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 시리즈 | |
환타지아 | 환타지아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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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아 (1940) Fantas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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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 ||||
피노키오 | ▷ | 환타지아 | ▷ | 덤보 |
장르 | 애니메이션, 뮤지컬, 판타지 | |||
감독 | 세뮤얼 암스트롱 제임스 알가 외 | |||
제작 | 월트 디즈니 벤 샤프스틴 | |||
각본 | 조 그랜트 딕 휴머 | |||
출연 |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딤스 테일러 | |||
음악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표트르 차이콥스키 외 | |||
제작사 |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 | |||
수입사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재개봉) | |||
배급사 | RKO 라디오 픽쳐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재개봉) | |||
개봉일 | 1940년 11월 13일 1946년 9월 1일 (재개봉) 1956년 2월 7일 (재개봉) 1963년 2월 20일 (재개봉) 1969년 12월 17일 (재개봉) 1977년 4월 15일 (재개봉) 1982년 4월 2일 (재개봉) 1982년 10월 1일 [1] 1985년 2월 8일 (재개봉) 1990년 10월 5일 (재개봉) 1991년 6월 22일 (1차 재개봉) | |||
상영 시간 | 126분 | |||
제작비 | $2,280,000 | |||
북미 박스오피스 | $83,320,000 | |||
서울 총 관객수 | 111,653명 | |||
스트리밍 | ||||
국내 등급 | 전체 관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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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세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개봉 당시에는 흥행과 비평 모두 폭망하여 디즈니를 위기에 빠트린 흑역사격 작품이었으나, 이후 재조명되어 현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애니메이션이다.2. 예고편
공식 예고편 |
1990년 재개봉 예고편 |
3. 시놉시스
8개의 위대한 클래식 음악을 애니메이션으로 재해석한 실험적인 시도. 볼 수 있는 음악과 들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세계 최초로 입체 음향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시청각의 황홀경을 선사하는 디즈니의 전설.
4. 제작 비화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1937년에 개봉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로 쓰고 대히트를 치며[2] 그 뒤에 제작된 피노키오도 흥행에 성공을 하자 어떤 작품이라도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1930년대 중기에 월트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의 인기가 계속해서 하락하는 것을 감지하고, 다시금 인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폴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를 바탕으로 하는 클래식 음악을 가미한 단편 애니메이션을 기획했다.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니 연주의 퀄리티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맡아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몰색하는데[3], 이리저리 발품을 판 끝에 결국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그가 지휘하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낙점되었다. 이때 재미있게도 스토코프스키는 디즈니에게 스케일을 키워 기존에 제작하려던 애니메이션에 여러 곡을 추가해 아예 장편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4], 월트 디즈니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단편 애니메이션에서 지금의 환타지아라는 영화로 기획이 변경, 제작이 진행된다.
원래의 기획이 변경되면서 환타지아는 하나의 주제가 아닌 여러 클래식 음악에 맞춘 다양한 시퀀스가 존재하는 영화가 되었으며, 원래 기획했던 미키 마우스만을 위한 애니메이션은 영화 중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는 환타지아에 큰 야망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만약 이 영화가 성공적이라면, 그 전에 개봉한 것 중에 인기 있는 작품 + 새로운 작품 이라는 형식으로 매년 영화를 개봉하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개봉 당시 완전히 흥행에 실패하면서 백지화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환타지아 2000이 만들어졌으니 어찌 보면 월트 디즈니의 소원이 뒤늦게라도 이루어진 셈이다.
월트 디즈니의 1930~40년대 애니메이션이 그렇듯이, 현대 기준으로도 애니메이션의 퀄리티는 대단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퀄러티 높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예산과 돈을 마구 쏟아부었고[5], 클래식이라는 음악 매체를 소재로 하는 애니메이션인 만큼 사운드 측면도 중요시하여, 새로운 사운드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6] 사운드 분야에서도 돈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고 작화 역시 맘에 들때까지 수십장을 그리고 버리기를 반복하다보니[7] 결국 영화 제작비만 해도 당시에 이미 228만 달러[8]나 나가게 되었다. 그래도 월트 디즈니와 회사 직원들은 영화가 성공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5. 줄거리
영화는 크게 1, 2부로 나뉘어졌으며 중간에 15분 인터미션이 존재한다.[9]
음악회에 왔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오케스트라가 배치되어 있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사회자가 나와서 음악에 대해 설명을 하고 1부가 시작된다.
