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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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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영국의 대표적인 신문 더 타임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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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1996년 A. E. 밴보트 · 잭 윌리엄슨 · 존 W. 캠벨 · 휴고 건즈백
1997년 안드레 노튼 · 아서 C. 클라크 · 아이작 아시모프 · 허버트 조지 웰스
1998년 프레데릭 폴 · 할 클레멘트 · 로버트 A. 하인라인 · C. L. 무어
1999년 레이 브래드버리 · 로버트 실버버그 · A. 메리트 · 쥘 베른
2000년 고든 R. 딕슨 · 폴 앤더슨 · 시어도어 스터전 · 에릭 프랭크 러셀
2001년 잭 밴스 · 어슐러 K. 르 귄 · 프리츠 라이버 · 알프리드 베스터
2002년 마이클 무어콕 · 새뮤얼 딜레이니 · 도널드 월하임 · 제임스 블리시
2003년 케이트 윌헬름 · 윌슨 터커 ·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 데이먼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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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윌리엄 깁슨 · 이안 밸런타인 & 베티 밸런타인 · 리처드 파워스 · 로드 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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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더글라스 트럼불 · 옥타비아 E. 버틀러 · 리처드 매드슨 · 로저 젤라즈니
2011년 할란 엘리슨 · 가드너 도조와 · 빈센트 디 페이트 · 장 앙리 가스통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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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H. R. 기거 · J. R. R. 톨킨 · 주디스 메릴 · 조애나 러스 · 데이비드 보위
2014년 프랭크 프라제타 · 올라프 스태플든 · 미야자키 하야오 · 리 브래킷 · 스탠리 큐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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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C. S. 루이스
C. S. Lewis
파일:1__lLwTSvbqUe1Pe3ut8C50g.jpg
본명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필명 클라이브 해밀턴
Clive Hamilton
N. W. 클러크
N. W. Clerk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898년 11월 29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사망 1963년 11월 22일 (향년 64세)
잉글랜드 옥스포드
직업 작가, 문학 비평가, 방송인, 평신도 신학자, 기독교 호교론자
장르 소설, , 수필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경력 옥스퍼드 대학교 개별 지도 교수 및 평의원
케임브리지 대학교 중세 · 르네상스 문학 교수
배우자 조이 데이비드먼 (1956년 ~ 1960년, 사별)
종교 무종교(무신론) → 성공회
1. 개요2. 생애3. 기독교 신앙4. 작품
4.1. 나니아 연대기4.2. 기독교 관련4.3. 그 외4.4. 루이스에 대한 전기물
5. 개인적 이야기들
5.1. 아일랜드와의 관계
6. 한국에서의 입지7. 기타

[clearfix]

1. 개요

영국소설가이자 기독교 호교론자.[1]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철학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2. 생애

북아일랜드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까운 친구에게는 잭(Jack)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어머니의 사망을 계기로 15세부터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지만[2][3], 가톨릭 신자인 톨킨과 다른 친구들의 영향으로 30세 때인 1929년 성공회 신앙을 받아들여 성삼위일체(holy trinity) 성당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 동아리인 잉클링스의 멤버였으며,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J. R. R. 톨킨과 우정을 유지했다. 그는 개신교, 가톨릭 등 기독교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한 기독교 변증[4]과 소설, 특히 후에 영화화된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하다

언론으로부터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론자>라는 찬사를 받았고,[5] 뛰어난 필력으로 인간의 본성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신부나 제임스 패커 신부, 존 스토트 신부, 팀 켈러, 케빈 드 영, 존 파이퍼, 존 레녹스, 존 M. 프레임, 오스 기니스, 래리 크랩, 미로슬라브 볼프,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알빈 플란팅가, 톰 라이트 주교, 프랜시스 콜린스, 스캇 솔즈, 케빈 벤 후저, 마이클 리브스, 달라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 로날드 사이더, 셰인 클레어본, 프레데릭 비크너 같은 개신교ㆍ성공회ㆍ복음주의권 신학자나 사목자, 철학자, 심리학자, 교사, 사회 운동가, 예술가, 평신도 지식인들에게 직ㆍ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 신학자들 중에도 로버트 배런이나 피터 크리프트, 마이클 와드, 요한 바오로 2세[6]처럼 루이스의 소설과 변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3. 기독교 신앙

