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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연합 공화국 제2대 대통령 | |||
<colbgcolor=#c09300><colcolor=#fff> 이집트 아랍 공화국 제5·6대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 أنور السادات | Anwar Sadat | |||
이름 | 안와르 엘 사다트 Anwar El Sadat أنور السادات | ||
출생 | 1918년 12월 25일 | ||
이집트 술탄국 미트 아부 엘 콤 | |||
사망 | 1981년 10월 6일 (향년 62세) | ||
이집트 카이로 | |||
재임기간 | 제13대 총리 | ||
1973년 3월 26일 ~ 1974년 9월 25일 | |||
제5대 대통령[A] | |||
1970년 10월 15일 ~ 1976년 10월 2일 | |||
제6대 대통령 | |||
1976년 10월 2일 ~ 1981년 10월 6일 | |||
제17대 총리 | |||
1980년 5월 15일 ~ 1981년 10월 6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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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정치인, 군인 | ||
종교 | 수니파 이슬람 | ||
신장 | 179cm | ||
정당 | 아랍 사회주의 연합 ( - 1977) 국민민주당 (1977 - 1981) | ||
약력 | 이집트 국회의장 이집트 부통령 이집트 총리 아랍 연합 공화국 대통령 (1970 - 1971) 이집트 대통령 (1970 - 1981) | ||
수상 이력 | 타임지 올해의 인물 (1977년) 노벨평화상 (1978년) 의회 명예 황금 훈장 (201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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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의 군인, 정치가. 제4차 중동전쟁으로 아랍 민족주의 진영의 영웅으로 대접받기도 했지만, 이후 이스라엘과의 화평 정책으로 평가가 엇갈리게 되었으며, 특히 아랍 내에서는 배신자 취급받았다.
2. 일생
2.1. 군인 안와르 사다트
안와르 사다트는 이집트 무누피아 주 미트 아부 엘 콤에서 가난한 수단계 이집트인 부모의 형제들 중에서 13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수단계 흑인과 이집트인의 혼혈이었으며, 아버지는 이집트인이었다.[3] 사다트는 1938년에 카이로 왕립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통신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영국의 지배에 있던 이집트 왕국[4]을 독립시키기 위한 장교들의 독립단에 참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안와르 사다트는 이집트의 독립을 위해 당시 엘 알라메인에 있었던 에르빈 롬멜과 함께 카이로 시내에서 싸우다가, 영국군에게 테러 용의자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총살당하는 신세는 면했지만, 군적을 박탈당한 채 이집트 감옥 내에 있던 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러던 중 1944년에 탈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카이로의 일본 정원에 숨어 지냈다.
2.2. 쿠데타
사관학교 동기이던 나세르와 함께 자유장교단을 결성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52년 이집트 왕국의 파루크 1세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을 세웠고, 쿠데타 당시 국민들에게 혁명공약을 라디오와 TV로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다.이후 승승장구하며 이집트 공화정부에서 1960년부터 1969년까지 국회의장 등의 주요 관직들을 역임하다가 1964년 대통령이었던 나세르에 의해 이집트 부통령에 취임하기도 했고, 다시 1969년에 이집트 부통령직에 있었다. 그러던 중 1970년 9월 28일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나세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2.3. 대통령 집권
나세르와 달리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추구했던 사다트는 집권 이후 반대파를 제거하는 동시에, 나세르의 사회주의식 국유화 정책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사다트는 이집트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슬람적 관습들을 없애는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1973년 10월에는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동서 양쪽 전선으로 기습, 선제공격을 가하여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지휘실의 사다트. 왼쪽이 수에즈 운하 강습도하작전을 주도한 참모총장 사드 압드 엘 샤즐리 장군이다. |
개전 초 이집트군은 적시에 동원령을 발효하는 데 실패한 이스라엘군을 거세세 몰아붙이며 중동전 사상 최초로 아랍 측이 세계에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을만한 군사적 성과를 거뒀지만, 전열을 정비한 이스라엘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자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수에즈 남단의 제3군이 포위당한 채 전쟁을 끝마쳤다. 그러나 번번이 이스라엘에게 패배하기만 했던 이집트와 아랍 진영에게는 이 정도의 분전도 충분히 의미있는 군사적 성공이었고, 덕분에 사다트는 이집트와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무엇보다, 전쟁이 이스라엘의 군사적 승리로 종결됐다고 해서 사다트의 계획도 함께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정한 노림수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미 개전 전부터 이집트의 후견국을 소련에서 미국으로 갈아치울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내던 그는 1974년 1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새라 개입한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중재 하에 이뤄진 전후 협상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 동안에서 물러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67년 이후 거의 10년 만에 이집트 최대의 수입원 중 하나던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대가로 미국의 대규모 지원 패키지를 얻었고, 미국은 사다트에게서 친미 노선으로의 전환을 확인받으며 이집트라는 아랍 세계 최고의 외교적 카드를 손에 넣었다. 소련만 제외하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딜이었다.
