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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 | 스쿼드|스쿼드(간략)|U-21 스쿼드|임대|U-18 스쿼드|위민 | ||
스태프 | 보드진 및 스태프 | ||
역사 | 역사 · 역대 시즌 · 유니폼 · 응원가 · 기록 | ||
역대 시즌 | 2004-05 · 2005-06 · 2006-07 · 2007-08 · 2008-09 · 2009-10 · 2010-11 · 2011-12 · 2012-13 · 2013-14 · 2014-15 · 2015-16 · 2016-17 · 2017-18 /리그 · 2018-19 /리그 · 2019-20 /리그 · 2020-21 /리그 · 2021-22 /리그 · 2022-23 /리그 · 2023-24 /리그 · 2024-25 /리그 | ||
주요 인물 | 역대 감독 · 역대 올해의 선수 · 레전드 | ||
응원가 | 응원가 목록 | ||
더비 매치 | 북서런던 더비 서런던 더비 | ||
구단 시설 | <colbgcolor=#034694><colcolor=#ffffff> 경기장 | 스탬퍼드 브리지 · 킹스메도우 | |
훈련 시설 | 코밤 트레이닝 센터 | ||
스폰서 | 나이키키트 스폰서 · 인피니트 애슬레틱메인 스폰서 · 트리바고트레이닝 키트 스폰서 | ||
기타 | 등번호 저주 · 첼시 마이너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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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자취를 남긴 인물
1.1. 첼시의 위대한 인물
1.1.1. 1950년대
- 테드 드레이크
첼시의 1972R 리그 우승을 지휘한 감독
한 시즌 44골을 기록하여 아스날의 한 시즌 최다 득점자 타이틀을 갖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골 결정력을 지닌 선수였던 테드 드레이크는 은퇴 이후 5년간 레딩 FC의 감독을 맡다가 1952년 첼시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 이후 자신의 선수 시절 유명세를 활용하여 좋은 선수들을 많이 영입해왔고 3번째 시즌이었던 1954-55 시즌 그는 첼시를 이끌고 첫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그 결실을 맺었다.
테드 드레이크는 첼시 유소년 팀에 대한 지원을 늘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지원한 첼시 유소년 팀은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빛을 발해 그리브스, 탬블링, 베너블스, 해리스, 홀린스, 오스굿 등 첼시의 역사에 남을 선수들을 1군으로 대거 올려보냈다. 또한 그는 첼시의 새 별칭인 '더 블루스'를 사용하도록 했고 기존 로고를 지팡이를 잡은 사자의 모습으로 바꾸는데 기여하였다.
- 로이 벤틀리
첼시의 첫 리그우승을 견인한 위대한 주장
그는 367경기 150득점으로 첼시 역사에서 득점랭킹 5위에 머무르고 있으며, 클럽에서의 8시즌 동안 팀 내 최고 득점자였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스탬포드 브릿지 홈팬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2018년 향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지미 그리브스
첼시 유스 역사상 최고의 골스코어러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골스코어 중 한명인 지미 그리브스는 비록 구단의 최다 득점자에 등극하지는 못했지만 유스 리그에서만 114골을 폭격하며 신기록 경신, 1군 데뷔 후 첼시 통산 169경기 132골이라는 압도적인 경기당 득점을 기록하고 밀란으로 떠났다. 밀란에서의 불행한 1년을 보내고 그리브스는 첼시로의 복귀를 원했으나 첼시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이적료 경쟁을 하길 꺼렸으며 그렇게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토트넘으로 이적한 이후에도 그리브스는 수많은 득점기록을 갱신했다.
그리브스는 2021년 향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공교롭게도 첼시-토트넘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두 팀 모두 구단에 헌신했던 뛰어난 골스코어러를 기리기 위해 경기전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1.1.2. 1960년대
- 피터 오스굿
첼시 유스 출신인 오스굿은 17세의 나이에 가진 데뷔전에서 2골을 득점하며 바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후 다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지만 부상에서 돌아온 오스굿은 이전보다 더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 이전의 우아하고 화려한 기술에, 신체적인 강인함까지 더해서 발이든 머리든 다양한 종류의 득점들을 기록했다. 첼시에서의 10년동안 오스굿은 항상 선발 라인업에 들었으며 1970년, 구단 역사상 첫 FA컵 우승 당시 결승전 포함 대회 전라운드 득점을 포함, 이후 두시즌 동안의 컵대회 결승전에서도 득점을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오스굿은 지난 2006년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스탬포드 브릿지 웨스트 스탠드 앞에 세워진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져 있다. 스탬포드 브릿지에는 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왕은 단 한명 뿐이었다.
- 바비 탬블링
프랭크 램파드 이전 구단 올타임 최다 득점자
또 다른 첼시 유스 출신인 탬블링은 지미 그리브스가 떠난 이후로 구단의 최고 득점원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1965년 리그컵 결승, 1967년 FA컵 결승에서의 득점, 리그 아스톤빌라와의 경기에서의 5골 득점 등 1960년대 탬블링보다 많은 득점을 기록한 첼시 선수는 없었으며 프랭크 램파드가 2013년 기록을 갱신하기 이전까지 40년간 구단의 올타임 최다 득점자로 남아있었다.
