삼진을 기록했는데, 만일 6구에서 송창식이 스윙을 하지 않았다면 투수에게 볼넷을 내줄 뻔했다.[14]
8월 16일 넥센전에서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 서건창을 잡고 내려갔다.
8월 22일 넥센전에서는 초구 폭투로 실점하며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두산팬들은 이혜천과 양의지를 2군으로 내리거나 이혜천을 은퇴시키라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중.
9월 8일 삼성전에서는 연장까지 가는 혈투 도중 10회까지 3이닝을 잇달아 던진 김강률이 11회 1루타와 번트안타를 맞아 무사 1, 2루가 되자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승엽에게 안타를 맞아 무사 만루를 만들었고 곧바로 홍상삼으로 교체되었다. 그런데 홍상삼이 무사 만루를 기적적으로 무실점으로 막아내어 이혜천은 실점을 기록하지 않았다.
9월 29일 vsLG 전에서 선발 투수로 출장하여, 3⅓이닝동안 8실점이라는 정신줄을 빼놓은 핵폭탄을 터트렸다.
고액 연봉에도 불구, 성적은 초라하고 출전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 2012시즌 맹활약한 노경은과 비교해, 야구는 노경은처럼, 인생은 이혜천처럼이라는 말이 두산팬 사이에서 돌았다. 어쨌든 일본 진출 후 복귀 2년간 성적은 실망 그 자체, 아니 연봉 주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그야말로 최악이다. 데뷔 초창기보다도 훨씬 못한 수준.
그리고 이 해 두산 구단은 차기 좌완 클로저를 뽑게 된다.
3.1.3. 2013 시즌
답이 안 나오는 제구 때문에 팬들도 더 이상 많은 기대를 갖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막 제대한 좌완 투수 유희관이 더 믿음직해 보인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4월 9일 무등야구장 KIA 타이거즈전에서 팀이 4:3으로 아슬아슬하게 앞서던 7회말 2사 만루에 최희섭을 상대하기 위해 등판했으나, 9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몸에 맞는 공을 내주고 노경은의 승리를 날려먹었다. 게다가 두산 타선이 8회초에 7점이나 뽑아내면서 더더욱 욕을 먹었다.
5월 18일 한화 이글스전 선발 투수로 나왔다. 결과는 1⅓이닝 5피안타 1볼넷 6실점(6자책). 핵폭탄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강판되었다. 3실점 뒤 승계주자 3명을 남겨두고 내려갔으나, 후속 투수로 등판한 51번 배팅볼기계가 승계주자를 모두 홈인시켜 총 6자책. 거기에 팀은 한화 이글스에 시즌 최다득점, 최다 안타를 안겨주며 14:2로 대패. 이혜천은 패전투수가 되었다. 또한 방어율도 1.42에서 8.22로 수직상승...[15]
이후 부상으로 6월 1일에 2군으로 내려갔고 그 이후 시즌 끝날때까지 소식이 없었다.
3.2. NC 다이노스 시절
2013년 11월 22일 열린 KBO 리그 2차 드래프트 결과로 NC 다이노스로 이적. 이혜천 본인도 자신의 별명이 핵이라는 것과 핵품달이란 패러디를 알고 있으며 "진짜 '핵'이 뭔지 보여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나중에는 액자로 만들어 걸었다고 한다.#[16]
12월 30일 스포츠동아의 단독 보도에서 2011년 두산 복귀 때 맺은 계약이 이면계약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두산 복귀시 맺은 1년간 연봉 3억 5천만원, 옵션 1억 5천만원이 4년간 적용된다는 것이며, 방출을 요구하자 두산 프런트는 계약금 2억원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혜천은 구단이 계약을 어겼으므로 1년 연봉인 3억 5천만원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혜천은 이면계약이라도 계약은 계약이니 3억 5천만원을 받아야겠다며 "팬들에겐 죄송하지만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얼마 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 계약금 2억원을 돌려달라고 한 건 이혜천이 시즌 도중에 자신을 방출해달라고 하자 농담조로 한 거고 실제로 정식으로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두산 측과 이혜천은 합의를 봤는데, 내년 연봉 3억 5천만원 중 NC가 지불할 연봉을 제외한 금액을 두산이 보장하기로 했다고 한다. NC 측에서는 5천만원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아보이므로 두산측은 대략 3억원을 대신 지급해야 할 듯.
