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트레이 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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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레이 힐만의 지도자 경력을 다룬 문서.2. 초창기
더이상 선수로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유니폼을 벗고 곧바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스카우터로 입사한 후 경력을 쌓았으며 2년 후인 1990년에는 뉴욕 양키스의 마이너리그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AAA팀 매니저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활약했으며 2001년 콜럼버스 클리퍼스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2002년에는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해 팜시스템의 이사 겸 필드 코디네이터로 재직했다.
3.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시절
2003년, 힐만은 당시 도쿄도를 연고지로 하던 닛폰햄 파이터즈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부임 당시 힐만은 일본프로야구 최연소 감독이었지만,[1] 마이너리그 코칭 경력이 오래 되어 신생팀에게 선수 육성 노하우를 물려줄 수 있는 인재로 평가받았다.
부임 첫 해였던 2003년에는 5위를 기록했지만, 홋카이도로 연고지 이전을 한 첫 해인 2004년에는 신조 츠요시,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등의 대타자들의 맹활약으로 정규시즌 3위를 달성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2위였던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배하며 퍼시픽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진출엔 실패했다.[2]
44년만의 일본시리즈 V2가 결정된 이후 헹가래를 받는 힐만.[3] |
2005년에는 미국에 잠시 갔다 오면서 감독 대행을 맡기기도 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닛폰햄이 기록한 성적은 2승 4패. 결국 그해에는 62승 71패로 퍼시픽 리그 5위를 기록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2006년에는 기존의 전력에 2년차 영건이었던 다르빗슈 유, 한 해 반짝이었긴 했지만 신인왕을 차지한 좌완 선발 야기 토모야, 야수진의 스몰볼 요원으로 성장한 모리모토 히초리나 다나카 켄스케 등 새로운 전력을 앞세워 연고이전 후 첫 정규 시즌 1위를 달성했고 이 해 플레이오프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를 거두면서 25년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다.[4] 2006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로 시리즈 전적 4승 1패를 기록하며 우승. 팀에 44년만의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기를 안겨주었다. 그 후 제 2회 코나미컵과 2006년 아시아 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대회 2연패를 달성한 그는 뒤이어 2007년에도 팀을 거침없이 이끌었고, 구단 역대 최다 연승 기록인 14연승[5]과 교류전 12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내며 2년 연속 퍼시픽 리그 우승을 만들어 낸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6] 치바 롯데 마린즈[7]를 꺾고 2007년 일본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작년 상대인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작년과 똑같이 시리즈 스코어 1승 4패[8]를 당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창단 이후 60년 동안 일본시리즈 우승 단 한 번, 리그 우승 단 두 번의 전통적 약체팀을 이끌고 2년 연속 퍼시픽 리그 우승, 그리고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것은 높이 평가되는 부분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선 통산 689경기 351승 324패 14무, 일본시리즈 우승 1회, 준우승 1회을 기록했다.
4. 캔자스시티 로열스 감독 시절
일본시리즈가 열리기 전인 9월 8일에 아이가 아프다는 이유로 닛폰햄 감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9]
그는 이후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감독직을 수락하며 선수로서 밟아보지 못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무대를 감독으로서 밟게 된다. 당시 캔자스시티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년간 리그 최하위를 기록해 팀의 반등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신생팀이던 닛폰햄 파이터즈를 우승으로 이끈 힐만이 제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첫 시즌에는 75승 87패로 아메리칸 리그 중부 4위를 기록하면서 4년만에 팀을 최하위에서 건져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2009년에도 4위를 기록하면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듬해인 2010년 5월 13일, 12승 23패로 리그 최하위를 기록 중이던 그는 경질되었다. 참고로 이때 결코 이닝 이터라고는 할 수 없던 길 메시를 완봉시킨답시고 커리어 최다인 132구 피칭을 시켰다가 탈이 나게 만들어서 비난을 받았다. 사실 로얄스 이적 이전까지 200이닝 시즌이 없던 투수에게 2년 연속 210이닝을 던지게 하며 너무 많은 워크로드를 부담시켰는데 이 완봉으로 정점을 찍었다.[10]
5. 벤치코치[11]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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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애스트로스 벤치코치 시절. |
6.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트레이 힐만과 민경삼 前 단장 |
2016년 10월 27일 입국 당시. 손에 낀 반지는 2006년 아시아 시리즈 우승반지[13] |
2016년 10월 27일 KBO 리그의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조건은 2년간 160만 달러. 제리 로이스터와 송일수에 이은 세 번째 외국인 감독이자 2년 만에 등장한 외국인 감독이다.SK 와이번스, 트레이 힐만 감독 선임 다만 위 기사에서도 힐만이 두 번째 외국인 감독으로 표기되어 있듯 송일수(이시야마 가즈히데)는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 이름을 등록명으로 사용해서 외국인이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야구팬들의 여론은 힐만을 로이스터에 이은 2번째 외국인 감독으로 인식하는 게 지배적이다.
