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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차림의 정통성 논쟁
상차림 |
현대의 제사상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전통에 맞지 않다는 의견이 퍼져 있으나, 실제로 제사상은 과거 더 화려하였다.[1]차례상으로 원래 유교에서는 차례상과 제사상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차례상은 간단히 차와 술, 다과만을 올리고 제사상은 화려하게 각종 전통음식을 예절에 맞춰 올렸다.] 그렇지만 명절 등에 올리는 차례상은 간단히 차리는 게 맞다.[2]
재미있게도, 유명한 유학자를 조상으로 모신 유서깊은 가문들은 제각각 이유를 들어 독특한 방식으로 넣고 빼가며 자기들만의 상차림을 정해 전통으로 내려오지만, 그렇지 않은 집들은 상차림에 대해 딱히 정해진 바가 없으니 오히려 형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율곡 이이의 제사상에는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데, 이는 율곡 이이가 평생 동안 소고기엔 입도 안댔으며 이를 생전에 제사에 당부하였기 때문이다. 즉 생전 본인의 의사 표명이 있었다면 형식을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
따라서 보통 제사상 하면 떠올리는 상차림 대신 바나나, 피자, 치킨 등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고인이 생전에 아주 싫어했던 음식은 빼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서 "밤, 대추, 곶감, 약과 등과 같은 전통 상차림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이라면 올려도 상관 없다"는 2가지 의견이 충돌되고 있으나 무조건 형식만 지키는 것은 조선 시대 기준으로도 맞는 예법이 아니다.
전문가 견해도 "주식인 밥, 탕, 나물 등은 반드시 올려야 하지만 그 밖엔 피자나 치킨이나 바나나, 파인애플 같은 외래음식을 올려도 무방하다"는 의견이다.#. 가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패스트푸드나 서양식 과자 등으로 차린 제사상의 사진들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형편과 사정에 따라선 이 역시 제사 형식에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혹은 어떤 집들의 경우 그냥 아예 제사상 차리는 사람들이 차리기 편하고 먹고싶은거 위주로[3] 제사상을 차리고 원래 제사상에 기본으로 올라가는 음식은 한두 가지 정도[4]만 올려두고 지내는 경우도 있다. 구색맞추기용 상차림용 반찬들도 직접 마련하기보단 그냥 사서 올리는 경우까지 있다. 요새는 아예 제사상을 대신 차려주는 업체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말 다했다.
특히 핵가족으로써 그냥 안 내려가고 따로 자기들끼리만 제사 지내는 집에선 이렇게 상차림 음식 선택의 자유도가 매우 높아진다. 또 가족 구성원들이 좀 깨어있는 집안이라면 그냥 모두 나서서 간소하게 음식을 각자 마련해와서 차리거나 아예 상차림 자체를 하지 말고 넘어가자고 하기도 한다.
본래 우리가 '전통' 상차림이라 부르는 형식도 1969년 3월 1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공포된 건전가정의례준칙과 80~90년대 언론 등에서 몇몇 가문의 제사상 차림을 종합하여 상차림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널리 퍼뜨린 표준 형식일 뿐, 한국의 전통 상차림이라 보긴 힘들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가정의례준칙이 의도한 것은, 허례허식을 피하라고 국가에서 생활 수준을 고려하여 과도한 지출을 줄이고자 핑곗거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 당시에는 집안위세를 과시해야한다는 이유로 무리해서라도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는 경우가한둘이 아니다보니 제사 규모를 제한시킨것이다. 물론 이 당시에는 그러니까 더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러지 말라고, 집안 어르신들에게 "나라에서 하지 말랬어요"하고 이유를 댈 수 있게 한 거라는 이야기. 심지어 이 가정의례준칙에서는 제사의 대상은 2대조까지만 한정하며 제사의 수를 최대한 줄이고자 권장하였다.
