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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10:43:42

벨기에의 클레망틴 공주

클레망틴 공주에서 넘어옴
<colcolor=#000000> 나폴레옹 공비
벨기에의 클레망틴 공주
Princesse Clémentine de Belgique
파일:Clementine_of_Belgium.jpg
이름 프랑스어 클레망틴 알베르틴 마리 레오폴딘
(Clémentine Albertine Marie Léopoldine)
네덜란드어 클레멘티너 알베르티나 마리아 레오폴디나
(Clementine Albertina Maria Leopoldina)
출생 1872년 7월 30일
벨기에 브뤼셀
사망 1955년 3월 8일 (향년 82세)
프랑스 제4공화국 니스
배우자 빅토르 보나파르트 (1910년 결혼 / 1926년 사망)
자녀 마리 클로틸드, 루이
아버지 레오폴드 2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여대공
형제 루이즈, 레오폴드, 스테파니
종교 가톨릭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첫사랑과 결혼3.3. 제1차 세계 대전3.4.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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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레오폴드 2세마리 앙리에트 왕비의 3녀. 보나파르트가의 당주 빅토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5세)와 결혼했다.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파일:Princess_Clémentine_of_Belgium.jpg
어린 시절의 클레망틴 공주, 1880년

1872년 7월 30일에 레오폴드 2세오스트리아의 마리 앙리에트의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레오폴드 2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레오폴드 왕세자가 요절해 후계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국왕 부부는 사이가 안 좋았지만 의무적으로 아이를 가졌고, 그 결과 클레망틴이 태어났다. 또 딸이 태어나자 부부는 굉장히 실망했다. 결국 후계자를 낳는 일을 포기한 레오폴드 2세와 마리 앙리에트 왕비는 별거에 들어갔다.

클레망틴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부모님은 가정과 자식에 관심을 주지 않고 각자의 관심사에만 몰두했다. 레오폴드 2세는 돈벌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마리 앙리에트 왕비는 아이들에게 애정을 주지 않고 엄격하게만 대했다. 오죽했으면 자기 자식들보다 헝가리산 말들을 더 아낀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왕비는 아이들의 교육과 성장을 가정교사에게 일임했다. 클레망틴은 가정교사로부터 프랑스어, 독일어, 음악, 문학 등을 배웠다. 문학과 역사에 재능이 있었고,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이 빨랐다고 한다.

클레망틴은 바로 위의 언니인 스테파니와 가장 친했다.[2] 스테파니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시집간 후에도 둘은 서신을 주고 받았다. 자매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에 8살 때 클레망틴의 언니들은 모두 시집을 간 상태였고, 클레망틴은 궁중에서 외롭게 자라야 했다.

3.2. 첫사랑과 결혼

10대 때 클레망틴은 사촌 보두앵 왕자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의 약혼은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비춰졌다. 보두앵은 레오폴드 2세의 동생이자 벨기에의 추정 상속인인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왕자의 장남으로, 훗날 왕위를 이을 것이 확실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장차 명군이 될 것이라고 기대받을 정도로 총명하고 다방면에서 뛰어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보두앵은 1891년에 폐렴으로 21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슬픔을 뒤로 한 클레망틴은 이후 오귀스트 고피네 남작, 양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로스 왕자 등과 사랑에 빠졌지만 전부 오래 가지 않았다. 레오폴드 2세는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섭정이었던 루트비히 3세의 아들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과 클레망틴을 이어주려 했지만, 클레망틴은 그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혼사를 거절했다.

1895년에 모친 마리 앙리에트 왕비는 궁을 나와 스파로 거주지를 옮겼다. 클레망틴은 그 동안 어머니가 맡았던 국무를 물려받게 되었다. 이 당시 큰언니 루이즈는 심한 낭비벽으로 빚만 왕창 만들다가 장교와 바람까지 나서 정신병동에 감금되었고, 작은언니 스테파니는 남편 루돌프 황태자자살한 뒤 허락도 없이 평민과 결혼해버려 레오폴드 2세를 분노케 했다. 이렇게 언니들이 전부 아버지 눈밖에 나면서 집안의 나만 정상인에 레오폴드 2세와 대화가 되는 유일한 자식에 왕비 역할도 도맡게 된 클레망틴은 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클레망틴은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좋은 시기는 길지 않았다. 1900년 무렵에 레오폴드 2세는 클레망틴보다 어린 카롤린 라크루아라는 딸뻘 여자에게 빠져 엄청난 돈을 그녀에게 퍼부었다. 의기양양해진 카롤린은 왕비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2년에 어머니 마리 앙리에트 왕비가 숨을 거두면서 클레망틴은 울적해졌다. 이토록 힘든 시기에 클레망틴은 일생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파일:external/www.photo-arago.fr/09-541262.jpg
나폴레옹 공 빅토르 보나파르트[3]

