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IA 타이거즈 1기 시절과 삼성 라이온즈 시절
KIA 타이거즈 No.77 |
조계현(趙啓顯) |
(출처 : 포토로) |
삼성 라이온즈 No.77 |
조계현(趙啓顯) |
(출처 : 포토로) |
2001년 시즌을 마치고 두산에서 방출되어 은퇴한 후, 2002년에는 KBS의 제안을 받아 해설위원 생활을 했다. 이후 김성한 감독의 부름을 받아[1] 2003년 KIA 타이거즈의 1군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6년 만에 친정 팀으로 돌아와 2005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코치진 교체의 여파로 인해 물러났으나 선동열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이 당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는데, KIA 투수코치 시절에는 김진우에게 너클볼을 장착시키려다 제대로 망한 전적이 있고 이후 기아가 꼴지에서 해매자 결국 2군으로 내려가더니 아예 경질되었다. 게다가 김성한 감독이 이강철, 신용운과 김진우 등을 혹사시킬 때에 투수코치였던 조계현은 대체 한게 뭐냐는 비판도 제기되었을 정도.
삼성에서는 윤성환을 조련시킨 것을 제외하면 잉여 투수들을 올리고 털리느라 팬들로부터 까였다. 특히 2009 시즌에는 조현근-최원제-김상수 + 박성훈-차우찬, 소위 조원수박차라 불리는 미완성된 투수들을 심심할 때마다 올리고 털리는 일을 반복하여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2]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투수코치로 있을 때 성장한 윤성환은 조계현과 마찬가지로 빠른 구속보다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자와 승부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윤성환은 다양한 변화구보다는 속구-커브의 투 피치로 타자와 승부할 때가 많다는 게 차이점.
결국 팬들의 열화 끝에, 성적이 떨어지던 2009 시즌 막판에는 2군 투수코치로 내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비코치였던 김용국과 함께 2009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했고, 삼성 팬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의 후임으로 오치아이 에이지가 온 후 삼성의 불펜진이 철벽 포스를 내뿜기 시작하자, 조계현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용국은 넥센에서 1년간 있다가 나중에 류중일 감독이 요청하여 복귀하긴 했지만.
2. 두산 베어스 시절
두산 베어스 No.75 |
조계현(趙啓顯) |
(출처 : 포토로) |
2010 시즌부터 본인이 현역 말년을 보냈던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하며 2001년 이후 9년 만에 두산으로 돌아왔는데, 선발-불펜 할 것 없이 두산의 투수진을 초토화시켜 놓는 위업을 달성했다. 용병들과 김선우를 제외하고 선발진이 모조리 개박살났으며, 패전조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롯데의 양상문, 한화의 이상군, KIA의 이강철과 함께 KBO 최악의 막장 투수코치로 꼽혔으며, 두산에서도 2군으로 밀려난 후에야 겨우 두산 투수진이 기사회생했다. 사실 선수들이 못하는데 코치가 다 잘못한것처럼 말하는것도 웃기는 일이다. 특히 두산 김경문의 운영이라면.
하지만 2011년 5월 이후부터 다시 1군 투수코치로 올라왔다. 헌데 그전에 올라왔던 사람이 윤석환이었기 때문인지 이전보다는 평판이 조금 나아졌다. 예로 노경은-김강률 등의 투수들이 구위가 개선되며 호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에 일부 두산 팬들이 호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노경은의 구속이 150km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르난도 니에베 역시 초반과 달리 불펜에서 각성해서 맹활약하였다. 페르난도의 초반 부진 이유는 성실하고 싹싹한 더스틴 니퍼트와 달리 투수코치들의 투구 조언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조계현이 그 자리에서 변화구를 몇 개 던져 주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마운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 일단 투수들을 다독여 주고, 격려해 준다는 것.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기존의 윤석환이나, 달감독같은 경우 도망가지 말고 맞더라도 "걍 네 공 믿고 가운데 찔러넣어"를 주문하며 타자와 피하는 투구를 하는 투수들을 갈군다면, 조계현은 "괜찮어, 슬금슬금 던져, 변화구 가르쳐 준 것도 쓰고..." 하면서 조용히 다독이는 편이라 한다.
어쩌면 직구앓이, 파워직구 위주의 두산 투수들에게 변화구를 가르치면서 슬금슬금 피하면서 승부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두산 투수진에게 활력소가 되었던 듯. 2009년까지 직구위주의 공격 투구를 했던 김선우가 2010 시즌 이후로 여러 구종을 장착하면서 2011년에 16승을 달성한 것도 조계현의 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두산 베어스 팬들은 3~5선발 이후를 말아먹은 장본인으로 조계현을 꼽고 있다. 혹사로 기껏 발굴한 투수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은 계속되고 있으며, 변화구를 잘못 장착시켜 두산 투수들의 구속이 일괄적으로 5km씩 감속했다는 비판도 있다. 결과적으로 두산이 2011 시즌을 말아먹는 데 한 몫을 했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 물론 조계현 탓만 하기엔 김경문 감독이 투수진을 혹사시킨 것도 있었고 임태훈 사건으로 인해서 팀 분위기가 박살난 것도 있는지라....
3. LG 트윈스 시절
LG 트윈스 No.71 |
조계현(趙啓顯) |
어수선했던 2011 시즌이 끝난 후 두산 베어스의 코치직에서 사임하고 올림픽 대표팀에서 코치로 함께한[3] 김기태 감독의 부름을 받아 LG 트윈스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4] 여태 맡았던 투수코치가 아닌 만큼 과연 수석코치로 어떤 활약을 할 지 기대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시즌이 개막한 이후 별다른 언론 노출도 없었으며, 투수 기용 및 관리에 있어서도 주로 차명석 1군 투수코치가 부각되는 등 투수 쪽에 개입하기보다 수석코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듯하여 LG 팬들에게 까이지 않았다.
