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00, #000000 20%, #000000 80%, #000000); color: #ffcd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cd00> 초대 | 제2대 |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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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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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제9대 수상 | |||
<colbgcolor=#000000><colcolor=#ffcd00> 출생 | 1871년 2월 4일 | ||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하이델베르크 (現 독일연방공화국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하이델베르크) | |||
사망 | 1925년 2월 28일 (향년 54세) | ||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現 독일연방공화국 베를린) | |||
재임기간 | 독일 제국 제9대 수상 | ||
1918년 11월 9일 ~ 1919년 2월 13일 | |||
바이마르 공화국 제2대 국가대통령 | |||
1919년 2월 11일 ~ 1925년 2월 28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00><colcolor=#ffcd00> 부모 | 아버지 칼 에베르트 어머니 카타리나 에베르트 | |
배우자 | 루이스 럼프 (1894년 결혼) | ||
자녀 | 5명 |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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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정치인. 독일 제국의 제9대 수상이자 마지막 수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2. 생애
2.1. 초창기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를 지내는 도중인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정부와 군부에 대해 공격적이지 않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당시 전세상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자[2] 여러 세력들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독일 11월 혁명의 과정에서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뒤를 이어 독일 제국의 총리가 되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빌헬름 2세가 망명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다.사실 에베르트는 공화국의 선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막스 폰 바덴 전 총리가 섭정을 맡기를 바랬으나 내각 각료이자 정치 동지인 필리프 샤이데만이 멋대로 공화정을 선포하자 여론이 그쪽으로 쏠린다. 에베르트는 샤이데만에게 "자네는 공화국을 선포할 권한이 없네. 독일이 공화국이 되든 그 무엇이 되든 국민의회가 결정하네!"라며 거세게 질책하지만 대세는 공화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후 국민의회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된다. 다만 직선제로는 선출된 적이 없는데, 독일의 첫 직선제 대선은 그의 후임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시절 처음 열린다.
2.2. 대통령 재임
바이마르 공화국은 수립 직후부터 계속 혼란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연합국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독일에 요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민주화가 되었지만 국민의 여론은 공화국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독일인은 자국 영토가 유린당하지 않은 채 패배를 맞이한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배후중상설이란 음모론이 횡행했다. 또한 군주정이 무너지자마자 항복을 수락한 공화국과 민주주의 정치인들을 "외세와 손잡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조국을 배신한 세력"이라며 증오했다.[3]거기에 배상금을 갚기 위해 마르크를 대량으로 찍어내면서 금 보유량이 바닥나고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렌텐마르크 참조. 여기저기서 몰아세우는 상황이 되자 사회민주당은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계속된 혼란이 이어졌다. 그것은 어느 정권도 2년 이상 집권하지 못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래도 초기 리더십은 아주 최악만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쿠데타를 막아내고 흑적황 연정을 85%의 지지로 출범시켰으며, 화폐개혁으로 전후 벌어진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잠재웠다(1923년). 또 같은 해 프랑스가 석탄 인도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으로 루르지역을 점거하자 총파업으로 맞서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배상금감축 제안에 도움을 보았다.
그러나 에베르트는 흑-적-황 연정의 큰 공신이기도 하지만 정작 1920년 총선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영향으로 인하여 표를 대거 잃었고, 이후에는 보수적 외교정책을 지지하면서 오히려 자기 당인 사회민주당을 디스하는 바람에 흑-적-황 연정을 붕괴시키기까지 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삽질 덕에 사회민주당은 여당으로 오랫동안 복귀하지 못했고 독일 정치의 불안정성은 결국 나치의 출범에 기여했다.
에베르트와 사민당은 군에 병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위원을 파견해 장교들과 군부를 거스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와는 대조적으로 군부의 독자성과 행동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 대가로 군부 역시 러시아에서처럼 강경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세력을 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해줬다. 바이마르 체제 성립 이후에도 공화국 정부와 군부의 관계는 상호 비간섭으로 굳어졌다.