5.1. 1부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65>[10]
- 표트르 차이콥스키 - <호두까기 인형(차이콥스키)>[11]
요정들과 의인화한 버섯과 꽃의 여행과 무도회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 폴 뒤카 - <마법사의 제자>[12]
마법사의 제자에도 잠시 나오기도 한 내용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마법사로 유명한 이가 있었는데 그에게 철없는 제자 미키 마우스가 하기 싫은 일을 빗자루보고 시키기 위해 스승인 대마법사가 잠자느라 마법 모자를 벗어둔 걸 몰래 쓰고 마법을 부렸는데, 이 모자를 쓰고 마법으로 부릴 수 있지만 제어를 못하게되어 집안이 난장판이 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80년대 계몽사에서 낸 디즈니 컬러 전집에서도 수록되었으며 이 애니메이션에서 미키 마우스가 제자 마법사이며, 스승 마법사는 월트 디즈니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13]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봄의 제전>[14]
지구의 탄생에서부터 공룡 멸종까지 지질의 역사와 생물의 진화를 그렸다. 다만 아쉽게도 신생대는 빠졌다. 티라노사우루스[15]와 스테고사우루스의 대결 장면이 인상적. 이 장면은 한때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에서 공룡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자료화면으로 은근히 자주 써먹었다. 물론 쥬라기 공원이 나오기 전까지의 얘기. 덤으로 80년대 국내 극장 애니메이션에서도 무단으로 이 장면을 잠깐 써먹기도 했다.
5.2. 2부
간단하게 사회자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시작하기에 앞서 ‘사운드트랙‘을 영상화하여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파트가 인상적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교향곡 6번 F장조 op. 68 "전원">[16]
그리스 신화의 상상 속의 동물들을 토대로 그렸다. 페가수스 가족들의 일상, 켄타우로스 족들의 일상 이야기들을 다뤘다. 중간에 디오니소스와 이들의 잔치를 폭풍으로 말리는 제우스, 헤파이스토스도 나온다. 본래 이 장면에는 "선플라워"라는 흑인 하녀 모습의 켄타우로스가 있었으나, 외모나 연출이 인종차별적이란 이유로 1969년 이후로는 검열되었다. - 아밀카레 폰키엘리 - 오페라 '라 조콘다' 中 <시간의 춤>
동물(악어, 코끼리, 타조, 하마)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 장면은 실제 발레리나들을 보고 참조해서 그렸다. -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 <민둥산에서의 하룻밤>[17]
- 프란츠 슈베르트 - <아베 마리아>[18]
2부의 3번과 4번은 서로 연속되어 있는 하나의 시퀀스다. 예술적인 관점에서는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이 맨 나중에 평화 분위기로 끝나는 것에 <아베 마리아>로 대못을 박음으로써 어둠과 공포를 이겨낸 빛과 희망이라는 메시지 전달이 제작진의 의도이므로 건드리지 말고 이어 보는 것이 옳다.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은 성 요한 축일 전날 민둥산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러시아의 괴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어둠의 마왕 체르노보그가 혼령들과 악마들을 불러모으고, 그의 사악한 마법으로 인해 혼령들, 악마들, 해골들이 대마왕 체르노보크를 찬양하는 광란이 이어진다.[19] 그러나 성 요한 축일이 밝음을 알리는 새벽종이 쳐 마물들 모두가 벙찌게 되고 그들은 털레털레 무덤으로 혹은 땅속으로 들어가고 체르노보크 또한 여명에 대한 패배를 인정하고 잠들면서 아침이 밝아오고 종교 행렬이 슬며시 비치는 것으로 <민둥산에서의 하룻밤>끝난다.