- 론 해리스
17세의 나이로 데뷔한 첼시 유스 출신 론 해리스는 이후 18년 동안 팀의 주전을 차지했다. 1965년 리그컵 우승 이후 1967~1972년 사이 4개의 컵 결승전 모두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으며 첫 FA컵 우승, 첫 유럽 대항전 우승인 컵 위너스컵을 들어올렸다.
해리스의 체력, 퀄리티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뛰어났던 것은 구단을 향한 그의 충성심인데 1970년대 구단의 재정이 안좋아지고 많은 스타들이 팀을 떠나면서 암흑기가 찾아와서 두번의 강등을 당했지만 해리스는 언제나 팀과 함께 했었다. 그는 수비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으며 The Chopper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터프한 태클과 단호한 성격으로 팀내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 피터 보네티
뛰어난 반사신경과 우아한 민첩성으로 The Cat이라는 별명이 붙은 보네티는 구단 올타임 두번째 출전 기록을 가지고 있다. 보네티는 1960년대, 1970년대 구단이 모든 성공을 이뤄낼 때 빠질 수 없는 핵심 멤버였으며 1970년 리즈와의 FA컵 결승전은 지금도 전설적인 경기로 남아있는데, 초반 상대 파울로 부상을 입고 심하게 절뚝였지만 경이로운 골키핑 능력으로 팀에게 트로피를 안겼으며 1년 후 레알마드리드와의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The Cat은 은퇴 후에도 첼시로 돌아와 골키퍼 코치로 팀에 헌신했다.
- 찰리 쿠크
첼시 FC 올타임 베스트 테크니션 중 하나
1966년 던디에서 이적한 쿠크는 웨스트햄과의 리그 데뷔전에서 잉글랜드 올타임 최고의 수비수, 바비 무어를 손쉽게 농락하면서 모든이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6시즌 동안 쿠크는 본인의 화려한 기량을 보여줬으며 1970년, 1971년 컵 대회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70년 FA컵 결승전에서 피터 오스굿의 동점골 이전의 드리블과 크로스는 첼시 FC 역사에 남게 되었다. 쿠크는 커리어 말년에 다시 첼시로 복귀해 젊은 선수들을 잘 이끌면서 팀의 승격을 도왔다.
1.1.3. 1970년대
- 레이 윌킨스
첼시 FC 올타임 최연소 캡틴
The Butch
첼시에서 유스생활을 보낸 윌킨스는 뛰어난 재능을 앞세워 17세의 나이로 팀에 데뷔했지만 동시에 팀의 주전 라인업에 해체되는 일이 발생한다. 윌킨스는 무려 18세의 나이로 팀의 주장을 맡았지만 팀의 강등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윌킨스는 이후 가장 뛰어난 선수로 팀의 승격을 이끌었으며 2부리그에서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 선수이자 슈퍼스타였다. 윌킨스는 선수 은퇴 이후 첼시로 돌아와 코치로서 잔루카 비알리, 루이스 필리페 스콜라리, 거스 히딩크, 카를로 안첼로티를 보좌했다.
윌킨스는 경기장 내에선 오만하고 공격적인 스타일로 The Butch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경기장 밖에선 화려하고 이색적인 페션으로 별명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 존 홀린스
컴플릿 미드필더
또다른 첼시 FC 유스 시스템의 산물인 홀린스는 17세에 데뷔한 이후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질주를 시작했으며 두차례에 걸쳐서 1960년대, 70년대, 80년대 동안 총 600경기에 가까운 출전 기록을 세웠다. 리그컵, FA컵, 컵위너스컵 석권에 주축이었던 홀린스는 뛰어난 시야을 앞세워 탁월한 볼배급과 안정적인 볼점유, 적절한 타이밍의 태클, 영리한 위치선정, 빠른 공수전환 능력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꾸준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였다. 그는 구단의 뛰어난 전성기 시절에 두번의 첼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첼시팬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보여줬다.
홀린스는 첼시에 감독으로 부임해서도 풀멤버스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1.1.4. 1980년대
- 케리 딕슨
1983년 여름 케리 딕슨은 1부 리그 승격을 위해 광폭 영입 행보 중이던 첼시에 영입되어 첫 해 2부에서 34골을 기록하며 1부리그 승격의 주역이 되었다. 또한 1부 리그에서도 24득점을 기록하여 리네커와 함께 득점왕에 올랐고 팀은 6위를 기록했다. 딕슨은 이 두 시즌 동안 첼시에서 100골을 득점하며 득점력을 과시했으나 다음 시즌 중 부상으로 시즌을 망쳤고 이 부상 이후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으나 팀이 강등된 시기에도 팀을 떠나지 않으며 1년만에 재승격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92년까지 첼시에서 193골을 기록하며 그 시점에서 바비 탬블링에 이은 첼시 역대 득점 2위를 달성했으며[1] 전성기를 지난 31세의 나이로 사우스햄튼으로 떠났다.
