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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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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리 이전2. 분리 이후

1. 분리 이전

태백시청은 549년진흥왕이 이 근방의 낙동강 수계에 ‘태백현’을 설치한 바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으로 검증되는 사실이 아니다.

분리 승격 이전의 역사는 삼척시/역사 참조.

2. 분리 이후

1981년, 옛 삼척군 장성읍황지읍삼척군에서 분리되어 '태백시'로 승격되었다. 태백이라는 이름은 태백산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지며, 실제로 흰 눈이 많이 내린다.

삼척시/역사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원래 삼척군 상장면으로, 북쪽에 위치한 하장면과 세트로 '장성'(長省)이라고 불렸던 지역이다.[1] 그러다가 1961년에 장성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에 황지출장소가 황지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에는 삼척군[2]의 일부였던 장성읍과 황지읍을 합쳐 태백시가 설치되었다. 1394년(태조 3) 울진군에서 공양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울진군은 역모의 본거지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고 울진군에 속하였던 다섯 현 가운데 태백현 지역은 안동도호부로 이속된지 587년 만에 부활된 셈이다.
"팔도사람" 다 모인 "하늘아래 첫 도시"
신생 도시인 태백시를 알리는 1981년 4월 3일동아일보 기사 #[3]

석탄산업의 전성기였던 1960~70년대에는 인구가 13만이 넘는 중견 도시로 번창했다. 이 당시에는 석탄 수요량이 폭증하는 가을철에는 동네 개도 만원짜리 지폐[4]를 물고 다닌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번창하는 도시였다. 뭐, 인구로 치면 대도시는 아니었지만[5] 캔 석탄을 바로 돈으로 바꿀 수 있고, 일용직 노동자의 임금 역시 일당이나 주급으로 바로 지급하던 지역경제의 특성상 도시 규모에 비해 현금 유동량이 매우 큰 편이었다.

더구나 석탄 시즌이면 노동력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면서 일거리를 찾아 다른 도시에서 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때 일하러 오는 사람은 보통 독신 남성이거나 가족이 있더라도 남자 혼자 오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밥 먹고 잠 자는 것까지 모두 돈을 내고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힘든 노동에 지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유흥업 등의 규모도 상당했다. 그리고 이 시기 비록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지만 아직 여전히 낙후된 면이 많았기에 현물이 아닌 현금이 지속적으로 유통되는 경제구조의 가치는 생각보다 더 컸다.

즉 다량의 화폐가 유입되고 소모되는 경제 구조의 특성상 인구 규모 이상의 수준으로 번창하는 도시였던 것이다. 다만, 임시 고용 노동자의 비중이 높고[6] 그런 사람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서비스업이 발달한 도시의 특성상 썩 분위기가 좋은 도시는 아니었다. 대부분 광부로 일했던 이들은 고된 노동환경과 평소의 생활고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사람들이었고[7], 비단 밤문화와 트러블 얘기를 하지 않아도 산재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의해 광산이 줄줄이 문을 닫고 광부와 그 가족들이 떠나면서 급속히 쇠퇴하였다. 점점 상황이 열악해지자 1999년 12월 12일 시내 중심인 중앙로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생존권 쟁취 투쟁을 벌인 바 있다. 당시 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여 정부로부터 석탄가격안정지원금 10년간 1조원 지원, 3천명 고용 규모 대체산업 육성 등 5개 항의 지역개발사업 추진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쇠퇴는 막을 수 없었으며, 2004년에는 전성기의 상징이던 KBS 태백라디오방송국이 KBS강릉방송국과 통합되어버렸다.[8] 당시 태백이 잘 나가던 시대의 마지막 흔적이었기 때문에 태백시민들 사이에서 상당히 강경한 통합 반대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1994년 12월 26일, 삼척군 하장면 전체가 편입 대상이었지만 삼척군의 반대로 편입되지 못하고 원동리, 상사미리, 하사미리, 조탄리를 사조면이 아닌 사조동으로 편입한 것에 그치며 읍면을 겸하는 행정적 도농통합이 사실상 무산되어 1998년에는 소규모 동 통폐합조치로 황지3동, 화전1동, 화전2동과 통합하여 사조동지역은 현재 삼수동의 일부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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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은 장승을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2] 삼척군은 이후로도 동해시, 삼척시 등을 뱉어냈는데, 1995년 도농통합 당시 삼척시와 삼척군만 통합되면서 지금에 이른다.[3] 아울러 해당 링크에서 지금과는 다른 태백시의 시경계선을 확인할 수도 있다.[4] 만원권 지폐가 막 등장했을 당시에 만원권 지폐 몇장이면 번듯한 직장인 월급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수표용으로 썼다.[5] 물론 전국 기준으로는 그랬겠지만 강원도 내에서는 제3의 도시였다. 1970년 태백(당시는 삼척군 장성읍)의 인구는 102,255명이었는데, 이는 춘천시(120,517명)나 원주시(110,188명)에 맞먹는 규모였으며, 영동 지방에서는 강릉시(72,920명)나 동해시(당시는 명주군 묵호읍+삼척군 북평읍, 92,463명)를 제치고 1위의 인구였다.[6] 석탄 성수기에는 타 지역 노동자들을 몇 달이나 몇 주 단위로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태백시로 갓 승격될 무렵인 1981년 4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더라도 승격 예정 지역의 인구 11만 2천여명 중에서 무려 95%가 외지인이고, 그 외지인들의 출신 지역 역시 전국의 모든 행정구역 중에서 딱 2개 면만 빼고 다 있었다고 할 정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 비하적으로 표현하자면 뜨내기의 비중이 높았다. 게다가 그런 외지인들의 다수가 '정착할 생각은 없다'(=돈 좀 모이면 고향이나 다른 곳으로 돌아가 살 거다)는 입장이어서 시 승격 무렵에는 "시로 승격되어 인프라가 갖춰지면 외지인들도 정착 의사를 보여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가 나왔다고 할 정도이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향촌 귀속 의식이 많이 약해진 21세기 이후에도 "외지 출신 이주자(=나쁘게 말하면 뜨내기)가 많은 지역은 사람들의 애향심이 약하고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올 정도인데 하물며 1970~80년대 기준으로는 어떻게 여겨졌을지 생각해 보자.[7] 이는 비록 태백시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지만 옆동네에서 일어난 사북사건 항목만 봐도 알 수 있다.[8] 공교롭게도 인근에 있던 삼척MBC도 2015년에 강릉MBC와 통합하여 MBC강원영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