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정원일 |
자 / 호 | 건중(建仲) / 춘산(春山) |
본관 | 연일 정씨[2] |
출생 | 1891년 2월 7일 |
경상도 영천군 환귀면 연하동 (現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연하마을 316번지) | |
사망 | 1943년[3] 12월 27일 (향년 52세) |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용정형무소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부부위패 6판-193호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선산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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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91년 2월 7일 경상도 영천군 환귀면 연하동(現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연하마을 316번지)에서 아버지 율파(栗坡) 정용우(鄭鏞禹, 1852. 9. 18 ~ 1914. 2. 10)[4]와 어머니 안동 권씨(1847. 6. 7 ~ 1936. 10. 6)[5]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영천군 임고면 고천동(現 영천시 임고면 고천리)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다.1919년 파리 강화 회의 개최를 앞두고 기미독립선언서 서명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해 유림들끼리 유림들만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로 해 이른바 "파리장서"를 작성하자, 이때 김창숙·곽종석(郭鍾錫) 등 136명의 유림과 함께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가족들을 이끌고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북로군정서에 입대해 활동했다.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안창호 등과 제휴하다가, 임시정부의 비밀 지방행정조직인 연통제의 함경도 독판부 기밀 경감에 위임되었고, 함경남도 함흥부(現 함흥시)를 거점으로 윤태선(尹台善)·이상호(李相鎬)·전재일(全在一) 등 수십 명의 조직원과 함께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임시정부의 명령을 도내에 전달하는 등 연락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동지를 포섭해 연통제 조직이 완비될 수 있도록 국내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힘썼다. 그러나 같은 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청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어 총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만기출옥 후에는 다시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1925년 길림성 길장도(吉長道) 화전현(樺甸縣)[6]에서 이탁(李鐸)·지청천·김이대(金履大) 등이 결성한 정의부(正義府)에 입대해 무장항일투쟁에 종사했다. 특히 1926년 4월부터는 정의부 검무감(檢務監)으로 있던 고인섭(高仁燮)과 함께 봉천성 봉천시, 길림성 목단강 지역[7],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영안현 해림보(海林堡)[8],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9], 봉천성 요심도(遼沈道) 개원현(開原縣)[10]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제국 경찰에 매수된 밀정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아보았다.[11]
그러나 1927년 2월 12일 개원성(開原城) 내 동문(東門) 밖 서학생(徐學生)의 집에서 중화민국 관헌에 체포되었고, 이튿날인 2월 13일 일본 제국 경찰에 인계되어 평안북도 신의주부(現 신의주시)로 압송되었다. 결국 1927년 11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에 공소했으나 같은 해 12월 5일 공소가 기각되어 징역 2년형의 원심 판결이 유지되었다.
출옥 후에는 귀국해 강원도 횡성군에서 은거하다가 1943년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이때 모집한 군자금을 중경시에 피난해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달하기 위해 함경도에서 중화민국으로 건너가던 도중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용정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3년 12월 27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 순국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10월에는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에서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유해는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선산에 안장되었으며[12], 2016년 12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정재호와 그의 부인 서월분[13]을 기리는 부부위패가 봉안되었다.
3. 여담
- 2004년 9월 11일, 영남일보에서 정재호 지사의 차남 정훈식(鄭勳植, 1939. 3. 27 ~ )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14] 정훈식은 어릴 적부터 짚신을 팔아 생계를 연명했고, 이후에는 영천군 고경면(現 영천시 고경면) 도암리, 경산군 하양면(現 경산시 하양읍) 등 다른 사람의 집을 전전하며 품을 팔고 머슴살이를 해 그 대가로 쌀을 받으며 생활하는 힘든 청년기를 보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해 한동안 무학으로 지내다 입대 후 군 복무 중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글자를 깨치기도 했다고 한다.
전역 후에는 여러 일을 전전하다 영천시청에서 16년간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하다 1999년 퇴직했는데, 1994년 근무 도중 청소차에서 떨어지는 낙상 사고를 당해 다리를 크게 다쳤다. 이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2004년 당시에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또한 부인 해주 오씨(1948. 3. 24 ~ ?)[15]와 일찍 사별하고 끊임없는 생활고로 가정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외아들마저 사회생활에 제대로 적응치 못해 교도소를 전전하는 것이 늘 가슴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1977년 늦게나마 선친이 독립유공자에 서훈되고, 2001년 고향 근처인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964번지에 선친의 독립유공을 기리는 '정재호 애국지사 추모비'가 건립되어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1] 디지털영천문화대전에는 鄭[2] 사정공파(司正公派)-우헌공계(愚軒公系) 28대 호(浩) 항렬.[3] 영일정씨세보 권11 511쪽에는 1944년,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1945년에 별세한 것으로 각각 다르게 등재돼 있다.[4] 자는 성언(聲彦).[5] 권석구(權錫九)의 딸이다.[6]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화뎬시(樺甸市).[7] 목단강이 시(市)로 승격된 것은 만주국 시기인 1937년 12월 1일의 일이다.[8] 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海林市).[9]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칭산촌(靑山村).[10] 現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톄링시 카이위안시(開原市).[11] 당시 주소지는 중화민국 봉천성 개원현 소구사(小九社),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톄링시 카이위안시(開原市) 샤오주서촌(小九社村)이다.수형인명부[12] 용정형무소에서 옥사한 이후 후손들이 시신을 미처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13] 영일정씨세보 권11에는 정재호 지사의 부인으로 이도빈(李道彬)의 딸 청안 이씨(1890. 2. 13 ~ 1919. 7. 6) 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청안 이씨는 1919년 7월 6일 만주에서 별세했다고 한다. 차남 정훈식이 1939년생인 것으로 보아 서월분은 둘째 부인으로 추정된다.[14] 2004년 9월 11일 영남일보 [향토 독립유공자 그 후손들의 삶 .9] 정재호 선생 아들 훈식씨[15] 오석연(吳錫淵)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