- 폴 카노빌
첼시 최초의 흑인 선수
폴 카노빌은 일관성이 없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 윙어로 볼 수 있지만 그는 1군 경기에 출전한 최초의 흑인 선수였고 팀 내의 여러 부분에서 편견을 극복해야 했다. 카노빌은 첼시에 소속되었던 1981년부터 1986년까지 5년간 103경기를 뛰었다. 그는 팀이 2부 소속이었을 때에 영입되어 1984년에 승격을 거둘 때 주축 선수였다. 1986년 첼시를 떠나 레딩 FC에 입단하였으나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인해 24세의 나이에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은퇴 후 카노빌은 암과 약물 중독을 이겨냈고 이후로는 첼시 FC 재단의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2022년 3월에는 무슬림에 대한 인종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는 톰 리케츠의 리케츠 가문이 추진 중인 첼시 인수 시도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다.
1.1.5. 1990년대
- 잔프랑코 졸라
매직 박스
작은 마법사
첼시에서의 7시즌 동안 졸라는 첼시팬들을 완전히 사로잡았고 두차례 첼시 올해의 선수, 2003년에는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98년 위너스컵 교체출전 결승골, 노리치시티와의 공중 백플릭, 전설적인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을 농락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1997년 윔블던과의 FA컵 준결승전 원더 중거리슛 등등 마법과 같은 수많은 장면들이 첼시팬들의 기억에 남았다. 졸라는 기량이 하락한 30대 중반에 나이에도 16골을 기록하며 팀의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이끌었다.
무엇보다 졸라는 언제나 본인의 축구를 즐겼으며 거의 모든 상대팬들한테도 인기가 많았다.
- 마르셀 드사이
첼시에 입성하기 직전 드사이는 챔피언스 리그 2연패, 세리에 A 2연패와 첼시 선수가 된 후 6주만에 월드컵 우승이라는 압도적인 커리어를 자랑했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어난 호흡을 보여주던 프랑크 르뵈프와 첼시에서도 강력한 수비 체제를 구축하면서 팀을 챔피언스리그권 진입, FA컵 우승이라는 업적을 이뤄냈다. 거기에 첼시 소속 기간일 때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UEFA 유로 2000 우승도 경험하였다.
무엇보다 드사이가 첼시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첼시 올타임 베스트 캡틴 존 테리의 튜터를 자청하면서 그의 성장을 이끌어준 것이다.
- 데니스 와이즈
커티
팀에서 11년동안 445경기를 뛴, 존 테리 이전 첼시의 위대한 주장
데니스 와이즈는 당시 거친 플레이로 인해 크레이지 갱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윔블던 FC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1부로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90년 첼시에 영입되어 시즌 두 자리 수 골을 두 차례 연속 기록하는 등 미드필더임에도 뛰어난 득점능력을 보여줬다. 이전 주장 앤디 타운젠드가 팀을 떠난 1993년 주장 완장을 이어받아 1997년 FA 컵 우승, 1998년 UEFA 컵 위너스 컵, 리그컵, 슈퍼컵에서 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그는 한때 크레이지 갱의 멤버였고 선수로서의 유명세만큼 커리어 내내 카드를 수집하고 다니는 과격한 플레이로도 유명했다. 전성기가 완전히 지난 2001년 그는 160만 파운드에 레스터로 이적하며 첼시와의 긴 여정을 끝마쳤다.
그림에는 그려지진 못했지만 분명 들어가야 할 선수이며 올드 첼시 팬이라면 동의 할 것이다.
-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
지미[2]
하셀바잉크는 18년 선수 커리어 동안 10개 구단에서 245골을 넣으며 활약했지만 그 빛나는 선수 생활 정점은 단연 첼시 시절이었다. 15M이라는 클럽 레코드로 합류한 이후 그의 이적료는 염가로 평가되었다. 지미는 아이두르 구드욘센과 치명적인 투톱을 구축하면서 팀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선수 개인으로서는 두차례의 EPL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이후 지미는 미들즈브러, 찰턴, 카디프에서 뛰었는데 아이러니하게 그의 찰턴 첫 골은 다름이 아닌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터졌다. 득점 직후 지미는 친정팀 예우로 골세레모니를 하지 않았으며 홈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 로베르토 디 마테오
전성기에 돌입한 이탈리아 국가대표 디 마테오는 4.9M이라는 당시 구단 역대 최다 이적료로 첼시에 합류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눕는 포즈를 취한 세레모니와 뛰어난 중거리슛 능력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1997년 FA컵 결승전 득점, 98년 리그컵 결승전 득점, 2000년 FA컵 결승전 득점이라는 걸승 득점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3번의 다른 컵 결승전에서 득점을 기록한 두번째 첼시 선수로 기록되었다. 디 마테오는 위너스컵 우승, 챔피언리그 8강 진출에 핵심이었지만 2000년 UEFA컵에서 삼중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당해 은퇴를 하게 되었다.
로비는 2011년 구단에 복귀하여 처음에는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의 수석코치로 일했으나 2012년 3월 보아스가 성적부진으로 경질당하자 임시 감독 대행으로 임명, 리버풀과의 FA컵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그의 전설적인 입지를 더 올렸으며 첼램덩크라는 기적으로 구단에게 첫 빅이어를 안겨주었다.
- 루드 굴리트
총알 헤더
첼시 FC 역사상 첫 슈퍼스타
첼시의 역사에서 몇 명만이 클럽의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고 말할 수 있지만, 루드 굴리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중 하나였다. 1995년, 전 발롱도르 위너가 AC밀란으로부터 영입되었을 때, 그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스탬포드 브릿지로 합류한 적은 없었다.