1902년에 클레망틴은 나폴레옹 공 빅토르 보나파르트와 교제하기 시작했다. 빅토르는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손자이자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손자로, 보나파르트가의 당주였다. 클레망틴은 1888년에 브뤼셀을 방문한 빅토르 보나파르트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에도 호감을 느꼈었다고 한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는 프랑스 제3공화국과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기 때문에 프랑스 황제를 칭하는 빅토르를 못마땅하게 여겨 결혼을 반대했다. 1903년에 클레망틴은 자신이 그 동안 왕실을 위해 한 희생을 내세우며 다시 한 번 빅토르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청했지만, 레오폴드 2세는 단호하게 허락을 거절하고 상속권을 들먹여 딸 클레망틴을 협박했다. 결국 클레망틴과 빅토르의 결혼은 계속해서 미뤄지고 1909년에 레오폴드 2세가 숨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4]

레오폴드 2세 사후 클레망틴의 사촌동생 알베르 1세가 즉위했다. 알베르 1세는 기꺼이 클레망틴의 결혼을 허락했다. 1910년 11월 14일, 이탈리아 왕국 피에몬테 지방에서 매우 늦은 나이인 38세에 클레망틴은 48세의 빅토르와 마침내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식 후에는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5]의 초대로 퀴리날레 궁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였다.
파일:Clementine_of_Belgium,_Princess_Napoléon.jpg
벨기에의 클레망틴 공주, 1908년
파일:VICTOR_ET_CLEMENTINE.jpg
클레망틴과 빅토르 보나파르트, 1910년

한 달 간의 신혼여행을 마친 부부는 브뤼셀에 정착했다. 비록 새 거주지는 변변치 않았지만,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부부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에 보나파르트 가의 수장이 되었다.

3.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빅토르 부부와 자녀들은 영국으로 피난을 갔다. 그들은 빅토르 보나파르트의 당숙 나폴레옹 3세의 미망인인 외제니 드 몽티조 황후와 함께 햄프셔 주 판버러에 있는 그녀의 거주지에서 생활했다. 클레망틴은 피난 생활에는 잘 적응해갔지만 변덕스러운 외제니의 성격에 맞춰주는 걸 힘들어했다고 한다.

클레망틴은 영국으로 피난온 벨기에인 동포들을 잘 챙겨주었다. 그리고 벨기에 군인들을 지원해주는 협회 등 각종 벨기에 애국 협회 조직에 참여했다. 벨기에 언론은 그런 클레망틴에게 찬사를 보냈다.

전후 클레망틴과 가족들은 브뤼셀로 돌아갔다. 1926년에 빅토르 보나파르트가 숨을 거두었다. 50대 초반의 클레망틴은 아직 10대인 아이들을 돌보며 지냈다.

3.4. 말년

말년에 클레망틴은 몸이 안 좋은 딸을 돌보며 친척들과 자주 교류했다. 특히 레오폴드 3세의 배우자 아스트리드 왕비와 친했다고 한다. 클레망틴은 10명이 넘는 손주를 두었으며, 종종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954년 10월에 브뤼셀을 떠나 프랑스 니스에 있는 빌라를 임대해 그곳에서 거주했다. 1955년 3월 8일에 빌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아작시오 황실 예배당에 있는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벨기에의 클레망틴 공주
(Princess Clémentine of Belgium)
<colbgcolor=#fff3e4,#331c00> 레오폴드 2세
(Leopold II)
<colbgcolor=#ffffe4,#323300> 레오폴드 1세
(Leopold I)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Saxe-Coburg-Saalfeld)
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로이스 여백작
(Countess Augusta Reuss of Ebersdorf)
루이즈 도를레앙
(Princess Louise of Orléans)
루이필리프 1세
(Louis Philippe I)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6]
(Princess Maria Amalia of Naples and Sicily)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여대공
(Archduchess Marie Henriette of Austria)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
(Archduke Joseph of Austria)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공주[7]
(Infanta Maria Louisa of Spain)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 여공작
(Duchess Maria Dorothea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작
(Duke Louis of Württemberg)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테 공녀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4.2. 자녀

파일:Clémentine_of_Belgium,_Princess_Napoleon_with_her_children.jpg
클레망틴과 두 자녀, 1921년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마리 클로틸드 보나파르트
(Marie Clotilde Bonaparte)
1912년 3월 20일 1996년 4월 14일 세르게이 드 비트
슬하 4남 6녀
1남 나폴레옹 공 루이
(Louis, Prince Napoléon)
1914년 1월 23일 1997년 5월 3일 알릭스 드 포레스타
슬하 2남 2녀

5. 여담



[1] '벨기에의 공주 전하'라는 작위는 1891년 3월 14일부터 규정되었다.[2] 바로 위의 자매라고 해도 클레망틴이 워낙 늦둥이라서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8살이나 났다.[3] 이른바 나폴레옹 5세[4] 웃긴 건 이래놓고 정작 레오폴드 2세는 정부와 서자들에게 전 재산을 물려줬다는 거다(...). 세 자매는 본인들의 몫을 어떻게든 얻어내기 위해 소송을 걸어야 했다.[5] 빅토르 보나파르트의 외사촌.[6] 페르디난도 1세의 5녀이자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외손녀이다.[7] 카를로스 3세의 차녀이자 아우구스트 3세의 외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