원래 SK에서 차기 감독으로 외국인 감독과 내국인 감독을 놓고 고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시아 경험이 있는 감독 후보군으로 트레이 힐만뿐 아니라 아지 기옌,[14] 스캇 쿨바,[15] 조이 코라[16] 등을 올렸고 국내 지도자 중에서는 후보군 6명을 추렸었다고 한다. 이후 SK는 트레이 힐만과 접촉했고 "과연 KBO 리그로 올까?"라는 걱정을 했었는데 의외로 적극적으로 오겠다고 표현 의사를 밝히며 계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닛폰햄 감독 시절 스몰볼로 일본시리즈 패권을 차지한 경험이 있기에
2016년 11월 11일 송도 컨벤시아에서 이/취임식을 거행하며 정식으로 감독직에 올랐다.이 취임식에서 기자들과 가진 일문일답.
첫 번째 외국인 감독이었던 제리 로이스터는 선발중심 야구, 수직적 리더십이 아닌 소통중시, 프로로서 자율 훈련과 자기관리, 팬서비스 강조 등 힐만이 부임한 2017년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원칙들을 적용시키려 한 선구자였지만 팀이 KBO역대최악의 꼴찌팀 롯데인 데다[18] 리그 여건 자체가 불펜야구에 적절하게 맞춰져 있었고 본인이 단기전에 너무 무력하기도 해서 미완의 개혁가로 남았는데 아시아 야구를 경험한 힐만은 어떨지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6.1. 2017년
자세한 내용은 트레이 힐만/2017년 문서 참고하십시오.6.2. 2018년
자세한 내용은 트레이 힐만/2018년 문서 참고하십시오.8년만에 팀에게 우승을 안겨주고 선수단에게 헹가래를 받는 모습 |
I am still here
정규시즌 종료 후 플레이오프 대비 훈련 중 인터뷰에서. 당시 힐만이 재계약 포기 의사를 밝히고 그 이후에 했던 발언이다.
정규시즌 종료 후 플레이오프 대비 훈련 중 인터뷰에서. 당시 힐만이 재계약 포기 의사를 밝히고 그 이후에 했던 발언이다.
6.3. 평가
메이저 리그 출신 감독으로서, 2000년대 후반의 왕조 시기를 지난 후 오랫동안 강팀의 위용을 잃었던 SK 와이번스를 8년만에 우승시킨, 한국시리즈에서 외국인 감독으로는 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명장이다. 짧은 부임 기간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KBO 리그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19] 제리 로이스터와 함께 KBO 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감독으로 평가받는다.[20] 보통 칭찬보다 비판을 많이 받는 감독으로써는 이례적으로 호평받는데, 우승 한 번만으로 SK 팬들에게 세 번의 우승으로 왕조를 이룬 김성근[21]과 동등한 평가를 받는 감독이다.[22] 특히나 힐만 다음의 감독인 염경엽이 팀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꼽히기에 더욱 두드러진다.힐만이 SK에 부임하기 전만 해도 SK는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 정도에 야구를 잘했을 뿐, 더는 우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평범한 팀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홈런을 많이 치기는 했지만 다른 팀에 비해 약간 정도 많은 뿐이었지 큰 장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수비는 불안, 불펜도 불안한 그런 팀이었다. 힐만은 본인의 지도 하에 SK를 부족한 수비와 불펜은 수비 시프트로 메우고, 홈런은 더욱 발전시켜 그동안 스몰볼 성향의 SK를 홈런 공장으로 바꿨다.[23][24][25] 또한 2018년에는 출루율 및 주루 플레이까지 개선했다.
