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3:15:35

정막

<colbgcolor=#000><colcolor=#fff> 정막
鄭漠 | Jeong Mak
파일:정막.jpg
본명 정순영 (鄭淳永, Jeong Soon Young)
출생 1928년 1월 25일
전라남도 광주군
(現 광주광역시)
사망 2012년 1월 21일 (향년 83세)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2가 50 경북대학교병원
본관 서산 정씨 (瑞山 鄭氏)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화순공립보통학교 (졸업)[1]
광주서중학교 (졸업)[2]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고등부 (졸업)[3]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 / 학사)[4]
부산대학교 대학원 (재료공학 / 석사)[5]
부산대학교 대학원 (재료공학 / 박사)[6]
데뷔 1950년 '평화의 섭리' (무용)
1999년 월간지 '춤' (평론)
부모 아버지 정태암[7], 어머니 문화[8]
배우자 김기전[9]
자녀 장남 정기홍[10][11], 차남 정기준[12], 삼남 정기호[13]
약력 현대군무단 단원
한국춤평론가회 정회원
원화여자고등학교 교사
대구공업고등학교 교사
도쿄대학 객원연구교수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섬유학과 교수
경성대학교 공과대학 제조학과 교수[14][15]
정막무용연구소 소장[16]
대구발레아카데미 운영
대구시민문화연구소 소장[17]
스페이스 콩코드 소극장 운영
조선교육무용연구소 (제3기)[18]
수훈 국민훈장 목련장
종교 개신교
링크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공학도 출신으로 춤에 입문2.2. 늦깎이 평론가
3. 사망4. 저서5. 수상6. 상훈7.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평론 정막.jpg
나는 이 책에서 오늘의 춤뿐 아니라 지난 날의 춤에 대해서 남기고 싶거나 남겨야 할 일들을 평론집이란 이름으로 적지 않게 실었다고 생각한다.
<춤 평론집> 춤추는 바보 춤 못 추는 바보에서
대한민국공학자, 1세대 무용평론가이다.

2. 생애

파일:515163.jpg

청년 시절에는 '정막'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직접 무용을 했다. 이후 무용평론가로 활동할 때는 주로 본명인 '정순영'이라는 이름으로 무용 평론을 써왔다.

전라남도 광주군 출신인 정막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과에 재학 중이던 1947년 함귀봉이 만든 조선교육무용연구소[19]를 통해 춤의 세계를 접한다.[20]

2.1. 공학도 출신으로 춤에 입문

6·25전쟁 당시 정막은 조선교육무용연구소 출신인 조동화[21]가 조직한 현대군무단(軍藝隊)의 무용단에 들어가면서 무용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정순영의 첫 작품은 1950년 11월 시공관에서 선보인 '평화의 섭리'로 기록된다. 그는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부산극장에서 1953년 열린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 '인어의 정설' 무대에 출연했고, 같은 해 8·15 경축 무용전 '도학자가 본 서커스' 무대에 서면서 안무도 맡았다. 이듬해 정막은 당시 중앙국립극장에서 첫 개인발표회를 열었다.

전쟁 후 정막은 대구에 정착해 대구공업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이어갔다. 1956년에는 김기전 무용가와 결혼했다. 이때쯤 정막은 부산대학교에 강의를 나갔고, 김기전 무용가도 부산화교중학교에서 무용을 가르쳤다. 정막 부부는 1957년쯤 당시 이응창 원화여자고등학교 교장의 배려로 원화여고에서 정막무용연구소를 운영하고 학생들에게 무용을 가르쳤다. 이후 1961년 정막은 김기전 무용가와 '대구발레아카데미'를 만들어 현대무용과 발레를 가르치고, 지역의 무용 인재를 육성한다.

2.2. 늦깎이 평론가

부산대학교를 거쳐 경성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정막은 정년퇴직 후인 1999년 월간지 '춤'을 통해 정식 무용 평론가로 등단한다. 뒤늦게 시작한 무용평론이었지만, 정막에게 공연을 보고 이에 대한 평을 글로 쓰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보다 전인 1950년 중반부터 지역 언론에 무용 공연 평과 칼럼을 기고해왔다.

정막은 전국 각지의 무용 무대를 찾아 공연을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정막의 평론 방식은 무용 공연을 실제적·구체적으로 묘사한 방식이어서 '과학 비평'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특히 그는 공연장에 가기 전 팸플릿과 무용가의 활동 이력 등을 충분히 숙지한 다음 망원경을 들고 공연을 관람했다. 리허설부터 공연 뒤풀이까지 참석해 다양한 정황을 파악하고, 이를 세밀하게 평론에 서술했다. '관무기(觀舞記)'라는 제목으로 매월 월간지에 평론을 꾸준히 쓰기도 했다.

성기숙 무용평론가는 대문 2015년 겨울호에 정막에 대해 "공학도이면서 무용에 투신해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활동을 펼쳤고, 춤의 실기와 이론을 넘나들며 그 자신이 몸으로 체득한 무용 실기를 바탕으로 평론을 했기에 그 누구보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작품을 재단하고 평가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관련 문서

3. 사망

뉴스
연합뉴스
아리랑
영남일보
국민일보
매일신문
동아일보
한겨레

향년 83세로 2012년 1월 21일 오후 4시 30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빈소는 경북대학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4. 저서

그는 평론가로 활동하며 쓴 글을 모아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춤추는 바보 춤 못추는 바보" "정순영 춤 평론집 제2집 : 춤의 현장 관무기" "정순영 춤 평론집 제3집 : 댄스 리뷰 관무기" "정순영 춤 평론집 제4집 춤과 댄스리뷰" "정순영 춤 평론집 제5집 댄스 리뷰 & 관무기"가 대표적이다. 유작으로 남은 "대구 춤 60년사"는 그의 대구 지역 춤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800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대구 무용이 본격적으로 태동했던 시기의 무용 공연부터 시작해 지역 무용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5. 수상

6. 상훈

7. 여담


[1] 1936.3-1942.3[2] 1942.3-1946.6[3] 1946.9-1948.6[4] 1948.9-1954.3[5] 섬유과 교수로 재직했던 학교이다.[6] 1975.2[7] 1883년에 사망하였다.[8] 1878년에 사망하였다.[9] 대구시립무용단 초대안무자이다.[10] 1957년 출생, 조지아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조지아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국제리서치연구소장을 역임하였으며, 만4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11] 파일:정막부부 삼형제.jpg
맨 왼쪽부터 삼남 정기호, 장남 정기홍, 차남 정기준이다.
삼형제 모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를 다녔다.
[12] 1959년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13] 1965년 출생, 부산고 졸업 후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2기로 졸업하였다. 동문으로 조재현, 이병준가 있다. 과거 기자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14] 1979.3-1993.3 정년퇴임하였다. 경성대학교를 들어갈 당시 학교에 의류학과를 만들었다고 하며 퇴직하기 전 총장 선거를 나갔다고 한다.[15] 이공대학 학장, 교무처장, 기획실장을 역임하였다.[16] 원화여자고등학교에서 운영했다고 한다.[17] 현 사단법인 다다[18] 동문으로는 김문숙, 김삼화가 있으며 무용과가 없던 시절 무용교육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19] 조선교육무용연구소 제3기 출신이다.[20] 함귀봉은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와세다대학에서 현대무용과 교육무용을 전공했고, 조선교육무용연구소는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무용 교육 기관이었다. 오늘날 대학 무용과와 다름없었다.[21] 관련 문서[22] 생전에 집필했던 마지막 유작이다.[23] 파일:김상규와 정막.jpg
왼쪽이 김상규, 오른쪽이 정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