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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23:58:54

제1차 상하이 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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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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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제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한중 농민 충돌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눈강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마옥산 사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년 1월 28일~5월 5일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1차 상하이 사변 종결
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열하사변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일본군의 열하 침공
당고정전협정 1933년 5월 31일 열하사변 종결 }}}}}}}}}

제1차 상하이 사변
一·二八事變 / 一·二八事变
[ruby(第一次上海事変, ruby=まだいいちじシャンハイじへん)]
파일:external/imgc.allpostersimages.com/battle-of-shanghai-1932-between-china-and-japan.jpg
날짜 1932년 1월 28일 ~ 1932년 5월 5일
장소 중화민국 상하이시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svg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차이팅카이[1]
파일:대만 국기.svg 장즈중
파일:대만 국기.svg 우톄청[2]
파일:대만 국기.svg 대극[3]
파일:대만 국기.svg 허잉친
파일:대만 국기.svg 장광나이
파일:대만 국기.svg 천밍수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시오자와 고이치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노무라 기치사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시라카와 요시노리
전력 19로군, 5군, 세무경찰대, 헌병대 등 5만명해군 육전대, 1,3파견함대, 9사단, 24혼성여단 등 10만명[4]
피해 규모 사상자 1만 3천명사상자 3천명
결과 중일 양국이 상하이 정전협정을 체결
영향 열강의 시선이 상하이에 몰린 틈을 타서 만주국 수립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사쿠라다몬 의거3.2. 일본인 승려 습격사건과 일본의 기습3.3. 일본 외무성의 침략호응3.4. 상하이 시가전3.5. 중국의 항전태세3.6. 육군의 증원과 일본의 최후통첩3.7. 일본군의 3차 공세3.8. 일본군의 2차 증원3.9. 일본군의 4차 공세3.10. 송호정전협정
4. 결과
4.1. 중일 양측의 피해규모4.2. 만주국의 수립
5. 여담6. 참고 문헌7. 1930년대의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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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2년 1월 2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탈한 일본 제국만주국을 설립하고 만주의 항일 세력을 일소할 시간을 벌기 위해 벌인 침략 행위이다. 중국에선 1.28 항전이라 부른다.

2. 배경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천황과 내각의 재가도 받지 않고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장쉐량(張學良, 장학량)의 오판에 힘입어 순식간에 만주를 점령한 바가 있었다. 만주사변을 주도해낸 관동군 과격파들은 만주를 아예 중국에서 분리하여 괴뢰국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본국은 중국의 만주에 대한 명목상 주권을 인정하자는 입장이었지만 이런 과격파 일당들은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본국의 말 따위는 듣지 않았다.(...) 이들은 장쉐량의 정적인 만주 구파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데려와서 만주국을 수립하려 했는데 벌건 대낮에 눈뜨고 영토를 침략당한 중국의 반발과 국제사회의 이목을 의식하여 이를 바로 추진하기 어려웠다. 이에 일본은 만주국 수립 과정에서 세간의 이목을 돌려보기 위해 유럽 열강의 이권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상하이에서 사고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당시 상하이는 세계 15대 도시, 아시아에서 2번째로 큰 경제대도시였는데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이 조계지를 설치하고 막대한 양의 자본을[5] 투자한 곳이었다. 일본이 원하는 이목집중이라고 하는 과제를 달성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1931년 10월 11월 상하이의 일본인들은 상하이 거류민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양쯔강유역 일본인 연합대회, 전중국 일본인 거류민 대회 등을 열어 포악한 지나를 응징하라고 난동을 부렸다. 이 때문에 만주사변으로 어그로가 오를대로 올라 있던 중국인들의 반일감정 역시 치솟아서 일본인과 중국인의 충돌이 연일 벌어졌는데 이런 점 때문에 일본 군부는 상하이를 주목하게 되었다.

관동군과 일본 군부의 강경파 다나카 류키치,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은 폭력사태를 사주하여 만주국 설립을 위해 상하이에서 소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분란을 획책하였다.

3. 전개

3.1.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 인근에서 관병식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천황 히로히토가 탄 마차에 한인애국단 소속의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다. 폭탄은 터지지 않아 천황처단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중국의 신문들은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이라는 보도를 대서특필하였고, 이 보도는 상하이의 일본인들과 일본군들을 격앙시켜 그들로 하여금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3.2. 일본인 승려 습격사건과 일본의 기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19th_Root_Army%2C_being_in_engagement_with_the_Japanese_in_Chapei_front.jpg
교전 중인 국민당 헌병대

양 측의 감정이 과열되던 차에, 1932년 1월 18일, 상하이 마옥산에서 일본인 승려 2명과 3명의 신도들이 괴한의 습격으로 구타당해 승려 한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관동군의 사주로 벌어진 사건이었으나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이 사건을 계획적인 반일행위로 규정,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으며 일본 교민들도 폭동을 일으켜 경찰을 살해하는 등 마구 행패를 부렸다. 일본의 억지요구에 상하이 시장 우톄청은 일단 굴복하여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였고 사건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월 28일 제1파견함대 기함에서 벌어진 칵테일 파티에서 시오자와 소장은 뉴욕 타임스 기자 핼릿 어벤드에게 우톄청의 양보 여부와 관계없이 일본 제국 해군은 '속수무책인 일본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11시부터 육전대를 상륙시켜 국민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놀란 어벤드가 쑹쯔원과 미국 총영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국 총영사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중국이 가만히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참모총장 주페이더와 군정부장 허잉친은 상하이 정세의 긴박함을 인지하고 헌병 제6단을 난징에서 상하이로 파견하여 갑북의 방비를 맡게 했다. 상하이는 광둥파 소속 차이팅카이 장군의 19로군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19로군은 총 3개 사단 9만명으로 구성된 부대였고 그 중에서 78사단 소속 6개 단을 상하이 방어에 투입하고 있었다. 19로군은 장제스의 직계부대는 아니었지만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고 전투력이 강한 정예부대로 '철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차이팅카이는 60사단, 61사단, 78사단을 상하이에 투입하여 국제공동조계를 포위했고 참호와 토치카, 지뢰지대를 건설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 방어시설들을 빌미로 사건의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사건이 다 끝났다고 믿어지던 28일 오후 11시, 상하이 공안국과 상하이 시정부는 시오자와로부터 난데없는 공문을 받았다.
"제국의 해군은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하는 갑북 일대의 치안유지에 관하여 불안을 확대하고 이에 병력을 배치하여 치안에 임하려 함. 본인은 중국 군대가 갑북 방면에 배치한 적대시설의 조속한 철수를 중국 측에 요구함."