바로 그 유명한 프란츠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이어진다. 초기에는 웨스트민스터 교회 콰이어에 의해 피쳐링되는 것을 통해 종교 행렬이 마저 이어져서 해당 괴담이 종교 행렬로 평온하게 끝맺은 것에 대못을 박게 되고[20], 소프라노 줄리에타 노바이스의 독창을 통한 천국 체험을 거쳐(레이첼 필드라는 여류시인이 새로 쓴 가사로) 언덕에서 일출이 밝아오는 것으로 장엄하게 이 영화를 마친다.
명장면으로 뽑히는 징면은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에서 아베 마리아가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과, 마법사의 제자 부분. 특히 마법사의 제자는 환타지아 2000에서 다시 등장했다.
6. 사운드트랙
[[RIAA|]] | 미국 내 판매량 1,000,000 단위 이상 |
7. 흥행
7.1. 개봉 당시
문자 그대로 쫄딱 망했다. 흥행에서도 망했고 당시 평에서도 망했다. 애니메이션을 보러 온 사람들은 스토리 없이 음악에 맞춰서 계속 춤추고 연기만 하는 캐릭터를 상영 내내 보다 보니 지루해졌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애니메이션이 왜 끼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데에도 영상의 보조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전파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21]결국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것에 비해 흥행이 시원치 않아 월트 디즈니사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한동안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기획하지도 못했으며 짤막한(5~7분짜리) 애니메이션이나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여파로 인해 디즈니사는 몇 년 동안 혁신적인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거의 기피했다.[22] 그나마 다음해(1941년)[23]에 저렴하게 만든 덤보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월트 디즈니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24]
이때쯤 디즈니에게 위기인 것처럼 보이는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국방부 협찬으로 각종 군 교육용 애니메이션, 총통 각하의 낯짝 같은 프로파간다 애니메이션 등을 제작하며 돈도 건지고 지지층을 늘릴 수 있었으며, 후방의 국민들을 위한 청량제 역할로도 애니메이션을 꽤 제작했다.
그러나 거액이 들어간 환타지아의 제작비를 바로 회수할 수는 없었고, 결국 환타지아의 제작비를 회수하는데 20년이나 걸렸다. 결국 한동안 월트 디즈니와 그의 회사는 이 작품을 없는 영화 취급을 했다.
7.2. 재평가
환타지아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그것은 10년, 20년 또는 30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 내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환타지아는 아이디어 그 자체다. 난 또 다른 환타지아를 만들 수 없다. 나는 향상할 수 있다.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게 다야.
Fantasia’ is timeless. It may run 10, 20 or 30 years. It may run after I’m gone. ‘Fantasia’ is an idea in itself. I can never build another ‘Fantasia.’ I can improve. I can elaborate. That’s all.
월트 디즈니#
Fantasia’ is timeless. It may run 10, 20 or 30 years. It may run after I’m gone. ‘Fantasia’ is an idea in itself. I can never build another ‘Fantasia.’ I can improve. I can elaborate. That’s all.
월트 디즈니#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이 작품도 재평가를 받으면서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나 기존의 영화 제작방식에서 음악은 영상을 위해 존재하는 부가적인 요소이며 영화의 컨셉과 영상에 맞추어서 음악이 만들어지지만 환타지아에서는 이를 뒤집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음악을 두고 이에 맞춘 영상을 제작하여 패러다임을 전환하였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았고, 개봉 당시의 폭망을 뒤엎고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라는 큰 호평을 받는데 성공했다. 또한 미국의 1960년대 히피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큰 유행이 되었으며, 수많은 만화 제작가들이 이 영화에 쓰인 기법이나 작화에 찬사를 보냈다. 나중에는 여러 차례 재개봉하여 높은 수익을 벌어들였으며[25][26] 2차 시장에서 비디오 판매도 꽤나 흥행하면서 디즈니에 큰 돈을 벌어다 주는 요소가 되었다.
