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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9:04:58

테구라모리 마코토

파일:2024-01-09_03-09-44_DSC_2434 copy800.jpg
<colbgcolor=#0000B7,#162342><colcolor=white> 이름 테구라모리 마코토
手倉森誠| Teguramori Makoto
출생 1967년 11월 14일 ([age(1967-11-14)]세)
일본 아오모리 현 고노헤 정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2cm | 체중 74kg
직업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0000B7,#162342><colcolor=white> 선수 스미토모금속/가시마 앤틀러스(1985~1992)
NEC 야마가타(1993~1995)
감독 베갈타 센다이(2008~2013)
일본 U-23 대표팀(2014~2016)
일본 대표팀(2014~2016 / 수석코치)
V-파렌 나가사키(2018~2020)
베갈타 센다이(2021)
BG 빠툼 유나이티드 FC(2022)
촌부리 FC(2023)
BG 빠툼 유나이티드 FC(2023~)
국가대표 1경기 0골 (일본)

1. 개요2. 선수 시절3. 지도자 시절
3.1. 일본 U-23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3.2. 해임 그 이후
4.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축구선수 출신 축구 감독.

베갈타 센다이, 일본 U-23 축구 국가대표팀, V-파렌 나가사키 감독을 역임했으며 2021년에 두 번째로 베갈타 센다이 감독에 취임했다.

2. 선수 시절

테구라모리는 1967년 11월생으로, 고교 졸업 후 1985년 스미토모금속(가시마 앤틀러스의 전신)에 입단하여 실업 선수로 데뷔하였다. 스미토모금속은 JSL 1~2부를 오가던 그저 그런 팀으로, 테구라모리는 여기서도 주전에 오르려다 미끄러지는 정도의 미드필더였다. 1993년 프로화를 목전에 둔 가시마에서 방출된 후로는 몬테디오 야마가타의 전신인 NEC 야마가타로 이적하여 주전 미드필더로서 3년간 활약하고 1995 시즌 후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1]

3. 지도자 시절

1996년 몬테디오 야마가타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2001년 오이타 트리니타[2]의 피지컬 코치, 2002년 오이타 트리니타 수석코치직을 역임한다. 그러다 그의 인생을 바꾸어주는 팀을 만나는데 그 팀은 바로 베갈타 센다이다. 2004년부터 베갈타 센다이의 코치 및 수석코치를 역임하다 2008년 2부리그에 있던 베갈타 센다이의 감독을 맡았고 그 해 2부리그 3위를 기록,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나 주빌로 이와타에게 아쉽게 패배해 승격이 좌절된다.

하지만 그는 선수들을 독려하여 다음해인 2009년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베갈타 센다이를 1부리그로 승격시켰고 여기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기존의 일본식 아기자기한 패스축구를 버리고 수비를 탄탄히 한 역습축구로 2011년 베갈타 센다이를 J리그 4위로 올려놓으며 당시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팬들에게 위안을 주었으며, 2012년엔 예상하지 못하게 베갈타 센다이를 준우승시키며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이끄는 등 베갈타 센다이의 절정기를 이끌었다. 이 성과로 그는 2014년에 일본 U-23 축구대표팀 감독에 바히드 할릴호지치가 지휘봉을 잡고 있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도 겸직하게 되었다.

3.1. 일본 U-23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

3.1.1. 2016 AFC U-23 챔피언십 카타르

첫 대회였던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라이벌 한국에 지며 8강 문턱에서 떨어졌지만 이후 2016년 올림픽예선을 겸한 AFC U-23 챔피언십 대회가 열렸고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당시 상황은 좋지 못했는데, 당시의 일본 대표팀은 한국과 상황이 똑같았다. 당시 신태용 감독이 이끌던 한국 U-23 대표팀은 황희찬, 권창훈, 류승우, 문창진을 제외하고는 이름값이 많이 떨어지거나 경기 감각이 좋지 못했고 심지어 전 감독이었던 이광종 감독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하고 신태용 감독이 급하게 바톤을 이어 받으면서 역대 한국 U-23 대표팀 중 최약체라는 소리를 듣고 있던 상황이었다. 일본 역시 사령탑만 같고 유럽파인 쿠보 유야, 황희찬의 동료인 미나미노 타쿠미를 제외하고는 역시 경기 감각이 떨어지거나 이름값이 많이 떨어지는 선수들로 구성돼 최약체 소리를 듣던 상황이었다.