팬들의 반응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계약은 계약인데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말끔하게 처리하지, 두산 프런트가 일을 잘못 처리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3년간 두산에서 삽질한 주제에 오히려 큰소리나 치고 있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두산 팬들 대다수는 이혜천에 대해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 게다가 이혜천은 “NC로 이적한 것에 대해서 기분좋게 생각하고, 지옥에서 꺼내 준 김경문 감독님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첫 출발부터 삐걱대 아쉽다. 최대한 빨리,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짓고 싶다" 라고 말했는데 두산 팬들은 3년간 기회를 그리도 많이 주고 고액의 연봉을 꼬박꼬박 지급했던 두산을 향해 '지옥'이라고 한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다.
3.2.1. 2014 시즌
스프링캠프 자체 평가전에서 1이닝 2피안타 2볼넷 1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대로라면 방어율이 0인데 WHIP가 4.00인 괴랄한 스탯이 나온다.
시범경기에서도 그동안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며 핵폭탄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시범경기 최종 성적은 5경기 2.1이닝 2패 3홀드 ERA 15.43을 기록했다. 더 이상한 점은 홀드가 3개인데, 시범경기 홀드 부문 공동 1위다[17]
결국 불을 화끈하게 지른 탓인지 개막 엔트리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4월 15일 미세골절로 말소된 찰리 대신 1군에 등록 되었으며 18일 삼성전 7회초 1아웃 상황에 등판해 2타자를 상대로 범타처리를 시키면서 무실점(!!)으로 이닝을 종료시켰다.
4월 19일 삼성전 6회초 1아웃 상황에 등판해 대놓고 몸을 빼는 채태인을 상대로 범타처리를 시켰지만 다음타석 최형우 상대로는 안타를 맞아서 바로 교체되었다.
4월 24일 SK전 9회말에 등판해 범타처리로 1아웃을 시킨 후 2볼넷을 줘서 또 핵실험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했으나 최정과 박정권을 삼진으로 잡아 무실점으로 이닝을 종료시켰다.
4월 25일 두산전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강판된 찰리를 대신해 무사 주자 2,3루 상황에서 등판해 대폭발, 볼넷-2루타-내야안타-2루타를 연속해서 맞으며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 잡고 3실점 (찰리의 승계주자 2명 제외)했으며 허경민과 김현수를 플라이로 잡은 후 2루타와 볼넷 허용하며 타자일순시켜주었다. 기록은 0.2이닝 4피안타 2볼넷 4실점 4자책 평균자책점 54.00
5월 1일 LG전 8회초 1아웃 상황에서 정의윤한테 2루타를 맞은 이민호 다음으로 등판해 이병규를 범타 처리 시켰으나 이진영한테 안타를 맞아 1실점하자 바로 강판 당했다.
8월 9일 SK 와이번스전에 6회초 등판하여 또다시 핵실험을 강행하나 싶었으나 1과 2/3이닝동안 6타자를 상대하며 1피안타 1폭투 4삼진 0자책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무슨 각성이라도 한건지 8월 7, 9, 11, 15일 4번의 등판에서 4.2이닝 평균자책점 0.00의 깔끔한 피칭을 선보이고 있다, 더 놀라운건 이 경기중 삼진은 5개를 뺏어냈지만 사사구는 한개도 없었다!!!
급기야 손정욱과 더불어 왼손 필승조(!) 역할을 하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10월 9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1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한 후, 팀이 다음 이닝에 역전하며 본인이 승리 투수가 되었다. 2012년 5월 10일 이후 882일 만의 승리. 시즌 방어율도 3.31로 그 명성에 비하면 아주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10월 14일 삼성과의 경기에선 9회초 2대 1의 1점차 리드 상황에서 등판하여 0.2이닝 무실점으로 2012년 이후 오랜만의 홀드를 챙겨갔다. 사실 세이브도 가능할 것 같았지만 경기종료를 한 타자 남겨두고 김진성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김진성은 마지막 타자 최형우를 삼진으로 아웃시키고 세이브를 올렸다.
3.2.2. 2015 시즌
시즌 초 손정욱이 부상으로 경기를 뛸 수 없는 상황인지라 좌완 필승조가 사실상 이혜천 한 명이라는 희한한 상황이 되었다.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어 작년 후반기의 기세를 이어가며 좌완 원 포인트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하며 홀드도 2개 챙겨갔다.4월 18일 한화전에서 6회 투아웃에 이용규를 땅볼로 잡았지만 7회엔 강경학의 몸을 맞추고 김경언에게 안타를 맞으며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고 이민호와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민호가 승계주자들을 홈으로 불러들이며 8경기만에 시즌 첫 실점이 발생했다. 결국 4월 23일을 끝으로 고양으로 올라갔다.
다시 7월 31일에 1군으로 돌아왔지만 정작 8월성적은 좋지 못했다.
그 뒤로 방어율은 계속 올라 6점대까지 올랐으나, 다시 방어율이 내려갔으며 결국 방어율 5.19로 시즌을 마감했다.