"기독교인간이라는 기계의 전체 설계도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설계도에서 이탈했고, 원래 설계도를 변경한 자신의 설계도야말로 진짜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적인 것에는 이런 반응이 거듭 나타날 것입니다. 즉 누구나 거기(기독교)에서 끌리는 부분을 발견하지만, 오직 그 부분만을 골라낸 뒤 나머지는 버리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정반대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자신이야말로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7]
요즘에 어떤 이들은 자선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기보다는 그런 가난한 자들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든 기독교의 도덕과 결별하는 것과 같습니다.[8]
청년 시절 그는 기독교를 믿지 않으려고 애썼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에도 한동안 미사만 참여할 정도로 기독교 예식 전반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말년에는 싫어하던 성가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고 한다.

루이스의 핵심적인 기독교관은 기독교의 범주를 엄격하게 구분해야겠지만, 그 안에 속하는 여러 교파들 간의 차이는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미미하다 정도. 덕분에 루이스는 기독교로 회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갈등과 고뇌를 느껴야 했는데, 모더니즘적인 그의 성격상, 기독교에 투신한다는 것은 삶의 양식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공회 내의 저교회파/고교회파 간 차이, 여러 개신교 종파 간의 차이,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 계열의 차이 같은 것들은 비교적 사소한 것으로 여겼다. 어차피 자세한 교리에 있어서 의견이 다른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받아들이냐 마느냐'가 진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본인은 만년까지 가톨릭 신도가 아니었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마리아론에 대한 비판을 들었을 때 일면 기사도적인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도로 유한 언급을 하기도 했다. 루이스의 입장에서는 결국 기독교 내 여러 분파들은 기독교라는 같은 건물에 입주한 여러 세대의 다른 가정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순전한 기독교>는 이러한 루이스의 기독교관을 잘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예수가 잘난 인간이라면 모를까 초월적인 구세주라고 하기는 그렇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긋고 반대하고 있다.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든지, 미친놈 취급하든지 자유지만 그 중간은 없다'는 단호한 입장이다.
"유대인 가운데 한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하느님으로 자처하며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전부터 항상 존재해 왔다고 했습니다. 또 마지막 날 다시 와서 세상을 심판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힌두교인 같은 범신론자라면 얼마든지 자기가 신의 일부라고 말하거나 신과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한테는 이 말이 하등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그런 범신론적인 신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이 점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의 말이야말로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주장 중에 이제는 우리 귀에 너무 익은 나머지 무심코 흘려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하느님이 아니라면, 이것이야말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용서라는 것은 해를 입은 사람이 해를 끼친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제 발을 밟았을 때, 제 돈을 훔쳤을 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발을 밟히지도 않았고 자기 돈을 도난당하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 돈을 훔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한다 해도 얼간이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했으며, 그들의 죄에 피해를 입은 이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양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정말 하느님일 경우에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모든 죄는 하느님의 법을 깨뜨리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아닌 존재가 이런 말을 했다면, 역사에 등장했던 그 어떤 인물보다 우스꽝스럽고 자만에 찬 짓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이것은 이상하고도 의미심장한 사실인데)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복음서를 읽을 때 그에게서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심에 차 있다는 인상은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편견 없이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예수는 스스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고(마태 11,29), 우리는 그의 말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인간에 불과할 경우, 온유나 겸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할 말들을 자주 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지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9]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 막을 수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다만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성경, 그중에서도 예수의 언행을 다룬 복음서가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으며 신뢰할 만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을 전제할 때 유효성을 얻는다. 예를 들어서 무슬림들은 예수를 선지자로서는 인정하지만 복음서를 믿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종교 서적을 바탕으로 그 서적의 신뢰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미친놈인지 구세주인지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부당한 흑백 논리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리처드 도킨스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유명 무신론 인사들에게 통렬히 비판을 받기도 했다.[10][11]