2012년 9월 12일 SK전에서는 5살 연하[5]인 김기태 감독이 경기를 포기하는 것[6]을 말리다가 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다음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나타난 걸 보면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본인 말에 의하면 말리는 걸 김기태 감독이 뿌리치는 과정에서 저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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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LG의 성적이 좋아지면서, 김기태 감독을 잘 보좌하고 있는 것 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감독이 야수 출신인 만큼 투수 출신으로서 이것저것 조언해준 듯. 물론 투수진의 안정화는 차명석 투수코치의 공이 크지만...
2014년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갑작스럽게 사퇴했지만, 구단이 사퇴를 수리하지 않은 상태이고 여전히 엔트리에는 김기태 감독이 올라와 있어서 사실상 감독 대행임에도 공식 직함은 여전히 수석코치인 어정쩡한 상태에서 팀을 이끌었다.
LG 프런트에서는 조계현에게 감독 제의를 했으나, 김기태 감독과의 의리를 지켜 사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 조계현이 사실상 감독 대행역을 하면서도 처음부터 자신을 "수석코치"로 못박아 둔 것을 보면, 일부 조계현까들이 주장하는 대로 겸손을 가장한 언플은 아닌 듯하다.[7] 어쨌든, 기대한 성적반등은 없었지만,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백창수를 1군에 꾸준히 기용한 것만큼은 호평을 받고 있다.
2014년 5월 11일,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고, 5월 12일 LG 트윈스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된다.
시즌 막판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차출되었다.
4. 다시 KIA 타이거즈 코치로
KIA 타이거즈 No.76 |
조계현(趙啓顯) |
선동열 감독이 재계약 파동 이후 재계약을 안 하는 쪽으로 가게 되면서 김기태가 2015년부터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기태를 따라 친정 팀 KIA 타이거즈로 팀을 옮겼다. KIA에서도 보직은 LG 시절과 똑같이 수석코치다.
당초 kt wiz에서 2군 감독으로 영입을 타진했지만, 김기태가 KIA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고민 끝에 KIA 타이거즈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조계현이 KIA로 옮기자, kt wiz는 두산 베어스에서 2군 감독을 맡고 있었던 황병일을 2군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김기태 감독과의 호흡은 여전히 잘 맞는 편. 무지 재미있고 유쾌한 성격이라 선수들이 많이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한다. 결국 우승까지 이르렀다.[8]
2017 시즌에 KIA 타이거즈가 우승하자 그룹 인사에서 기아자동차 사장이 겸직하던 구단 사장직을 단독으로 변경하면서 허영택 단장이 구단 사장으로 영전했다. 동시에 조계현 수석코치가 신임 단장으로 영전하면서 모기업, 현장, 프런트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게 되었다.
[1] 전임 투수코치였던 김봉근이 감독과의 마찰로 물러나면서 새롭게 인선되었다.[2] 이후 위의 잉여 라인(...)에서 조현근은 2009 시즌 후 경찰 야구단에 입대했으나 군 복무 중 2군 리그에서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제대 후 토미 존 수술까지 받고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채 2016 시즌 후 방출당한 후 은퇴했고, 최원제는 군 제대 후 결국 타자로 전향했다. 투상수와 박성훈은 시즌 후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됐다. 그나마 이적한 후에 김상수의 포텐셜이 터지기는 했다만 삼성 입장에서 이득은 없었다. 그나마 차우찬이 이듬해인 2010년 승률왕에 오르며 포텐이 터지긴 했는데, 이쪽도 이후 6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는 등 2년 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2013년부터 삼성의 주축 투수로 활동하며 2015년에는 탈삼진왕에 올랐고 시즌 후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2016 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무려 4년 95억이라는 대박을 터뜨리며 LG로 이적했다.[3] 사실 김기태와는 삼성에서 1999 시즌에 한솥밥을 먹기도 했었다.[4] 당초에 김기태 감독은 염경엽 수비코치에게 수석코치를 권했으나 염 코치가 파벌설 등의 루머를 이유로 고사하고 넥센 히어로즈 주루코치로 옮겼다.[5] 사실 학번은 3학번 차이난다. 조계현은 유급한 64년생이어서 65년생과 같이 학교를 다녔고, 김기태는 69년생이지만 1년 조기입학을 해서 68년생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6] 9회 2아웃 2루 상황에서 박용택 대타로 신인 투수 신동훈을 기용한 것. 그것도 이전에 투수로 등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데뷔전을 대타로 치른 것이었다.[7] 수석코치는 대체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감독이 자신을 보좌하기 위해 데려오는 경우고 두번째는 감독을 중간에 잘랐을 때, 보험을 위해 프런트에서 선임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김기태가 감독에 취임하면서 영입한 조계현, 그리고 2011년 선동열이 KIA에 부임할 때 데려온 이순철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계현이 김기태가 사라진 이후 감독대행을 계속 맡기도 좀 껄끄러웠을 것이다. 후자의 범주는 2009년 당시 조범현 KIA 감독 아래서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종모, 그리고 2006년 이순철이 LG 감독을 사임한 후, 감독대행을 맡았던 양승호가 있다. (사실 김기태 자신도 박종훈 밑에서 프런트 보험용 수석코치를 했다.) 기아가 해당년에 우승한 후, 조범현의 발언권이 높아지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자신과 인연이 전혀 없고 껄끄러운 관계였던 김종모를 자른 것이었다.[8] 물론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KIA가 2차 드래프트 1라운드로 데려온 배힘찬이 드럽게 못하고 있는데, 배힘찬을 데려온 김기태만 욕 먹었지만 사실 배힘찬을 뽑자고 얘기한 사람은 조계현 수석코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