본래 유교에선 처음부터 제사 때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엄격한 상차림을 처음부터 지정하지 않았다. 이는 대학자를 배출한 집안의 불천위 제사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홍동백서나 조율이시 등의 규칙과는 애초에 거리가 먼 제사상이다.[5] 심지어 <송자대전>에서도 송시열이 "(중국 기준으로) 바다가 동쪽이니 생선이 동쪽인가"라는 식으로 지나가듯이 언급한 게 고작이다. 다시 말해 지금과 같은 형식적으로 굳어진 상차림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문 단위로 전해지는 상차림 규칙은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부 내려오고 있다.[6] 속담의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것도, 각 가문마다 규칙이 달라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우리가 아는 제사상의 상차림 형식은 성리학의 예법이 평민에게까지 퍼지기 시작하고 신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조선 말엽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7] 다만 가문마다의 전통 진설법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칭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제사상 차림은 전혀 문헌 근거가 없으며, 전통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매년 명절 때마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어 빈축을 사고 있다.
대부분 제사 지내는 집들은 상술되었듯 유교 경전에 비춰보면 근거는 없지만 흔히 '정석'이라고 알려진 상차림을 고집하고 있고, 이를 차리기 위한 비용은 여전히 부담이 되는 규모이다. 물론 대가족이 대부분이라 수십 명의 제사상을 차려야하는 1980년대 이전에 비해 만들어야 하는 음식의 양이 조금 줄어들어 노동강도가 줄었다곤 하지만, 핵가족 기준으로 놓고 보면 여전히 음식의 양은 차고 넘친다. 1980년대만 해도 명절만 되면 모든 여자들이 분주하게 모여서 정신 없이 음식을 장만하는 노동환경에서 지금은 꽤 줄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제사상은 무시할 만한 노동은 아니다. 다만 가짓수가 많아도 양을 줄이면 그만인데 안 그러는 집이 많다. 양을 줄이는 것은 후술할 제사음식이 남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같은 비용으로 더 좋은 재료를 써서 더 맛있게 먹을 방법이기도 하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리려는 욕심만 자제하면 말이다. 다만 제사상은 조상에게 올린다는 이유로 먹지 않고 버릴지언정, 쓸 데 없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가득 올리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현실성 없는 비판이다.
2010년대 이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제사나 차례 문화에 대한 반감이나 혐오가 극을 달리면서, 언론에서도 간소한 제사상'이라거나 퇴계 이황 종가의 제사상, 본 항목에도 소개된 제사상 차례상에서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것의 실상을 소개하면서 꼭 이를 엄격히 지킬 필요는 없다는 기사를 이전보다 많이 내보내는 추세지만, 젊은 층들의 반응은 시큰둥한 수준. 애초에 하기 싫은 거지 규모를 줄여서라도 하고 싶은 게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제사를 싫어하는 층의 마음을 잡으려면 제사를 작고 쉽게 지내는 방법이 아니라 안 지내도 되는 이유를 다뤄야 한다. 다만 이런 말은 유가에서는 나올 수 없다. 교회/절에서 "교회/절에 안 나와도 되니 예수/부처 믿으세요"라고는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제는 제사 율법보다 제사 자체를 지내지 않으면서, 시행은 마음만으로 감사할 정도이다.
2022년 1월 19일,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에서 '추석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했다. "차례상에 전 안 올려도 된다. 음식도 최대 9개만" 간소화된 상차림은 가족 간 합의를 통해 결정하면 된다고 부연 설명했다. # 무엇보다 준비에 가장 힘이 드는 '전 요리'가 없다. 전 요리는 정통성 측면에서 봐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성균관이 제시한 차례상 |
2. 종교적 관점의 충돌
아래에도 나와 있지만 제사는 각 종교마다 다양한 방식의 제사법이 존재하며, 이 때문에 개인의 종교적 관점이 그 집안에서 내려져오던 전통과 충돌할 경우 제사를 거부하는 등의 충돌과 갈등이 발생할 우려가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종교적 관점의 충돌로 인한 제사 거부가 이혼 사유에 해당한다는 판결도 나왔다.#조선 후기 청나라에서 여러 서양문물이 들어왔을 때 같이 들어온 천주교의 영향 때문에 생긴 제사 거부는, 천주교에서는 유일신인 하느님만 섬겨서 제사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여겨서 제사를 금지한 적도 있다고 한다.
