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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0:43:26

피터 제닝스

<colcolor=#fff><colbgcolor=#000> 피터 찰스 아치볼드 이버트 제닝스
Peter Charles Ewart Archibald Jennings
파일:Peter Jennings.jpg
출생 1938년 7월 29일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 토론토
사망 2005년 8월 7일 (향년 67세)
미합중국 뉴욕주 뉴욕시
직업 저널리스트, 앵커, 언론인
소속 캐나다 방송 협회(1959~1963)
CTV(1963~1964)
ABC(1965~2005)
학력 리스가 사립고등학교 중퇴
부모 부 : 찰스 제닝스
모 : 엘리자베스 오스본
배우자 첫번째 부인: 발러리 갓소 (이혼)
두번째 부인: 아누슈카 말루프 (이혼)
세번째 부인: 케이티 마톤 (이혼, 1979~1993)
네번째 부인: 케이스 프리드 (1997~2005, 사망시까지)
자녀 엘리자베스 제닝스, 크리스토퍼 제닝스 (1982년생)
약력 ABC 기자
ABC 중동 특파원
ABC 수석 기자
ABC World News Tonight 진행자
1. 개요2. 상세
2.1. 초년기2.2. 미국 최연소 앵커2.3. 해외 특파원 시절
2.3.1. 워싱턴과 아침뉴스 앵커로 복귀2.3.2. 해외 특파원 복귀와 공동앵커2.3.3. 해외 특파원 및 기자로서의 평가
2.4. 단독앵커
2.4.1. 9.11 테러와 미국 국적 취득2.4.2. 앵커직 당시 주요 활약
3. 마지막 방송과 사망4. 기타

1. 개요

미국텔레비전 앵커, 기자, 아나운서.

피터 찰스 아치볼드 이버트 제닝스(Peter Charles Archibald Ewart Jennings, CM, 1938년 7월 29일 ~ 2005년 8월 7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뉴스 앵커이다. 1965년 2월 1일부터 1967년 10월까지 그리고 1983년 8월 9일부터 2005년 4월 1일에 폐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앵커직에서 내려오기 전까지 ABC의 "ABC 월드 뉴스 투나잇"의 단독 진행을 맡았다. 고등학교를 중퇴하였으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저널리스트 중 하나였으며, NBC의 톰 브로코, CBS의 댄 래더와 함께 앵커 빅3시대를 이끈 인물이다.

발음과 억양이 정확하고 깔끔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 상세

2.1. 초년기

제닝스는 1938년 7월 29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캐나다의 유명 라디오 방송인인 찰스 제닝스 였다. 피터 제닝스는 아홉살에 캐나다의 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하며 방송 경력을 시작했으며, 토요일 아침 CBC 어린이 프로그램인 'Peter's People'을 진행했다. 제닝스가 이 쇼를 진행할 당시 그의 아버지는 중동에서 출장 중이었는데, 족벌주의를 극도로 싫어했던 찰스 제닝스는 방송국에서 자신의 아들을 출연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했다고 한다.

제닝스는 11살 때 온타리오 주 포트 호프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 스쿨에 다니기 시작하며 스포츠 분야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다. CBC가 1950년대 초 아버지를 오타와 본사로 발령낸 이후에는 Lisgar Collegiate Institute로 옮겼다. 그는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10학년에서 낙제한 이후 자퇴했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두고 순수한 지루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어린시절에는 소녀들과 만화책을 좋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꽤 게을렀다고 한다. 제닝스는 이후 Carleton University와 오타와 대학교도 잠시 다녔으나, 얼마안가서 곧 자퇴했다.

제닝스는 방송에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의 첫번째 직업은 캐나다 로열 은행의 은행원이었다. 그는 회사가 그를 Havana지점으로 배정해주기를 원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그를 온타리오 주 프레스콧이라는 작은 마을과 인근의 브록빌 지점으로 옮겨주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여러 아마추어 뮤지컬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 생활을 하기도 했다.