개봉 60년이 지난 뒤 2000년에 이르러 환타지아 2000이라는 이름의 후속작이 나왔다. 두 작품은 비슷한 구성을 갖고 있는데, 1악장: 추상예술, 2악장: 원곡의 의도와 다른 재해석, 4악장: 반 독립적인 단편영화, 최종악장: 선악 테마, 마지막에 합창단와 소프라노가 오케스트라에 함께한다.[27] 환타지아 2000의 오프닝 나레이션이 환타지아의 딤스 테일러의 해설을 아카이브한 것이고, 마법사의 제자 시퀀스가 다시 사용되었다. 해당 영화의 지휘 겸 사회자를 스토코프스키와 대치되도록 미국을 대표하던 명 지휘자 중 하나인 제임스 러바인(1943~2021)에게 맡겼지만 2018년 동성 성폭력 혐의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쫓겨나서 흑역사가 되어 오점을 남겼다.[28] 평은 나름대로 괜찮았으나 환타지아 2000도 첫개봉에서 제작비 8천만 달러를 회수하지 못하고 최종 미국 극장 수익은 6065만 달러에 그쳤다. 그나마 비디오 및 DVD 등 2차 판권시장 흥행으로 수익을 거뒀다고 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줄거리가 없고 보기에 따라서는 지루하다는 평도 많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에 초등학교 교사가 하루를 할애하여 환타지아를 틀어줬는데 10분 만에 아이들이 반은 자고 반은 딴짓하고 한두 명만 계속 보다가 40분이 지나더니 한 반 전체를 올킬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더럽게 재미없는 디즈니 만화를 틀어줬다고 학부모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학부모는 도리어 명작을 보게 해준 선생님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메타크리틱 점수는 무려 96점으로 미키 마우스가 등장한 모든 창작물을 통틀어 가장 평가가 좋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작품성이나 제작 기술, 연출은 압도적이나 애니메이션 소비자층의 니즈와는 백만광년 가량 동떨어진, 대중성을 극도로 희생하고 작품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예술 애니메이션. 자본주의의 총아나 다름없는 월트 디즈니 회사 스타일에서 나오기 힘든 돌연변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디즈니의 수많은 고전 걸작들 중에서도 전작들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피노키오 등과 함께 손에 꼽을만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고 극찬했으며 "일본군이 이 애니를 봤다면 감히 태평양 전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80년 전에 그것도 전쟁 중에 풀 컬러에 풀 프레임 [29]으로 음악과 화면 싱크를 맞춰가면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파워를 가진 나라와 전쟁을 해서 어찌 이길 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평했다. #
Nostalgia Critic가 가장 좋아하는 디즈니 작품이다. 그래서 잠깐 등장하는 악마 체르노보그를 디즈니 최고 악당으로 뽑았을 정도.
8. 여담
- 대한민국 저작권법 기준으로 저작권이 소멸하여 한국에서는 자유롭게 볼 수 있다. 미국에선 아직 저작권이 소멸하지 않았다.
- 영화에서 나오는 악곡을 소개하는 사회자는 미국의 작곡가이자 음악 비평가인 딤스 테일러(Deems Taylor)로, 본래는 인터뷰 자료가 조금 더 분량이 길었지만 극장 개봉 당시에 편집되었는데 훗날 디즈니에서 원본 필름을 찾아 영상을 복원시켰지만 오디오 파트는 손상이 심각하여 복원되지 못했단 후문이 있다. 이로 인해 2000년대부터 발매 중인 광매체 판본에선 코리 버튼(Corey Burton)이 딤스가 나오는 장면들을 재더빙한 오디오가 수록되었으며 환타지아 2000의 첫 부분에서도 코리가 녹음한 음성을 아카이브로 활용하였다. 한국어 더빙판 또한 첫 출시는 1991년에 이뤄졌으나 디즈니+ 런칭 시엔 더빙판 자료가 유실된건지 재더빙판이 수록되었다.
- 개봉 이후 비디오, DVD, 블루레이 등 여러 매체로 계속해서 나왔는데, 환타지아 2000이 나올 당시에는 영화관에서 재개봉하기도 했다. 요즘에 이 영화를 보고 싶다면 블루레이를 구해서 보도록 하자. 화질과 음질이 많이 개선되었고,[30] 부록으로 이 영화의 메이킹필름[31]이 들어가 있다.
- 작중에 등장한 하마와 악어는 미키의 크리스마스 선물 미니와 데이지의 중심인 파트1에서 까메오로 등장힌다.