현재 천주교에서는 각 나라의 고유한 전통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제사 자체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효를 한다는 관습 측면에서 제사와 같은 형태로 추모 기도를 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제사의 종교적 측면이 매우 희박하고 관습에 가까운 것 또한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는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현지민의 풍습과 융합돼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고만 유럽식 기준을 강요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톨릭과 정교회가 갈리진 큰 이유를 생각하면 그 동네도 홍역을 치른 바 있고. 제사 중에 두 번 절하는 것도 허용하며 권장 제사 순서까지 만들어서 알리고 있는데, 조상이 식사하는 동안 잠시 밖으로 피한다든지 하는, 죽은 이를 산 사람처럼 대한다든지 신으로 모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은 뺐고 미신적인 요소가 들어간 제사('신'자가 적힌 신주, 축문, 합문 등)는 금지한다. 개신교에서는 간단한 추모식으로 대체하거나 그냥 안 한다.
때문에 개신교/가톨릭 집안 남자가 결혼 상대자로 약간 유리한 점이 있기까지 하다. 유교를 신봉하는 지방 출신 장손 집안의 장자 또는 외아들은 결혼 시장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는 외아들과 함께 선호도가 최하이다.
다만 일부 나이롱 신도의 경우 젊었을 때는 우리 집은 기독교이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핑계로 노동을 회피하다가 노인이 된 뒤에는 갑자기 입장을 바꿔 제사는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종교를 핑계로 조상을 섬길 의무는 방치하다가 정작 자신이 죽을 때가 다가오니 죽어서도 추모받고 싶어서 제사상을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
또한 기독교인 중에서도 '종교는 종교, 제사는 제사'라는 생각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제사도 지내는 집이 많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제사를 하지 않는다'라는 고정관념이 현재에는 많이 사라진 상태다.
3. 정통 유교와 무신론과 제사의 관계
무신론적 관점이나 과학적 회의주의의 관점에서는 사후세계, 영혼, 귀신 등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선 회의적이기에 '무신론자들은 제사를 해선 안 된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제사라는 건 정말 영혼의 존재를 믿어서 하는 게 아닌, 말 그대로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로써 그것을 기리는 행사기 때문에 꼭 영혼의 존재를 믿냐 안 믿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그래서 이들 중 제사를 비종교적 행위로 보는 이들은 보다 절충하여 '조상에게 최소한의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선에서만 하자[8]'라거나 '요즘은 유교 풍조가 약해져서 제사 자체가 현대적인 도덕적 관습과 멀어졌으므로 폐지하자'라고 주장한다.
공자의 관점에서 제사를 정립해 보면 관습적으로, 피동적으로, 의무감으로, 체면 때문에 제사를 모셔서는 안 된다. 조상을 자신과 가족의 복을 비는 신으로 섬겨서도 안 된다. 자손이 함께 모여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조상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집안 어른께 인사하고 혈연의 정을 나누는 마음으로, 같은 동기끼리 우애를 나누는 마음으로 제사에 참여해야 한다.
- 《제사의 참 의미는?》, 오마이뉴스.
- 《제사의 참 의미는?》, 오마이뉴스.