21세에 제닝스가 방송계에서 경력을 시작한 것은 Brockville에서 였다. 1959년에 지역 라디오 방송국인 CFJR은 그를 뉴스 부서에 고용했다. 제닝스가 취재한 많은 기사는 CBC에서 체택되기도 했다. 1961년까지 제닝스는 오타와의 새로운 텔레비전 방송국인 CJOH-TV의 직원으로 합류했다. 방송국이 1961년 3월에 개국한 이후 제닝스는 처음으로 심야 뉴스프로그램인 Vue의 인터뷰 진행자이자 공동 프로듀서였다. 그의 프로듀서들은 딕 클라크와 닮은 그의 젊음의 매력을 보았고, 곧 제닝스는 댄스쇼 프로그램인 Club Thirteen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다음해, 캐나다 최초의 민영 TV방송국이자, 그의 아버지가 속한 CBC의 신생 경쟁자인 CTV는 심야 전국뉴스 앵커로 제닝스를 고용했다. CTV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동안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1964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취재하기도 했다. 미국에 있는동안 ABC 뉴스의 회장인 Elmer Lower를 만나 ABC 뉴스 합류를 제안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패할것을 두려워한 피터 제닝스는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3개월후 마음을 바꾼 제닝스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2.2. 미국 최연소 앵커


제닝스는 ABC 뉴욕 뉴스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ABC는 후발주자로서 NBC와 CBS의 뉴스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져있었고, 네트워크는 젊은 시청자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1965년 2월 1일, ABC는 현장에서 신선한 얼굴을 한 캐나다인을 뽑아 그를 15분짜리 저녁뉴스 방송인 Peter Jennings with The News의 앵커로 임명했다. 26세의 제닝스는 현재까지도 최연소 미국 네트워크 뉴스 앵커였다. 제닝스는 후에 "당시 ABC의 상황은 좋지 않았으며, 그들은 무엇이든 기꺼이 시도했고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앵커로 앉히는 모험을 시도했다."고 회상했다.

경험이 부족했던 제닝스는 다른 방송사의 경쟁자들을 따라잡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CBS의 앵커는 무려 월터 크롱카이트[1]였으며, NBC도 쳇 헌틀리와 데이비드 브링클리[2]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일부 시청자들은 제닝스의 캐나다 억양을 싫어했다. 그는 일부 단어를 틀리게 발음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정세와 문화에 깊이 있는 지식이 부족했다. 제닝스는 후에 "크롱카이트, 헌틀리, 브링클리와 경쟁하려고 하는 26세의 나는 단순히 자격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그는 재시작하자는 마음으로 1968년에 해외 특파원으로 자진하여 중동에서 자신의 보도 능력을 발휘한다.

2.3. 해외 특파원 시절

기자 및 앵커로서의 실패 후 제닝스는 기자로서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중동 특파원을 지원했었으며 그로 인해 발령난 곳이 레바논의 베이루트였다.

허나 특파원 생활을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제닝스는 말이 레바논 특파원이지 사실상 중동 지역 전체를 담당한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이때 슬슬 떠오로는 이스라엘과 아랍 그리고 팔레스타인 분쟁을 취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한 몇몇 특집 보도 후 베이루트 지국장으로 승진하였다.[3]

이후 '1972 뮌헨 올림픽'에 파견되었었는데 때마침 팔레스타인의 반 이스라엘 테러 그룹인 '검은 9월단' 가 이스라엘 선수단을 살해하는 '뮌헨 올림픽 참사' 소식을 단독특종으로 보도했었다. 이 사건 취재는 본인은 첫 특종이기도 했으며 제닝스는 이를 탄력으로 자신의 취재 능력을 키워 나갔다. 몇주이후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긴 했지만, 이 보도로 ABC는 방송시작이래 처음으로 뉴스시청률1위를 달성했다.

다음은 당시 나갔었던 보도의 일부분이다.



뮌헨 취재 이후, 제닝스는 중동 문제를 계속해서 취재했다. 1973년에 그는 욤 키푸르 전쟁을 취재했으며, 다음해에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수석 특파원 겸 공동 제작자로 활동하며 첫번째로 피버디 상을 수상했다. 그해에 제닝스는 레바논 사진 작가인 Anouchka Malouf와 재혼했다.

