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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07:37:00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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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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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Auguste Renoir
파일:Pierre_Auguste_Renoir,_uncropped_image.jpg
출생 1841년 2월 25일
7월 왕정 오트비엔 리모주
사망 1919년 12월 3일 (향년 78세)
프랑스 제3공화국 카뉴쉬르메르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화가, 조각가
장르 인상주의

1. 개요2. 생애3. 가족4. 외부 링크5. 관련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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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Pierre-Auguste_Renoir_-_Autoportrait_%281876%29.jpg 파일:르누아르_초상화.jpg
35세의 자화상 (1876)[1] 이렌 캉 당베르 양의 초상화 (1880)[2][3]
Un sein, c'est rond, c'est chaud. Si Dieu n'avait créé la gorge de la femme, je ne sais si j'aurais été peintre.
(유방, 둥글다, 따뜻하다. 하느님이 여자의 젖가슴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화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4]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여성 육체를 묘사하는 데 특수한 표현을 사용했으며 풍경화에도 뛰어났다. 인상파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게 화려한 멋을 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난색을 찍은 솜뭉치로 문지른 듯 부드럽고 따뜻한 화풍을 가졌다. 그림 전체가 화사하고 부드럽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 언제든 햇빛을 쬘 수 있다. 이 화풍이 워낙 개성적이라 르누아르는 따뜻한 화가의 대명사로 꼽힌다.

르누아르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화사하지만 두 가지의 타입이 있다. 그림의 선이 없이 보들보들하게 그린 것, 화사함은 유지하되 고흐의 작품처럼 물감을 덧칠하고 자글자글하게 그린 것.

여성을 따뜻하고 사근사근하게 묘사하는 데에 도가 튼 화가이다. 르누아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우아하며 부드럽고 다채롭다. 한 폭의 그림 그 자체. 누드도 정말 많다.

말년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온몸에 마비가 오는 고통을 참으며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의 친구가 왜 그리 고통스러워 하면서까지 그림을 그리냐는 물음에,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기 때문이네." 라는 명언으로 답한 적이 있다.

자화상은 유독 칙칙한 색깔을 썼다. 본연 화풍은 그대로라 나름 부드럽지만.

2. 생애

리모주에서 재봉사 집안에 태어났는데, 얼마 되지 않아 양친을 따라서 4살 때 파리에 나왔을 때 가정이 가난해서, 12~3세 때부터 도기 공방에 첨화직공으로 들어가 일했다. 그 동안에도 데생을 배우고 미술관에 다녔는데, 도기에 그림을 붙이는 기계가 발명되자 직공 일을 그만두고 회화에 전념했다. 그 때에 그는 글레르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동문으로 모네, 시슬레, 피사로가 있어 굳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처음에는 살롱에도 출품했는데, <리즈>(1867)의 상(像)을 중심으로 그의 작풍은 분명하여지고, 보불전쟁 후에는 파리 교외에서 모네, 시슬레와 함께 제작을 했다. 이어 인상파 제1회 전시회(1874)에 유명한 관람석을 출품했을 때 그 당시는 비난을 샀지만 1876년에는 대작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발표하여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광선과 춤추는 군중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초기의 르누아르의 화풍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섬세하고 고전주의적인 느낌도 어느 정도 자아내며 테크닉적으로는 거의 회화의 극치라고 불릴만큼 정교했다. 1864년의 <로맹 라코 양의 초상>이나 친구였던 모네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 그리는 모네>, <라 그르누에르> 등 커리어 초기의 작품들은 로코코 시대의 느낌과 모네 류의 인상주의를 오가는 형태를 보인다. 1860년대에서 70년대 초까지의 르누아르의 그림들을 보면 서로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 1870년대부터는 인상주의의 영향에 점점 더 경도되는 모습을 보인다.