실제로 무신론과 제사의 관계에 대해서 조사해본 기사#를 보면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제사를 유교에 도입하여 발전시킨 공자야 말로 오히려 영혼이나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적인 무신론자였다고 한다. 공자가 제사를 도입한 이유는 영혼의 존재를 믿어서가 아닌 도덕국가 재건에 제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신론과 제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2000년대 이후로 국내에서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 무신론이라는 것이 서구의 자유사상 및 계몽주의 계통의 신무신론이 아닌, 거의 무종교 내지는 동아시아적인 비신론(nontheism), 세속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가장 크게는 현대의 제사 풍습이 종교색이 크지 않은, 친족단합을 도모하는 세시풍습에 가깝다는 데서 이유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과연 제사가 정말로 종교적 동기와는 "무관하다" 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 제사 절차 중에 잠시 집 밖으로 몸을 피해서 누군가의 "식사" 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과정이나,[9] 제사를 마치고 제사상의 음식을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고 부른다거나, 이러한 행동을 음덕(陰德)을 입는다고 표현하는 것 역시 '제사라는 행위가 초자연적인 섭리의 개입을 일부 전제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 내지 기복적인 동기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보여 준다. 신주나 지방에 ''신'이 거하는 '위'치'라는 의미의 '신위(神位)'라고 쓰는 행위 역시 초자연적인 조상신의 존재에 대한 전제와 완전히 무관하다 하기 어렵다. 기독교에서 '기도빨'과 같이 기복신앙적 요소가 더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종교냐, 아니냐'를 떠나서 '초자연적인 세계관이냐, 아니냐'로 따져보도록 하자. 현대의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기준으로 초자연성의 여부를 따지면, 유교의 제사는 당연히 초자연적인 것을 긍정하는 것이고, 그런 초자연적인 대상을 상대로 의례를 벌이는 제사는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를 지내는 근거는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이 일정 기간 동안 세상에 남아 있다" 라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논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물론 고전 유가에서도 순자의 경우에는 제사를 지내는 이유를 "가족이 화목하기 위함이지, 실제로 죽은 사람 영혼이 찾아오는지는 알 바 아니다"[10]라고 한 적 있지만. 순자는 후대 유가로 이어지는 학맥에서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 이단에 가깝다.
4. 유전학과 족보의 관점
"삼정의 문란과 공명첩 남발로 인해 상놈들도 돈 긁어모아서 족보를 사들이는 바람에 개나소나 양반 후손 노릇 하고 있다"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양반-상민-노비의 삼층 피라미드 구조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래시계 구조로 바뀌었다는 지표도 있기에 아주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족보를 철저히 지킬 여력이 있는 권반(權班)과 그렇지 못한 잔반(殘班), 혹은 지킬 족보도 없거나 하루살이에 여념이 없는 상민 이하가 있음을 염두에 두었을 때, 어느 쪽의 계보가 더 잘 퍼졌을지의 문제도 있어서 마냥 삼정과 공명첩 탓만 하기도 어렵다.외려 족보보다 더 확실한 논쟁거리는 따로 있다. 바로 유전학적 관점의 혈연이다. 2020년에 환갑을 찍은 1960년대생이 제주라고 가정할 때, 그의 4대조[11]라고 하면
5. 제주(祭主), 상차림 여성차별 문제
