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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20:43:19

파라 팔라비


<colbgcolor=#239f40><colcolor=#ffffff> 이란 제국 팔라비 왕조 초대 샤바누
파라 팔라비
فرح پهلوی | Farah Pahlavi
파일:Shahbanu_of_Iran.jpg
출생 1938년 10월 14일 ([age(1938-10-14)]세)
이란 제국 테헤란
국적
[[팔라비 왕조|]][[틀:국기|]][[틀:국기|]][1]
왕조 팔라비 왕조
재위 이란 제국 왕후
1959년 12월 21일 ~ 1967년 10월 26일
이란 제국 샤바누
1967년 10월 26일 ~ 1979년 2월 11일
이란 제국 샤바누 (명목상)
1979년 2월 11일 ~ 1980년 7월 27일
가족 아버지 소흐랍 디바
어머니 파리데 고트비
배우자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장남 키루스 레자
장녀 파라나즈
차남 알리 레자
차녀 릴라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결혼2.3. 이란의 왕후2.4. 대관식2.5. 이란의 샤바누2.6. 이슬람 혁명과 망명2.7. 망명 이후
3. 여담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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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두번째 계후이자 이란 제국샤바누. 사산조 페르시아아자르미도흐트, 푸란도흐트와 함께 이란의 2500년 역사를 통틀어 여제, 황후를 뜻하는 '샤바누'의 칭호를 공인받은 단 세 명의 여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59년 국혼으로 황실에 입성한 후 이란의 서구화, 근대화를 꾀한 부군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정책 '백색혁명'에 발맞추어 교육, 문화예술, 복지, 여성인권 분야에서의 발전을 이끌었으나, 1979년 제정의 몰락과 함께 긴 망명을 떠나 현재는 파리메릴랜드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1938년 10월 14일 테헤란에서 이란 제국 육군 대령인 소흐랍 디바와 그 아내 파리데 고트비의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이란령 아제르바이잔 출신으로, 외교관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온 엘리트 장교였고, 모친은 부유한 길란인 가족의 딸이었다. 파라는 유럽에서 공부하여 서구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졌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유럽식 교육을 받았고, 히잡과 같은 전통적 생활양식을 강요받지 않았다. 그러나 1948년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외숙들이 사는 테헤란으로 이사를 떠나 그곳에서 프랑스계 학교를 다니게 된다. 이 시기 건축가였던 외삼촌의 영향으로 건축과 도시에 관심을 보인 파라는 1957년 이란 정부 국비유학생에 선발되어 프랑스 파리의 건축학교에서 수학하게 된다.

2.2. 결혼



파일:Persian_royal_wedding.jpg

파일:1000014021.jpg

파라는 1959년 파리 주재 이란대사관에서 열린 유학생 초청 연회에서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를 처음 만나 그해 12월 21일 테헤란의 골레스탄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은 대단히 화려했는데, 당시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이브 생로랑이 직접 디자인한 웨딩드레스와 세계에서 가장 큰 핑크 다이아몬드인 누르 울 아인이 박힌 티아라[2], 네덜란드프랑스에서 대량으로 들여온 화훼류와 고급 장식들 외 수많은 사치품이 사용되었다.

2.3. 이란의 왕후

1960년 10월 31일, 장자 레자 팔라비가 태어났다. 파라 이전 2번의 결혼에 각각 불화와 난임으로 실패해 후계자가 없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결혼한 지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후계자가 태어난 것에 매우 기뻐했으며, 후계자라는 황실의 숙원을 해결한 파라의 입지는 매우 견고해졌다. 당시 산업, 행정, 교육, 군사 외 다방면에서의 근대화, 서구화를 강하게 추진하던 샤는 왕후 파라에게 문화예술, 교육, 복지 등을 주관할 폭넓은 권한을 주었다. 파라는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전국 곳곳에 학교와 병원, 보건소, 박물관을 설립했고, 프랑스어영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유학파로서의 장점을 살려 이란 국내의 박물관과 유럽 유수의 학교, 박물관 사이에 학술교류와 방문전시가 활발해지게끔 했다.[3] 또 학부 시절 배운 건축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 지어지는 니아바란 궁전의 설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장남 레자 왕태자 이후 1963년 장녀 파라나즈 공주, 1966년 차남 알리레자 왕자, 1970년 차녀 릴라 공주를 낳아 샤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게 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미국식 대학 교육에도 큰 관심을 보인 그녀는 1960년대 중반 팔라비 대학[4]을 미국식 종합대학으로 개편하는 사업과 아리아메르 공과대학[5]의 설립에 동참했다.