갑북은 조계지 밖으로 명백히 중국의 영토였고 이는 얼토당토않은 요구였다. 당황한 중국 측은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과 접촉하려 했지만 이 통고가 날아든지 30분이 겨우 지나서 수십 량의 장갑차를 앞세운 일본 해군 육전대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 해군 육전대는 기존의 908명에 더해 사세보와 구레에서 증파된 925명을 더해 1833명 규모였다. 일본군은 북사천로-송호로의 천통암역, 규홍로-보산로, 북사천로-보흥로 3개 방면으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상하이 시정부는 사건이 일단락됐음을 알리는 전보를 보내자마자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새로운 급보를 난징으로 보냈다.
"화급, 난징 중앙집행위원회 행정원 앞. 29일 오전 9시 30분, 시공안국 온국장이 직접 한 말에 의하면 일본 해군 육전대는 28일 밤 12시 경, 갑북 일대에서 군사행동을 개시, 아군을 공격하고 있음. 아군은 대항하여 교전 중임. -상하이 시정부."

오토바이를 탄 육전대 병사들은 인구가 밀집된 거리로 기관총을 발사했고 상하이 시내에 배치된 중국 저격병들이 응사했다. 애스터 호텔에 투숙 중이던 장제스의 고문 윌리엄 헨리 도널드는 즉시 우톄청에게 전화를 걸어 수화기 너머로 울리는 포성과 총성을 들려주었다. 공격이 시작되자 상하이의 서양인들은 야회복을 입고 몰려나와 술과 커피, 샌드위치를 즐기며 일본군의 공격을 구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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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사변 발생 다음날 상하이 영국 총영사 브레난과 미국 총영사 커닝엄은 기자회견에서 "만약 일본군이 철저하게 중국군을 소멸시키지 못할 경우 상하이의 사태는 어떻게 진행될 것이며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다. 공동 조계, 프랑스 조계는 이 기회를 틈 탄 중국 군대의 불법적인 침입을 받아 무력 회수와 같은 폭거의 사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를 위험에 처해있다. 이러한 위협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군이 병력을 가지고 중국 군대를 철저하게 압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은 현재 병력의 적어도 수배 혹은 수십배에 이르는 병력을 중국에 파견하여 시국을 수습하고 상하이 조계의 위급함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일본의 행동이 수위를 넘으면서 열강의 일본에 대한 협조와 지지 의사는 곧 사라지게 된다.

3.3. 일본 외무성의 침략호응

사변 발생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간, 1932년 1월 12일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가 상하이를 출발하여 1월 15일 도쿄에 도착했다. 시게미쓰는 외무성 간부에게 상하이의 사태가 심상치 않으며 만약 상하이에서 새로운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단지 일본과 중국간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아시아 국장 등 외무성 간부들도 동의했다. 1월 25일 요시자와 켄키치 외상은 "모두 당신의 의견에 동감하므로 하루라도 빨리 상하이로 돌아가서 사건의 처리에 힘쓰고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시게미쓰는 29일 고베를 출발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일본 해군 육전대의 공격이 시작된 후였다. 1월 30일 나가사키에 기항한 시게미쓰는 사변 발생을 알게 되었고 3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사태를 조사한 시게미쓰는 2월 2일 요시자와 외상에게 62호, 63호 전보를 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28일 중국측이 우리 총영사의 요구 조항을 모두 승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거류민의 주요한 단체인 시국위원회는 여기에 대해 절대 반대하였다. 즉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하면서 동 위원회의 농성장에 모여 있던 재향 군인 등은 울기도 하고 흥분하여 총영사에 대해서는 물론 해군 측을 마찬가지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해군측이 끝까지 예정대로 행동을 단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구락부인들의 소요는 일변하여 만세의 소리로 일변하였다.
62호 전보
육전대는 함대 본부와 의견이 종종 달랐으며 더욱이 청년 장교 중에는 혈기왕성한 자들이 많았다. (...) 재류민의 행동을 보면 극단론만을 여전히 강행해야 한다는 무책임한 언동이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28일 중국측과 타협이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밤에 군사 행동을 일으킨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63호 전보

이는 책임이 일본 측에 있다는 것을 정확히 꿰뚫은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시게미쓰 공사는 즉각 육군을 파병해야 한다고 요시자와 외상에게 건의했다. 요시자와 외상 역시 1월 30일 육군대신 및 해군대신과 논의하여 육군 출병을 결정했으며 2월 2일 각의에서 승인했다. 요시자와 외상은 외무성이 육군 파병에 찬성한 것에 대해서 육군이나 해군의 압력이 아니었음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1월 31일에는 요시자와 외상이 영국, 미국, 프랑스 3국 대사를 각각 불러들여 "우리 육전대는 방비를 위해 배치되어 있었는데 중국측으로부터 발포가 있어 이로 말미암아 응전한 것으로 완전히 자위를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도 "중국 측이 돌연 사격을 개시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은 자위상으로 응전했던 것이다. (...) 만약 중국 측이 끝까지 이러한 공격을 중지하고 철병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일본으로서도 육군을 파견하여 중국 측의 공격에 대비하여 제국신민과 공동조계의 안전을 위해 끝까지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상의 정황은 일본 외무성이 과거 만주사변 당시의 시데하라 외상 휘하의 외무성과 달리 침략에 적극 호응하고 오히려 확전하는데 조력한 증거라 하겠다.