조선 전기나 중기까지만 아직 불교식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를 꼭 장남이나 아들만 지내라는 법은 없었다[12]. 심지어 매년 장남이 제주를 맡는 것도 아니었다. 직계 비손이 없을 경우는 부인이나 딸들이 제주를 맡았는데, 돌아가면서 제주를 맡는 경우를 윤회봉사(輪回奉祀), 딸의 자손이 지내는 경우는 외손봉사(外孫奉祀), 죽은 장자의 부인이 지내는 경우는 총부봉사(冢婦奉祀)라고 칭했다. 심지어 외조카가 제주를 맡거나, 사위가 처가의 제사를 모시는 경우도 흔했다. 17세기 이후 종법 질서가 정형화되며 정착되면서 적장자가 상속과 제주의 권한을 승계받는 형식이 보편화되면서 지금의 관념이 자리잡게 되었다.그러나 현대에는 제사를 모시는 제주(祭主)는 무조건 그 집안의 장남이 맡게끔 강제되는데[13], 이는 개항 이후 조선 말엽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집안의 장남에게 많은 권한과 책임을 물려주다 보니 마치 그게 당연한 것처럼 굳어진 것이다. 재수 없게 보통의 한국인 가정에서 첫 번째로 태어난 남성이라는 선천적인 요인만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인데, 이는 곧 선천적인 요소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에 맞지 않는, 반헌법적인 차별이라는 말이 된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당한 대우를 타고나는 특수계층을 만드는 반헌법적인 요소로, 인권유린으로 볼 소지가 다분하다. 제사옹호론 측 주장대로 제사가 정말 장점이 많은 문화라면 여성들 역시 제주를 맡을 수 있도록 하거나, 둘째 등도 제주를 맡을 수 있도록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부장제에 대해 거부감이 가장 강한 집단 중 하나인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는 거의 없다. 설령 자신이 제사를 모시고 싶은 진보적인 여성이 있더라도 집안의 윗세대 어른들과 친척들이 가부장제와 남존여비에 찌들어 있는 소위 '옛날 사람'들이라면 소용이 없고, 아무리 원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버지 제사인데 남자라는 이유로 조카가 제사를 주관하고, 정작 친딸들은 본인들이 직접 제사를 지내길 원했음에도 '어디서 여자가!'라는 이유로 집안 어른들에게 된통 혼난 후 사촌동생 뒤에서 멀뚱멀뚱 구경만 했다는 식이다. 성차별이 있음이 분명한데 지적받지 않는 대표적 영역의 하나다.[14]
며느리들의 제사상 차리기에 대한 문제제기는 진영을 막론하고 나온다. 남편 조상신 모시는 데 며느리만 일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 남편 집안의 행사인데, 왜 피 한 방울 안 섞인 며느리가 죽어라 일하고 그 집안 피를 이어받은 남편은 상차림에 있어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는가? 물론 결혼으로 인해 그 집안 가족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두 같이 일을 한다면 모를까, 누구는 죽어라 음식 차리고 설거지하고 일하는데 동시에 누구는 다른 한편에서 먹고 놀고 떠들기만 하며 편히 쉬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일하는 쪽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남자가 처가는커녕 본가 제사에서도 하는 일은 없고, 여자들이 죽어라 음식 만들고 설거지 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서 먹고 놀기만 하니까 남성이 누리는 특권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다.
갈수록 여성들의 인식이 바뀌어서 이전과 달리 변화를 요구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며느리 파업 같은 일로 저항하기도 한다. 아예 제사상 차라리는 걸 전문업체에 일임하거나 제사를 중단하기로 결정하는 식으로 타협하기도 한다. 이 문제로 인한 갈등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 심한 경우 이혼의 계기가 되거나 칼부림도 발생한다.
6. 2017년 제사폐지 청원 사건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제사를 법으로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와 온라인상에서 논란을 빚은 사건.청원 링크 관련기사 청원의 내용만을 보면 제사가 중국 고유의 관습이라거나, 제사의 폐지가 성평등과 여권향상에 기여한다는 내용 등을 들어 논란이 일어났다.유교적 명분론에서도 여권향상, 성평등을 놓고 보면 거꾸로 여성도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여권향상이라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제사는 반대하지만 청원의 내용 자체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제사무용론자들도 많다. 다만, 제사에 대한 현 세대의 인식이 좋지 못하며 지금의 제사 문화를 청산해야 할 인습으로 바라보고 있음이 드러났다는 점에는 의의가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국민들의 마음을 이해하나 자신들은 조선시대 왕이 아니라며 이러한 청원들을 곤란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국가가 제사를 법으로 의무화한 적은 없지만 반대로 법으로 금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제사를 방해하는 걸 처벌하는 법이 이미 있는데 제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다면 이는 모순이다.