KBO 리그 첫 번째 외국인 감독이었던 로이스터가 그랬드이, 선수들과 수평적인 관계로 소통하면서도 감독으로서의 책임감은 놓지 않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 선수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
선수들과 정말 가깝게 지낸 감독이다. 정의윤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 홈런을 쳤을 때 감독 폭행 세러머니를 제안한다든가, 선수들의 어깨를 주물러 준다든가, 300홈런을 친 최정에게 꽃다발을 직접 전달한다든가, 역전 3타점 적시타를 친 최항을 안아준다든가 하는 장면들은 국내 감독들에게서 참 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특히 선수들의 사정을 많이 들어주는 아버지 같은 역할도 많았다. 박종훈은 자기 생각을 감독에게 털어놓은 경우는 힐만 감독이 처음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한동민은 플레이오프 5차전이 마지막이 될까 봐 편지까지 써서 전달했다고 한다. 김태훈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 야구 선수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터뷰를 하기까지도. 박정권은 선수들이 감독님과 쌈을 싸먹는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사실 선수들과만 가까이 지낸 것이 아니다. 코칭 스태프들이나 통역을 담당했던 김민 매니저와도 무척 가깝게 지냈다. 코치들에게 커피를 내려 대접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 데이터에 대한 신뢰. 선수에 대한 신뢰
상대 팀과 우리 팀의 데이터[26]를 쌓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략을 수립해 경기에 임했던 감독이다. 하지만 한 해의 데이터만 신뢰한 것이 아니라 그 선수의 경험을 신뢰한 경우도 많다. 가장 좋은 예가 한국 시리즈 엔트리에 박정권을 넣은 것. 2018년 페넌트레이스에서는 거의 한 것이 없는 선수를 이전 가을야구 기록들과 그의 경험을 신뢰하여 발탁했고, 그는 팀이 승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그리고 귀신같이 재평가받는 정권이 내
또한 코치진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선수들의 상태를 묻고 기용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코치진들에게 어떤 선수를 기용하고 싶다면 나를 설득해 보라는 질문도 했다고 한다.
- 있는 점을 활용한다. 칭찬을 한다. 만들어 낸다.
가끔 감독들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묘하게 팀의 부족한 부분을 탓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2년간 SK 와이번스 감독직을 하면서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정의윤의 보살 실수, 한동민의 번트 실수 같은 잘못한 선수가 있어도 잘 한 점을 칭찬하거나 위로하는 경우가 많았다.[27] # # 가끔 보다 보면 상대 팀 선수가 잘한 점을 칭찬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그런 과정에서 참 많은 선수를 길러냈다. 박종훈, 문승원을 비롯해 김태훈, 정영일 등 힐만 밑에서 실력이 꽃을 피웠다. SK 스카우트 팀의 선택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었던 웨시퍼는 1군에서 언제든 쓸 수 있는 강한 선수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구단에서조차 '나이스맨'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
칭찬을 많이 하는 감독이기도 했지만 실수에 대해 잘 위로해 주는 감독이기도 했다. 한 가지 예로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초대형 실책을 한 강승호를 경기가 끝난 후 안아 주기도 했다. 사진 강승호는 감독이 떠나는 날 그 장면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했다. #
- 철저한 건강 관리
힐만 감독은 선수들을 엄청나게 관리했다. 토미 존 수술에서 복귀한 김광현은 절대 4일 휴식 후 등판을 시키지 않는다든지, 투구수나 이닝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2018년에 제일 고생한 선수가 김태훈이지만 시즌 3연투가 2회 정도일 뿐이다.[28] 철저한 관리의 결과 김광현은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마지막 이닝에서 이틀 쉬고 올라왔음에도 154km가 나오는 직구를 던지는 괴력투를 보여줬다. 일부 야구인들의 시각과는 달리 투수들의 팔과 어깨는 쓸수록 단련되고 강해지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모품이다. 투수에게는 목숨처럼 여겨지는 신체 부위이며, 쓰는 만큼 충분한 휴식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만큼 갈려나가며 소모될 뿐이다.