2.3.1. 워싱턴과 아침뉴스 앵커로 복귀


1974년도 말에 제닝스는 워싱턴으로 기자로 발령났었고 이후 얼마 뒤인 1975년 1월 6일에 '굿모닝 아메리카(GMA)'의 전신인 'AM America'의 뉴스앵커로 발탁되었었다.

ABC는 NBC의 인기 아침 프로그램인 'TODAY'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 프로그램에 800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고 10개월만에 폐지되었다. 그가 실패한 두 번째 앵커직이었다. 당시 피터는 특파원으로 오래 활동한탓에 워싱턴 스튜디오가 지겹고 숨이 막혔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2.3.2. 해외 특파원 복귀와 공동앵커

앵커 복귀작 실패 후 그는 1975년 11월, 다시 중동으로 향하였고 이번엔 중동지국장직을 겸했다.

두 번째 특파원 임기때는 이란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프랑스 망명,[4] 주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 사태, 포클랜드 전쟁과 같은 소식들을 단독특종 혹은 특별취재하기도 하였다.

한편, ABC 뉴스에 신임 사장으로 부임한 룬 알 레드 지는 CBS와 NBC에 이어 시청률 3위에 머물러 있는 저녁 뉴스를 살리기 위해 개편을 준비중이었다. 1970년대 후반, 당시 앵커였던 해리 리즈너와 바바라 월터스를 전면 교체하고, 프로그램에 3명의 앵커간 3원 연결 형식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978년 7월 10일 World News Tonight은 워싱턴에서 프랭크 레이놀즈, 시카고에서 맥스 로빈슨, 런던에서 피터 제닝스가 진행을 맡으며 방송을 시작했다. 제닝스의 공식 직함은 "국제뉴스 데스크"였지만, 계속해서 수석 국제 특파원으로서 활약했다. 1979년 중반까지, 알레드지가 이전에 기획해 큰 인기를 끌었던 World of Sports와 동일한 그래픽 카드를 특징으로 하는 이 혁신적인 포맷의 방송은 시청률을 높였다. 첫방송 이후 190만에 달하는 시청자를 확보했으며, NBC의 Nightly News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1978년 7월 10일 당시 World News Tonight 첫방송 영상.

1979년에는 동료 ABC 기자인 Kati Marton과 세번째 결혼을 했으며, 같은 해에는 Marton이 딸 엘리자베스를 낳으면서 아버지가 되었다. 1982년에는 Marton 사이에서 두번째 자녀인 크리스토퍼가 태어나면서 나름대로 단란한 가정도 이루었다.

ABC의 3인 앵커체제의 일환으로 제닝스는 주요 국제 뉴스, 특히 중동 문제를 계속 보도했다. 런던의 앵커 데스크에서 매일밤 국제뉴스를 보도하는 그의 모습은 ABC뉴스가 다른 방송사에 비해서 해외 뉴스의 비중이 더 크다는 인상을 시청자들에게 심어주었다. 제닝스는 이란 혁명과 이어지는 인질 사건, 사다트 암살 사건, 포클랜드 전쟁,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요한 바오르 2세의 폴란드 방문 등을 보도했다. 주요 국제 기사를 다루겠다는 그의 주장은 피터 제닝스의 보조 역할 정도로 전락해버린 다른 동료 ABC 국제특파원들과 갈등이 생기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제닝스 자신도 런던에서의 역할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 ABC와의 계약이 만료되었을때 제닝스는 캐나다로 돌아가 CBC의 새로운 저녁 뉴스인 The Journal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CBC는 제닝스의 재계약협상 마감일을 지키지 못했고, 계획은 무산되었다.

2.3.3. 해외 특파원 및 기자로서의 평가

해외 특파원 경험은 사실 제닝스 본인뿐만 아니라 ABC 메인 뉴스에서 국제뉴스 보도부분 향상에 기여가 되었으며 동시에 각지의 문화와 역사 등을 같이 설명해주어 견문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했었다. 덕분에 이러한 공로덕분에 ABC 뉴스는 1990년대 후반까지는 정말 독보적인 시청률을 자랑할 수 있었으며 이에 제닝스가 미리 개척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2.4. 단독앵커

1983년, 월드뉴스 투나잇의 워싱턴 앵커였던 레이놀즈는 다발성 골수종에 걸려 4월부터 방송에 출연하지 못하게 되었다. 레이놀즈의 부재로 뉴스의 시청률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ABC는 원래 레이놀즈가 회복 후 복귀할것을 기대했고, 그동안 레이놀즈를 대체하기 위해 제닝스를 워싱턴 지사로 잠시 옮겨 임시 진행을 맡겼다. 하지만 1983년 7월 20일, 레이놀즈는 급성 간염에 걸린 후 갑자기 사망했다.