노쇠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비록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굴리트는 단 한 시즌만으로도 첼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거론될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선수 겸 감독으로서 1997년 FA컵 결승에서 미들즈브러를 2-0으로 꺾으면서 첼시 최초의 외국인이자 흑인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26년이라는 길고긴 무관행진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다음시즌 뛰어난 선수들을 많이 영입한 굴리트는 시즌 초반 좋은 성적으로 순항했으나 구단과의 계약 문제에 따른 불화로 경질되었다. 굴리트의 유산을 이어받은 잔루카 비알리는 리그컵과 컵위너스컵을 우승하였다.
1.1.6. 2000년대
- 존 테리
Mr.Chelsea
철의 수비수
Captain, Leader, Legend
첼시의 영원한 캡틴
1995년, 웨스트햄에서 넘어온 유스가 첼시와 계약한다. 센터백으로 자리를 잡은 뒤, 첼시로 넘어온 스타 플레이어인 마르셀 드사이 옆에서 성장하며 함께 첼시의 수비진을 이끌었다. 이후 무리뉴가 첼시에 부임한 뒤, 주장 완장을 달고 약 20년간 팀을 이끈 그는 항상 팀을 지탱했다. 그 뒤, 2012년 빅 이어를 들어올리며 커리어에 챔스 우승을 추가시키는데 성공했고 첼시를 떠나기 전까지 팀에 헌신했다. 그는 첼시에서 1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마지막 첼시의 경기에서 26분에 케이힐과 교체되며 영광스러운 첼시 생활의 막을 내렸다. 존 테리 특유의 몸을 사리지 않는 수비인, 일명 걸레수비를 바탕으로 무리뉴와 함께 첼시의 팀컬러를 만들어준, 첼시의 영원한 캡틴으로 기억되고 있다.
- 프랭크 램파드
Super Frankie
첼시 FC 올타임 최다 득점자
푸른 심장
2001년, 웨스트햄 출신 유스 미드필더 1명이 첼시로 넘어왔다. 2004년, 무리뉴가 첼시에 새로 부임하고 절정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2009년까지 마이클 에시엔, 클로드 마켈렐레와 함께 첼시의 중원을 책임졌으며 특히 미하엘 발락과 이루는 삼각편대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강력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011년에는 팀원들과 함께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 빅이어를 들어올렸고 2014년 팀을 떠날 때까지 존 테리와 함께 부주장으로서 팀을 지탱했다. 은퇴 후 첼시의 감독으로서의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현역 시절, 첼시에서의 그의 퍼포먼스와 득점력은 첼시 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 디디에 드록바
The Peacemaker
Blue till I die
2003년 드록바는 리그앙 마르세유에서 한 시즌 활약 후 무리뉴의 부름으로 첼시로 이적한다. 첫 시즌엔 아직 만개하지 않은 포텐과 아쉬운 결정력으로 인해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바로 다음 시즌, EPL에 점점 적응하기 시작하던 드록바는 팀의 핵심 공격 자원으로 성장하였으며 2007년과 2010년, 득점왕을 수상했다. 2012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는 경기 종료까지 3분도 남지 않은 시간, 동점골을 떠트리며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마지막 승부차기 주자로 나서 성공시키며 팀의 첫 챔스 우승을 안겨주었다. 이후 2014년 첼시로 돌아와 리그 우승을 하며 마지막으로 첼시를 떠났지만 위급할 때 터져 나오는 그의 클러치 능력, 시원한 결정력은 아직까지 첼시 팬들의 뇌리 속에 박혀있다.
- 페트르 체흐
Big Peter
2004년, 쿠디치니의 백업으로 스타드 렌에서 7백만 파운드에 유망주 키퍼가 첼시에 넘어온다. 그렇게 첼시로 오게 된 체흐는 데뷔 첫 시즌, PL 역대 리그 최소 실점 우승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팀에게 리그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2006년 10월 14일 레딩전에서 스티븐 헌트와 충돌하며 두개골 부상을 입은 그는 3개월 후 헤드기어와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2012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로번의 PK와 승부차기에서 2번의 킥을 막아내며 팀의 첫 챔스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그는 2015년, 11년간 헌신했던 팀을 떠났지만 2019년에 다시 돌아와 팀의 테크니컬 디렉터를 도맡기도 했다. 끔찍한 부상을 당했음에도 다시 돌아와 오랜 시간 골문을 지켜준 그는 아직까지도 첼시 역대 최고의 골키퍼를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한다.