하지만 일본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1월 31일 미국 대사 네빌은 "일본 육전대는 28일 야간에 상하이 상업지에서 중국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상하이 전시의 평화는 깨어지고 상업은 두절되었으며 공동 조계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어 미국 정부로서는 이와같은 사태의 진전에 대해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일본 정부에 대해 이와 같은 생명의 손실, 재산의 파괴 등 일체의 행동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고 경고했고 영국 대사 린들레이도 본국의 훈령에 따라 항의했다. 이에 요시자와는 린들레이 대사에게 "우리 육전대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져있을 뿐 아니라 공동조계도 마차가지로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는 형편이다. 영국 측에 즉시 중국군이 증원을 중지하고 일정한 거리까지 퇴각하도록 상하이 주재 영국 관헌에게 필요한 훈령을 발동해줄 것을 의뢰한다."고 변명했다.

3.4. 상하이 시가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anghai_1932_19th_route.jpg
교전 중인 국민당 19로군

일본군이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은 차이팅카이는 즉시 갑북을 수비하던 78사단 6단에게 일본군을 격퇴하라고 지시했다. 중국군은 3만 5천명, 일본군은 6천명이었으나 일본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함대와 비행기를 비롯한 막강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오자와 소장은 4시간 안에 상하이를 점령할 것을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19로군은 밝은 지리사정을 바탕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매우 효율적으로 저항했고 오히려 전황은 중국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보흥로에 진입했던 일본군 장갑차들은 창문에 숨어 있다가 수류탄을 던지는 중국군의 저항에 차례로 격파되었고 거리 깊숙히 진입하던 일본군들은 중국군의 습격에 차례로 포위섬멸되었다. 29일 오전 4시, 항공모함에서 20여기의 함재기가 발진하여 시내를 폭격함으로 육전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로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갑북을 사수했고 오히려 육전대가 큰 피해를 입음으로 육상 전투는 곧 소강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에 일본군은 상하이 시내에 대한 폭격을 더욱 맹렬히 가했다. 어벤드는 상하이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땅이 도자기처럼 마구 흔들렸다. 세차게 부딪히는 느낌과 폭발 소리가 잇달았다.

일본군은 난민대피소와 시민들을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고 당시 중국 최대 출판사였던 상무인서관이 일본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으며 일본군은 상무인서관 소속 도서관을 습격해 송, 원 시대 도서 십수만권을 약탈했다. 일본군이 약탈한 서적을 나르는데만 1주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상하이 사변 9개월 후 하병송은 상무인서관에서 내놓던 잡지인 동방잡지 복간호에 <상무인서관 피훼기략>이란 글을 써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전 10시경, 본관 총공장에 5개의 폭탄이 잇달아 투하되었다. 제1탄이 인쇄부, 제2탄이 복도에 명중하여 폭발, 불길이 치솟았다. 소방차도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었고 그저 불타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 후 일본 비행기는 다시 폭격을 계속하여 전 공장이 불탔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모든 공장에는 각종 인쇄용지를 다량으로 쌓아놓었기 때문에 불이 더 잘 붙었던 것이다. 공장의 인쇄기도 모두 소실되었고 종이가 탄 재는 연기를 타고 수십 리 밖에까지 날렸다.
하병송, 상무인서관 피훼기략

1월 29일, 영국과 미국의 주선으로 첫번째 정전협상이 행해졌다. 이들은 휴전에 동의했으나 30일에 교전이 재개됨에 따라 31일에 3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하지만 일본의 휴전 연장 동의에는 어디까지나 19로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본국의 증원군을 불러올 시간을 벌기 위한 속셈이 있었을 뿐이었다. 1월 30일 해군은 사세보 진수부의 3특별 육전대 474명, 2월 1일 요코스카 진수부 제1특별 육전대 525명을 추가 파병하였고 49척의 3함대를 새로 편성하여 상하이로 출발시켰다. 이 3함대의 사령관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이었고 종래의 1파견함대, 1수뢰전대 외에 순양함 3척으로 구성된 3전대, 항공모함 가가, 호쇼 등을 보유한 1항공전대의 지휘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상하이 공격의 지휘관은 시오자와에서 노무라로 교체되었다.

2월 2일 미국, 영국, 프랑스가 일본과 중국에 통첩을 제시했다.

하지만 증원군을 받은 일본 측은 이 통첩을 무시하고 2월 3일 공세를 재개했다. 이날 국가동방도서관 역시 공습으로 파괴되어 1904년부터 수집된 수백만권의 고서적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시오자와 소장을 방문한 어벤드는 서구 언론이 그를 '어린애들을 도살하는 망나니'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렸지만 시오자와는 자신이 230킬로그램 짜리 폭탄 대신에 15킬로그램 짜리 폭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2월 4일 청운로, 보흥로 일대가 일본군의 포격과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었고 2월 7일에는 상하이 북부의 오송 지역에 일본군의 공격이 벌어졌다. 하지만 중국군은 1주일에 걸친 일본군의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을 본 노무라는 육전대만으로는 중국군의 저항을 뚫기 어렵다고 판단, 육군의 증원을 요청했다. 이에 육군은 2월 5일 가네자와의 9사단, 제3,제5,제12,근위사단의 일부 부대들을 차출하여 1개 혼성여단을 만들어[6] 상하이 파견군을 편성했다.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은 우에다 켄키치 9사단장에게 "제국의 중국 본토에 대한 정책은 만몽에 대한 정책과 완전히 그 취지를 달리하여 중국 본토에서는 열국과 협력하고, 상하이 방면에서의 우리 군사 행동은 열국과 협조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목적이다."라고 지시했다. 이후 3차 정전교섭이 행해졌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결렬되었고 일본은 중국의 항전을 공산당의 음모로 모함하면서 국제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했다.