1977년 이스라엘 방문 당시의 모습. 오른쪽은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국무총리 | 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 직후 |
사다트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도 서로 속내를 기탄없이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훗날 사다트에 대해 전 세계 정상 중 유일하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정을 느낀 진정한 친우였다고 회상한 카터는 사다트와 베긴을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양국간의 항구적인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밀고 당기는 팽팽한 협상 끝에 마침내 두 나라는 역사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바로 1978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점령했던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고, 이집트는 그 대신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승인하고 평화협정을 맺은 후 국교를 수립하기로 했다. 세계가 놀란 이 합의로 사다트는 메나헴 베긴과 함께 197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왼쪽부터 사다트, 지미 카터,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
설상가상으로 경제자유화를 통한 외국 자본의 도입도 사다트 정부가 경제에서 무능한 바람에 오히려 이집트 사회의 빈부격차 심화,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이어지면서 사다트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9년 1월 이란에서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조가 전복되자 사다트와 친했던 팔라비 2세는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그 후 바레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이 과정에 사다트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슬람 사회에서 사다트가 무슬림들의 편이 아니라며 사다트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졌다.
그렇게 아랍 국가들과 사다트 반대파의 반발이 높아지던 중, 사다트는 1981년 9월 이집트의 나세르 지지자, 지식인, 여성운동가, 공산주의자, 이슬람 원리주의파, 학생운동가, 대학교수, 언론인, 정치운동가들을 급작스럽게 체포하여 독재자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약 1,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이집트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그 사이에 오일 쇼크[5]와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이집트 경제가 나빠지기까지 하자 사다트의 지지율은 갈수록 하락세를 걸었다.
한편 이러한 사다트의 이스라엘과의 화평 노선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여러 아랍 세계 국가들에서도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당시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승인하자 아랍 국가들은 1979년 아랍연맹에서 이집트를 추방시키고(1989년에 복귀) 이집트에 소재하고 있던 아랍연맹 본부를 튀니지로 이전해 버리면서[6] 같은 아랍 국가들로부터도 따돌림당하는 결과를 낳았다.[7] 이스라엘과의 화해 노선으로 반 이스라엘 노선을 추구하던 아랍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아랍연맹에서 추방당한 이후 사다트 정권 말기에서 무바라크 정권 초기였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까지 이집트에 우호적이었거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국가라고는 같은 언어와 민족, 종교를 공유하는 아랍 국가들이 아닌 모잠비크[8]나 탄자니아, 잠비아, 콩고 인민공화국, 르완다, 카메룬, 케냐, 자이르, 우간다 같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뿐이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 및 이스라엘에 대한 정식 국가 승인으로 중동 및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따돌림당하자 우호적인 제 3세력을 만들고자 1980년대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행하는 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의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수립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전쟁할 일이 없어지게 되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소총이나 기관총, 폭탄, 군모와 군복, 헬멧 같은 무기들과 군수물자들을 여러 내전 중이던 아프리카 나라들에게까지 대거 팔아넘겼는데 이후 이집트에서 팔아넘긴 이 무기들을 아프리카 내전 국가들의 반군과 정부군, 민병대 세력들이 전쟁터에 투입해 총탄과 포탄을 퍼붓고 살상하며 죽이는 일도 있었다.
2.4. 사망
1981년 10월 운명의 퍼레이드에 참석한 육군 장교 예복 차림의 사다트. 왼쪽의 공군 예복을 입은 장교는 부통령이자 훗날 독재자가 되는 호스니 무바라크. |
1981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 개전일에 승전 기념 열병식을 관람하던 도중 이슬람주의 과격파인 지하드 소속의 할리드 이슬람불리 이집트 육군 중위와 그 부하들과 교전 도중 총탄과 수류탄에 맞아 쓰러졌다. 평소 사다트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언젠가 나는 암살당할 것"이라 늘 주장해왔기 때문에 무려 4중으로 된 경호를 받았으며, 때문에 사다트를 암살하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그러나 당일에는 경호담당 장교가 메카 성지순례를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며, 이집트 공군이 축하 비행을 하며 군중들이 축하 비행에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 이슬람불리와 그의 부하들은 사열 트럭에 숨은 채 사다트에 접근했다. 이슬람불리가 트럭에서 뛰어내려 사다트에게 경례하는 척 하면서 수류탄을 투척하고 자동소총을 발사했다. 처음에는 이집트 국방장관이 수상하다고 했지만 이슬람불리가 경례를 하자 이에 안심한 사다트가 맞경례를 하려고 일어나자 바로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다. 후일 사다트의 조카는 '숙부는 그 행동을 테러가 아닌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이슬람불리는 "파라오에게 죽음을 안기라!" 고 외쳤으며, 수류탄 3발을 던졌다.