-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발매되었으나,[32]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음질에 비해 턱없이 형편없는 음질을 들려주어 아쉬움을 샀다. 그래도 2014년 발매된 Walt Disney Records the Legacy Collection에선 음질이 매우 향상되어 출시되었다.
- 영화의 음악을 연주한 오케스트라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수장이었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였으나 실제로 영화에 나온 오케스트라는 여러 사람들을 모아서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 1960년대 후기부터, 극중의 파트에서 묘사된 스테레오 타입형 흑인 켄타우로스 캐릭터 선플라워, 오티카에 대해 자체적으로 편집하여 판본에서 삭제하였으며왼쪽이 무삭제판, 오른쪽은 수정판, 1992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협회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 부에나 비스타 홈 비디오를 상대로 오케스트라의 공동 제작자로 인정하란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디즈니+에서 환타지아를 시청하면 재생 전에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자막이 나온다.
- 마법사의 제자 에피소드에서만 딱 한번 나왔지만, 별과 달이 그려진 마법사 모자를 쓰고 붉은 가운을 걸친 미키의 모습은 이후 디즈니 관련 작품, 특히 게임에서 자주 나온다. 대표적으로 킹덤 하츠 시리즈. 킹덤 하츠 3D에선 아예 오프닝 타이틀의 시작을 장식하기도 했다.
-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환타지아'가 아니라 '판타지아'가 맞다.
- 1943년 디즈니의 경쟁사인 워너 브라더스에서 루니 툰의 에피소드 'A Corny Concerto'로 패러디했다. 엘머 퍼드가 사회자인 딤스 테일러 포지션을 맡았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대표작을 연주하는데, 전반부인 빈 숲속의 이야기에서는 벅스 버니와 포키 피그, 후반부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에서는 대피 덕이 나온다. 패러디 작품임에도 이쪽도 1994년 최고의 카툰 50선에 선정될 정도로 평가가 좋은 작품이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환타지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자 워너는 1976년 루니 툰의 캐릭터를 이용해 환타지아와 비슷한 애니메이션 동물의 사육제를 만들었으나 퀄리티가 그닥[33][34]이라 흥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 일본에서는 1955년에 처음으로 개봉하고 1960년대에 재개봉을 했는데, 이 때 이 작품을 보고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 애니메이션 업계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키노시타 유키가 있다.
- 그 외의 내용이나 제작 비화들을 자세히 알아보고 싶으면 위키피디아 영어 문서, 네이버 리뷰, imdb 내용을 보자. 지금 보는 내용보다 상세한 점들도 있다.
- Oh Boy My Favorite Seat 밈[35] 미키의 앞좌석에 앉아 화면을 가리는 엄청난 떡대의 악마의 정체는 여기서 나오는 체르노보그다. 미키가 말을 거자 험악한 표정으로 불기둥을 내뿜는 위협을 하지만, 마이클 아이스너가 화면 가린다고 이야기하자 바로 깨갱하면서 몸을 웅크린다.