그의 주장은 기독교 대 외부 세계가 아니라 기독교 내적으로 보다 유의미한데, 논리적으로 볼 때 복음서의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는 신앙관에 대해 매우 강력한 반론이 되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내용에 따라 예수를 뛰어난 인간으로 인정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자 인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건 좀 후대의 오바가 아닌가, 하는 식의 기독교 내적인 절충주의에 대해 루이스가 가하는 비판이 바로 저것인 셈. 해당 구절이 등장하는 저서 <순전한 기독교>의 목표는 무수한 종파로 나뉘어진 기독교의 공통적 본질을 제시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론을 부정하는 절충주의를 기독교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통찰을 주장의 형태로 제시한 것이 바로 위 제시문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는 주장의 전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우지간 루이스의 저서에서 인간성에 대한 흥미 있는 통찰이나 기독교 근본주의와 운동화된 기독교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 절제를 단순히 음주 금지와 같이 1차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음주 금지는 이교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일갈하였다. 또 성공회의 오랜 대립 문제인 고교회파와 저교회파에 대해서도 어느 한편에 서지 않았다. 말년에 상당히 가톨릭에 호의적인 태도로 있었다는 평가도 많고, 실제로 가톨릭계 서적들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인물.
교만의 반대편에 선 미덕은 겸손이다. 겸손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겸손의 첫 단계라 말해주고 싶다. 적어도 이 단계를 밟기 전에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자신이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교만이다.
순전한 기독교(라디오 방송 편집본)

C. S.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진화론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그는 40대 후반까지는 이 이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다트머스 사건 때문에 이 과학 이론에 대하여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사실 루이스는 인문학도였고 당시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지켜보았던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충격적일 수 있기에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진화론을 자신의 신앙과 융합시키려고 시도했던 그의 어록을 여기 잠깐 인용해 보자.
"...신은 동물의 형상을 완성했고, 그것은 장차 인간의 매개체가 되고 신의 형상이 될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그것은 동물일 뿐이었다. 모든 물리적, 정신적 과정이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것들만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신은 이 유기체의 심리와 생리에 '나' 라고 하는 새로운 의식을 심어주었는데, 그 의식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며, 신을 알고, 진실과 아름다움과 선을 판단할 수 있으며, 시간 너머에 존재하면서 흘러가는 시간을 감지할 수 있는 인식이었다... (중략)

...우리는 신이 이런 창조물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천국 같은 상태를 지속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머잖아 끝이 났다. 누군가는 또는 무언가는 자기들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속삭이기도 했다. (중략) 이들은 신을 향해 "이건 우리 일이지 당신의 일이 아니오"라고 말할 우주 어딘가의 후미진 곳을 원했다. 그러나 그런 후미진 곳은 없다. 이들은 명사가 되고 싶었지만 단지 형용사에 머물렀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그 자기모순의 불가능한 소망이 어떤 행위에서 또는 일련의 행위들에서 표출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소망은 아마도 열매를 말 그대로 먹는 행위와 관련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C. S. Lewis(F. Collins, pp. 210~211에서 재인용)
루이스는 '기독교'의 범주를 정하는 데 있어서는 완강한 편이었고 스스로 신앙을 가질지 판단하는 여부에서도 엄격했지만,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뒤로는 기독교 바깥의 사상이나 과학적 연구 등에는 상당히 열린 자세를 유지했다. 가령 외우주에 인류와 별도의 문명이 존재한다면 그들에게는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건 우리가 아직 모르는 일이라는 정도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4. 작품

4.1. 나니아 연대기

4.2. 기독교 관련

4.3. 그 외

4.4. 루이스에 대한 전기물

아래 책들은 C. S. 루이스가 쓴 책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쓰인 루이스의 전기이다.