1983년 8월 9일, ABC는 피터 제닝스가 네트워크와 4년 계약을 체결하고 단독 앵커 및 수석 에디터[5]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제닝스는 뉴욕 본사로 옮겨 9월 5일부터 새롭게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 발표로 월터 크롱카이트 이후 앵커 세대 교체와 함께 제닝스, CBS 댄 레더, NBC 톰 브로코의 앵커 빅3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 제닝스는 3명의 뉴스맨 사이의 경쟁이 피상적으로 될 위험이 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1983년 9월 5일, 제닝스의 첫방송 이후 ABC 뉴스의 시청률은 꾸준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4년 대선을 준비하기 위해 앵커를 맡은 첫 해를 미국 국내 정치에 대해 공부하는데 투자했다. 1984년 6월, 당시 자신의 정치적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 제닝스는 데이비드 브링클리[6]와 민주당 전당 대회를 비롯한 선거방송을 공동 진행했다. 그럼에도 몇몇 사고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인물 호칭을 제대로 못하거나 개표 과정에서의 세부 사항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더듬거리는 문제점을 보여주어 공동 진행자였던 브링클리가 이를 수정하는 해프닝도 잦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현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러한 불안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제닝스의 방송은 시청률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제닝스는 1986년 챌린저호 참사 당시 11시간 연속으로 특보 진행을 맡으며 큰 호평을 받았다. 1989년에는 지상파 3사의 저녁 뉴스 경쟁은 점점 과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진 당시 전문가들은 제닝스와 ABC의 신속한 방송 대응을 칭찬했고, 톰 브로코와 NBC의 지연된 대응을 비판했다. 그 다음달, 브로코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면서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했다. 그 해 시청률 1위는 월드뉴스 투나잇이었다. 또한 13주 연속 시청률 1위를 차지해, 처음으로 전체 연간 평균 시청률에서 CBS를 이기는 기록을 세웠다.

제닝스의 성공적인 행보는 1990년에도 계속되었으며, World News Tonight은 줄곧 시청률 경쟁에서 선두를 지켰다. 그해 1월, 1시간 동안 한 가지의 주제를 깊이있게 다루는 프라임타임 시간대 특집뉴스 프로그램인 'Peter Jennings Report'를 시작했다. 첫 프로그램에서 다룬 미국의 총기 문제에 대한 보도는 큰 호평을 받았다. 4월에 방영된 두번째 프로그램 "킬링 필드에서"는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책에 초점을 맞췄다. 이 프로그램은 연방 정부가 아시아 국가에서 크메르 루즈의 집권 복귀를 은밀하게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부시 행정부는 처음에 부인했다. 그러나 7월 18일 백악관은 크메르 루즈에 대한 승인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1991년 1월 17일 걸프 전쟁이 시작되었을때, 제닝스는 특보를 전하기 위해 전쟁의 처음 48시간중 20시간을 진행하면서 장시간 마라톤 방송을 진행했다. 이 방송은 ABC 뉴스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군사 브리핑을 방송하기 위해 1월 19일 토요일 아침 어린이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제닝스는 이때 전쟁 보도가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정서적 영향에 대해 우려하게 되었고, 제닝스는 어린이를 위한 90분짜리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제닝스와 ABC 기자, 미군이 전화로 어린이 시청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전쟁에 대해 설명했다.

