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Οἰκουμενικὸν Πατριαρχεῖον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 |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의 상징[1] | |
<colbgcolor=#A32020><colcolor=#FFF> 창립자 | <colbgcolor=#FFF,#1F2023>사도 안드레아스 / 초대 총대주교 |
설립 | 330년[2] |
총대주교 | 바르톨로메오스 1세 |
본부 성당 |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537-1453) 거룩한 사도 교회 (1453-1456) 팜마카리스토스 교회 (1456-1587) 성 요르고스 성당 (1601-현재) |
산하 교구 | 525개 |
언어 | 그리스어, 튀르키예어 |
링크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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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교회의 14개 독립 교회 가운데 하나이며, 정교회 최고 기관이다.2. 명칭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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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 Οἰκουμενικὸν Πατριαρχεῖον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 |
Rum Ortodoks Patrikhanesi | ||
영어 | Ecumenical Patriarchate of Constantinople | |
러시아어 | Вселенский Константинопольский Патриархат | |
Цариградска васељенска патријаршија | ||
Patriarhia Ecumenica a Constantinopolului | ||
Вселенска Константинополска патриаршия | ||
კონსტანტინოპოლის მსოფლიო საპატრიარქო |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Οἰκουμενικὸν Πατριαρχεῖον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그대로 유래한 것이다. 반면, 튀르키예는 로마 정교회 총대주교청(Rum Ortodoks Patrikhanesi)이라 부르고, 총대주교는 로마 총대주교(Rum Patriği) 또는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İstanbul Rum Ortodoks Patriği)라고 부른다.
3. 역사
콘스탄티노스 대제의 천도 이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헤라클레아 대주교 치하에 있던 작은 소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4세기경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그리스의 비잔티움으로 천도하면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비잔티움을 '새 로마(Nova Roma)'로 명명하였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동로마의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다.천도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헤라클레아 대교구로부터 독립하였으며, 그리스 지역과 아나톨리아 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교계제도의 발전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대주교보다 상위에 있는 수좌 주교로 격상되었다. 이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해 4번째 총대주교좌가 되었다.[3]
4. 튀르키예 내 현황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역사는, 오랫동안 독립된 교황령이 있었고 로마 대약탈과 같은 사건을 제외하면 바티칸 포로 시절에조차 바티칸 경내만은 침범받지 않았던 로마 교회의 처지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수난과 오욕의 역사였다.오스만 제국은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하자마자 수도자였던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Γεννάδιος Σχολάριος)를 직접 세계 총대주교로 임명함으로써 처음으로 교회와 관계를 맺었다. 오스만 제국은 그 후 밀레트 제도로 정교회를 믿는 오스만 제국 내 모든 신민들에게 종교적, 세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밀레트 제도에 따라 오스만 제국 정부는 정교회 신자들로부터 징수할 세금을 세계 총대주교를 통해 교회에 할당하여 교회로부터 징수하였으며, 이에 따라 교회는 평신도들이 내는 십일조에 세금을 추가한 교회세를 신자들로부터 거두어 제국 정부에 할당량을 보낸 뒤, 나머지를 거두어 교회 살림에 운용했다. 기본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교회정책은 "니들 알아서 해라. 그런데 기어오르면 알지?"(...) 입장이라 교회를 통해 정교회 신자들을 통제했다. 교회가 제국 정부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세계 총대주교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세계 총대주교를 입맛에 맞는 인물로 갈아버렸다.