2년간 감독 생활을 하면서 보여준 단점이라고 해 봐야 2018년 초반에 있었던 지나친 양아들 기용 정도인데, 시즌이 끝날 때까지 그러면서 시즌을 망쳐버리는 감독들도 있기 때문에 정말 큰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고 그 당시 그 선수들은 백인식, 정의윤, 정진기, 윤희상 등 목록을 보면 언젠가 커야 하거나 해줘야 하는 선수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2018 시즌 종료 후 되돌아봐도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기용은 없었다. 그때 팬들이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 선수들을 그 후 실제 썼을 때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 경기 내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이 팬들의 평가이다. 게다가 정의윤, 윤희상, 정진기 등은 한국시리즈에서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가족을 위한 본인의 의지로 팀과의 계약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음에도 지속적으로 SK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 프런트로부터 언급이 되는 편이었으며, 힐만 본인도 자주 영상 등으로 SK에 대한 애정과 팬들에게 근황을 전하는 등 근래 한국 프로야구에서 보기 드문 명예롭고 성공적인 퇴임을 이룬 감독이 되었다.[29]
그의 후임인 염경엽이 정규시즌 막판 1위를 내주고 포스트시즌에서 자신의 후임 장정석에게 깔끔한 스윕패를 당하고, 2020시즌에는 9위로 추락하는 바람에 많은 슼팬들이 힐만의 빈자리를 그리워했다. 특히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고 투수들을 혹사로 갈아먹으며 양아들을 내보내 경기를 말아먹는 중인 염경엽과 달리, 선수들과 관계가 아주 좋았고 이렇다 할 혹사나 편애조차 없었던 힐만이기에 더더욱.[30][31]
7. 마이애미 말린스 코치 시절
美 마이애미 지역 언론에서 “캔자스시티 감독 및 돈 매팅리 감독 하에서 LA 다저스 벤치코치를 지낸 트레이 힐만이 마이애미의 1루 코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돈 매팅리 감독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것으로 그 전부터 친해왔기 때문에 코치를 맡는 것이 어려움이 없다고 해서 수락했다고 한다.2월 8일, SK 와이번스가 훈련 중인 플로리다 주 베로비치에 위치한 히스토릭 다저타운에 방문했다. SK는 우승반지, 트로피 복제품 등을 전달했다. # 후속 기사에 따르면, 2번 더 방문했다고 한다. #
류현진과 함께 조원우 전 롯데 감독의 메이저리그 연수를 주선해 주었다. #
개막전에 전광판으로 팬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
2019년 6월 23일 희망 더하기 행사에서 다시 한 번 전광판으로 인사를 전했다. 2:38부터 확인
2020년 베로비치 겨울 캠프에 방문해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
코로나 바이러스 영향으로 전세계 스포츠 행사가 중단된 가운데, 한국에서 야구리그가 개막하다 보니 린드블럼, 메릴 켈리와 함께 인터뷰를 한 기사가 야후 스포츠에 실렸다. #야후 스포츠(영문) 관련 기사
2020년 5월 14일 ESPN에서 중계하는 SK의 경기를 시청했으나, 팀이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배하면서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2021년 3월 5일 SK 와이번스의 마지막 날 행사 때 영상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모기업인 신세계그룹 이마트와 선수단 모두에게 행운을 빌며, 미국에서도 항상 응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2021년 10월 23일 타 구단으로 이적하기 위해 코치직을 사퇴했다. #