5. 개인적 이야기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그의 친구 J. R. R. 톨킨처럼 영국군 장교로 참전한 바 있다.[16] 참호전의 와중에 부상을 입어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이런 경험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전쟁은 되레 인간이 신에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기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좋아할 필요가 없다는 고참 악마의 논리가 대표적이다.

톨킨은 그의 종교관을 설득시키는 데 가장 많은 공로가 있었으나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고 한다.

결혼은 상당히 늦은 예순(만 58세 6개월)의 나이에 했는데, 상대 조이 데이빗먼은 미국의 소설가인 빌 그레셤(Bill Gresham)의 아내이자 두 아이 데이빗과 더글라스의 어머니로[17], 무신론자에 마르크스주의자(미국 공산당원)유대인계였다. 그녀는 또 결혼 직전에 골수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녀를 기독교인으로 변화시켰고, 이민 비자를 위해 1957년 결혼했으며, 3년만에 그를 떠나보냈다. 이런 상황을 그는 '죽음의 신(사신)이 연적인 팔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입양한 그녀의 아들들을 키우다가 3년 후 그 역시 사망한다. 이 결혼 이야기는 1993년에 영화 섀도우랜드로 영화화되었는데, 앤서니 홉킨스가 루이스 역을 맡았다.

연옥 교리에 대해서는 그가 대죄까지도 연옥에서 씻겨진다고 보았다는 평가가 있다. 즉, 이 평가에 따르면 지옥행으로 가는 인간이 훨씬 적었다고 보았다는 이야기다.[18] 루이스의 사후 세계관에 관심이 있다면 천국과 지옥의 이혼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소설의 형태로 서술하여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지옥관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지옥에서 죄인들이 서로를 혐오하여 서서히 멀어지고 고립되는 것과, 지옥은 아래쪽에 위치하고 천국은 위쪽에 위치해 올라갈수록 크기가 커진다는 비유, 그리고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선택권이 주어졌음에도 지옥에 머문다는 것 등, 여러 흥미로운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19]

5.1. 아일랜드와의 관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3px-Statue_of_C.S._Lewis%2C_Belfast.jpg
벨파스트에 있는 C. S. 루이스의 동상

그는 무신론자 시절에 아일랜드 신화켈트 전통, 북유럽 신화 등에 관심이 많았고, 아일랜드어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를 젊은 시절 두 번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이런 그의 관심은 성공회로 개종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비록 북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한 건 아니었지만, 조상을 웨일스에 둔 성공회 신자 집안에서 자란 그가 가진 종파적 비배타주의 관점과,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려고 한 점은 예나 지금이나 종교 갈등이 심각한 북아일랜드의 상황을 감안하면 나름 대인배급이라 평가할 수 있다.

6. 한국에서의 입지

C. S. 루이스는 한국의 기독교 출판계에서도 인기 있는 작가이다. 《순전한 기독교》(영어: The Mere Christianity)등의 일부 저작들이 영국 C. S. 루이스 협회와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은 홍성사에서 출판하고 있는데, 이는 전 홍성사 편집장 옥명호가 대학생 시절 우연히 성바오로서원 출판사에서 읽은 루이스의 작품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또한 2006년 4월호 《기독교사상》에 《순전한 기독교》를 번역한 이종태 목사(장로회)와 C. S. 루이스 팬인 옥명호 등이 C. S. 루이스의 신학과 삶에 대해서 쓴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후속편 서문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대해 다루고 있자 이를 소개하고 차기 번역을 약속할 정도였다.

옥명호가 루이스를 접하게 된 성바오로서원이란 이름에서 짐작 갔을지 모르지만, 가톨릭에서도 매우 호의적으로 인용하는 인사다. 루이스가 기독교 교파 간의 차이를 같은 건물 다른 세대 정도로 비유할 만큼 교파 간의 차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인 사람이었기에 가톨릭 측에서도 루이스의 작품을 거부감 없이 출판해 왔다. 가톨릭 근본주의자들도 이 사람의 신앙도서는 안심해도 된다고 말할 정도. 성바오로서원 자체가 성 바오로 수도회가 운영하는 것으로, 루이스의 책 대부분을 취급했던 것은 물론 나니아 연대기 역시 일찌감치 번역했다. 저자는 전경자. '나르니아' 등 실제 발음과 고유 명사가 차이를 보이는 일이 많았지만 특유의 착 달라붙는 문체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20] 가톨릭 청년 교리서인 유캣에서도 루이스의 발언을 인용하고 있다.