19세기 초 민족주의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리스인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는 등 제국 곳곳에서 소요사태를 일으키기 시작하자, 역시 시범케이스로 세계 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5세가 공개처형을 당하기도 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당시 그리고리오스 5세는 술탄 마흐무트 2세로부터 호된 질책을 듣고 그리스에서 일어난 독립전쟁을 두고 '종교도 없는 세속주의자들이 일으킨 소요사태에 불과하며 술탄께 충성하지 않고 반란군에 합류하는 이들은 파문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음에도[4] 1821년 4월 얄짤없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세계 총대주교의 처형과 더불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튀르크인들이 그리스인들을 학살했다. 하필이면 세계 총대주교와 그리스인들이 죽은 때가 그리스도교에서 최대 축일로 기념하는 부활절 주간이었고[5] 이 소식을 들은 독립군은 격분하여 보복으로 남부 그리스 일대에서 튀르크인들을 학살했고 아직 오스만의 통제 하에 있던 북부 그리스에서는 그 보복으로 튀르크인들이 그리스인들을 학살하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또한 이 소식을 들은 열강(특히 러시아)에서도 거세게 항의하고 친그리스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등, 그리고리오스 5세 처형은 그리스 독립운동을 더 거세게 불타오르게 만든 악수였다.
공화국 시기에 들어서는 1925년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 정교회 성립을 진지하게 논의하기도 했다. 세속주의 공화국을 바탕으로 한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이 바로 전해에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 종교부(T.C. 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가 이를 대신해 무슬림들을 통제한 것과 맞물려 국가가 그리스도인 또한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튀르키예 정부는 공화국 종교부가 이슬람과 관련된 일만을 하도록 하는 대신, 오스만 제국 시절 세계 총대주교가 지녔던 권한들을 중앙 정부로 회수하였다.
한편 세계 총대주교 스스로가 튀르키예에 주재하는 상태에서 튀르키예 당국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그리스인들이 교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만큼 지속적으로 이들을 견제했다. 먼저 세계 총대주교는 반드시 튀르키예 국적자여야 하고, 세계 총대주교를 선출하는 시노드의 구성임원들 또한 반드시 튀르키예 국적자여야 한다. 다만 에르도안 집권기 이후로 시노드의 구성 임원 자격 조건이 완화되어 외국인 주교라 하더라도 시노드에 참석하면 튀르키예 국적이 주어지게 되었다. 민감한 문제인 호칭에 있어서는 '세계 총대주교'라는 호칭을 과거에는 사용하지 못하게 했지만, 현재는 이것의 튀르키예어 표현인 Ekümenik을 언론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신학 교육과 외부 활동에서도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 특히 1971년 할키 신학교를 폐쇄함으로써 튀르기예 본토에서 사제 양성이 중단되었다. 이는 튀르키예 당국이 강경하게 고수하는 '교육에서의 세속주의' 원칙 때문에 종교적 색채가 강한 자율적 운영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폐쇄 압박을 받은 결과였다.[6] 이미 1924년 로잔 조약 체결 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아나톨리아 지역의 모든 그리스인들이 본국으로 추방되어 명의교구들만 잔뜩 양산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돌아가는 4개 관구만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이다. 후술할 5개 관구들이 교구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로잔 조약에 의거한 인구교환에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 및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은 예외로 쳤기 때문이었다.[7] 하지만 이 인구 교환으로 인해 150만 그리스인들에게 '소아시아 재앙'(Μικρασιατική καταστροφή)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리스인들이 빠져나간 데다가,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의 사이가 엄청 나빠지면서 나가지 않아도 되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엄청난 갈등을 빚었다.
정말 골때리는 것은 추방할 그리스인을 선별하는 기준이 바로 정교회 신자 여부였다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튀르키예어를 쓰고 튀르키예 문화 속에 산 사람도 정교회 신자가 되는 순간 '그리스인'으로 분류되어 추방되었다. 당연히 그리스에서도 그 역이 성립하여 그리스인 무슬림들도 모조리 추방당했다. 하지만 튀르키예어에 익숙하고 튀르키예풍 문화와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던 그리스인들은 정작 본국에서 그리스인으로 대우받지 못해 나중에 공산당이나 좌익 쪽으로 가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스보다 차별이 덜했던 튀르키예에선 그리스계 무슬림이 변두리로 나가 살아가다가도 돈을 벌어 이스탄불이나 대도시 지역으로 이주하여 상당수가 꽤 큰 부유층이 된 반면, 그리스로 간 그리스인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오랫동안 어렵게 살아갔다.