[1] 2003년 감독 부임 당시 힐만의 나이는 불과 만 40세로, 당시 현역 선수였던 이토 쓰토무보다 어렸고, 요미우리에서 뛰고 있던 구도 기미야스와는 동갑이었다. 2005년까지 일본에서 그보다 나이가 어린 프로야구 감독은 없었다. 이후 후루타 아쓰야가 2006년 41세의 나이로 선수 겸 감독에 취임한다.[2] 그 후 세이부는 당시 1위였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누르고 퍼시픽리그 우승, 일본시리즈에서도 주니치 드래곤즈를 누르고 우승했다. 근데 뭔가 감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이 해가 바로 호크스가 2010년까지 가을야구에서 계속 탈락하는 징크스인(심지어 2008년 왕감독께서 은퇴하던 해엔 꼴찌로 진출 실패!) 일명 "가을의 풍물시" 의 시작이었다(...)[3] 저기 있는 OKAJIMA가 그 오카지마 맞다.[4] 사이토 가즈미가 최종전에서 끝내기 완투패를 당하고 주저앉아 서럽게 울던 그 플레이오프 맞다.[5] 이후 2016년 깨졌지만 외국인 감독으로서의 기록은 아직까지도 최장기간 기록.[6] 센트럴 리그에서도 2007년 플레이오프를 도입하며 바뀐 이름.[7]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지휘하던 시기라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미국인 감독끼리의 포스트시즌 맞대결이 되었다.[8] 패배가 결정된 5차전에서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합작퍼펙트 게임을 당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때 상대팀 주니치 감독의 투수교체를 두고 한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9] 이 때문에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뭐하는 짓이냐는 팬들의 반발과, 닛폰햄의 슈퍼 스타들이었던 모리모토 히초리와 이나바 아쓰노리에게도 비판을 들었다.[10] 길 메시는 이 날 이후 완전히 망가져서 잔여 시즌 8점대를 찍고 다음 시즌에도 부활하지 못했지만, '팀에 민폐를 끼치기 싫다'며 잔여연봉 전부를 포기하고 은퇴하여 야구계의 성자로 찬양받았다. 이 이후 크게 데여서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투수혹사가 없다.[11] 우리나라의 수석코치급에 해당한다. LG 트윈스가 이 개념을 2016년부터 KBO 리그에 도입했는데 최정우 코치가 수석코치 역할을 하는 벤치코치로 일하고 있다.[12] 2013년 6월 11일 다저스타디움에서 발생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빈볼 시비 & 벤치 클리어링 영상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흥분한 돈 매팅리 감독을 진정시키는 등번호 45번의 HILLMAN이 바로 그다.[13] 확대된 사진을 보면 아시아 시리즈 챔피언이라고 쓰여져 있다.[14]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시킨 감독이고 삭스 코치를 한 적 있던 이만수 전 감독의 영향인지 인터뷰를 통해 한국에서 한 번 지도자 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한 바 있다. 만약 SK의 감독으로 선임됐다면 그야말로 거물급 인사를 영입할 뻔했는데, 진짜로 감독으로 영입했다가는 스포츠신문이 그의 구설수로 뒤덮일 뻔했다(...)[15] 과거 1998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외국인 선수로 뛴 바 있고 2016년 현재 볼티모어 오리올스 타격코치.[16] 전 마이애미 말린스 수석코치, 2017 시즌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코치.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이만수 감독과의 인연으로 2013년 SK 와이번스의 스프링캠프 때 수비 주루 인스트럭터로 참여하기도 했다. 만약 와이번스의 감독이 됐다면 KBO리그 역대 외국인 감독, 코칭스탭 중에서 훌리오 프랑코 다음으로 가장 화려한 경력을 가진 감독이 될 뻔했는데,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1997년 랜디 존슨, 켄 그리피 주니어, 에드가 마르티네스,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함께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참고로 용규놀이 후 18구째 홈런을 친 걸로 유명한 알렉스 코라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의 형이기도 하다.