- 주제 무리뉴
The Special One
첼시의 상징
1.1.7. 2010년대
- 에덴 아자르
세계에서 가장 탐나는 영건이었던 아자르가 그가 성장한 클럽 LOSC 릴을 떠나 챔피언스리그 우승 팀과 계약할 것이라고 트위터를 통해 발표한 것은 2012년 여름이었다. 7년 후, 그는 첼시의 역대 최고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팀을 떠났는데, 프리미어리그 2회 우승, UEFA 유로파리그 2회 우승, FA컵과 리그컵 1회 우승을 이끌었다.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활약하면서 팀이 많은 성공을 거두는 동안 가장 빛나는 스타였던 아자르는 첼시에서 352경기에 출전하여 110골을 득점하였다. 아자르가 첼시에서 보여줬던 뛰어난 터치, 신체 밸런스, 그리고 폭발적인 스피드를 기반으로 한 기술과 속도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 게리 케이힐
Gazza
케이힐이 볼턴 원더러스 FC에서 수준급 수비 능력을 보여준 결과 2012년 1월 첼시에 합류했다. 그는 첼시의 전설이자 주장으로 국내와 유럽 무대에서 두 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포함한 많은 영예를 안은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였다. 그는 2014-15 시즌에는 존 테리와 함께, 2016-17 시즌에는 3백의 왼쪽 스토퍼로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해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테리의 퇴장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선발로 출장해 뮌헨을 상대로 보여준 120분간의 사투는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다. 그는 2017년 테리가 떠나면서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2019년 팀을 떠날 때까지 그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
Two Goal
2008년에 첼시와 계약을 맺은 이바노비치는 초창기 주전으로 기용되지 못했지만, 그 다음 시즌인 2009-10 시즌에 그는 라이트백을 맡아 태클을 하거나 전진할 타이밍을 잘 잡으며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는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중앙과 우측 수비 모두를 소화할 수 있었고 득점 능력 또한 인정받았다. 2012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할 때 나폴리를 상대로 놀라운 결승골을 터뜨리고, 이듬해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인저리타임 헤더골을 기록하며 유럽 대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다. 이바노비치는 2014-15 시즌에도 라이트백으로 전경기 출전하여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급격한 노쇠화로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제니트로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첼시의 역사적인 라이트백으로 기억되고 있다.
1.1.8. 2020년대 및 현재
비록 공홈, 벽화에 등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현재의 활약도와 팀내 위상으로 평가할 때, 첼시의 위대한 인물로 일컬어질 매우 유력한 인물들이다.-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
Dave
2012년 8월 24일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이적해 2019/2020 시즌부터 2022/23 시즌까지 첼시의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던 레전드. 첼시 소속으로는 유일하게 프리미어 리그, FA컵, 리그컵(카라바오컵),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 유로파 리그, 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을 모두 우승[3]해본 선수이다. 2023년 7월 6일부로 팀을 떠나며 11년간의 긴 여정이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 은골로 캉테
NG
레스터 시티에서 팀의 창단 첫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이끌고 첼시로 이적한 후 프리미어 리그와 UCL, UEL 우승을 주도했으며, 특히 챔스 결승에서 대활약을 펼치며 자신이 왜 월드클래스 미드필더임을 증명했다. 또한 첼시 소속으로 프랑스 대표팀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우승에도 공헌하였다. 7년 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첼시를 떠났지만 첼시의 역대 미드필더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공을 세운 선수이다.
- 토마스 투헬
램파드 감독을 경질하고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첼시는 급하게 소방수로 PSG에서 경질되고 온 투헬을 선임했다. 그리고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망가진 팀을 빠르게 정비하고 전력을 가다듬어 첼시에게 두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와 첫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안겨줬다. 로만 아브라모비치에서 토드 볼리로 구단주가 바뀌면서 첼시의 지휘봉을 놓게 되었으나 첼시의 역사에서 그의 업적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1.2. 기타 첼시의 상징적인 인물
1.2.1. 1950년대
- 켄 암스트롱
1946년 켄 암스트롱은 그가 나고 자란 브래드포드를 떠나 첼시에 합류했다. 거친 태클로 유명한 측면 하프백이었던 암스트롱은 첼시의 첫 리그우승 시즌 39경기에 출전한 주요 선수였다. 통산 11시즌 동안 402경기에 출전하며 전성기를 보낸 그는 33세의 나이로 첼시를 떠나 뉴질랜드에 정착했다.
뉴질랜드로 떠난 이후로는 대표팀 선수 겸 감독으로서 활동하다가 1964년 그만뒀다. 그는 1984년 별세했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 후 스탬포드 브리지에 흩뿌려졌다.
1.2.2. 1960년대
- 테리 베너블스
베너블스는 첼시 유소년 팀에서 탬블링, 해리스, 오스굿 같이 훌륭한 선수들이 계속해서 발굴되던 1960년대에 데뷔하여 앞에서 말한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21세의 젊은 나이로 주장 완장까지 차지했던 선수였다. 그는 주장으로 있는 동안 레스터와의 리그 컵 결승에서 직접 득점해 팀의 우승을 이끄는 등 뛰어난 활약을 했으나 1966년 토미 도허티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 토트넘에 입단했고 런던 팀들을 떠돌다가 은퇴했다. 그의 이적 이후 첼시의 주장 완장은 첼시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주장을 역임했던 론 해리스에게 넘겨졌다.