이러한 갈등은 현대에까지 지속되어 1955년, 키프로스에서 벌어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폭동을 근거로 벌어진 튀르키예인들의 보복 폭동(이른바 Istanbul Pogrom)으로 성당과 수도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리즈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해 20만여 명을 아우르던 그리스인들의 숫자는 1955년과 65년 사이에 그 1/4인 4만 8천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1978년 통계에서는 무려 7800명 선으로 급격히 위축되었다. 지속적인 튀르키예 당국의 압박[8]으로 전성기 이스탄불 주변 거주 그리스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2500명 선으로 떨어졌다.
현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아있는 정교회 성당은 생각보다 많고 대부분 로마 제국 시대로 소급되기까지 하지만, 정작 로마 제국 시대부터 남아있는 성당들 태반은 모스크 혹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성당으로 멀쩡하게 잘 쓰는 건물들은 19세기 근대 시대에 그리스인들의 세력이 잠시 커지면서 건립된 성당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벽돌에 고풍스러워 보이는 건물 대신 19세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석조건물과 높은 종탑들이 붙은 성당들이 많다.
현재 총대주교좌 성당인 페네르(Fener)[9]의 성 요르고스 성당. |
정교회의 본부격이지만, 정교회 성당 건축의 정수인 돔 형태 그리스 양식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인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총대주교좌를 3번 옮긴 끝에 19세기에 최종적으로 이곳에 정착했다. |
1054년 이후 정교회의 총본산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 소재지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었다. 그러나 1453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자 사흘만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모스크로 바뀌었다. 그 후 총대주교좌는 성 사도 성당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인 1454년에 수녀원이던 판마카리스토스(행복한 성모) 성당으로 옮겨져 132년 동안 총대주교좌로 있었다.
그러나 판마카리스토스 성당이 1591년 무라드 2세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전승을 기념하여 펫히예 모스크(Fethiye Camii)[10]로 바뀌면서, 1586년 총대주교좌는 다시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크실로포르타스 성당(Ιερός Ναός Αγίου Δημητρίου Ξυλόπορτας)으로 이전되었다. 그 후 1603년에 페네르의 아요스 요르고스 성당(Καθεδρικός ναός του Αγίου Γεωργίου, Aya Yorgi Patrikhane Kilisesi)으로 다시 옮겨져 지금까지 총대주교좌 성당으로 남아 있다. 또한 총대주교좌를 옮길 때 오스만 제국은 황실 예산을 탈탈 털어서 당대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으로 리모델링도 해주고 건축가들을 불러 화려하게 장식하게 하는 등 여러모로 지원했다.
총대주교좌 성당을 방문하려면 에미뇌뉘(Eminönü) 환승센터에서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 예니 보스나(Yeni Bosna)쪽으로 가는 아무 버스나 잡아탄 다음에 운카파느(Unkapanı)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 다음 바닷가를 등지고 길을 건넌 다음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이콘 기념품 가게 몇 곳을 지나친 다음(...) 삼거리까지 50 m 정도 올라갔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막다른 골목에 성당 입구가 있다. 만약 세계 총대주교를 만나고 싶다면 한국 정교회 암브로시오스 조그라포스 대주교의 추천서가 효험이 있다. 세계 총대주교는 방문객에게 30분 정도 말씀과 강복을 베푼 뒤에 초콜릿을 준다고 한다. 참고로 아무래도 이스탄불 토박이고 튀르키예 국적이라 튀르키예어가 매우 유창하다.