르누아르는 조심스럽게 생활했으며 지우를 얻어 사교계의 사람을 그린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 딸들〉(1878)과 그 밖의 것도 아름답다. 세잔은 자연을 추구했지만, 르누아르는 인간에게 그 흥미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1881년에는 이탈리아에 여행하여 라파엘로에 경탄하고, 특히 폼페이의 벽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그 후는 데생의 부족을 생각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제작 경향을 바꾸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1880년대 즈음부터는 인상파 화풍을 따르다가 그림의 형상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슬럼프를 느껴 붓을 꺾을 뻔한 적이 있다. 이 시기의 르누아르는 대작들을 많이 그려냈지만 스스로는 어떤 한계에 부딪혀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 이후 슬럼프에서 회복된 그는 그러다가 그것도 나중에는 이전보다도 형태는 한층 빛에 용해되고 색채는 보다 리드미컬한 제작으로 화풍을 바꾸었으며, 주제도 다양하던 전기에 비해 후기는 오로지 나부(裸婦)를 추구하여 여인의 육체에 한없는 아름다움을 찾고서는 그 빨간 색조로써 순화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 화가라 불렸고, 특히 적색의 표현에 뛰어나 근대 최대의 색채 화가로 알려져 있다. 르누아르의 생애는 평온했으나 늘그막을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1899년부터는 남프랑스 해안으로 옮겨 살았다. 이어 카뉴에서 삶을 마감하면서 마지막까지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가 일흔이 넘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인해 손이 마비되었지만 붓을 입으로 물면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 〈해수욕장의 풍경〉, 〈대수욕〉, 〈목욕하는 여인들〉, 〈큰길〉 등이 있다. 르누아르 초/중기와 후기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그가 남긴 여러 점의 목욕하는 나신의 여인들을 그린 그림이다. 초기의 <목욕하는 여인들>은 회화적으로 균형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비현실적인 모델들의 포즈, 깔끔하고 조화로운 아카데믹 스타일의 여인들의 몸매 등의 특징을 보면 마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같은 신고전주의 같은 느낌마저 자아내지만#, 후기의 <목욕하는 여인들>에서는 여성의 나신은 훨씬 더 살집있고 풍만하게 그려져있으며 형태보다는 붉은 색감이 강조되고 붓터치는 정교함을 잃은 대신 더욱 역동적으로 변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인한 물리적 한계로 인한 것임과 동시에 그가 아카데믹 스타일의 화풍보다 개인의 개성을 한껏 더 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3. 가족

아들(차남)인 장 르누아르(1894~1979)는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주로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하다. 아버지가 그림으로 미를 그려냈다면 아들은 영화로 미를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데 그가 감독한 <게임의 규칙>(1939)은 불멸의 영화 100, 세계 걸작 100에도 자주 선정되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생몰 년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 장 르누아르는 상당한 늦둥이이다. 그래서 피에르는 아들이 감독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대신 장은 아버지의 활동 자료들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증언도 많이 남겨서 프랑스 미술계에 큰 역할을 했다. 아래 일화는 그 증언들 중 하나다.
남달라 보였던 아버지

아버지가 (학교로) 날 찾아오셨을 때, 다른 학부모들 사이에 섞인 그는 마치 잘못 찾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단추로 채우는 깃이 달린 작업복 재킷 차림에 부드러운 펠트 모자 밑으로 약간 길게 늘어진 머리칼은 다른 학부모들의 풀먹인 깃, 검정 실크 넥타이, 기름 바른 콧수염, 빳빳하게 주름잡힌 바지들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세계에서 온 아버지를 기피했다. 아버지에게 입을 맞추던 나는 급우들의 놀란 시선에 당혹감을 느꼈다.

어느 월요일, 첫째 시간이 끝나고 휴식 시간에 로제란 아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자기 아버지는 오페라 인근의 대형 식료품상회 사장이며 트루빌에 별장도 있다는 것이다. 그 '거만'의 결정판은 자기 어머니가 위대한 외과의사인 도양한테서 돌기 제거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한마디로 그들은 참으로 세상물정에 밝았다. 아이들이 우리 주변에 빙 둘러섰다. 로제가 주머니에서 2수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자, 이걸 네 아버지한테 드리고, 가서 머리나 깎으시라고 해."

그때 내가 돈을 받고 그애한테 고맙다고 했어야 하는 건데. 부모님은 내게 자선을 받아들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모욕하는 말을 들은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아주 잠깐 동안, 운동장의 나무와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다음 순간 내가 얼마나 격하게 그 신성모독자에게 덤벼들었던지 급습당한 아이는 미처 방어도 못 하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나는 아이의 목을 움켜잡고 계속해서 그애를 때렸다. 급우들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애를 질식시켜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학사담당자 앞으로 불려가 내가 한 행동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머리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내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결국 며칠 조용히 지내라며 날 집으로 돌려보냈다. 적어도 난 그 일로 톡톡히 대가를 치른 것이다. 내가 다시 등교하자, 아이들 모두가 내게 아주 잘 대해 주었다. 난 놀라는 한편 기분이 좋았다. 로제가 악수를 청했다. "네 아버지가 화가란 걸 말하지 그랬어!"
ㅡ 장 르누아르,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 (1958) 中[5]

장남 피에르 르누아르(1885-1952)는 영화배우가 되었다. 주로 조연을 맡았으며 최초로 조르주 심농의 대표 캐릭터인 매그레 경감 역을 연기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감독인 동생하고는 서너편 같이 작업했다.