은퇴 이후에는 여러 구단에서 감독직을 역임했으며 한때는 잉글랜드 대표팀을 이끌기도 했으나 리즈 유나이티드의 전성기가 끝나는 시점에 부임해 끔직한 한 해를 보낸 이후로는 더 이상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
1.2.3. 1970년대
- 데이비드 웹
첼시가 유스 출신 스타 선수들로 잘 나가던 1960년대 후반 첼시에 합류한 웹은 1970년 FA컵 결승 재경기에서 헤더 골을 기록하며 첼시의 첫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이듬해 UEFA 컵위너스컵 우승 또한 가져오는 등 첼시의 황금기에 기여했다. 그러나 첼시가 1970년대 중반 재정난에 빠졌고 첼시는 웹을 12만 파운드에 QPR로 매각했다. 그의 포지션은 첼시 이적 이전에 센터백이었으나 첼시에서는 론 해리스의 존재로 인해 주로 라이트백으로 출전했다. 은퇴 이후에는 다양한 클럽에서 감독직을 맡았는데 1993년에는 첼시 임시 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1.2.4. 1980년대
- 팻 네빈
Wee Pat
피터 오스굿과 론 해리스로 대표되던 첼시의 황금기가 완전히 저문 1983년, 4년 연속 승격 실패라는 고배를 마시던 첼시는 당시 20세의 유망한 선수였던 팻 네빈을 영입했다. 그는 데뷔 시즌부터 14골을 터뜨리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고 다음 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잔류를 이끌었으나 그 다음 시즌에는 부진했다. 1985-86 시즌 후반부터는 다시 좋은 활약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나 1987-88 시즌 첼시는 강등되었고 네빈은 에버튼으로 떠났다.
- 콜린 페이츠
첼시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1970년대 후반에 유스 팀에서 콜업되어 데뷔한 콜린 페이츠는 1982-83 시즌 첼시가 3부리그로 강등될 수도 있는 위기에서 팀을 구해낸 이들 중 하나였으며 다음 시즌 중 주장 완장을 넘겨받고 첼시가 1부로 승격하는 것에 공헌했다. 1부리그에서도 준수한 활약으로 인정받았으나 1987-88 시즌 부상으로 팀이 강등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시즌 종료 후 찰튼으로 떠났다.
1.2.5. 1990년대
- 드미트리 하린
하린은 프리미어 리그 초창기 첼시의 주전 골키퍼이었으며 1994년 FA컵 결승행, 1995년 컵 위너스컵 준결승 진출을 이룩하는 등 전성기 시절 뛰어난 폼을 보여줬다. 그러나 클럽에서의 마지막 3년은 부상과 대체자 에트 더후이[4]의 영입으로 잔루카 비알리 감독이 벤치에 앉히는 일이 늘어나며 3시즌 동안 20경기 출전에 그쳤고 1999년 계약 만료 후 셀틱으로 떠났다.
- 스티브 클라크
스티브 클라크는 첼시가 강등되었던 1987-88 시즌에 이적해왔으며 이후 11시즌을 첼시에서 보내고 은퇴했다. 그는 첼시에서 421경기라는 많은 경기를 소화했고[5] 와이즈와 함께 많은 트로피 또한 들어올렸다.
사실 그는 선수로서의 커리어보단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로 더 알려져있는데 무리뉴 체제의 첼시에서 수석코치를 맡기도 했고 WBA의 감독을 맡아 팀을 PL 8위까지 올려놓기도 했으며 번번히 메이저 대회 예선에서 탈락하던 스코틀랜드를 이끌고 유로 2020 무대를 밟기도 했다.
- 그레이엄 르 소
첼시 유스 출신으로 첼시에서 첫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 르 소는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주며 주전급 선수로 자리잡았으나 한 포지션에 정착시켜 주지 않는 감독들과 불화를 일으켜 블랙번으로 떠났고 거기서 리그에서 손 꼽히는 레프트백으로 성장하여 우승도 경험했다. 그러나 팀 내 불화에 부상까지 겹치며 97년 다시 첼시로 돌아왔고 2003년까지 140경기를 뛰며 주전 레프트백으로서 리그컵, 컵위너스컵, FA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후 35세의 나이로 전성기가 지난 2003년 웨인 브릿지와의 스왑딜로 사우스햄튼에 입단, 2005년 은퇴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36경기나 뛰었을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으나 커리어 내내 부당한 게이 의혹으로 고통을 받기도 했다.
- 프랑크 르뵈프
1995년 RC 스트라스부르의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을 이끄는 등 주가를 높이던 르뵈프는 1996년 이탈리아 선수들을 긁어모으며 성장하던 첼시에 합류했다. 센터백이었지만 5년간 17골을 기록하며 당시 졸라-휴즈-비알리의 삼각 편대를 위시해 공격 축구를 하던 첼시의 득점력에도 기여했다. 르뵈프 영입은 첼시가 이후 프렌치 커넥션 수비진을 구축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는데 그의 영입 이후 첼시는 드사이, 프티, 데샹, 갈라스 등 프랑스 국적의 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르뵈프는 존 테리가 완전히 주전으로 성장한 2001년 팀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 잔루카 비알리
1996년 비알리는 루드 굴리트의 제안을 받고 60만 파운드라는 이적료를 기록하며 유벤투스에서 첼시로 이적했다. 첼시로 온 비알리는 첫 시즌만에 팀을 FA컵에서 우승시켰고 유로파 위너스컵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이후 1998년에 굴리트 감독이 경질되고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UEFA 컵위너스컵과 리그컵을 우승시켰다. 이후 2000년까지 첼시에서의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팀을 떠났다. 그는 단순히 중위권에 불과했던 첼시라는 팀을, 2000년대부터 첼시가 올라가도록 그 기반을 마련했다.