5. 관할 교구
전 세계의 정교회 관구들 | |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교구 |
현대 그리스의 정교회 관구 | ||
아테네 대교구 | ||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교구 | ||
아토스 자치주 | ||
크레타 대교구 |
이 문서에서는 구분을 위해 Metropolis를 수도 대교구로, Archdiocese를 관구 대교구로 번역했으나, 현재 한국 정교회에서는 Metropolis를 그냥 대교구로 번역한다.
현재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교구는 제외한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 대교구(총대주교 직할)
- 크레타 관구 대교구
- 고르티나 & 아르카디아 수도 대교구
- 레팀논 & 아블로포타모스 수도 대교구
- 카이도니아 & 아포코로노스 수도 대교구
- 람피&시브리토스 & 스파키아 수도 대교구
- 이에라페트라 & 시티아 수도 대교구
- 페트라 & 체로니소스 수도 대교구
- 키사모스 & 셀리노 수도 대교구
- 아르칼로초리온 & 카스텔리온 & 비아노스 수도 대교구
- 아토스 자치주
- 디아테이라&영국 관구 대교구
- 이탈리아 관구 대교구
- 오스트레일리아 관구 대교구
- 도데카니사 제도의 수도 대교구들(도데카니사에는 딱히 관구 대교구가 없다.)
- 카르파토스 & 카소스 대교구
- 코스 & 니시로스 대교구
- 레로스 & 칼림노스 & 아스티팔라이아 대교구
- 로도스 대교구
- 시메 대교구
- 그 외 수도 대교구들
- 오스트리아 대교구
- 벨기에(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 포함) 대교구
- 프랑스 대교구
- 독일 대교구
- 스웨덴과 스칸디나비아 대교구
- 스페인과 포르투갈 대교구
- 스위스 대교구
-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
- 토론토 대교구
- 캐나다 우크라이나인 대교구
- 미국, 오세아니아, 서유럽, 남아메리카의 우크라이나인 교구
- 파나마(중앙아메리카) 대교구
- 멕시코 대교구
- 홍콩 대교구
- 한국 대교구: 국내 정식 명칭은 '한국 정교회' 또는 '정교회 한국 대교구'.[15]
- 뉴질랜드 대교구
- 싱가포르 대교구
- 서유럽 러시아인 사목구들의 총대주교 관구 소속 대리교구(Exarchate)
- 상당수의 총대주교 소속 기관들과 파트모스 섬의 복음사도 성 요한 수도원, 아토스 산의 20개 대수도원과 수많은 은둔수도처의 수도원 공화국, 테살로니키의 역사적인 블라타디스 수도원과 성녀 아나스타시아 수도원 등과 같은 스타브로피기온 수도원[16]
현대 그리스 영토 북부에도 수도 대교구 36곳이 있는데, 이 지방은 그리스가 처음 독립할 당시에는 얻지 못하였다가 훗날 발칸 전쟁을 치른 후 그리스의 영토가 된 지역이다. 이 36곳 수도 대교구들은 원칙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관할하에 있으며, 기도를 할 때 세계 총대주교를 수석 주교로 삼는다. 이 대교구의 주교들에게는 자신 중 하나를 새 총대주교로 지명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아테네 대주교 하의 그리스 교회는 청지기로서 이 대교구들을 관리하는 것이며, 36교구의 주교들은 여전히 세계 총대주교에게 상소권을 갖는다.
또한 핀란드 대교구와 에스토니아 대교구(에스토니아 사도 정교회)는 본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관할이나 자치권을 인정받아 사실상 독립된 교회로 본다.
알바니아인 혹은 러시아인들이나 우크라이나인들이 미국과 캐나다 등 세계 각지에서 세운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아래로 들어온 교구는 대략 15개 정도이다.