1991년 10월 12일, 속보로 인해 ABC는 토요일 아침 정규방송을 다시 중단했다. 제닝스는 다시 한 번 시청자를 염두에 두고, 대법관 후보자 클래런스 토마스에 대한 상원 인준 청문회 중계를 시작하기 전 어린이 시청자들을 위한 멘트를 했다. 제닝스는 "아주 좋지 않은 언어를 들을 수도 있다"고 말하며 토마스와 그의 고소인인 아니타 힐을 두고 "그 여자와 남자가 함께 일할 때 그녀에게 한 일에 대해 매우 고통스러운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달라고 부모님께 요청할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제닝스는 이후에도 어린이 시청자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계속 제작했다. 1992년 2월에는 에이즈에 대한 90분짜리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1992년 4월에는 인종차별에 대한 어린이 대상 포럼을 진행했다.

1992년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토론회의 진행을 맡았다. 그해 6월에는 Ross Perrot을 초대해 다운타운 포럼을 열기도 했다. 1992년 9월 9일, ABC는 정치 보도에서 그동안 논란이 있었던 사운드 바이트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제닝스는 World News Tonight 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절차에 대해 외면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지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라며 "일과 이상이면 후보자의 일상에만 시간을 할애할 것입니다. 텔레비전 전용으로 설계된 무대 연출 및 사운드 바이트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빌 클린턴이 1992년 11월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제닝스는 어린이를 위한 두 편의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새 행정부를 소개했다. 그는 1993년 2월에 클린턴 대통령을 초대해 어린이와 함께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11월에는 워싱턴 DC에서 법무장관 Janet Reno와 래퍼 MC Lyte가 출연한 중학교 라이브 스페셜을 진행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은 제닝스가 큰 어려움과 함께 당혹감을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1993년 8월 13일, 제닝스는 부인과의 이혼을 Newsday에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이 커플은 이전에 제닝스가 Marton이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리처드 코헨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1987년에 4개월동안 별거한적이 있었다. 1994년 1월, 그는 World News Tonight의 총괄 프로듀서 Emily Ronney를 해고했다. Rooney의 공개 해고는 전국적인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보수성향의 미디어 연구 센터(MRC)와 같은 미디어 감시 단체의 등장으로 제닝스는 진보 편향적인 인물로 간주되어 날카로운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는 1994년 11월 14일 ABC 라디오에서 1994년 미국 중간 선거 결과를 분석한 발언으로 MRC와 Cal Thomas와 같은 보수주의자들로 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 논란이된 그의 발언은 이러했다. "분노한 유권자들에 대한 의견도 있습니다. 두 살배기 아이의 부모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먼 부모들은 여러분에게 쿵쿵거리는 발, 출렁이는 눈, 비명같은 급한 성질들에 대해 말해줄 수 있어요" 라며 "통제되지 않는 분노로 가득 찬 국가를 상상해 보세요. 유권자들은 지난주에 성질이 급했습니다. 육아와 통치가 욕설이 필요는 없습니다. 이 나라는 두 살짜리 성난 아이에 의해 운영될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7]또한 1995년 7월 27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50주년을 일주일 앞두고 Peter Jennings Reporting으로 방송한 "히로시마: 왜 폭탄이 떨어졌는가"도 피버디 어워즈를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롱을 받았다. 켄 링글은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다큐멘터리 리뷰에서 히로시마 폭격시 군사적 필요성이 아니었다는 어떤 암시를 반박하기 위해 고안된 연막인 "학술 수정주의의 좁은 터널을 거니는 재주꾼"이라고 말했다. MRC는 미국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련을 위협하는 냉소적인 냉던 게임을 하기 위해 폭탄을 투하했다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이 프로그램을 "수정주의 역사의 일방적 버전"이라고 평했다. 다큐멘터리의 일부 시청자들은 제닝스에게 캐나다로 돌아가라고 말하면서 버스 요금을 우편으로 제닝스에게 보내기도 했다.