성공회 신자이면서 가톨릭에 우호적이었던 루이스가, 성공회의 영향력이 미미하고 가톨릭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한국의 개신교계에서 무척 인기가 있다는 것은 꽤 흥미롭다.[21] 그러나 국내의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복음주의 개신교인 중에는 루이스가 인문학적으로 지나치게 지적이고, 말년으로 갈수록 가톨릭에 호의적이 되었다고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22]

간혹 루이스가 죽기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루이스는 죽을 때까지 성공회 신앙을 지켰다. 다만 말년으로 갈수록 가톨릭에 더욱 호의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맞다. 루이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루머는, 이런 루이스 말년의 모습에 루이스에 대한 애정이 더불어져 가톨릭 커뮤니티 쪽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생각된다.

요약하자면, 국내에서 근본주의 개신교 교인들을 제외하면,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계에서 매우 인기 있는 작가이다. 또한 한국의 기독교인(천주교인과 개신교인 모두)들에게 성공회라는 교파를 강하게 각인시킨 인물임에 틀림없다.

의외로,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에 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골수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좋은 평을 듣는 작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를 써댄 신상언 같은 광신도 목사의 경우,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사탄 숭배 사상 깃든 판타지를 읽느니 그나마 나니아 연대기를 추천한다고 할 정도였다.[23]

한국의 많은 보수적인 교회들, 진보적인 교회가 모두 좋아하는 몇 안되는 신학자(평신도 신학자)이자 기독교 작가다.