유신시대에는 제사를 포함한 관혼상제에 대한 강제적 제약을 둔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에 정부가 개입해서 법적으로 강제규정을 두었던 현대 한국 정부에서는 극히 드문 사례이다. 이 시기에는 결혼한다고 청첩장 돌리고, 장례식이라고 부고장 돌리고, 방문한 사람들에게 답례품이나 술이나 음식 접대하면 불법이었다[15].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는 가까운 친척만 초대할 수 있었고, 식장도 예식장이 아니라 집이나 공회당을 사용하게 되어있었다. 국가기록원의 1973년 가정의례준칙 이런 법률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정부가 왜 제사 같은 것 하나 못 없애냐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애초에 저런 법률이 만들어지고 강제조항까지 들어갔던 것은 10월 유신 이후의 정부 독재시대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법률들은 현대라면 죄다 위헌소송감이다.[16] 실제로 결혼식에서 하객들에게 술과 음식 접대를 하지 못하게 했던 규정은 헌법재판소에 의해서 위헌 결정이 나오기도 했다.가정의례에관한법률 제4조 제1항 제7호 위헌확인(헌재 1998.10.15 98헌마168 결정). 결국 이런 조항들은 건전가정의례준칙이라고 해서 권고사항으로만 남았는데, 법률에서 강제규정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실질적으로는 사문화 되었다는 이야기이다.[17] 이 내용들을 보면 제사 외에도 성년식, 약혼, 결혼, 장례 등을 간소하게 간단히 하라는 권고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거 있는지도 모르고, 알고 있다고해도 지키지도 않는다.
즉 제사폐지 청원은 제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제사 지내는 사람에게 벌금 때리라는 이야긴데, 애초에 위헌소지가 너무 강하고,[18] 벌칙조항을 포함한 법률은 청와대의 의지만으로는 제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결국 이 청원은 20만명 이상이 참여하지 않아 청와대의 공식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참고로 제사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최소한의 현실적 요구는 현대 제사상의 표준처럼 자리잡고 있는 가정의례준칙법에서 재정한 표준제사상차림조차 경제적으로 매우 큰 부담이 되니 제사상에는 뭘 올리든 상관없이 간소하게 차리면 된다는 정확한 사실을 널리 알려달라이다.
현행 건전 가정의례준칙에서 제사상에 올리는 제수에 대한 규정은 딱 한줄이다.
제수는 평상시의 간소한 반상음식으로 자연스럽게 차린다.
이걸 좀 더 쉬운 말로 고치면, 그냥 평소에 먹던 반찬 올린다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표준제사상이라는 것은 적어도 현행 법률체제에서는 정한 적도 없고, 지키라고 홍보한 적도 없다. 소위 말하는 표준 제사상은 언론이 보도하거나[19], 성균관과 같은 유교 관련 단체들이 정한 것[20]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같은 법률 결혼 조항에도 있는 것처럼 웨딩드레스나 예복 입지 말고, 혼인예식의 복장은 단정하고 간소하며 청결한 옷차림으로 한다라는 조항이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느냐라는 것. 즉 호화결혼식 등에 대해서 항상 뉴스에서 떠드는 것처럼 정부에서도 제사에 대해서 왈가왈부를 할 수는 있다. 공익광고 이상의 방법을 동원해도 실재 효과는 전혀 없을 것이다.이상의 논의에서 꾸준하게 국가에서 홍보해달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정부 방침은 언제나 있었고 그것을 따라 공영방송에서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고, 명절이 되면 간소하게 지내라고 명문 양반가에서 조촐하고 손 덜 가게 지내는 것을 방송하기도 했다. 거의 매년, 무척 오랫동안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제사상에 치킨과 케익과 피자가 올라오는 것이 농담이 될 정도로 실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것은 정부가 간소한 의례를 권장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런 홍보를 몰라서도 아니다.
결국 이것은 사람이 바뀌어야 해결될 문제다. 현대 한국의 다른 사회현상처럼. 찜닭과 파전이 좋다는 제주가 가시고 나면 치킨과 피자를 좋아하는 제주가 치킨과 피자를 올리면 되는 것이다. 그게 원래 문화가 바뀌어 온 방식이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발전 도상에 한 세대가 한 가지 습관을 고수하며 살다 죽을 수 있었다. 그 선진국들 대부분이 연간 경제성장률 1%인 시대를 길게 가졌고, 외부요인에 의한 사회문화적 변화도 적었기 때문에, 변화는 천천히 찾아왔다. 하지만 한국은 경제성장도 선진국들의 몇배 이상 빨랐고 외부요인의 비중도 컸다. 그 결과 한 세대가 살아가는 동안 셋에서 여섯가지 새로운 관습들을 익히며 자신을 변화시켜야 했다. 그러면서 이전의 관습대로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당연히 생겨났고, 그 이전에 흘러온 역사를 전혀 모르는 새로운 세대가 매 10년마다 태어나 자기들끼리도 생각과 습관이 달라 갈등하는 마당이니 제주 세대와는 당연히 생각이 더 많이 다르게 되었다.