여기서 일본은 사우디, 북한, 태국과 같은 조에 배정이 되었고, 그는 변칙적 운영과 로테이션, 유연한 전술운영으로 사우디전을 2:1, 북한전 역시 1:0으로 승리, 3차전에선 상대적 약체인 태국을 4:0으로 대파하며 3전 전승으로 조 1위를 차지해 8강에 진출했다. 그런데 하필 8강 상대가 연령대, 성인 가리지 않고 자신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이자 라이벌인 한국을 괴롭히는 서아시아의 왕자 이란이었다.[3] 게다가 피지컬도 거의 괴물이라 안그래도 피지컬 축구에 약한 일본으로써는 큰 경계를 했고 이는 맞아 떨어지는 듯 했다. 일본은 전반 후반 이란의 압박에 골대를 맞는 등 상당히 고전했지만 탄탄한 수비로 후반까지 이란의 공세를 막아냈고 연장전에 들어가자 이란의 체력이 떨어진 점을 간파하여 선수교체를 했고, 이는 신의 한 수가 됐다. 교체선수인 나카지마 쇼야가 연장 4분, 5분에 멀티골을 넣음으로써 연장전 끝 3:0으로 승리, 위기를 넘기고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에게 패배를 안겨 주기도 했고 유소년 연령대에서는 아시아 수준급인 성적을 보여준 이라크를 만나게 된다. 경기 시작 후 일본은 전반에 자메이카 혼혈 공격수 스즈키의 패스를 받은 유럽파 공격수 쿠보 유야가 선제골을 넣음으로써 기선을 잡지만 이라크는 엄청난 압박으로 끝내 동점골을 넣었다. 그렇게 1:1상태에서 거의 90분이 다 돼 연장으로 넘어가는 분위기에서 추가시간에 하라카와가 중거리슛으로 극장골을 넣으며 2:1 역전승을 하며 결승에 진출함과 동시에 올림픽 티켓을 따냈다. 대회 직전 최약체 소리를 듣던 대표팀으로서는 성공적인 성과를 낸 것.

같이 최약체 소리를 듣던 라이벌 한국 역시 7회 연속 올림픽 본선에 나간 짬은 어디 안 가는지 신태용감독의 유연한 전술운용과 운이 겹쳐지며 우즈벡, 예멘, 이라크, 요르단, 개최국 카타르를 연달아 꺾으며 결승에 올라감으로써 세계 최초로 8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이라는 업적을 세우며 결승에 올라갔고, 한일전이라는 데스매치가 무려 결승전에서 확정되고 만다.

일본은 피지컬한 한국의 축구에 고전하면서 전반 권창훈과 후반 진성욱에게 각각 한 골씩을 헌납하며 0:2으로 끌려갔고 경기는 그대로 한국의 승리로 끝나는듯 했다.하지만 마코토 감독은 선수교체로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한국의 체력 방전도 겹쳐 결국 후반에 3골을 몰아넣으며 지고 있던 경기를 3:2로 역전시켜 U-23 챔피언십 우승컵을 가져간다.

이 대회에서 마코토 감독은 약한 대표팀 전력을 이끌고 선수들과의 소통, 카리스마, 유연한 전술운영, 적절한 선수교체, 그리고 체력안배를 위한 로테이션으로 서아시아의 강자 이란, 이라크 그리고 라이벌인 한국을 꺾고 6회 연속 올림픽 본선진출을 이끌며 일본축구협회와 축구팬들에게 박수와 찬사를 받았다.

3.1.2.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그러나 그렇게 1번 시드를 따내 박수를 받으며 진출한 올림픽 축구 16개국 본선에서는 5시간만에 도착한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오게네카로 에테보에게 4골을 허용하는 등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며 4:5로 패했다. 이 경기 직전 나이지리아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이 고작 2시간에 불과했던 사실이 추가로 알려지면서 일본 현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2차전이었던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도 후지하루 히로키의 치명적인 자책골로 2:2로 무승부를 거두면서 자력 8강 진출이 무산, 8강 진출 가능성이 크게 낮아졌다. 3차전에서 뒤늦게 스웨덴을 상대로 1:0으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콜롬비아가 이미 조 1위를 확정지어 무리할 필요가 없었던 나이지리아를 2:0으로 잡으면서 조 3위 대회 10위에 그쳐 8강 진출에 실패해 일찍 짐을 싸야했다.