1.2.6. 2000년대
- 클로드 마켈렐레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페레즈에게 모욕적인 언사와 연봉 인상 거절을 당한 마켈렐레는 2003년 첼시로 이적했다. 무리뉴 체제에서 홀딩 미드필더 역할을 맡아 첼시의 전성기를 이끄는 활약을 선보여 첼시의 리그 최소 실점 기록을 세운 주역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미하엘 발락의 영입 이후로는 차츰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고 2008년 고국 팀 PSG로 이적, 그곳에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로는 다양한 클럽에 코치직을 맡다가 2019년부터 첼시에서 임대생 관련 업무를 수행 중이다.
- 아이두르 구드욘센
The Iceman
1990년대 말 당시 2부 리그였던 볼턴 원더러스 FC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구드욘센은 2000년 첼시에 합류해 데뷔 시즌 13골, 다음 시즌 23골을 기록하며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이후 그는 하셀바잉크와 투톱을 이뤘고 특유의 대단한 테크닉으로 하셀바잉크가 두 차례 득점왕을 이룩하는 것을 도왔다. 하셀바잉크가 떠나고 드록바가 합류한 2004년부터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위치를 옮겨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나 에시엔이 합류한 다음 시즌 입지를 잃고 발락까지 영입되자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이후 저니맨 생활을 하다가 은퇴했고 이후에는 아이슬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 히카르두 카르발류
FC 포르투의 트레블과 포르투갈의 유로 2004 준우승을 이끈 대세 센터백 카르발류는 포르투 감독이었던 주제 무리뉴가 첼시에 부임하면서 함께 첼시로 팀을 옮겼다. 뛰어난 태클 능력에 기반해 존 테리의 짝으로 자리잡은 카르발류는 첼시에서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부상으로 기량이 하락한 2008년부터 알레스에게 주전 자리를 내줬으며 결국 2010년 레알 마드리드 CF로 떠났다. 이후 모나코를 거쳐 은퇴한 카르발류는 안드레 빌라스보아스의 마르세유에서 코치직을 맡기도 했다.
- 조 콜
조 콜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유스였고 그의 눈부신 실력은 매우 어린 나이에도 눈에 띄었다. 2003년 웨스트햄이 강등되자 그는 스탬퍼드 브리지로 이적할 기회를 잡았고, 넓은 시야와 창조적인 능력을 보여줘 주제 무리뉴 감독의 지휘 아래 2005년과 2006년 프리미어리그에서 연속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양발을 잘 써서 좌우측을 가리지 않아 두 차례 큰 부상에도 첼시에서 오래 입지를 지켜 3번의 FA컵, 2번의 리그컵, 그리고 그의 마지막 시즌인 2009-10 시즌에는 3번째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는 첼시에 떠난 후 LOSC 릴에서 뛰기도 했는데 아자르의 첼시 이적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퇴 이후에는 첼시 유스에서 코치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 파울루 페헤이라
무리뉴와 함께 팀에 합류한 페레이라는 2004-05 시즌에 25번의 프리미어리그 무실점 수비를 펼쳤고, 50년 만에 첫 리그 우승을 거두는 데에 단 15골만을 허용하며 믿음직한 풀백의 모습을 보여줬다. 시즌 막바지에 부상으로 결장했으나 다음 시즌에는 팀에 복귀하여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2006년에 다시 리그를 우승했고 1년 후 페레이라는 새로운 웸블리에서 열린 첫 번째 FA컵 결승전에서 대표팀 동료인 호날두를 붙잡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2013년 은퇴할 때까지 주전으로 뛰지 않았지만, 페레이라는 중요한 경기들에서 활약을 펼쳤다. 그는 첼시와 함께 하며 10번의 주요 대회 우승을 거두었고 유로파 우승 트로피를 들고 은퇴식을 치렀다. 은퇴 이후로는 첼시의 임대 선수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 마이클 에시엔
들소
2005년 여름, 2440만 파운드라는 고액의 이적료로 영입된 에시엔은 한때 적응 기간을 겪으며 과도한 이적료를 지불해서 데려온 선수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완벽히 적응해 본디 평가대로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고 특히 2007년 FA컵 결승전에서는 히카르두 카르발류의 부상으로 센터백을 맡아 연장 혈투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집중력을 유지하여 우승에 기여했고 이런 활약상 덕분에 그해 첼시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에시엔은 인상적인 슈팅 능력으로도 유명세를 떨쳤는데 2006년 아스날전에서의 중거리 슈팅, 2009년 바르셀로나전에서의 왼발 발리슛 같이 인상적인 골들을 기록했다. 이후 2009-10 시즌부터 잦은 부상에 시달리다 원래의 신체 능력을 잃었고 레알 마드리드 임대를 거쳐 결국 2014년 AC 밀란으로 떠났다.