[17] 삿포로 돔은 돔구장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펜스 등으로 인해 나고야 돔과 함께 투수 친화 구장으로 유명하다.[18] 로이스터 재임기 롯데 코치진은 수석 박영태, 투수 양상문, 주루 이철성, 수비 공필성 등 역대로 꼽아도 될 최악의 코치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19] 보통 여기에는 2010년대 중후반 두산 베어스 왕조를 이끈 김태형, 그보다 앞선 2010년대 초반 삼성 라이온즈 왕조의 지도자 류중일이 함께 언급된다. 하지만 김태형의 경우 성적은 좋을지 몰라도 과도한 카리스마형 감독이라서 비판을 받는 편이고, 류중일은 충분한 전력이 갖춰진 상위권 팀은 잘 이끌지만 중-하위권 팀의 성적을 향상시키는 능력은 부족해 이후 LG 트윈스 시절의 기대 이하 성적으로 평가가 꽤 내려갔다. 이렇듯 우승을 많이 한 감독들조차 여러 구설수나 단점이 있는 반면, 힐만은 짧은 기간 동안에도 우승을 포함한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고, 구설수 없이 물러났다는 점에서 야구 감독들 중 이례적으로 평이 높다.[20] 이후 로이스터, 힐만 이후 외국인 감독들이 KBO 리그에 감독으로 부임하였음에도 우승은 커녕 가을야구 진출조차 하지 못하고 성적 부진으로 팀을 떠나게 되며 이 두 감독의 평가가 더더욱 상승하고 있다.[21] 2020년대 시점으로 김성근은 한화 이글스 시절 혹사 문제로 평가가 많이 낮아졌고, SK 시절에도 전병두 혹사 사건 및 여러 논란으로 평은 갈리기는 했다. 그러나 2007년 감독 부임 이후 한국시리즈 3회 우승, 1회 준우승의 대업적을 달성하여 2000년대 후반 왕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SK 팬들에게는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치 삼성 라이온즈 왕조를 만들었지만 LG 트윈스에서 기대치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한 류중일이 삼성 팬들에게 받는 평가와 비슷하다. 마침 류중일의 경우 류중일의 후임이었던 김한수가 최악의 평가를 받는 것이 힐만의 후임 염경엽과 유사하다.[22] 오죽하면 SSG 랜더스 갤러리에서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명장을 평가할 때 머리로는 김성근을, 가슴은 힐만을 외치는 경우가 많다.[23] KBO 리그 역대 팀 홈런 1위를 234홈런의 17 SK가, 2위를 233홈런의 18 SK가 차지하고 있다. 모두 힐만의 감독 시절이다.[24] 물론 전임 김용희 감독 때부터 SK가 장타력을 강조하는 야구를 지향하긴 했지만, 이를 팀 컬러로 정착시킨 것은 2017년(힐만 부임 첫해)부터다.[25] 특히 두산 베어스 팬들이 힐만과 SK 선수단, 프런트의 능력, 그리고 수비 시프트 및 플라이볼 레볼루션에 기반한 타격 훈련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고 이후 힐만 체제의 타격코치였던 정경배가 두산으로 오게 되었다.[26] 실제로 SK는 NC 다이노스와 함께 한국프로야구에서 세이버메트릭스 분야에 투자를 하는 팀으로 꼽힌다.[27] 이 정반대 사례가 이하라 하루키. 실제로 이하라는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지면 선수를 탓하는 것으로 유명해 세이부에서도 선수단이 이하라를 대놓고 씹었으며 2020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선수 체력 관리를 위한 타자의 투수 기용을 비난할 때도 우에하라 코지와 다르빗슈 유에게 언행불일치로 씹혔다.[28] 그러나 염경엽은 시즌 초부터 그를 3연투시키고 결과는 만루 홈런으로 돌아왔고,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부진하다가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고 선발로 전향했다. 이후 부활하지 못하고 은퇴했다.[29] 그래도 SK 구단은 2011년 김성근의 해임 과정에서 벌어진 마찰을 제외하면 다른 감독들은 계약 기간을 보장하면서 후임 감독들과 자연스럽게 계약하여 감독 교체가 비교적 원만하게 이루어진 구단이었다.[30] 물론 조용호, 정진기 등 양아들이라고 불렸던 일부 선수들이 있긴 하지만 편애라고 보기는 어렵다.[31] 일부 솩갤러들은 힐만 2년만에 우승하는 바람에 지지리도 돈 안쓰는 프런트가 자기들이 잘해서 우승한 거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며 프런트를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