3.5. 중국의 항전태세

한편 일본군의 공격에 난징 정부도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하였다. 상하이는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상하이를 잃으면 수도 난징도 위험한데 이는 이후의 중일전쟁 시기에 적나라하게 증명된 바가 있었다. 그런 전략적 필요 외에도 중국 전체가 반일 시위로 들끓고 있었고 일본의 침략에 더 이상 소극적인 대응을 하는 것은 정권에 위협이 될 판국이었다. 장광나이가 일본군이 더 큰 규모로 공격해올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난징을 수비하던 19로군 소속 부대들까지 일부만 남기고 모두 상하이로 보낼 것을 지시했고 29일 전역 장광나이, 차이팅카이, 송호 경비사령관 대극이 연명으로 철저 항전을 다짐했다.
"우리는 군인으로서 다만 정당방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위난을 막고 국토를 지키는 것은 천직으로 하며 척지촌초라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보위하기 위해 저항하며 최후의 한 사람, 한 발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군정부장 허잉친도 "한편으로는 정당한 자위에 힘써 조금의 토지라도 내주지 말것이며 또한 한편으로는 여전히 외교방식을 통하여 각국이 그 조약상의 책임을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라는 통고를 내어 당시 난징 국민정부의 방침인 일면 교섭, 일면 항쟁의 방침을 확고히 했다. 같은날 행정원장 쑨커가 사직하고 왕징웨이로 교체되었으며 지난 해 12월 15일부터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있던 장제스도 장왕합작에 따라 펑위샹, 옌시산, 장쉐량과 함께 군사위원에 임명되었고 국민정부는 전시체제로 돌입했다. 장제스는 이날 자신의 직속부대인 2사단을 보냈으며 87사단과 88사단의 파견도 결정했다. 또한 일본군이 양쯔강을 따라 올라올 가능성을 고려하여 수도를 뤄양으로 옮겨 장기 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장제스는 이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정부를 옮겨서 일본과 장기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장래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되면 나 혼자 모든 책임을 감내하겠다. 그러나 두 가지 해를 비교해보면 해가 적은 쪽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약 정부를 옮기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위협을 받게 될 것이고 장차 반드시 성하의 맹(城下之盟)을 초래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큰 해에 비하면 나 한사람이 책임을 감내하는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나는 지난날부터 개인을 희생하여 국가를 구하겠다는 뜻을 지녀왔다. 아까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때 장제스는 일본군이 우한까지 점령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호북성 주석과 4사단장에게 "일본 해군이 반드시 한커우, 우창에서 군사행동을 취할 것이므로 철저하게 경비, 자위하여 절대로 이에 굴복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7] 다음날인 30일에 장제스는 다음과 같은 담화도 발표했다.
"상하이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고통을 참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왜구는 더욱 난폭하게 협박해왔다. 재삼 우리 상하이 방위군을 공격하고 민가를 폭격했으며 시가지를 파괴했다. 동포는 비참하게도 짓밟혔고 국가는 멸망의 위기를 맞이했다. 피가 흐르고 있는 인간으로서 이 이상 더 참고 견딜 수 있겠는가?

우리 19로군 장병들은 충성스럽고 용감하여 이미 자위를 맡고 있다. 우리 전군의 혁명장병은 국가와 민족의 멸망이 눈앞에 닥쳐온 이때, 일치단결하여 국가의 존엄을 쟁취하고 민족의 생존을 확보하여 혁명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옥쇄할지언정 구구하게 살아남을 생각을 버리는 결심을 가지고, 평화를 파괴하고 신의를 저버리는 포학한 일본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날 뤄양으로의 천도가 공식 발표되었다. 장제스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난징정부는 상하이 사변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전하고, 먼저 수도를 뤄양으로 천도해 일보 함대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결정하였다. 이는 난징정부가 장차 일본군의 위협으로 인해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장기항전을 하기 위함이다.

주석 린썬, 행정원장 왕징웨이 등이 카이펑을 거쳐 뤄양으로 떠났고 2월 1일 양쯔강을 거슬러온 일본군 함정들이 난징 시내를 포격했다. 난징-상하이를 잇는 철도망이 붕괴되었고 버스 운임이 2배로 치솟았다. 이날 군사위원회는 쉬저우에서 회의를 소집해서 이틀간의 회의 끝에 중국을 5개 전구로 분할하는 전국방위계획을 수립했다.

이 방위계획에 총 240만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상하이 방어에 3방위구를 주력으로, 2방위구를 예비대로 활용하는 한편 1방위구는 동북으로 진격시켜 일본군을 견제하여 상하이에서의 침략을 확대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2월 8일 편성을 마친 5군이 상하이로 파견되었고 국민정부는 사절을 각 지방 군벌들에게 파견하여 독전했으나 군벌들은 사병들의 손실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베이핑의 장쉐량에게는 천궁보리지선이 파견되었는데 장쉐량은 "후방을 공고히 한 다음에 전방으로 진군하겠다. 지방을 보호하여 중앙을 옹호하겠다." 따위의 말만 하였고 지금껏 항일을 입에 달고 살았던 광동파도 강서로 출병하라는 중앙의 명령을 무시했고 쓰촨의 류샹도 중앙에서 파견된 장독륜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위협하여 내쫓았다. 항일을 명분으로 중앙에 대한 반기를 들기 일삼던 지방 세력들의 실태가 이와 같았다.

한편 19로군의 항전에 고무된 전국 각지에서 19로군을 칭공하는 움직임과 더불어 이들을 돕기 위한 애국 운동이 벌어졌고 루쉰, 마오둔, 예셩샤오, 위다푸, 후스, 저우위통 등 43명의 저명인사들이 연명으로 '세계에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중국의 반제투쟁을 지원하달라고 호소했다. 2월 7일에는 리다, 양한셩, 저우구청 등 127명의 저작가들이 공동선언을 발표, 총파업, 수업거부를 통해 일제에 저항하고 농민, 노동자, 상인, 학생, 군인들의 일치단결을 호소했다. 신보, 문예신문, 대공보 등 언론도 군대의 투쟁을 집중보도하면서 항일여론을 고취시켰다.