9. 외부 링크
[1] 극장 개봉은 81년이나, 이미 70년대에 TV에서 매주 방송했던 디즈니랜드를 통하여 마법사의 제자를 비롯한 여러 부분이 방송되었기에 극장 개봉이 국내 최초 소개가 아니다.[2]
영화의 역사에 비추어 봐도 대단한 작품이다. 기술적 한계로 1937년대 이전의 컬러 영화라고 하면 제한적인 색상과 화질을 갖고 있었는데, 백설공주를 기점으로 갑자기 선명한 색상과 고화질이 스크린에 튀어나왔다. 현대 기준으로는 아바타가 개봉했을 때의 충격에 준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1937년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작품이 나오면서 컬러영화의 색상과 화질이 대폭 개선된다.[3] 심지어 안익태에게도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4] 스토코프스키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을 결합한 작품을 몇 번 찍은 적이 있었다. 아마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제안했을 것이다.[5]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은 이게 최초는 아니다. 그리고 로토스코핑도 이게 처음은 아니다.[6] 지금의 스테레오 기술을 생각하면 된다. 이 기술은 휴렛팩커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극장에서는 이 사운드를 재생하기 위해 필요한 사운드 자재들을 구입하기 꺼렸고, 개봉 당시에는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이후 재평가되며 휴렛팩커드의 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7] 환타지아 2000에도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에서 발퀴레의 기행. 원래 이 음악을 포함시키려 했으나 이미 수십장을 그려놓은 상태에서 맘에 안들어서 완성시키지 않았다. 이런 일이 영화 제작 기간 동안 비일비재했다고 한다.[8] 참고로 1939년 엄청난 대작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비가 600만 달러(하지만 나중에 이건 과장이고 385만 달러 정도라고 밝혀진다. 그래도 이 정도도 엄청난 돈이다.)였는데 당시에는 미쳤다는 소리가 지배적이었다. 즉 블록버스터급 제작비가 들어간 것이다.[9] 상영시간이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125분이다(블루레이 영상 기준). 당시 극장용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들은 60~80분 정도로 훨씬 짧았다.[10] 오르간 버전이 아닌 스토코프스키 편곡의 오케스트라 버전이다.[11] 음악적 순서가 아닌 사계절 순서로 연주하다 보니 음악을 왜곡했다고 개봉 당시에 비판받았다고 한다.[12] 이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된 부분이다.[13] 만화에 나오는 스승 마법사의 이름 Yen Sid는 디즈니(Disney)를 반대로 적은 것이며, 월트 디즈니가 찡그리는 표정을 바탕으로 해서 마지막에 나오는 얼굴 찡그리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14] 부분부분 잘라서 연주했다. 원곡은 더 길다.[15] 티라노사우루스지만 알로사우루스처럼 앞발가락이 3개로 나왔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앞발가락이 2개였다.[16] 이것도 부분적으로 편집해서 연주했다. 원곡은 이 영화에 나온 것보다 훨씬 길다.[17] 몇몇 재현부나 이행부가 잘렸다.[18] 이것도 스토코프스키에 의해서 편집되었다. 원곡은 피아노에 독창인데 오케스트라에 콰이어로 부풀렸고, 3절이 2절로 축소되었으며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이 전주 없이 다이렉트로 1절이 시작한다.[19] 여기서 여자마귀가 나오는데 전체관람가인데도 유두가 노출되었다.[20] "아베 마리아"를 보칼리제 형식으로 반복한다.[21]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너무 많은 걸 기대했다고도 하는 분석도 있는데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비디오같은 건 없던 것은 물론이고, TV도 방송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점이라(1939년에 정규방송 시작) 방송하는 지역도 얼마 안 되었고 수상기도 무자비하게 비싸다 보니, 모든 영화와 영상물은 극장에서 꽤 비싼 돈을 내고 봐야하던 시절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극장에 가는 것 자체가 어른들의 문화였던 것. 당연히 제작자들의 코드 역시 성인 기준이었다.[22] 여기서 전쟁의 영향과 파업의 여파까지 겹치며 이후 월트가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 환타지아만큼의 혁신적인 구조와 기술성을 자랑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을 꺼리게 되었으며, 1950년대 초부터 TV 프로그램, 테마파크, 칼아츠 등의 새로운 계획에 도전하면서 다른 매체에서 혁신성을 발휘해나간 계기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23] 이 해엔 회사 내부에서 방대한 규모의 파업이 일어났었다.