[1] 성균관 의례부장 '홍동백서 등 차례상 규칙 근거 없다'이를 근거로 삼아 부정하는 의견이 있으나 이는[2] 현대의 제사 지낼 일이 보통 차례인 것을 생각하면 위 말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3] 어차피 만들고 뒤에서 먹어서 처리하는건 제사상 차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4] 보통 마련하기 쉽고 손질도 덜 드는 과일류 등[5] 퇴계 이황의 불천위 기제사 상을 보면 제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아는 진설법과 거리가 멀다.[6] 그렇지 않다면 가문마다 다른 진설이 설명이 안 된다.[7] 1920년의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일보 기고문에 “今之儒者(금지유자)가口(구)로눈禮樂射御書數(예악사어서수)라能言(능언)하지만은其實(기실)은能通(능통)한者(자)一有(일유)타言(언)하기不能(불능)이니禮(예)의糧粕卽喪服(양박즉상복)의前三後四(전삼후사)와祭需(제수)의紅東白西等(홍동백서등)이나主張(주장)하야知禮者(지례자)로自爲(자위)하는普通儒者(보통유자)를多見(다견)하얏지만은...”으로 제사의 전통에 대해 논한 글이 있다.[8] 온건한 신세대들의 입장이다. 강경해질 경우 아예 제사를 없애자고 한다.[9] 과학적 회의주의까지 갈 것도 없이, 이러한 절차는 다른 상징을 배제한 세속적인 관점에서 봐도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10] 출처: 풍우란, <<중국 철학사>>[11] 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 제주를 기준으로 할 때 수직으로 6촌이다.[12] 하지만 여자가 지내는 경우는 거의 아들이 없는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없었을 것으로 본다.[13] 다만 이것도 케바케. 장남이 외지에 거주하여 제사준비 등을 할 수 없는 경우 차남 또는 그 아래의 아들이 제사준비를 하고, 장남이 제수비용을 대는 경우 등 집안의 상황마다 다르다.[14] 다만 아들이 아예 없고 딸만 있는 집이라면 장녀나 외동딸에게 시키는 집도 있다. 남편이나 집안 어른들이 대신하기도 하지만 아예 큰어른들이 한 번 알려주고 맡겨버리는 집안도 있다.[15] 당시 돈으로 50만원의 벌금이 규정되어 있었고, 소위 말하는 사회 유력층이 걸리면 신문에 이름이 공시 되었다.[16] 심지어 김영란 법을 비판하는 이들이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꺼내들은 논거가 바로 가정의례준칙이었을 정도이다. 시사저널 김영란법, ‘제2의 가정의례준칙’ 될까 우려, 식품산업과 김영란법, 법만능주의를 경계한다[17] 앞 각주에서 김영란 법을 가정의례준칙법으로 비유한 것과 반대로 2016년 당시 국가권익위원장이었던 성영훈은 김영란 법이 가정의례준칙법 처럼 사문화 되기를 바라는 입장도 있는 것 같지만 사회적으로 지지 받기 때문에 사문화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을 정도이다.[18] 제사라서 뭐하면, 결혼으로 돌려봐도 된다. 예식이 너무 돈낭비에 호화스럽다고 결혼식을 하지 말고, 혼인신고만 하라고 강제하는 것과 같다. 이 내용이 위에 언급되는 가정의례준칙의 발상이다.[19] 거의 매년 명절이 되면 차례상 상차림에 대한 신문 기사와 TV방송이 나온다.[20] 이 문서에 있는 표준 제사상은 성균관 내 연구소가 만든 이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