후일 국가방위군의 엘리트주의적인 전쟁 대비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못했던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방위군은 이러한 정치적인 거래의 결과 사실상의 국가 안의 국가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3. 사망
1925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4] 임기를 매우 적게 남겨둔 상태였다. 후임 대통령으로는 결선 투표를 거쳐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선출되어 뒤를 이었다.3. 평가
1875년 이후 약 45여년에 걸친 사회민주당의 투쟁 끝에 사회민주당이 배출한 최초의 정부수반이라는 점에서 현대 독일 중도좌파에게는 빌리 브란트, 쿠르트 슈마허, 오토 벨스와 함께 가장 고평가받는 인물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당의 싱크탱크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을 두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주요 국가의 사회민주주의자 중에서는 합법 선거를 통해 최초로 집권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5]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다만 역사적으로 보면 평가가 미묘한데, 약 80%의 지지를 바탕으로 흑적금 공화국 동맹을 출범시켰지만, 공화국 동맹이 독일 패전의 책임을 떠안으며 지지율이 폭락한채[6] 실패했다는 점이나 극우 세력의 준동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7] 평가가 깎이고 있다. 하지만 렌텐마르크를 도입하여 독일의 인플레이션 문제를 단박에 해결한 점, 1918년 독일 혁명 이후 혼란기 때 급진적 보수/극좌 혁명을 막고 중도적인 의회민주 정부를 세웠으며 선진적 헌법의 기틀을 닦았다는 점에서 고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극좌,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마찬가지인데 1919년 독일 혁명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피살에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손수 진압했다는 이유에서이다.[8] 아닌게 아니라 극우 자경단으로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때려잡은 이 사건으로 독일의 사민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분열하게 되었고 독일 공산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부정하고 모든 내각에 불신임안을 제출하며 정국을 불안정하게 했다.[9] 이 원한관계는 계속 유지되어 이들은 나치당의 발호에도 나치의 집권이 확실시 되던 1932년 이전까지 상호협조를 전혀 안하였고 결국 둘 다 나치당에 의해 불법화된는 결과를 초래한다.
4. 같이 보기
[1] 국립국어원의 표기상으로는 에베르트이지만, 독일어로는 에버트(국제음성기호 표기: [ˈeːbɐt\])이다. 예시.[2] 여담이지만 에베르트 본인도 두 아들을 1차 대전에서 잃었다.[3]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살아남은 제2제국의 기득권층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대해 비협조적이었으며 민주주의 체제가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여겼기에 이에 회의적이었고 군주제로 복귀하거나 군국주의 체제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4] 여담으로 에베르트를 수술한 의사 아우구스트 비어는 군주제 옹호론자로 에베르트가 사망하고 의사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나치당과 히틀러를 지지하기도 한 상당한 극우 성향의 인물이었다. 단 그거와는 별개로 비어는 의사로서 에베르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의 수술을 최선을 다해 집도했다고 한다.[5] 호주나 북유럽 일부 국가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총리를 배출한 적이 있었지만 독일과 같은 주요 국가로만 치면 에베르트가 최초이다.[6] 1919년 총선 76.2% → 1920년 총선 43.8%. 다만 독일 최대 주인 프로이센 자유주에서만큼은 프로이센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흑적금 동맹이 건재했고, 이는 독일의 극우화를 마지막까지 저지하는데 역할을 했다.[7] 에베르트의 재임 기간인 1921년에는 콩피에뉴 휴전협정을 이끈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재무상이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극우 테러리스트의 총에 맞아 숨지는 일까지 일어났다.[8] 현재도 로자 룩셈부르크 마이너 갤러리 등 공산주의 성향의 커뮤니티에서는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에베르트 언급만 나오면 쌍욕이 튀어나오는 광경을 볼 수 있다.[9] 특히 20년대말 경제혼란과 더불어 공산당과 나치당의 의석수가 늘어나며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