하지만 AFC U-23 대회에서 한국을 잡고 우승했던 까방권 덕분인지 팬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고 마침 일본 국가 대표팀의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이 월드컵 예선 초반 동아시안컵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선수들과 자주 불화를 일으키자 일본 축구팬들이 후임감독으로 테구라모리 마코토를 밀었고, 일본 축구협회도 감독 교체를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할릴호지치 감독이 지휘하는 대표팀이 8월 31일, 호주를 홈에서 2:0으로 잡고 최종 예선 B조 1위로 월드컵에 진출하자 교체설은 유야무야됐다.

3.2. 해임 그 이후

하지만 2017년 일본 대표팀이 벨기에, 브라질와의 친선 경기에서 연패하고, 2017일본동아시안컵에서는 약체인 북한에게 겨우 1:0으로 이기고 도쿄에서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라이벌 한국 대표팀에게 신나게 얻어터지면서 1:4로 대패하자 감독 교체 후 경기력이 확 살아난 한국을 부러워하며 그 때 할릴호지치 감독을 경질해야 했다며 자학했다.

그 후 우크라이나, 말리 등 월드컵에서 떨어진 약체들과의 경기에서도 경기력이 최악으로 치닺자 여론은 폭파했고, 할릴호지치 감독은 월드컵 개막을 두 달 남기고 전격 경질됐다. 하지만 마코토를 지지하는 여론과 별개로 축구협회는 후임으로 일본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이자 현장에서 오래 떨어져 있던 니시노 아키라 감독을 임명함으로써 기름에 불을 부었다.

그런데 자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니시노 아키라가 노인정 대표팀으로 조롱받던 대표팀을 월드컵 16강 15위로 이끌자 마코토에 대한 애기는 쏙들어갔다. 의외의 대단한 성과에 갓시노라고 일본축구팬들은 찬양했고 니시노 아키라 감독 역시 박수 받을때 깔끔하게 월드컵이 끝나고 물러났다.

게다가 후임감독인 모리야스 하지메아시안 게임에서 U-21 대표팀을 이끌고 결승에 진출해 손흥민, 황의조, 조현우 등 와일드카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최강 전력을 꾸린 한국을 상대로 90분 내내 접전을 펼치고 분패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리자 마코토의 이전 성과도 점점 빛을 잃게 됐다. 일본 축구팬들은 모리야스가 이끄는 아시안 게임 대표팀의 활약을 보고 새로운 명장의 탄생이라며 기뻐한 것은 덤. 이렇듯 경쟁 감독들이 큰 대회에서 호성적을 기록하며 마코토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이 될 확률은 적어졌다.

그리고 12월 4일, J2리그로 강등된 V-파렌 나가사키의 신임 감독으로 먼저 선임되었다. # 2019 시즌에는 천황배 4강에 오르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승격에는 실패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33라운드에 아쉽게 승격이 좌절되면서 2년 연속 승격에 실패하자 나가사키에서 계약을 연장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해 팀을 떠나게 됐다.

그러나 2부 리그에서 분투한 것을 인정받아서인지 J1리그 베갈타 센다이 감독으로 다시 선임되었다. 2013년 팀을 떠난 후 8년만에 복귀. # 그러나, 2021 시즌에서 J2 강등으로 인해 물러난다.

2022년부터는 태국 리그의 BG 빠툼 유나이티드를 맡게 됐다. ACL 40강 조별리그에서 멜버른 시티에 이은 조 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 16강에서 진출 팀들 중 최약체 킷치를 만나 4:0으로 이겨 8강까지 진출하는 구단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8강에서 우라와 레즈를 만나 0:4로 패배해 4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2022년 10월 23일 방콕 유나이티드 전 패배 이후 BG 빠툼 유나이티드와 상호 해지 이후 팀을 떠나게 되였다.

2023년 12월 다시 BG 빠툼 유나이티드 FC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4. 여담


[1] 여담으로 스미토모 시절에는 파칭코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지쿠가 테구라모리를 찾아서 파칭코를 뒤지고 테구라모리는 숨는 게 비일비재했다고. 보너스로 가시마에서 방출된 후에는 경마장에서 재산을 싹 날렸다고 한다. NEC에 들어가서는 정신차리고 산 듯.[2] 후일 황보관이 감독을 맡게 되는 그 팀 맞다. 다만 2001년은 유스 팀 감독 상태. 황보관은 2004년 오이타 수석코치를 거쳐 2005년에 1군 감독으로 승격된다.[3] 하지만 통상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이란 대표팀은 유소년 연령대에서는 크게 강력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