2.4. 대관식



파일:persian_coronation.jpg

파일:persiancoronation.jpg

1967년, 이란 제국 의회는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 기존의 왕호인 샤를 황제를 뜻하는 샤한샤로 높일 것을 청한다. 샤는 이를 받아들여 백색혁명의 진전과 함께 급격히 발전한 이란의 모습과 자신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대관식을 계획한다. 1967년 10월 26일 각국의 군주, 정상들을 포함한 5,000여 명의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샤는 테헤란의 골레스탄 궁전에서 자신이 샤한샤에 등극했음을 선포한다. 왕후였던 파라 또한 이 자리에서 왕관[6]을 받음과 동시에 샤바누(황후)로 존숭되었고, 나아가 남편인 모하마드 레자 샤가 황태자가 21세가 되기 전에 서거할 시 섭정으로 재위한다는 파격적인 권한까지 부여받았다.

2.5. 이란의 샤바누

파일:empressfarah.jpg

이란 땅 구석구석 격오지까지 빼놓지 않고 방문하여 민생을 살피는 모습과 그간의 각종 자선, 교육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은 파라는 그간 해오던 내정 사무 뿐만이 아니라 외교 분야에도 발을 들여 1971년 제정 2500주년 기념행사[7]를 기획했고, 1972년에는 중국으로 단독 국빈방문을 가기도 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도 계속 이어져서, 이란 국외로 밀반출된 유물들을 다시 사오기도 했고, 부실하게 관리되던 고서와 유물들을 정리, 전통 공예와 문학을 전수하고 기록하는 한편 전국 곳곳에 박물관,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파일:warholiran.jpg

무엇보다 그녀는 이 시기 세계 미술품 시장의 큰손으로 떠올랐는데, 피카소, 클로드 모네, 잭슨 폴록, 앤디 워홀, 에드가 드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근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골라 모았다.[8] 구미권 밖에서 제일 가치있는 현대미술 컬렉션인 이 작품들은 1977년 개관한 테헤란 현대미술관의 전시품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건재하다고 한다.

2.6. 이슬람 혁명과 망명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의 유가파동과 농지개혁의 실패 이후 폭등한 실업과 구조적인 도농, 빈부격차 문제 탓에 이란 제국의 경제적 기반은 점차 불안해져만 갔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경민들과 저학력 빈민층은 이슬람의 전통적 가치 아래 결집했고, 서구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젊은이들은 전형적인 개발독재 체제였던 팔라비 왕조 하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75년에는 체제의 강력한 구심점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샤가 혈액암을 진단받았고[9], 이는 국정 수행 동력의 침체를 낳았다. 거듭되는 악재 속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날로 잃어가던 제국 정부는 1978년 렉스 극장 화재의 여파로 일어난 일련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군경 투입과 유혈진압이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던 이 치명적인 오대응의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곧 이란 혁명으로 이어졌다. 외국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당시 이란의 우방이었던 영국미국은 심히 불평등한 지하자원 수익 분배에 맞서 슬슬 자원 주권을 되찾아오려는 샤와 제국 정부의 시도를 눈치채고 호메이니의 귀국을 사실상 묵인하였다.


1979년 1월 16일, 거세지는 반정부 시위의 물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판단한 샤는 메흐라바드 국제공항을 통해 황후 파라를 포함한 친지, 측근들과 함께 이란을 떠나게 된다.

2.7. 망명 이후

파일:royalcoupleinexile.jpg

팔라비 일가는 1980년 3월 이집트사다트 대통령이 제후 부처와 황자녀, 측근들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약 1년 2개월 간 7곳을 비행기로 이동했다. 샤는 암에 걸려 쇠약해진 상태로 모로코, 바하마를 거쳤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수술을 위해 일시적으로 미국 입국을 허용받자마자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터졌다. 뒤이어 찾은 파나마에서는 파라를 포함한 황제 일가 전체를 이란으로 송환하려 했다. 사다트가 샤와의 친분, 그리고 파라가 부인 지한 사다트에 보낸 눈물겨운 편지를 생각하여 그들을 받아들인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황족들은 옛 이집트 왕실의 궁전인 쿠베 궁전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샤의 건강은 치료 적기를 놓쳐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지 오래였다. 1980년 7월 27일,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카이로에서 암으로 숨을 거둔다.[10]