7. 기타



[1]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의 평신도(layman)였다. 루이스가 기독교 호교서를 다수 저술했기 때문에 성직자였을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사제품을 받은 적 없는 평신도였다. 기독교 신학에 어느 수준 이상으로 깊이 접근하는 것은 목사나 (적어도 전도사는) 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국 개신교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성공회에서는 주교나 사제 이외의 평신도도 신학에 대한 이해가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신학적 지식에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이해가 더불어져 충분히 탁월한 식견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 루이스의 전공도 엄밀히 말하자면 문학(영문학)이었다. 그의 수많은 주옥과 같은 저작들이 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2] 그는 “하느님에게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나 있었다”고 한다.[3] 사실, 이런 이유로 무신론자가 되는 종교인들은 흔한 편이다. 개신교에서 떠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4] 대표적인 것으로 고통의 문제,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있다. 작품 목록 참조.[5] 기독교 사상사에서 깊이만 보면 루이스는 미약한 수준이겠지만(본인부터 그렇게 말했다), 대중을 상대로 알기 쉽고 찰지게 기독교 교리를 설파하는 점에 있어서는 상대가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6] 교황의 팬심이 어느 정도였냐면 루이스가 쓴 책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은 건 기본이요 강론 때 그의 책을 인용하거나, 루이스의 친구였던 오웬 바필드에게 루이스를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웠다고 할 정도로 루이스에 대한 팬심이 남달랐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네 가지 사랑이라고.[7] 《순전한 기독교》, 141쪽.[8] 《순전한 기독교》, 143쪽.[9] 기독교 무신론을 비판하고 있다.[10] 그들 중에서도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논리를 직접 언급하며, 익명의 불특정 다수가 편찬한 복음서는 신뢰할 만한 기록이 아니라며 '예수는 오해를 받았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또한 기독교 신학계의 최고봉 중 하나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맹비난한 적이 있다.[11] 또한 세속주의자였던 자와할랄 네루 역시 자신의 저서 세계사 편력에서 "예수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자 인간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이 반드시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싯다르타 역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후세에 숭배의 대상이 되고 힌두교 신의 아바타로 취급받았다"라 평했다.[12] 인간을 신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악마의 태도로 쓴 풍자적 작품이다. 그는 악마 집단을 일종의 기만적 관료 집단으로 묘사했다. 자신도 쓰는 거 자체는 나름 흥미롭고 쉬운 일이었지만 그 일 자체가 오래 하기에는 감정적으로는 대단히 지치고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1942년 작.[13] 첫 소설, 1933년 작.[14] 루이스의 SF 소설.[15] 톨킨과의 내기 결과로 쓰여진 작품이다. 한 사람은 우주여행에 관해, 한 사람은 시간 여행에 관해 쓰기로 했는데 루이스가 우주여행을, 톨킨이 시간 여행을 쓰게 된 것. 참고로 톨킨은 현대인들이 과거의 아틀란티스를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썼고, 이후 그 이야기를 다듬어 누메노르의 이야기로 자신의 세계관에 넣는다.[16] 이때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강한 시대라 문학가, 예술가, 학자, 귀족 등등 고급 엘리트들이 초급 장교로 참전했고 많은 유망한 인물들이 전사했다.[17] 루이스를 만나는 시점(1952년)에는 빌의 알코올 중독과 폭력, 그리고 지속적인 외도 등의 이유로 별거 중. 1954년에 제대로 이혼했다. 빌 또한 별거 기간 동안 만난 조이의 사촌이자 자신의 외도 상대였던 르네 로드리게스 피어스(Renée Rodriguez Pierce)[27]와 정식으로 재혼했다.[18] 그런데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 교단처럼 연옥 교리를 완강히 배척하는 정도는 아니고, 연옥에 대한 불가지론적 입장까지 수용하긴 한다. 연옥 교리를 믿건 안 믿건 그건 신자 개개인의 자유로 교회 차원에서 개입하지 않는다.[19] 물론 루이스 본인에 의하면 그의 개인적인 신앙은 성공회의 공동 기도서에 적혀저 있는 것과 같다고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다.[20] 현재는 판권 문제로 홍성사에서만 출판 중. 참고로 성바오로서원에서는 '꼬마 호비트의 모험' '마술반지'라는 타이틀로 호빗과 반지의 제왕도 출판했던 역사가 있다.[21] 재미있게도, 국내의 성공회 교인들은 주류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들이 C. S. 루이스, 존 스토트 신부, 알리스터 맥그래스 신부 등이 지은 기독교 서적을 읽고 좋게 평해주는 것에 대해 (자기 교파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고마움을 느낀다고 한다. 한국 성공회가 워낙 작다 보니, 신자들이 성공회가 세계적으로는 매우 큰 교단임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22] 처음에는 루이스의 작품에 감동을 받았으나, 가톨릭에 호의적인 면이 있음을 알고 나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어느 보수 개신교도의 비평도 존재한다.[23] 사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사탄 숭배 사상 깃든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 근거 없는 말이다. J. K. 롤링 작가부터 개신교(감리회) 신자이고, 호그와트에서도 크리스마스 연휴에 트리를 설치하는 등 기독교식 문화를 보이며 미네르바 맥고나걸 교수의 아버지는 목사로 설정되어 있다. 제임스 포터릴리 포터 부부도 고드릭 골짜기의 교회 옆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더욱이 롤링 여사가 현대와 환상 세계를 교차시키는 서사를 구사한 것을 미루어 거의 루이스의 정신적 후계자라 봐야 할 것이다.[24] 실제로 타임지나 크리스찬니티 투데이도 그를 영향력 있는 기독교 변증가 및 작가라고 평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점만큼은 사실이다.[25] 오히려 논증만 본다면 루이스가 아니라 플란팅가가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에 가깝다. 실제로 플란팅가는 종교 철학계에서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이며 다수의 기독교 철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26] 루이스의 진가는 철학적 변증보다는 문학적 내러티브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내러티브를 통해 루이스는 그리스도교라는 공감대 안에서 이루어지는 풍성한 상상력을 토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깊이 고찰해 볼만한 다양한 신앙적 통찰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