영화 르누아르 (Renoir, 2012) 는 만년의 르누아르와 아들 장 르누아르, 이들 부자와 얽혔던 모델 앙드레 에슬랭(Andrée Heuschling)[6],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정식 결혼으로 얻은 두 아들 이외에도, 결혼하기 한참 전인 1870년에 얻은 딸 잔 트레오(Jeanne Tréhot)가 있다. 잔은 르누아르의 그림 모델이자 애인이었던 리즈 트레오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르누아르가 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해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라 입양보낸 후 리즈와도 헤어졌다. 하지만 입양보내고서도 잔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재정적인 지원을 꾸준히 하는 등 아버지 노릇을 했는데, 결혼 후에도 아내 몰래 계속 잔에게 돈을 보내다가 들켰다. 아내는 남편에게 딸이 있는 것을 모른 채 결혼했기 때문에 더욱 분노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버지 물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에게 이복누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고인이 된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 일을 세상에 알리지 않아서, 르누아르 사후 80여년이나 잔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야 잔에 대해 쓴 편지가 발견되어 르누아르에게 딸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잔은 1934년 6월 8일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4. 외부 링크


5. 관련 미디어

조선, 혁명의 시대라는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이선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영화 어카운턴트(The Accountant, 2016) 의 주인공인 크리스찬의 (벤 애플렉) 집 거실에는 르누아르의 작품 <Woman with Parasol and a Small Child on a Sunlit Hillside>가 걸려있다.

5.1.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파일:attachment/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2.jpg

4기 1화에 폴 세잔의 라이벌로 출연한다. 실제 인물과 마찬가지로 누드화를 좋아하는 인물이지만 의외로 부끄럼을 많이 탄다. 자신의 부끄러운 혼잣말을 [7] 사람들에게 떠벌이려는 세잔의 협박에 분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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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같이 자신의 필살기인 '르누아르 로켓'으로 세잔을 응징한 다음 잠시 병림픽[8]벌인 뒤 그림시합으로 승부를 보자고 제안한다.

카미유 피사로,알프레드 시슬레,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가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그림시합 중에도 세잔과 다투며[9] 토끼 두마리가 세잔을 구타하는 그림[10]을 그렸다.

곧장 세잔의 뒤돌려차기에 응징당했고, 흰색 물감을 빌려달라는 세잔에게 손바닥에 물감을 부어 또다시 뒤돌려차기. 이후 파란색 물감을 '튜브째로' 빌려달라는 세잔에게 '튜브째로' 집어던져 세잔의 왼쪽 동공에 명중시켰다.

세잔이 마지막 물감 한 방울까지 알뜰하게 쓰고 튜브만 돌려주자 자기 물감을 다 써버린 세잔에게 분노하여 에드가 드가를 집어던져 세잔의 그림을 망쳐버렸다. 이에 분노한 세잔이 자신의 캔버스를 부수자 "남의 예술작품을 망쳐놓다니 네가 그러고도 예술가야!"라는 명대사를 시전하면서 르누아르 로켓을 발사. 이번엔 빗나갔다.

하지만 머리카락에 맹독을 바른지라 스친 상처로도 세잔은 넉아웃되었고 르누아르 역시 독 때문에 머리가 홀라당 빠져버렸다. 결국 이 병림픽을 보다못한 카미유 피사로에 의해 시합은 종료. 결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 매사추세츠 주 포그 미술관에서 소장 중.[2]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클로드 드뷔시의 전주곡 1권의 여덟 번째 작품인 “아마빛 머리의 소녀”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그림이다.[3] '행복을 그리는 화가' 르누아르가 그려준 초상화이지만, 이 초상화의 주인공 이렌은 매우 기구한 삶을 살았다. 1차 세계대전 때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들을 잃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딸과 사위, 외손주들이 절멸수용소로 끌려가서 목숨을 잃었다.[4] 르누아르의 예술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가 실제로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열렸던 '르누아르의 여인' 전시회에서는 아이들도 보는 전시회에 쓰기에는 표현이 낯뜨겁다고 생각했는지 "... 여성의 몸을 ..."이라고 완곡하게 적어 놓은 바 있다.[5] 안 디스텔, 『르누아르』, 송은경 역, 시공사, 1997, p.148~149.[6] 1900~1979. 이후 카트린 헤슬링(Catherine Hessling)으로 개명. 데데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앙리 마티스가 발탁해 피에르오귀스트에게 보낸 모델이었고 장 르누아르의 첫번째 아내였다. 진담인지 알 수 없으나 장이 밝히길 데데를 스타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영화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아들을 낳았으나 1931년 별거했고 1943년 이혼. 딱히 배우로써 열정이 있었던게 아니었는지 1935년 은퇴해 조용히 은거 생활을 했다. 공교롭게도 장이 사망한 비슷한 시기에 타계했다.[7] 아~ 여자 알몸을 그리고 싶구먼.[8] 이름으로 놀리는 짓을 했다. 르누아르는 세잔의 이름이 사무라이한테 칼로 베이는 소리같다고 욕하고, 세잔은 르누아르의 이름이 아저씨가 왁스 칠한 바닥에 알몸으로 미끄러지는 소리같다고 욕한다.[9] 둘 다 수염난 주제에 서로 수염쟁이라고 욕했다.[10] 그 전에 르누아르가 세잔더러 자기 그림에 들어온다고 비키라고 했으나 세잔이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