2월 14일 87사단과 88사단을 통솔할 5군의 군장에 장즈중이 임명되었으며 교도연대, 세무경찰연대 등이 잇달아 증파되면서 상하이의 중국군 방어병력은 5만명으로 증강되었다. 이들이 가져온 독일제 중화기들은 상하이 방어에 큰 보탬이 되었다. 중국군은 일본군의 증원에 대비하여 방위진지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3.6. 육군의 증원과 일본의 최후통첩

상하이 파견군의 주력인 9사단은 2월 9일과 10일 양일에 히로시마와 우시나를 출발, 14일부터 16일에 걸쳐 상하이에 상륙했다. 하지만 일본의 로비에도 2월 13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총영사는 상하이의 무라이 일본 총영사에게 육군의 파병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고 특히 미국의 항의가 심했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 역시 15일 "미국 정부로서는 도저히 이를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중국 측에서 이를 구실로 혹시 보복적으로 조계 내를 공격하여 미국인의 생명 재산에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라고 항의했다. 이에 주미 일본대사는 "미국도 영국도 일찍이 중국 측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나아가 불상사를 겪기도 하였다. 만약 장래 미국이 오늘날 일본이 봉착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면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육군을 조계로 상륙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일본 육군은 거의 상륙을 종료하고 있다. 이제와서 항의하는 듯한 태도를 표명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2월 16일 프랑스 조계지에서 중일 정전교섭이 행해졌으나 일본 측이 중국군의 20킬로미터 철수, 오송, 사자림 포대의 철거, 항일운동 단속, 중국군 철수 이후의 일본군 철수 등의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 이날의 교섭 역시 결렬되었다. 사실 일본측은 강경한 요구를 계속 내놓음으로 실질적으로 교섭하기보다는 공격의 명분을 축적하려 하고 있었다.

2월 17일 0시, 중국군 지휘부는 오송,강만,갑북,진여,남시를 연결하는 방위선을 설정하고 일본군에 대비했다. 강만역의 남쪽은 19로군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군이, 북쪽은 5군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군이 방어했다. 총지휘는 19로군 총지휘관 장광나이가, 우익군 지휘군은 19로군 군장 차이팅카이가, 좌익군 지휘관은 5군 군장 장즈중이 맞았다. 장제스는 상하이의 방위태세를 점검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하이 주변의 지형은 매우 복잡하다. 적군은 어쩌면 정면공격을 하지 않고 우리 쪽의 배후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진지에는 작은 강이 종횡으로 흐르고 있어 수비하기 쉽다. 일본군이 만약 전면 공격으로 나온다면 그 희생은 우리의 10배 이상이고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은 2월 18일 중국측에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여기서도 외무성과 군부가 협조했다. 일찍이 요시자와 외상이 9사단 상륙 이후 "이제 9사단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19로군에게 퇴각을 요구한다. 만약 듣지 않으면 일격을 가해 이를 격퇴시켜 나간다."라고 말했고 무라이 총영사가 외상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 시장 우톄청에게, 그리고 9사단장 우에다 켄기치가 19로군 군장 차이팅카이에게 각각 통첩을 보냈다.
"중국 군대는 20일 오전 7시까지 제1선의 철수를 완료하고, 같은날 오후 5시까지 조계로부터 2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지역까지 완전히 철수하라. 또 철수지역의 포대 및 기타 군사시설을 철거하고 재구축을 하지 말라. 만약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 군대는 자유행동을 취한다. 중국군의 제일선 철수가 완료된 이후 일본군은 그 실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호위병을 대동한 조사단을 철수 지역으로 파견한다."

여기에 더해 무라이 총영사는 군부가 요구한 것에 조건을 더 붙였다.
"항일회의 즉시 해산 및 기타 배일운동의 금지에 대한 약속을 철저히 이행할 것, 만약 이러한 것이 실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적당한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톄청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귀 총영사의 서한에서 발하고 있는 <상하이 방면의 엄중한 정세>는 모두 일본의 군대가 조약과 공법을 위반하고 멋대로 우리나라의 영토를 침입했고, 우리나라 국민을 참살함으로써 조성된 것이다. 일본의 군대는 아직도 도발, 공격, 폭격을 그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국민의 격분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른바 항일운동이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일체의 책임은 일본이 져야 할 것이다."

중화민국 외교부도 시게미쓰 마모루 공사에게 '일본의 요구는 무리한 난제이며 일본이 계속해서 진격한다면 중국군은 저항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한편 일본측은 스팀슨 국무장관에게 일본의 최후통첩에 대해 "제국 정부는 상하이 방면에서의 전투를 방지하고자 하는 견지에서 오늘날까지 가능한한 중국군의 자발적인 철퇴를 권유하여 왔다. 그럼에도 중국측에서는 우리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병력을 집결시켜 적대 행위를 계속하여 일부러 조계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따라서 제국 정부로서는 이러한 위급한 사태에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24시간의 유예 기간을 두어 최후의 통첩을 발동함으로써 중국군에 대하여 조계 20킬로미터 밖으로의 철병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렸다. 국제연맹 이사회는 2월 19일 일본에게 최후통첩 기간을 연장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요시자와 외상은 2월 20일에 "최후 통첩의 기간은 이미 종료되었으며 우리 군대는 이미 행동을 개시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19로군의 태도에 일대 변화가 없는한 이러한 기한을 연장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

이에 20일 아침 해군의 치욕을 씻어주겠다고 득의양양하던 상하이 파견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3.7. 일본군의 3차 공세