[24] 나중에 월트 디즈니사는 또 한번 파산직전까지 가는데, 그 원인이 바로 미국 올랜도에 있는 월트 디즈니 월드 건설 사업.[25] 2008년까지 극장 흥행에서만 764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26] 록키 호러 픽쳐 쇼와 더불어 첫개봉 때는 흥행에 참패했으나, 수차례 재개봉을 통해 성공적으로 제작비를 회수하여 성공한 사례다.[27] 다만 1940은 진짜 마지막 곡, 2000은 준-종결부이다.[28] 러바인은 죽을때까지 부정했지만... 끝내 이런 오명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채로 파킨슨병과 척추 수술 후유증으로 2021년 3월 9일 만 77세로 죽었다.[29] 초당 24프레임. 영화 FPS의 최대 단위.[30] 비디오로 본 사람들이 블루레이로 다시 보고 화질에 놀란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카더라.[31] 시간의 춤을 만드는 장면 등등.[32] 처음에는 LP 3장과 낱장으로 발매. CD로 매체가 이전하면서 CD 2장으로 나왔다.[33] 저예산 TV 애니메이션이 넘쳐나던 1970년대 중반임을 감안해도 심각하게 낮은 퀄리티를 보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루니 툰의 몰락세를 잘 보여준 작품. 이후로도 루니 툰은 한동안 암흑기였다.[34] 사실 이 당시 루니 툰만이 몰락했던 건 아니다. 황금기 당시 극장 상영용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전성기를 누린 작품들이 50년대 들어 가정용 TV가 널리 보급되면서 극장 상영용 애니메이션 시장이 쇠퇴하자 적지 않은 수가 TV 애니메이션에 뛰어들었지만, 많은 수가 극장 상영용 애니메이션과 TV 애니메이션이라는 플랫폼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퀄리티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지속된 전반적인 매너리즘까지 더해져 많은 작품들이 기존 팬층을 잃었고, 더러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버리기도 했다. 그나마 선방하던 작품들도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 사회가 변화하면서 애니메이션의 기능을 풍자와 해학보다는 대중매체로서의 책임에 주목하고, 애니메이션의 주 시청자들이 성인에서 어린이로 변화하면서 시청자 물갈이를 당해야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성공적으로 TVA 체제에 안착하거나 새로 성공하는 애니메이션들도 있었다.[35] 1991년 5월 20일 미국에서 방영된 TV 스페셜 "The Best of Disney: 50 Years of Magic"의 한 장면이다.
영화의 역사에 비추어 봐도 대단한 작품이다. 기술적 한계로 1937년대 이전의 컬러 영화라고 하면 제한적인 색상과 화질을 갖고 있었는데, 백설공주를 기점으로 갑자기 선명한 색상과 고화질이 스크린에 튀어나왔다. 현대 기준으로는 아바타가 개봉했을 때의 충격에 준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1937년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작품이 나오면서 컬러영화의 색상과 화질이 대폭 개선된다.[3] 심지어 안익태에게도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4] 스토코프스키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을 결합한 작품을 몇 번 찍은 적이 있었다. 아마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제안했을 것이다.[5]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은 이게 최초는 아니다. 그리고 로토스코핑도 이게 처음은 아니다.[6] 지금의 스테레오 기술을 생각하면 된다. 이 기술은 휴렛팩커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극장에서는 이 사운드를 재생하기 위해 필요한 사운드 자재들을 구입하기 꺼렸고, 개봉 당시에는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이후 재평가되며 휴렛팩커드의 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7] 환타지아 2000에도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에서 발퀴레의 기행. 원래 이 음악을 포함시키려 했으나 이미 수십장을 그려놓은 상태에서 맘에 안들어서 완성시키지 않았다. 이런 일이 영화 제작 기간 동안 비일비재했다고 한다.[8] 참고로 1939년 엄청난 대작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비가 600만 달러(하지만 나중에 이건 과장이고 385만 달러 정도라고 밝혀진다. 그래도 이 정도도 엄청난 돈이다.)였는데 당시에는 미쳤다는 소리가 지배적이었다. 즉 블록버스터급 제작비가 들어간 것이다.[9] 상영시간이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125분이다(블루레이 영상 기준). 당시 극장용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들은 60~80분 정도로 훨씬 짧았다.[10] 오르간 버전이 아닌 스토코프스키 편곡의 오케스트라 버전이다.[11] 음악적 순서가 아닌 사계절 순서로 연주하다 보니 음악을 왜곡했다고 개봉 당시에 비판받았다고 한다.