제닝스는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을 만회하기 위해 3년간의 로비끝에 1994년 1월, 유명 종교 전문기자인 Peggy Wehmeyer를 종교 담당기자로 영입했다. ABC는 종교적인 주제에 대한 보도를 늘렸으며, 1995년 3월에 제닝스는 'Peter Jennings Reporting : In Name of God'이라는 미국 교회의 변화하는 본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1995년 2월, 시애틀에서 방송된 KOMO-TV의 타운홀미팅 녹화중 제닝스는 1994년 중간선거에 대한 ABC 라디오 발언에 대한 논란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신성한 임무를 모욕했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캐나다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 O.J. 심슨 살인사건 보도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은 제닝스는 텔레비전 비평가들로 호평을 받았다. 대신 제닝스는 보스니아 전쟁을 취재하는데 더 집중했으며, 이 주제에 대한 3시간짜리 프라임타임 특집과 어린이들을 위한 토요일 아침시간대 특집을 진행했다. ABC는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다른 방송사보다 더 많은 시간을 국제 분쟁 취재에 할애했다. 제닝스는 이 취재에 대한 열정으로 하버드 대학의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골드미스 언론학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제닝스는 1995년 퀘벡 주민투표의 명성을 미국에서 높인 공로를 인정받았다. 특히 캐나다 언론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심층보도에 대해 극찬했으며, 그는 국민투표 전날 캐나다에서 방송한 유일한 앵커였다.

이러한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1996년부터 World News Tonight은 시청률이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다. 1996년 하계 올림픽 경기의 높은 시청률과 O.J. 심슨 재판의 많은 보도에 힘입어, 경쟁사 NBC는 7월말과 9월 초에 2주동안 ABC를 앞질렀다. 이 짧은 상승세는 시청률 상승을 시작한 NBC에 모멘텀을 제공했다. 이를 걱정한 제닝스와 ABC는 NBC의 성공을 모방하기 위해 국제보도를 줄이고, 가벼운 주제의 소프트 뉴스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시청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시청률은 급락했다. 제닝스는 "우리는 그것을 매우 나쁘게 했다"고 말하며 "시청자들이 우리를 발로 찼다."고 말했다. 월드뉴스 투나잇은 이후 주요 이슈의 비중을 늘리면서 예전의 포맷은 다시 복귀시켰지만, Nightly News의 1997년 저녁 뉴스 1위로 끝났다.

시청률 하락은 ABC 뉴스에 큰 후폭풍을 동시에 일으켰다. ABC는 24시간 케이블 뉴스채널 개발 계획을 전면 백지화시켰다. 1998년 5월 29일에는 뉴스부문 사장 룬 알레드 지에서 데이비드 웨스틴으로 교체되었다. 두 사람은 시청률 하락이 사장 교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또한 전국방송노동자기술자협회의 24시간 파업으로 1998년 11월 ABC 개표방송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몇몇 민주당 후보들은 노조를 지지하기 위해 인터뷰를 거부하기도 했다.

거듭되는 개편에도 불구하고, 제닝스는 저녁뉴스 시청률 1위를 탈환하지 못했다. 그 대신 World News Tonight은 2위 자리를 탄탄하게 지키고 있었다. 밀레니엄이 다가오자, ABC와 제닝스는 20세기의 광범위한 회고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닝스는 전 라이프지의 기자인 토드 브루스터와 팀을 이루어 20세기 미국의 역사를 다룬 606쪽짜리 책인 'The Century'를 집필했다. ABC에서 곧 방송될 동명의 다큐멘터리 시리즈와 함께 기획된 이 책은 출간 한 달 만인 1998년 12월,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1999년 3월 29일, 제닝스는 ABC의 12시간 분량의 미니시리즈 'The Century'의 첫번째 편을 진행했다.# 이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의 제작은 1990년에 시작되었으며, 총 2천 5백만 달러의 비용이 투자되었다. 제닝스는 또한 1999년 4월,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된 이 다큐멘터리의 15시간 확장판 '미국의 시간'도 진행했다.





1999년 12월 31일, 제닝스는 ABC의 대형 밀레니엄 이브 스페셜 방송인 ABC 2000 투데이를 23시간 동안 연속으로 진행했다. 적어도 약 1억 7천 5백만명의 사람들이 이 방송을 시청했으며, 제닝스는 경쟁 방송사들의 밀레니엄 특집 방송들을 가뿐하게 앞질렀다. 텔레비전 비평가들은 이 프로그램에 호평을 보냈으며, 피터 제닝스를 "초인적"이라고 평가했다. 비록 제작비가 총 1100만 달러[8]였지만, ABC는 500만 달러의 수익을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성공이 World News Tonight 시청률 상승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ABC는 1월 첫째주에서 시청률 선두를 차지한 이후 다시 2위로 내려왔다.