20일 오전 9시, 구루마이의 혼성여단 4천명과 9사단 일부 병력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10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강만역을 공격했으나 중국군은 이를 격퇴했다. 오송에서는 중국군이 일본군 함선들의 맹렬한 포격을 견뎌내며 일본군 1천명의 공격을 물리쳤다. 갑북의 팔자교에서도 한때 맥가택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으나 중국군은 반격을 가해 그날 밤 이를 탈환했다. 21일에도 일본군은 갑북, 강만, 오송에서 일제히 총공격을 가했으나 중국군은 강만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날 중국군은 일본군 전투기 846호를 격추시켰는데 여기서 수습된 일본군 승무원들이 지닌 부적을 보고 중국군은 일본군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여겨 크게 고무되었다. 22일 새벽, 일본군 6천명이 팔자교에서, 그리고 1만명이 강만에서 무력시위를 가했다. 사실 진짜 공격은 묘행진 방면에서 30대의 전차를 앞세운 2만명의 병력이었는데 결국 일본군의 공세에 장가교, 전곽가택, 후곽가택, 527단 3영 진지가 모두 파괴되고 영장 진진신이 전사했다. 방위선을 돌파한 일본군은 중국군은 524단을 포위공격했다. 하지만 중국군 18사단 부사단장 이언년이 재빨리 259여 소속 518단을 투입하여 일본군을 저지했다.

일본군을 저지한 중국군은 즉각 반격에 돌입, 5군 소속 261여가 우수한 중화기를 바탕으로 온조병에서 일본군 방위선을 격파하여 중심항, 남손택, 금모택 지역에서 4천명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중국군의 습격에 일본군은 많은 양의 무기, 탄약, 일장기를 버리고 패주했다. 이에 승기를 잡은 중국군의 반격이 이어져 일본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쯤되면 일본군의 공격 패턴이 너무도 일정했기 때문에 중국군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손쉽게 격퇴할 수 있었고 중국군이 참호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본군을 도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3일의 공세에도 일본군이 패배하자 노무라 중장은 누적된 피해와 부족한 탄약사정을 인지하여 공세중지 명령을 내리고 본국에 증원을 요청했다. 크게 고무된 장즈중은 휘하 사단장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22일부터 시작된 묘행진의 일전을 거쳐 우리나라, 우리 군대의 명성과 영예는 국제적으로 10배쯤 급상승했고, 각국의 여론은 우리군의 용감성에 대하여 매일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왜구의 명예는 일락천장이 되었던 것이다."

너무도 지지부진한 전과에 당황한 일본 측은 소위 폭탄 3용사 혹은 육탄 3용사라는 이야기를 유포하여 사기 진작에 나섰는데 이는 22일의 묘행진 전투에서 일본군 육군 이등병 스쿠에 등 3명이 폭탄을 안고 중국군 철조망에 몸을 던져 돌파구를 만들었다는 '미담'이었다. 이들 3용사는 군신으로 칭송받았는데 후지와라 아키라의 일본군사사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창작이라 한다. 한편 중국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일본군에게 징발된 트럭 운전사 호아모가 트럭에 실린 무기와 일본군사들을 데리고 그대로 황포강으로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일제에 저항하였단 이야기였다. 이후 중국 시인 왕증이 이 일화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고 나중에 중화민국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이 일화가 실리게 된다.

한편 일본군은 25일 새벽, 다시 강만에서 묘행진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고 소장묘의 88사단 소속 독립부대인 2단에게만 1천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는 등 맹공을 퍼부었다. 결국 휘하 중대장들이 줄줄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은 2단은 오전 10시에 소장묘에서 철수했고 중국군은 26일 오전, 강만진의 수비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양가교까지 병력을 퇴각시켰다.

3.8. 일본군의 2차 증원

중국군의 분전으로 전황이 지지부진하자 2월 23일의 각의는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 등의 주장으로 2개 사단의 증파를 결정했다. 2월 24일 1사단과 14사단을 증파하고 전 관동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을 창설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상하이에서의 고전에 열불받친 일본 측이 눈이 뒤집혀서 앞뒤 안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파병은 사실 치밀한 계산이 밑에 깔린 것이었다.

파병 결의 이후인 2월 25일 일본육군 참모본부 제2부는 <상해사건대책안>을 책정하여 상하이 사변을 국지적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이 대책안에 따르면 상하이 사건의 목적은 상하이의 군사적 점령이나 이익 확대가 아니라 국지적 해결 방침에 따른 당초의 기도 관철이며 상하이의 일본군 역시 상륙지점에서 일정한 정도의 교두보를 확보한다면 군사 행동을 정지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외무성 역시 군부에 호응하여 국제연맹 사무국장, 주중 공사, 상하이 총영사에게 "우리로서는 시국을 이용하여 상하이 지방에서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따라서 동 지방에서 전관 거류지를 설정한다거나 혹은 일본인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과 같은 저의가 없음은 물론 오히려 상하이 개발의 공로자인 영국, 미국, 프랑스에 대해 충분한 경의를 표한다. 특히 공동조계 공부국을 존중하여 상하이가 국제도시다운 면목을 더욱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 생각하고 있는 형편임을 해당국에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25일과 26일에는 "중국군이 일정 지역 밖으로 일정 기간 내에 철퇴하는 것을 조건으로 전투의 정지를 승락할 의사가 있음을 밝혀도 좋다. (...) 이후 상하이 부근에 있는 외국인의 보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는 열국 대표자들이 포함된 원탁회의가 개최된다면 이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시했다. 일본 외무성은 소위 '원탁회의'의 개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한편 장제스는 일본군이 상하이 북서쪽 유하 방면에 상륙하여 상하이의 중국군을 포위할 것을 염려하여 25일 장광나이에게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2차 결전 때를 29일과 3월 1일 양일로 하고 아군 후방부대를 모두 전선에 수송했다. 그밖의 부대는 6일이 지나지 않으면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 이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전선의 병력을 절감하여 부대를 각지에 모으고 유사시에 대비, 총병력의 반 이상을 예비병력으로 보존하라. 특히 유하 방면에는 3개 단의 병력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상세한 회답을 기다리겠다. -중정"