[12] 이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된 부분이다.[13] 만화에 나오는 스승 마법사의 이름 Yen Sid는 디즈니(Disney)를 반대로 적은 것이며, 월트 디즈니가 찡그리는 표정을 바탕으로 해서 마지막에 나오는 얼굴 찡그리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14] 부분부분 잘라서 연주했다. 원곡은 더 길다.[15] 티라노사우루스지만 알로사우루스처럼 앞발가락이 3개로 나왔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앞발가락이 2개였다.[16] 이것도 부분적으로 편집해서 연주했다. 원곡은 이 영화에 나온 것보다 훨씬 길다.[17] 몇몇 재현부나 이행부가 잘렸다.[18] 이것도 스토코프스키에 의해서 편집되었다. 원곡은 피아노에 독창인데 오케스트라에 콰이어로 부풀렸고, 3절이 2절로 축소되었으며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이 전주 없이 다이렉트로 1절이 시작한다.[19] 여기서 여자마귀가 나오는데 전체관람가인데도 유두가 노출되었다.[20] "아베 마리아"를 보칼리제 형식으로 반복한다.[21]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너무 많은 걸 기대했다고도 하는 분석도 있는데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비디오같은 건 없던 것은 물론이고, TV도 방송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점이라(1939년에 정규방송 시작) 방송하는 지역도 얼마 안 되었고 수상기도 무자비하게 비싸다 보니, 모든 영화와 영상물은 극장에서 꽤 비싼 돈을 내고 봐야하던 시절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극장에 가는 것 자체가 어른들의 문화였던 것. 당연히 제작자들의 코드 역시 성인 기준이었다.[22] 여기서 전쟁의 영향과 파업의 여파까지 겹치며 이후 월트가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 환타지아만큼의 혁신적인 구조와 기술성을 자랑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을 꺼리게 되었으며, 1950년대 초부터 TV 프로그램, 테마파크, 칼아츠 등의 새로운 계획에 도전하면서 다른 매체에서 혁신성을 발휘해나간 계기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23] 이 해엔 회사 내부에서 방대한 규모의 파업이 일어났었다.[24] 나중에 월트 디즈니사는 또 한번 파산직전까지 가는데, 그 원인이 바로 미국 올랜도에 있는 월트 디즈니 월드 건설 사업.[25] 2008년까지 극장 흥행에서만 764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26] 록키 호러 픽쳐 쇼와 더불어 첫개봉 때는 흥행에 참패했으나, 수차례 재개봉을 통해 성공적으로 제작비를 회수하여 성공한 사례다.[27] 다만 1940은 진짜 마지막 곡, 2000은 준-종결부이다.[28] 러바인은 죽을때까지 부정했지만... 끝내 이런 오명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채로 파킨슨병과 척추 수술 후유증으로 2021년 3월 9일 만 77세로 죽었다.[29] 초당 24프레임. 영화 FPS의 최대 단위.[30] 비디오로 본 사람들이 블루레이로 다시 보고 화질에 놀란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카더라.[31] 시간의 춤을 만드는 장면 등등.[32] 처음에는 LP 3장과 낱장으로 발매. CD로 매체가 이전하면서 CD 2장으로 나왔다.[33] 저예산 TV 애니메이션이 넘쳐나던 1970년대 중반임을 감안해도 심각하게 낮은 퀄리티를 보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루니 툰의 몰락세를 잘 보여준 작품. 이후로도 루니 툰은 한동안 암흑기였다.[34] 사실 이 당시 루니 툰만이 몰락했던 건 아니다. 황금기 당시 극장 상영용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전성기를 누린 작품들이 50년대 들어 가정용 TV가 널리 보급되면서 극장 상영용 애니메이션 시장이 쇠퇴하자 적지 않은 수가 TV 애니메이션에 뛰어들었지만, 많은 수가 극장 상영용 애니메이션과 TV 애니메이션이라는 플랫폼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퀄리티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지속된 전반적인 매너리즘까지 더해져 많은 작품들이 기존 팬층을 잃었고, 더러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버리기도 했다. 그나마 선방하던 작품들도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 사회가 변화하면서 애니메이션의 기능을 풍자와 해학보다는 대중매체로서의 책임에 주목하고, 애니메이션의 주 시청자들이 성인에서 어린이로 변화하면서 시청자 물갈이를 당해야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성공적으로 TVA 체제에 안착하거나 새로 성공하는 애니메이션들도 있었다.[35] 1991년 5월 20일 미국에서 방영된 TV 스페셜 "The Best of Disney: 50 Years of Magic"의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