200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제닝스는 이전 보다 더 많은 정치뉴스 보도 업무를 맡았다. 1월 5일 제닝스는 뉴햄프셔 대학에서 열린 민주당 예비선거 토론을 진행했다. 또한 황금시간대 뉴스 스페셜인 '다크 호라이즌'을 진행했다. 3월 22일 ABC가 방영한 '인도, 파키스탄, 폭탄'은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이 지역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제닝스는 클린턴의 순방 당시 인도를 방문한 미국의 유일한 뉴스앵커였다. 또한 폴 A. 슬라빈이 4월부터 World News Tonight의 새로운 총괄 프로듀서를 맡기 시작했다.

2.4.1. 9.11 테러와 미국 국적 취득

제닝스는 ABC의 9.11테러 특보를 17시간동안 연속으로 진행했다. 텔레비전 비평가들은 이를 "허큘리스"라고 표핸했다. 다른 방송나 뉴스 앵커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재난을 통해 미국인을 안내한 것으로 널리 칭찬을 받았다. 어느 시점에서 제닝스는 자녀들의 전화를 받고 평정심을 깼다. 그는 "우리는 이 의자에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권장 사항을 자주 제시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하지만... 당신이 부모라면 다른 나라에 아이가 있는 경우 전화를 걸어 교환 관찰을 해보세요."

그의 보도는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닝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해 러시 림보가 한 "미합중국 대통령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지만, 조만간 우리는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한다."라는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다. 당시 ABC에는 1만통이 넘는 항의 전화와 이메일이 쇄도했다. 9월 13일, 제닝스는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협상가 하난 아샤와이를 포함한 중동 전문가들을 위한 포럼을 주최한 것에 대해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2002년 중반, 제닝스와 ABC는 토비 키스가 "Courtesy of the Red, White and Blue(Angry American)"로 7월 4일 축하 방송을 시작하는것을 거부해 키스와 컨트리 음악 팬들로부터 캐나다 시민권자라는 조롱과 함께 비판을 받았다.


9월 11일의 사건은 제닝스와 브루스터가 공동 작업 성공 이후 시작한 프로젝트인 'In Search of America'에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 두 사람은 2001년 초에 이미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테러 공격 이후, 사건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 인터뷰했다. 이 책을 홍보하기 위해 제닝스와 World News Tonight은 2002년 4월, 국가/1년 이라는 1년간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국 50개주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제닝스는 또한 2002년 9월에 책과 같은 이름의 6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의 성공과 출판사의 대대적인 홍보에도 불구하고, 책은 많은 관심이나 판매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제닝스의 다큐멘터리 작업과 9.11 테러 특보방송 진행은 2003년 미국 국적을 취득하기로 한 그의 결정에 기여했다. 제닝스는 "저는 9.11 테러와 그 이후 그 나라에서 했던 여행이 저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시켜주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것은 제가 많은 시간을 편집자 자리에서 떨어져있게 하는 것을 의미했고, 저는 미래를 위한 건국아버지들의 이상과 생각에 훨씬 더 많이 연결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의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권 시험도 쉽게 통과했다. 제닝스는 "미국에 대한 전체 시리즈를 막 끝내고 미국 방송에서 앵커를 했던 제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끔찍했을것"이라고 말했다. 제닝스는 5월에 공식적인 충성 서약을 했으며, 충성서약을 하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그동안 캐나다인이라는 이유로 저널리스트로서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던 그가 드디어 미국인이 된 것이다.

2.4.2. 앵커직 당시 주요 활약

그는 화려한 이력처럼 유명한 보도 및 인터뷰가 몇몇개 있었는데 목록은 다음과 같다.

걸프전이 시작한 날 시작한 방송보도인데, 이때 첫 48시간 중 20시간을 제닝스가 앵커 데스크에서 보도하였다.