하지만 장광나이와 차이팅카이는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에 따르면, 이는 쑨커의 소개를 받은 가와시마 요시코가 차이팅카이에게 일본군은 갑북, 오송 방면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거짓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라 한다. 장제스 역시 장광나이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가와시마 요시코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3.9. 일본군의 4차 공세

2월 27일, 일본이 영국 측에 정전교섭을 의뢰하여 다시 중일 정전교섭이 행해져 동시 철수를 합의하게 되었다. 2월 29일 뱃멀미에 시달리던 시라카와 사령관은 11사단 선견병단,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막료들을 이끌고 중순양함 다에다카를 타고 나타났다. 이들의 상륙을 돕기 위해 3월 1일 88사단이 수비하던 죽원돈, 양가교 일대가 공격을 받았다. 이후 11사단이 탑승한 일본군 대함대가 나타났다. 유하 지역에서는 장광나이의 오판 때문에 교도총대 소속 1개 중대가 주둔할 뿐이었고 이들은 순식간에 전멸했다. 오전 7시, 칠료구와 육병구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장즈중은 1개 여단을 보내 구원하려 했으나 이들을 수송할 자동차가 태부족이라 실패했다. 이로 인하여 천밍수, 장광나이, 차이팅카이 등 19로군 지도부는 중앙에 신속한 지원군 파병 및 만주로 진공하여 상하이에서의 압력을 분산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일본과 정면으로 전쟁을 벌이는 일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이를 거절했다.
"일본 군대는 모두 21개 사단으로 집결이 용이하고, 일본 항구로부터 중국으로의 군대 수송도 빠르다. 현대 일본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 중국 군대의 집결과 수송은 일본 군대보다 느리며, 고사포대도 연습은 실시했으나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 중국 군대가 몇차례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을 때 일본과 교섭하여 정전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일본 군대의 지원군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 그때는 조건이 훨씬 가혹할 것이다."

여기에 19로군 지휘부는 이미 유하 방면에 14사단까지 상륙한 상태라고 오판, 전투기, 장갑차, 전차로 중무장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없다고 여겨 1일 밤에 철수했다. 이때 상하이로 수송되던 14사단이 이미 상륙해 있었다고 19로군이 오판한 데는 카와시마 요시코가 퍼뜨린 소문이란 주장이 있다. 철수한 19로군은 패배의 이유를 지원군을 충분히 보내지 않은 중앙에 돌리는 전문을 전국 각지에 보냈다.
"제19로군은 일본 군대에게 항전하여 한달이 넘게 고전하였다. 일본군은 무기가 우수하고, 수송이 민첩하다. 제19로군은 국민의 원조에 의기하고 병사들이 충용하여 육박전으로 사상자가 서로 겹쳐 쓰러지는 과정에서도 일본 군대의 선두 부대를 여러 차례 좌절시킬 수 있었다. 일본 군대는 2개의 사단이 더 증병되어 왔는데, 중국 군대는 제5군 이후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 2월 11일 중국 군대는 사상자가 심각하여 정면 전선에 집중하였고, 일본 군대의 여러 사단은 유하 방면으로 상륙하였다. 중국 군대는 지원병이 없어서 측면 후방이 위험에 처하였다. 이로 인해 부득이하게 3월 1일 밤에 전군이 제2 방위선으로 후퇴하여 저항하고 있다. 제19로군은 탄약이 다하고 병졸 한 사람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일본 군대와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문제는 5군은 19로군의 철수를 2일 오후 2시나 되어서야 알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공격에 혼자서 맞서 싸우며 격심한 피해를 입던 5군은 뒤늦게야 철수하기 시작하여 태창-안정진 선으로 후퇴했다. 이로서 1차 상하이 사변은 일단락되었다. 장개석 총통전을 지은 동현광은 다음과 같이 쓰면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19로군을 비판하고 있다.
"이 사건은 5주일 동안에 걸친 저항에 하나의 정기를 가져왔다. 장나이내와 차이팅카이는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또 제5군에 아무런 통고도 하지 않은채 제19로군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 그러는 동안에 장제스는 제19로군이 그의 충고에 따라 유하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믿고, 형세 만회를 위해 증원군을 파견했다. 증원군의 선봉은 정해진 날에 상하이 부근에 도착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장광나이와 차이팅카이가 전투포기 명령을 내린지 이틀 뒤였다."

19로군이 철수하자 일본은 켈리에게 다시 중국 군대의 선제적 철수를 요구하면서 27일에 정해진 동시 철수 조건은 깨지게 되었다. 하지만 외교부장 뤄원간궈타이치 모두 이 조건을 거부했다. 뤄원간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영국 군함에서 2월 28일 비공식적인 회담을 소집하여 5항의 기본조건을 정하였다. 중국 대표는 다음날 이를 접수하였으나, 일본은 대답이 없었으며 대규모의 군대로 중국 군대를 다시 공격하였다. 정전 협정이 체결되지 않는 이유는 일본이 성의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다시 조정회담에 나갈 것이지만, 영토를 할양하거나 국권에 굴욕적인 어떠한 조건도 거절한다."