결국 이번시즌도 혜르노빌이었다는 소리이다.
4. 호주리그 시절
2015시즌을 끝으로 진갑용과 박명환이 은퇴하면서 최후의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혜천 역시 한국에서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호주프로리그(ABL) 소속 애들레이드 바이트의 선수로 뛰게 되었다. 선수등록 정보 2015년 11월 25일 등록되어 경기를 치르게 된다고. 이로서 OB 유니폼을 입어봤던 선수들은 모두 KBO 리그를 떠났다.
4.1. 2015 ~ 2016 시즌
현재 성적은 15경기 2승 0패 21이닝 방어율 3.00으로 호주에서도 8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탈탈 털리는 임작가와는 정 반대로 나름 팀의 구원투수로서 제 몫을 하고있다.2016년 11월 6일 애들레이드 바이트와 재계약했다는 기사가 떴다. #
4.2. 2016 ~ 2017 시즌
2017년 1월 23일 현재 작가본능이 돌아왔는지 11경기에 등판해 승리없이 2패 13.1이닝 평균자책점 7.43의 처참한 성적을 내고 있다. 피안타율 .333, WHIP 2.10의 경이로운 성적으로 이대로라면 시즌 후 재계약이 가능할지 의문인 상황이었고, 방출되었다.4.3. 2017 ~ 2018시즌
멜버른 에이시스에서 잠시 뛰었다. 이후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1] 본래 79년생이지만 조기입학을 해서 78년생과 같이 학교를 들어갔으나 부상으로 1년을 유급하면서 결국 제 때 학교를 졸업했다.[2] 01년 우승은 진필중 - 차명주 - 이혜천 세 투수를 갈아마셔서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중에서 혼자 살아남아 롱런한 쪽은 이혜천 혼자인데, 나머지 둘과 달리 어린 편이었기 때문.[3] 이때 SK와의 빈볼 시비가 오갔기 때문에 보복차원에서 이혜천이 총대메고 등판했다.[4] 이외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한신 타이거즈, 오릭스 버팔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도 노렸었지만 이 네팀은 조건안맞아서 탈락했다.[5] 이 역시 이전에 주장 미야모토 신야를 포함한 야쿠르트 타자들이 주니치 투수에게 사구를 맞자 보복차원에서 던졌다고 한다. 맞으면 맞는거고 빗나가면 말고 식으로 던졌는데 타석에 붙어있어 정통으로 맞았다.[6] 실제로 영상에서 슬로우 비디오 장면을 보면 모리노가 모자를 벗으며 "보시"라는 말을 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보시는 모자의 일본말이다.[7] 정작 일본 선수들은 흑인이나 백인 등의 선수와 시비 붙으면 도망부터 치고 본다. 왜냐하면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질 시 대부분 발리기 때문이다. 발비노 갈베스는 이런 의미로 상당히 유명했고 타이론 우즈도 일본에 가서 이런 성향을 이용해 고의로 망나니처럼 행동했다.[8] 2011년 임창용 선수 공식 프로필에 팀 동료인 포수 후쿠가와 마사카즈(현 야쿠르트 2군 배터리코치.)가 '신사! 혜천과는 완전 정반대!!' 라고 적은 걸 보면 팀 동료들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반면 당시 지역신문사의 말로는 빠칭코의 의미가 도박이 아닌, 제구력이 들쑥날쑥한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10] 어차피 구단 규정상 경기일에 빠칭코 하다 걸리면 벌금내야 한다고 했다.[11] 송지만은 이 부상으로 8월에나 다시 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폼이 돌아오지 않아서 2군행. 결국 2012년은 고작 14경기만 출전하면서 완전히 시즌을 날렸고 시즌 종료후 무려 1억4500만원 연봉 삭감 크리...[12] 정확하게는 중견수 김강민이 타구를 잡았다가 놓친 후 공을 더듬는 바람에 행운의 안타가 되었다. 주자가 2명이나 있었음에도 3루까지 안착하여 3루타로 기록이 되었다.[13] 다행히 정수성이 피했다.[14] 4년뒤에 LG 트윈스의 임정우는 넥센 히어로즈의 김택형에게 볼넷을 헌납하고 만다.[15] 5회초에 임태훈 바로 뒤에 등판하여 3타자 연속 안타를 맞아 승계주자를 모두 불러들였다. 본인 승계주자도 후속 투수 윤명준이 다 불러들인 게 함정이지만... 기록은 0이닝 3피안타 3실점(3자책).[16] 해당 기사 상단부에 실제 해품달을 패러디한 핵품달 짤방이 있었으나 이후 삭제되었다.[17] 여담으로 홀드 1위의 또다른 주인공은 KIA의 박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