사건 발생 후 많은 방송국 및 언론사들이 그랬지만 그 중에서도 제닝스는 '17시간 연속'으로[9] 앵커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사건초기, 아침특보에서는 빌딩이 무너지는 상황을 보면서 조용히 오마이갓이라고 말하며 몇초가량 침묵하기도 했다. 그리고 빌딩이 다 붕괴된후에도 침묵하며 애도하는듯한 모습을보이기도 했다.

이 때, 제닝스는 9/11 테러 보도를 이어가면서 1985/6년부터 끊었던 담배를 십 수 년 만에 다시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다시 피기 시작한 담배는 후의 폐암 발병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다음은 그날 보도의 일부이다.


2004년 11월 18일에 빌 클린턴과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제닝스가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도덕성으로는 역대 대통령 중 41위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자 클린턴이 격분하며 제닝스와 거의 말다툼까지 갈뻔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다소 크게 주목된 이유는 사실 제닝스가 '르윈스키 사건'에 대해 돌려 물어본 것이어서 그렇다.

다음은 문제의 인터뷰 부분이다.


3. 마지막 방송과 사망




2005년에 들어 종종 방송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는데, 2005년 4월의 베네딕토 16세 선출 과정 중에 폐암으로 인해 앵커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녹화방송을 통해 전했다.

그리고 얼마 뒤 항암치료를 시작했으나 그 해 8월 7일 아침 11시 30분에 결국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이 ABC뉴스를 통해 전해진 이후 그의 이전 본사의 1시간 짜리 추모 방송은 물론 그의 라이벌이었던 톰 브로코와 댄 래더, 그리고 그들이 몸 담았던 경쟁사인 NBC 투데이 쇼와 CBS에서 추모 방송 코너를 마련했었다.







다음은 NBC와 CBS의 추모 방송 코너이다.



사망 후 그는 에드워드 머로, 월터 크롱카이트, 댄 래더, 밥 쉬퍼, 마이크 월리스 (이하 CBS), 쳇 헌틀리, 데이비드 브링클리, 존 챈셀러, 톰 브로코, 브라이언 윌리엄스 (이하 NBC), 바버라 월터스, 다이엔 소여 (이하 ABC) 등과 함께 미국 앵커의 역사를 쓴 인물로 여겨진다.

4. 기타



[1] 월터 크롱카이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경험도 적은 피터제닝스를 두고 "나는 주름을 가리기 위해 메이크업을 받지만, 제닝스는 주름을 그리기 위해서 메이크업을 받는다"라고 농담했다고 한다.[2] 나중에는 ABC로 이직해 This Week의 앵커로 활동했다.[3] 요즘은 중동지국이 없어지고, 순회특파원이 중동과 기타지역을 취재하지만(심한경우 한 특파원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냉전이 한창이었던 시절이고, 국제뉴스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엄청났던 시절이라 거의 전 세계에 특파원을 파견했었다. 8,90년대에는 아시아가 신흥경제국으로 급부상하면서 베이징,서울,도쿄에 특파원이 다 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서울특파원이 아시아지역을 거의다 담당하고 있는중이다. 또 국제뉴스에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 중동관련소식을 제외하면 국제소식을 좀 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4] 당시 미국인 기자 최초로 호메이니를 단독 인터뷰하기도 했다.[5] 일반적으로 경쟁사의 다른 앵커들이 Managing Editor(총괄에디터)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것과는 달리, 제닝스는 한 단계 낮은 Senior Editor(수석에디터) 직함을 오랫동안 유지했다.[6] 당시 일요 아침 시사프로그램 '디스위크' 진행자. 브랭클리 역시 1956~1981년까지 NBC에서 '헌틀리-브랭클리 리포트(1956~1970)' → 'NBC 나이틀리 뉴스(1970~1981)'로 이어지는 NBC 메인 뉴스 앵커 출신이다.[7] 1994년 중간선거는 40년만에 당시 야당인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던 선거이다. 제닝스는 한쪽으로 쏠린 유권자들의 표심을 비판한 것이었다.[8] 경쟁 방송사인 NBC와 CBS는 밀레니엄 특집 방송에 200만 달러를 투자했다.[9] 사고 당일 오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특보진행후 이후 새벽뉴스진행자가진행한뒤 아침 굿모닝아메리카 방송후 다시 특보진행을하면서 며칠간 이 일정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