또한 국제연맹 대표 옌후이칭은 일본을 맹렬히 비난했다.
"영국 군함에서 상의한 정전조건은 중일 양국 군대가 동시에 즉시 철수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바로 이 조건을 접수했으나, 일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일본군대가 갑자기 중국군 제19로군을 공격하여 제2방위선으로 퇴각하도록 압박하였다. 이후 일본은 3월 2일 밤 영국 켈리 해군 사령관에게 다시 정전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의 투항을 의미하는 것과 같았다. 중국은 만주사변 이래 상하이 사변까지 중일 충돌 사건을 국제연맹에 위탁하여 해결하려고 모색하였고, 국제연맹 이사회의 모든 평화의 방법을 접수하고 있지만, 일본은 국제연맹의 여러 결의안, 맹약, 부전조약, 구국공약을 모두 경시하고 있다. 일본 군대 10여만명이 상하이로 지원되어 와 있고, 일본 전투기의 폭격으로 쑤저우, 항저우의 시민들 7천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로써 국제연맹의 결의안, 맹약, 부전조약, 구국공약의 모든 규정은 공문에 불과하게 되었다."

3.10. 송호정전협정

1932년 3월 3일, 국제연맹 총회에서 상하이 사변이 주요 의제로 오르고 열강이 일본에 대해 강경해질 것을 예측한 외무성이 정전 성명을 발표함으로 열강의 분노를 억누르려 했다. 시게미쓰 공사는 3일 여명, 노무라 사령관에게 연락하여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일본은 정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무라 사령관의 의향은 어떠한가?"라고 문의했다. 이에 노무라 사령관은 "우리에 관한한 이견은 없다. 그러나 육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라고 대답했다. 시게미쓰 공사는 제네바와의 7시간의 시차를 이용하여 임시총회 개최 이전에 정전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 육군과 상담을 거치지 않고 "일본군은 오늘날 상하이에서 전투를 치른 결과 출병의 목적을 완전하게 달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즉시 전군에 대해 정전할 것을 결정하였다."라고 설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내외 통신사에 보도하게 했다. 시라카와 사령관 역시 정전에 사후 동의를 하였고 이로써 일본군의 공식적인 군사행동은 종결되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이 완전히 근절되진 않았다. 한편 3월 4일 국제연맹 총회에서 노르웨이, 멕시코, 그리스 대표 등이 잇달아 일본을 규탄했으며 대일 규탄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32년 3월 4일 국제연맹 대회 결의안
1. 중일 양국 정부는 즉시 필요한 방법을 채택하여 양국 군사 당국이 정전 명령을 하도록 한다.

2. 상하이에 특별한 이익을 가지고 있는 열강은 전항 방법의 실행 상태를 대회에 보고한다.

3. 중일 양국 대표는 상술한 열강의 육군, 해군, 무관 각 당국의 협조로 협상을 개시하여 방법을 정하도록 건의한다. 이 방법은 전쟁을 중지하고 일본 군대의 철수를 규정하는 것을 확정해야 한다. 본 대회는 상술한 열강들이 수시로 협상 상황을 보고하기를 희망한다.

3월 11일, 국제연맹은 3월 4일 결의안을 상기하며 일본 군대 철수 지역의 치안에 협조해달라고 열강에 요청하였으며 또한 19개국 위원회를 조직하여 중일 양국의 충돌을 전문적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30일, 국제연맹은 다시 일본 군대 철수를 결의하였다.

결국 5월 5일 송호정전협정이 체결, 양군의 철수가 결정되었으며 정전협상에 따라 5월 6일 일본군이 철수를 시작, 5월 31일 완전히 철수하였다. 외교부장 뤄원간은 협정 체결 이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시원치 않은 심정을 드러냈다.
"상하이 정전회의는 국제연맹의 결의안에 의거하여 소집된 것으로써 정전과 철수에 대한 협상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비밀 문건이나 구두 양해와 같은 것은 없었다. 상하이의 안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원탁회의가 개최된다면, 그 원탁회의에서 토론되어야 할 사항은 동북 지방의 만주사변을 포함한 모든 사항이 되어야 한다."

시원치 않은 결말에 난징 정부는 크나큰 국민적 저항에 부닥쳤다. 중국에서는 일본과 전면전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국민당과 난징 정부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과 싸울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여론의 요구는 무리한 점이 있었다.

4. 결과

4.1. 중일 양측의 피해규모

한달간 벌어진 싸움에서 일본은 9만명의 병력과 군함 80척, 항공기 300대를 동원했으며 공식적으로 634명의 전사자와 1,791명의 부상자를 냈다. 중국군은 5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공식적으로 1만 3천명의 피해를 냈는데 중국은 일본군이 최소 5천명의 피해를 냈다고 주장했다. 우스이 가쓰미의 만주사변에 따르면, 당시 중국 피해는 사상자 1만 4326명, 일본 피해는 사상자 3091명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그 넓은 만주에서 일본군은 500명도 안되는 전사자를 냈는데 상하이의 중국군은 만주의 50만 대군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전과를 올린 셈이 되겠다. 후지와라 아키라는 일본군의 상하이 작전에 대해서 실패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군 9사단 7연대 대대장 구칸 노보루 소좌가 전투 중에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정전 이후 소환되었고 수치심에 자결하는 일이 있었다.

4.2. 만주국의 수립

1932년 6월 14일 제62의회 중의원 본회의에서 정우, 민정당이 공동으로 만주국 승인안을 제출했고 이는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8월 25일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은 '초토 연설'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1932년 9월 15일 일본은 만주국과 일만의정서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5. 여담

6. 참고 문헌

7. 1930년대의 주요 사건



[1] 19로군 사령관.[2] 상하이 시장.[3] 송호 경비사령관.[4] 지상전투병력은 7만 7천명 정도.[5] 영국이 5억 3400만 위안, 일본이 3억 8천만 위안, 미국이 1억 6300만 위안, 프랑스가 1억 300만 위안을 투자했다.[6] 주로 12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했다.[7]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오판이었다. 훗날의 2차 상하이 사변과 달리 1차 상하이 사변은 일본군의 군사행동이 상하이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고 주목적도 상하이 인근의 병탄이 아니라 만주국 수립을 위한 여유 확보에 있었기 때문이다.[8] 1차 상해사변 당시 현지 주력 기갑차량으로 일부 차량은 훗날 2차 상해사변에도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