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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1:37:30

전환국


1. 개요2. 역사
2.1. 설치2.2. 소속2.3. 활동2.4. 전환국 폐지와 그 이후

1. 개요

대한제국이 설립되기 전(前)인 1883년에 조선에서 화폐를 생산 및 관리를 하기 위하여 만든 기관이다. 현재 대한민국한국조폐공사와 비슷한 역할을 한 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역사

2.1. 설치

1883년 처음 기관이 설립될 당시에는 한성부에 설치되었으나, 1892년에는 제물포로 이전되었고, 그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의도로 1900년에 용산으로 옮겨졌다.

수도에 위치해야할 중요 기관인 조폐기관이 수도인 한성부에서 제물포로 옮겨진 이유는 서울과 인천 사이의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조폐에 필요한 자원[1]을 해외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주요 수입창구 중 한성부와 가까웠던 제물포로 옮긴 것이었다.[2]

다만 개항지였던 제물포청일전쟁 등 불안정한 상태를 계속 맞이하자 화폐사업을 해당지역에서 하기에는 문제사항이 인식되었고 또한 1899년에는 경인선이 완공되어서 원자재를 안전하게 한성부와 그 근교로 옮기기 수월해지면서 용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2.2. 소속

어쨌거나 전환국은 조선정부에 의하여 탄생시절부터 일본제국 통감부에 의하여 폐지될까지 개화기 조선의 다른 정부기관들처럼 다사다난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883년에 한성부에서 전환국이 처음 발족하였을 당시에는 관제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기관이었지만 화폐주권 보호와 세수 확보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조선의 민씨 정권에 의하여 계속 확장되다가 1892년, 제물포로 이전된 이후부터는 세수를 통제하려는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서 독립기관 자리를 빼앗기고 탁지부 10개국 중 1개국으로 이속되었고 그 직제와 인원도 대폭 감소되었다.

1896년에는 탁지부 소속 2등국으로 하여서 직제가 확장되고 인원이 증가하였으며 각 직급의 업무 분담을 명확히 규정하는 등 발전적으로 개혁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 개화파들을 숙청하면서 왕권이 개화파의 신권을 누루면서 가능해진 조치다. 당시 개화파는 외국에 기대서 조선을 상업이 진흥된 농업국가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던 반면에 고종국수주의자들은 주권이 위협받고 농업주권이 일본제국에게 위협받는 상황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공업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행보를 보였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성립하고 나서는 군주의 품으로 돌아와 상공업진흥을 위한 기관이라는 원래의 성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다시 탁지부 소속에서 독립기관으로 되었으며 총책임자도 국장에서 관리(管理)로 바뀌었다. 이러한 조치는 잠시 퇴보하여 1901년에 탁지부 소속으로 환속되었지만 1902년에 다시 독립기관이 되었다.

2.3. 활동

전환국을 설치하기 전에 조선왕국의 민씨 정부는 독일로부터 근대적인 조폐기기시설을 구매했다. 이후 전환국을 설치하자 독일인과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근대적인 화폐를 주조하고 발행해보려고 했으나 시험적인 단계에서 중단했다.

한성부 전환국에서 근대적인 화폐를 주조하려고 한 것은 역사적으로 기념할만한 뜻 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15종에 달하는 화폐를 무분별하게 주조하고 발행하려고 햇던 사실은 조선왕조의 경제정책 역량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한성부 전환국 시기에는 비싼 돈을 들여서 근대적인 조폐시설을 갖춰놓고서 한 일이 상평통보를 신기술로 찍어내는 일이었다. 노동력이 줄어들어서 상평통보의 주조가격이 약간 싸졌다는 것 빼고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일이었다.

제물포로 전환국의 위치를 옮긴 이후부터는 유의미한 시도를 했는데, 1892년부터는 신식화폐조례라는 법을 제정해서 근대적 화폐를 생산할 근거를 만들었고, 제물포 전환국에서 5냥 - 1냥 은화, 2전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및 1푼 황동화 등 5종의 근대적 화폐를 시범적으로 주조하여 대체를 고려했다. 하지만 정식 발행 및 유통을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화폐 또한 유의미하게 개혁을 하려고 했고 신식화폐발행장정을 공포하고 시행했다. 신식화폐조례를 시행할 시에 시범적으로 만들어놨던 근대 화폐를 기반으로 발행 및 유통했고 이후 계속 근대적 화폐를 정착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1900년 용산 전환국 시기에는 종래의 화폐주조사업을 확장했다. 금본위제를 제정하기 위해서 태환권를 발행하려고 시도했으며, 금본위제 확립하기 위해 을 정제하고 보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이러한 노력은 1901년,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화폐조례를 공포함으로서 실현되는 듯했다.

2.4. 전환국 폐지와 그 이후

대한제국은 농업주권을 뺏기는 와중에도 상공업 진흥책을 계속 펼쳐서 일본제국에 저항할 세수를 확보했다. 광무개혁의 개혁자금은 탁지부가 아닌 황실 내탕고에서 나왔고 이 내탕고 자금은 궁방전, 상공업 수입 중 일부 그리고 전환국에서 발행하는 화폐에서 충당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무너뜨리려면 이 전환국을 어떻게든 통제하거나 없애야만 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 후부터 조선일본 제국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당연한 관문으로 여겼고 이를 위하여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의 화폐발행권에 손을 대려고 했다. 이를 위한 작업으로 대한제국 백동화를 밀수와 위조라는 명분으로 단속해 가치를 절하하려고 했고, 미국대영제국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상황에서 1904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국제사회의 방관 속에서 제정개혁이라는 허황된 구실로 제정고문 파견하여 전환국을 손아귀에 넣어버렸다.

전환국을 손안에 넣은 일본제국은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기로 했으며, 일본이 파견한 경제 침략의 주구인 메가타 다네타로는 먼저 전환국을 폐지하고 화폐발행권을 일본의 은행으로 넘겨버린 다음에 조선 화폐를 사실상 쓰레기로 만드는 행위를 해버렸다.

이로써 전환국과 함께 걸음마 단계였던 조선의 민족자본을 소멸했고 대한제국의 경제는 붕괴하였으며 광무개혁도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후 조선경제에 대한 권리는 일본제국이 설립한 통감부로 이전되었고 통감부는 조선인에게서 일본인에게 이권을 뺏어다주는 역할을 다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고, 대한민국조폐공사를 다시 세울 때까지 화폐 주권은 우리민족사에서 사라진다.

[1] 조폐에 필요한 기계 뿐만이 아니라 원자재 전량[2] 학설 중에는 일본 제국이 조선의 화폐 주조권을 강탈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는 제물포로 옮기도록 친일세력에 압력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전환국을 설치한 세력은 민씨 세력이었고 그들이 전환국을 세운 것은 상평통보를 대체할 수 있으면서 보다 체계적인 화폐를 도입하여 화폐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기 위함이었음으로 일본 제국의 공작이었다는 말은 음모론에 가깝다. 그 증거로 전환국이 세워져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상평통보를 신기술로 찍어내는 것(...)이었고 이는 대한제국설립 전까지 계속된다. 다만 제물포로 옮긴 이유가 음모론이란 것이지 일본제국이 조선의 화폐 주조권을 강탈하려고 했다는 시도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