샤의 장례식사다트의 극진한 예우 아래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파라는 남편의 사후 3개월 동안 명목상의 섭정으로서 재위하다 1980년 10월 아들 레자 황태자가 명목상의 샤한샤로 즉위함에 따라 물러났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지, 1981년 10월 사다트가 암살당하며 또다시 신변이 위태로워진 파라와 팔라비 일가는 미국으로 다시 한번 거처를 옮기게 된다.[11] 이렇게 파라는 코네티컷메릴랜드에 새롭게 정착하며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비극은 멈출 줄을 몰랐다. 파라의 네 자녀들 중 혁명 당시 미성년자였던 셋은 혁명과 망명의 후유증으로 병적인 우울과 섭식장애에 시달렸다. 막내딸 릴라 공주와 둘째아들 알리 레자 황자는 각각 2001년 약물 과다투여로, 2011년 권총자살로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12]

2024년 현재, 파라 팔라비 황후는 미국프랑스를 오가며 자신의 이름을 딴 '파라 팔라비 재단'을 통해 재외 이란인들을 위한 각종 자선, 장학사업과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대외활동도 활발히 하는 그녀는 6월의 인터뷰에서 이란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밝혔다.

3. 여담

2022년 이란 히잡 시위에서 국외 재야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덕에 팔라비 왕조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호평일색이다. 아는 이들조차 팔라비 왕조 시절에 대한 비판점은 있을지라도 망명 후 히잡시위에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를 한다.

이란계 스웨덴인 영화 감독인 나히드 페르손 사르베스타니가 2008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장편 영화 '왕비와 나(Queen and I)'의 주인공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OVWiqpSW5Wc

4. 가족관계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의 샤한샤
(Mohammad Reza Pahlavi, Shahanshah of Iran, 1959년 결혼)
1남 레자 팔라비 황태자
(Reza Pahlavi, Crown Prince of Iran)
1960년 10월 31일 생존 ([age(1960-10-31)]세) 야스민 에테마드-아미니/ 슬하 3녀
1녀 파라나즈 팔라비
(Farahnaz Pahlavi)
1963년 3월 12일 생존 ([age(1963-03-12)]세) 미혼
2남 알리 레자 팔라비
(Ali Reza Pahlavi)
1966년 4월 28일 2011년 1월 4일 라하 디데바르/ 슬하 1녀
2녀 릴라 팔라비
(Leila Pahlavi)
1970년 3월 27일 2001년 6월 10일 미혼

[1] 망명 이후의 신분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게 없지만, 장남 레자 황태자가 현재 무국적자인 것을 고려하면 똑같이 특별 신분을 인정받는 무국적자일 확률이 높다.[2] 이것도 세계적인 명품 귀금속 브랜드 해리 윈스턴의 설립자인 해리 윈스턴이 직접 세공했다. 지금은 이란 중앙은행 지하금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3] 1961년 국빈 방문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와 직접 담판을 지어 성사시킨 것이라고 한다.[4] 現 시라즈 대학교[5]샤리프 공과대학교[6] 세계적인 귀금속 브랜드 반 클리프 앤 아펠의 설립자이자 수석 세공사였던 피에르 아펠이 직접 디자인하고 세공한 물건이라고 한다. 2024년 현재도 반클리프의 대표적 주얼리 컬렉션으로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다.[7] 총 행사비만 당시 돈으로 1억 달러가 든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파티라고 한다.[8] 그중 앤디 워홀과는 활발히 협업하여 시누이 아슈라프 공주와 함께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다.[9] 물론 이 사실은 당분간 극비에 부쳐졌다.[10] 골때리는 것은 이때 샤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소라야 전 왕후가 죽기 직전의 샤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다고 직접 연락해 왔는데, 샤는 그에 그녀를 아직 사랑한다고 대답(...)하며 방문을 허락했다. 물론 소라야가 채 행장을 꾸리기도 전에 샤가 급서하면서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본 파라 황후의 기분이 어땠을지는...[11] 새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황족들의 미국 정착을 기꺼이 허락했다.[12] 알리 레자 황자는 외동딸의 탄생을 불과 반년 앞두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