6. 독립한 교회
- 불가리아 정교회 (870년 독립)
- 러시아 정교회 (1589년 독립)
- 그리스 정교회(아테네 대교구) (1850년 독립)
- 세르비아 정교회 (1219년 독립 / 1557년·1879년 재독립)
- 루마니아 정교회 (1885년 독립)
- 폴란드 독립 정교회 (1924년 독립)
- 알바니아 정교회 (1937년 독립)
-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정교회 (1937년 독립)
- 우크라이나 정교회 (2019년 독립)
[1] 성 요르고스 성당 정문의 꼭대기에 설치되어 있다.[2] 헤라클레아 관구로부터의 독립.[3] 기존 3개의 총대주교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이다.[4] 그리고리오스 5세가 독립전쟁을 비난한 이유에는 독립전쟁에 대한 오스만 당국의 보복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내 그리스인들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5] 부활절 성찬예배가 끝난 직후 오스만군이 성당에 들이닥쳐 그 자리에서 바로 세계 총대주교를 끌어내 성당 문 앞에서 바로 교수형에 처했다.[6] 이는 반기독교와는 다르다. 당시에는 엄격한 세속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이슬람 학교 또한 금지되었고, 이맘이든 신부든 랍비든 뭐든 종교인이 종교 행사를 제외하고 성직자복을 입고 돌아다닐 수 없었다. 반기독교라기보다는 반종교에 가까웠다.[7] 대신 그리스에서는 서부 트라키아 지역의 튀르키예인이 잔류하였다.[8]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이후, 튀르키예 당국은 그리스 시민권을 가진 이스탄불 및 주변 거주 그리스인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적성국 국민 혹은 스파이 혐의를 씌워 추방 형식으로 이들을 출국시키기까지 했다. 이들은 1924년 인구교환 대상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인들을 보내버린 것이었다.[9] 이스탄불 파티흐구에 있으며, 운카파느(Unkapanı) 옆동네에 있다. 옛 성벽 내의 시가지 중에선 비교적 외진 편으로, 이스탄불 내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집단 거주지이자 중심지인 구역이다.[10] 참고로 현재 총대주교좌 성당 근처에 위치해 있다. 걸어서 대략 5분 거리.[11] 대교구장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12] 지금의 튀르키예 부르사[13] 지금의 튀르키예 에디르네[14] 지금의 튀르키예 이즈미르. '스미르나'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개신교 개역성경에 나오는 '서머나'가 이곳이다.[15] 원래는 러시아 정교회 산하였지만 여기저기 담당 교구를 옮겨다녔다. 1897-1908년까지는 러시아 정교회 신성종무원 산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교구 아래 있다가, 1908~1917년까지는 블라디보스토크 대교구 산하. 1917년부터는 신성종무원이 다시 분할되며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로 옮겨져서 1921년까지는 블라디보스토크 대교구, 1921-44년까진 도쿄 대교구로 강제편입되었다. 이 때문에 1945년 광복 후에 한국 정교회의 재산은 일제의 적산으로 취급받아 싸그리 몰수되었다. (이때 몰수된 재산은 1965년 재판에서 승소하여 되돌려받았다.) 1945-49년까지는 하얼빈 대주교 관할의 동아시아 관구였다. 1949년, 디아스포라 러시아 정교회의 미국·캐나다 대교구에 편입된 직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사실상 러시아 대교구와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1956년. 신자들이 총투표를 하여 적성국인 소련의 러시아 정교회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산하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그리스 정교회 미국 관구 대교구 관할로 들어갔다. 1970년 뉴질랜드 수도 대교구로 편입되고, 1993년에 한국 교구로 정식으로 지위가 격상한 뒤 2004년 6월 20일 세계 총대주교청 직속 한국 대교구로 설정되었다.[16] 정교회에서는 수도원들이 일반적으로는 지역 주교의 관할 감독 아래 있다. '스타브로피기온 수도원'이란 다른 수도원들과 달리 지역 주교가 아니라 더 높은 교회적 권위, 그러니까 총대주교 혹은 거룩한 주교회의(시노드)가 직접 관할하는 수도원을 일컫는다. 수도원을 세울 때 관할 감독하는 교회적 권위의 표상인 십자가를 세우는 관습에서 이 용어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