암살 당시의 모습들 |
총탄에 맞아 쓰러진 사다트는 병원으로 황급히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저격범인 이슬람불리는 체포된 후 반역죄로 1982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슬람불리는 독재자를 죽였으니 좋은 일 한거라며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당시 부통령이자 제4차 중동전쟁 당시 공군 장성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도 이때 손에 총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죽음은 면했다. 이후 호스니 무바라크가 후임 이집트 대통령이 되어 무려 30년 동안 집권하였는데,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이어진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로 퇴진했다.
2.5. 장례식
앞줄 좌측부터 제럴드 포드 전 미국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사다트의 장례식은 세계 각국의 귀빈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의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들과[9] 이스라엘, 서방 국가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상들이 참석하였으나,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택한 사다트를 싫어했던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을 제외하고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10] 오히려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저격범인 이슬람불리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웅으로 떠받들었고 사다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였다. 한편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11]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동유럽 공산주의 진영 국가들의 경우 사다트의 사망에 애도하거나 사다트의 암살 소식을 타스 통신과 탄유그 통신 같은 현지 국영 언론 통신을 통해서 보도하였으나, 소련은 1970년대 말 이집트가 친미/친서방 노선으로 방향을 튼 덕에 외교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던 관계로 주요 인사를 장례식에 파견하지 않았다.[12]
3. 선거 이력
<rowcolor=#ffd700>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0 | 1970년 이집트 대통령 선거 | 이집트 | 아랍 사회주의 연합 | 6,432,587 (90.00%) | 당선(1위) | 초선 |
1976 | 1976년 이집트 대통령 선거 | 9,145,683 (99.94%) | 재선 |
4. 평가
헨리 키신저는 사다트에 대해서 이츠하크 라빈과 더불어 평화에 대한 신념과 비전을 가지고 있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사다트는 죽었지만 그가 불러일으킨 영감은 꺼지지 않는다고 자신의 저서인 <세계질서>에서 크게 고평가했다.[13]아랍권에서는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을 팔아넘긴 배신자라는 비난이 있지만, 반대로 '영리한 사다트가 이스라엘을 평화협정으로 속인 다음에 한 10년 동안 힘을 더 길러서 다시 전쟁을 일으켜 끝장내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깝게 암살당해서 이루지 못했다' 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다. '효종이 북벌 계획 하루 전에 사망했다'라는 야사와 비슷한 허무맹랑한 소리.
[A] 아랍 연합 공화국 대통령 겸직.[2] 첫번째 부인으로 성격차 이혼했다.[3] 그래서 흔히 떠올리는 이집트인의 외모와는 다소 다른, 흑인 이목구비가 섞인 외양과 비교적 짙은 피부색을 갖고 있다.[4] 당시 이집트는 말이 독립국이었지 사실상 영국의 허수아비였다.[5] 이집트도 석유가 나오기는 많이 나오지만 이집트의 인구가 많은 데다가 석유의 품질이 좋지 않고 정제할 기술력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입해야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오일 쇼크 때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등의 걸프 만 국가들과 알제리, 리비아 등은 엄청난 이득을 봤는데 비해 이집트는 별로 이득을 보지 못하였다.[6] 이집트가 다시 가입하면서 현재는 카이로로 돌아왔다.[7] 물론 이집트와의 공식 수교관계까지 단절하지 않고 유지하는 나라들도 있었다.[8] 이집트는 나세르, 사다트 정권 시절이던 1960, 70년대에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하려고 포르투갈군과 독립전쟁을 벌이던 모잠비크를 지원했다.[9]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은 참석하지 않은 대신, 세 명의 전직 대통령들에게 에어포스 원을 빌려주어서 타고 가도록 했다.[10] 이는 당시 요르단이 아랍권과 서방세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던 점이 주효했다. 단, 요르단도 대외적으로는 친미/친서방 국가로 분류되는 아랍 국가이다.[11] 1973년 이스라엘을 상대로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키기 전 불가리아의 공산당 지도자였던 토도르 지프코프와 정상회담을 했다.[12] 1970년대 후반에 사다트 대통령은 이집트 내의 소련 기술자와 군사 고문단들을 추방하고 F-4E 팬텀 등 미국제 무기들을 도입하는 등 친미국/반소련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이집트와 소련은 사다트가 암살당해 죽을 때까지 앙숙으로 지냈다. 물론 사다트가 암살당해 죽고 무바라크가 이집트의 대통령이 되면서 양국관계가 좀 나아지긴 했지만 무바라크 역시 이스라엘과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유지하며 친미국/친서방 노선을 유지했다.[13] 키신저의 회고에 따르면 사다트는 예전부터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을 준비하고 있었고, 반이스라엘 정책이 국익에 해가 됨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국민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를 보여주어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사다트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말을 잘 이해한 지도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