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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鄭昌和 | |
출생 | 1928년 11월 1일 ([age(1928-11-01)]세) |
충청북도 진천군 | |
신체 | 168cm[1] |
데뷔 | 1953년 영화 '최후의 유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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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8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한국 액션영화의 대부. 얼마나 잘만들었냐하면 1960년대에 홍콩 영화계로 스카우트되었다. 참고로 다작이기때문에 극히 일부만 다루겠다. 그 시절에는 영화를 찍어내던 시절이어서, 신성일도 1년에 100편 출연이라는 미친 필모그래피(신성일도 껄끄러워한다)를 가졌고, 임권택이 100편 제작 전설을 가진것도 대부분 이 시절에 찍은거다. 임권택 감독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시절 영화찍어 번돈으로 술만 마셨다고 한다(진짜다)
홍콩에서 수많은 액션영화를 만들면서 홍콩 액션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선구자적인 감독이기도 하다. 이로인해 수많은 명감독들을 배출 하였는데, 이 중 오우삼감독도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 수업을 쌓기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격월간지,영화천국의 인터뷰에 의하면 영화감독이 되기위해 최인규[2] 감독 문하에 들어간다. 당시에는 오로지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고, 많이 어려운 시절에 자작영화는 만들기 불가능하고 필름 현상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노력해서 결국 홍콩영화계에 진출했으니 독보적인 존재다. 인터뷰 일부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홍콩영화사 연구에서는 1968년 이전의 정창화가, 그리고 한국영화사에서는 1967년 이후의 정창화가 사라져 있다. 홍콩 영화비평계의 원로인 로우 카(羅卡)는 정창화 감독이 홍콩 영화사 서술에서 빠져 있는 이유를 “그 어느 연구자도 정창화 감독의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콩영상자료원의 웡 아이링(黄爱玲)은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오히려 더 ‘홍콩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절실함이 강해지면서 홍콩의 상징적 장르인 무협영화에 참여한 한국과 일본 감독들의 존재가 불편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3) 이는 비단 정창화 감독만의 문제는 아니다. 즉, 초국가적인 영화활동을 했던 영화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시련이기도 했다. 일국사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어 왔던 내셔널 시네마 연구의 전통에서 본다면 정창화 감독같이 한 국가 영화사의 흐름에서 파악하기 힘든 감독들은 손쉽게 무시되거나 연구를 수행할 마땅한 방법론이 부재한다는 이유로, 혹은 두 개 이상의 내셔널 시네마를 비교하며 연구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의 무게감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최근 들어 아시아 각국의 영화인들이 트랜스내셔널 영화사의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2. 작품들
- 최후의 유혹 1953년작
밀수꾼들을 쳐부순다는 국책영화. - 유혹의 작품 1954년작.
- 제2의 출발 1955년작.
- 장화홍련전 1956년작.
- 풍운의 궁전 1957년작.
- 망향 1958년작.
- 비련의 섬 1958년작.
- 사랑이 가기 전에 1959년작.
-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 1959년작.
- 햇빛 쏟아지는 벌판 1960년작.
- 슬픔은 강물 처럼 1960년작.
- 노다지 1961년작.
김승호, 허장강, 황해, 장동휘, 엄앵란 주연의 액션극. - 장희빈 1961년작.
- 지평선 1961년작.
- 대장화홍련전 1962년작.
- 대지여 말해다오 1962년작.
- 칠공주 1962년작.
- 대지의 지배자 1963년작.
- 대평원 1963년작.
- 청준 산맥 1963년작.
- 밤안개 1964년작.
- 부부 전쟁 1964년작.
- 수색대 1964년작.
- 유부녀 1965년작.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년작.
일제강점기 학도병들을 주연으로 한 남방 액션물. (남방은 인도차이나 반도. 그러니까 월남 언저리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를 말한다.) - 살인 명령 1965년작.
- 죽도록 보고 싶어 1965년작.
- 예라이 샹 1966년작.
- 광야의 결사대 1966년작.
- 내 청춘 황혼에 지다 1966년작.
- 순간은 영원히 1966년작.
- 위험한 청춘 1966년작.
- 돌무지 1967년작.
- 비련 1967년작.
- 위험은 가득히 1967년작.
- 조용한 이별 1967년작.
- 황혼의 검객 1967년작.
-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1968년작.
- 모정의 비밀 1968년작.
- 허무한 마음 1969년작.
- 천면 마녀 1969년작.
- 아랑곡의 혈투 1970년작.
- 죽음의 다섯 손가락 1972년작.
원제는 철권 또는 천하제일권. 무술배우 나열의 주연 데뷔작이기도 하다. 닉슨 방중을 계기로 중국 붐이 이는 가운데에 미국 개봉이 이루어져 대힛트를 기록하고, 용쟁호투가 제작되는 데에 공헌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킬빌에서 이 영화를 오마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확히는 영화에 삽입된 사이렌 소리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사실 이 음악은 퀸시 존스가 작곡한 드라마 OST의 일부이다. 스펀지에서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한적 있는 한국영화'로 소개되기도 했다. - 흑야괴객 1973년작.
정창화 감독이자 골든하베스트로 이동해서 만든 첫 작품. 대한민국, 홍콩 영화.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배우들 커쥔슝, 묘가수, 황인식, 홍금보 등. - 황비 1974년작.
- 황비홍 소림권 1974년작.
- 흑연 비수 1974년작.
- 흑무사 1974년작.
- 얼굴 신탐 1975년작.
- 심판자 1976년작.
- 파계 1977년작.
- 학을 그리는 여인 1979년작.
- 불행한 여자의 행복 1979년작.
- 어느 여대생의 고백 1980년작.
- 소림용문방 1980년작.
- 요 1981년작.
- 노명검 1981년작.
- 괴초도사 1981년작.
- 색깔있는 여자 1981년작.
-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1981년작.
- 가슴 깊게 화끈하게 1981년작.
- 인터폴 1982년작.
- 여자와 비 1982년작.
- 소림신방 1982년작.
-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1982년작.
- 흑장미 1983년작.
- 친구 애인 1983년작.
- 뇌권 1983년작.
- 인생 극장 1983년작.
- 웬일이니 1983년작.
- 비호문 1983년작.
- 불새의 늪 1984년작.
- 홍병매 1984년작.
- 지금 이대로가 좋아 1984년작.
- 그때 죽어도 좋았다 1985년작.
- 내 사랑 짱구 1985년작.
- 피조개 뭍에 오르다 1985년작.
- 달빛 타기 1986년작.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2 1986년작.
- 중광의 허튼 소리 1986년작.
- 불춤 1986년작.
- 투명 인간 1986년작.
- 불행한 아이의 행복 1992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