- 미하엘 발락
2006년, 발락은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을 한 뒤, 로만에 눈에 띄어 첼시로 이적한다. 예전만큼 압도적인 폼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시즌 초중반에는 팀의 에이스인 램파드를 훌륭히 보좌했고, 첼시 수비진이 줄부상을 당하며 꾸준히 선발출장했다. 존 테리와 램파드가 빠졌을 때 팀의 캡틴 역할을 수행했고 2008년에는 팀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이끌었다. 다음 시즌, 거스 히딩크가 부임한 이후로는 첼시 전술에 중심이 되었고 강력한 피지컬과 제공권을 바탕으로 팀을 지휘했다. 이후 마지막 시즌까지 첼시 미들진의 중추로 활약했으며 팀을 떠난 지금까지 팀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충성심으로 많이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 카를로 쿠디치니
2000년 잔루카 비알리에게 추천을 받고 첼시로 1시즌 임대를 간 뒤, 0203시즌까지 좋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골키퍼상까지 수상했다. 이후 체흐가 첼시에서 주전으로 자리를 잡고 주전경쟁에서 밀렸으나 팀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며 재계약을 했다. 그렇게 약 10년간 첼시에서 몸담으면서 체흐의 공백을 확실하게 채워주었고 주전 키퍼가 부상을 당해도 세컨드 키퍼가 쿠디치니였기에 첼시팬들은 키퍼 걱정을 덜 할 수 있었다. 이후까지 첼시에서 활약하며 팀을 떠났고 코치직으로 다시 첼시에 돌아와 팀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며 엠버서더로 활동하고 있다.
1.2.7. 2010년대
- 하미레스
2010년 400억원의 이적료로 첼시에 합류한 브라질 국가대표 미드필더 하미레스는 거액의 이적료로 인해 입단 초기 과대평가된 선수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다재다능하고 헌신적인 스타일로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활약했다. 특히, 챔피언스리그 우승 당시 준결승전에서의 칩슛은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이후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영입되기 전까지 주전으로서 활약하며 준수한 활약상을 남겼고 파브레가스의 영입 이후로는 든든한 로테이션 멤버로 자리를 지키다 2016년 29세의 나이에 중국 리그로 떠나며 적지 않은 이적료를 남겼다.
- 존 오비 미켈
영입 과정에서 맨유 유니폼을 입기도 하는 등 어지러운 영입전 끝에 2006년 첼시에 입단한 나이지리아 국가대표 미드필더 미켈은 그런 힘든 이적과정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미성숙한 플레이를 보여주며 벤치로 밀려났다. 그러나 마이클 에시엔의 부상을 틈타 출전 시간을 확보한 이후로는 부족한 스피드 등 여러 단점에도 괜찮은 볼키핑과 패스 스킬을 보여주며 꾸준히 로테이션 멤버로서의 출전 시간을 가져갔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도 기여하는 등 가장 빛나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마냥 저평가할 수도 없는 면모를 보여줬다. 이후로는 적은 출전시간에도 불평하지 않고 벤치를 지켰고 결국 2017년 1월 중국 리그로 이적하며 첼시와의 길었던 여정을 마무리했다.
- 윌리안
2013년 겨울 토트넘행이 유력하던 윌리안을 첼시가 하이재킹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뚜렷한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경쟁자가 영입될 때마다 그 경쟁자를 계속해서 뛰어넘으며 기량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고 2015-16 시즌에는 팀이 부진한 가운데 팀의 유일한 빛이자 돌격대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해당 시즌 보여준 대단한 프리킥 골들은 시간이 지난 이후로도 회자되는 인상적인 골들이었다. 이후로는 페드로 로드리게스와 경쟁하며 괜찮은 폼을 보여줬으나 2017-18 시즌 FA 컵 우승 이후 인스타그램에서 안토니오 콘테를 지운 우승 사진을 올리는 행각을 저지르기도 했다. 에덴 아자르가 떠난 2019-20 시즌에는 그의 등번호 10번을 받고 기복 있는 모습도 보였지만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시즌 종료 후 계약 만료로 아스날에 합류하며 첼시와의 인연을 끝맺었다.
1.2.8. 2020년대 및 현재
- 티아고 실바
2020년 8월 28일, 첼시 홈페이지에 오피셜글이 하나 올라오면서 PSG에서 8년을 뛰었던 센터백인 실바가 첼시와 정식으로 계약하게 된다. 그리고 첫 시즌만에 바로 여태껐 한 번도 들지 못했던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팀의 핵심 수비수로 자리 잡았다. 이후 계속 주전으로 활동하던 그는 2022-23시즌 첼시가 역대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혼자서 팀의 수비진을 안정화시키며 첼시 역대 올해의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자기 관리로 어린 후배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던 그는 2024년, 팀을 떠나며 첼시와의 동행을 끝마치게 되었다. 비록 4년뿐이었지만 팀이 암흑기로 접어들며 선수들이 빠져나갈 때 홀로 남아 끝까지 팀에 헌신한 실바의 모습은 첼시팬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1] 현재는 프랭크 램파드가 득점 기록을 경신하며 3위로 밀려났다.[2] 사실 하셀바잉크의 본명은 제럴 플로이드 하셀바잉크인데 한 회장이 하셀바잉크의 영입을 언론에 비밀로 하고 싶어 "지미"라는 선수와 계약했다고 밝혔으나 그와의 계약이었음이 밝혀지자 하셀바잉크는 선수생활 내내 제럴이 아닌 지미로 불려지게 되었다.[3] 첼시가 현실적으로 출전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를 제외하면 이벤트 성 대회인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트로피만 없다.[4] 2000년 카를로 쿠디치니가 영입되며 더후이도 백업으로 밀려났다.[5] 2021년 기준 첼시 역대 출장 순위 9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