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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메 롤도스/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하이메 롤도스

1. 개요2. 어린 시절3. 결혼 생활4. 대통령이 되기까지5. 대통령 임기6. 롤도스 독트린7. 비극적인 죽음

1. 개요

하이메 롤도스의 일생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어린 시절

1940년 11월 5일 과야킬에서 태어났으며, 막내이다. 롤도스가 태어난 가문은 수세기 동안 빌라사르 데 마르(카탈루냐에 위치한 스페인 공동체)에 뿌리를 둔 카탈루냐 출신 롤도스 성씨의 에콰도르 분파 중 하나에 속했다. 빌라사르 데 마르에서 온 하이메 롤도스 발레타(1861-1927)는 하이메 롤도스 아길레라의 조상으로서 1875년 과야킬 항구에 도착해 에콰도르에 정착했다.

롤도스는 중고등수업을 비센테 로카푸에르테 국립학교[1]에서 받았으며, 그곳에서 비센테 로카푸에르테 대상과 학사를 받았으며, 중등학생 연맹[2]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과야킬 대학[3]에 입학했으며 법학사회과학 학위를 받고 대학생 연합[4]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모든 학년 동안 롤도스는 "박애주의"상과 "행복상" 수상자로 고려됐다. 또한 롤도스는 매년 최고의 학생들에게만 수여되는 상을 받기도 했다.

롤도스의 연설에는 전례가 있었다. 첫 번째 연설은 정치가 아니라 통치 관련된 분야였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여성스러워서 여자 학교를 돌아다니고 미인대회에 참가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5] 비센테 로카푸에르테 학교의 중등 학생 연맹 (FESE)의 책임자였었을 때 집회 참여를 많이 하였는데 나중에 과야킬 대학에 입학한 후 대학생 연합 (FEU)의 회장이 되면서 카리스마를 연습하기도 했다.[6]

3. 결혼 생활

1962년 레바논 출신의 에콰도르 변호사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마사 부카람 오르티스(Martha Bucaram Ortiz)와 결혼했다 . 둘은 세 명의 자녀를 가지게 된다.

장녀:마사 롤도스 부카람

차녀:부카람다이아나 롤도스 부카람

차남:산티아고 롤도스 부카람

장녀 마사 롤도스는 경제와 정치에 헌신하여 윤리와 민주주의당[7]의 의원이 되었고 2009년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다.[8]

4. 대통령이 되기까지

롤도스는 1967년과 1970년 사이에 의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또한1978년에서 1979년 사이에 군사 독재에 의해 개헌된 1945년 헌법을 개혁하기 위해 소집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1978년 헌법[9] 이 공포되었을 때만 해도, 롤도스는 과야킬의 시장 후보로 이제 막 급상승했고 그의 정치적 스승 아사드 부카람이[10]대통령 후보였다. 여론 조사에서 선거는 부카람이 승리할 것으로 예측하자, 군부 정권은 부카람이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 이바라[11], 카를로스 훌리오 아로세메나 몬로이[12]처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금지하는 "특별한" 조항을 선거법에 포함시켰다. 이에 기회를 잡은 롤도스는 "롤도스에게는 대통령을, 부카람에게는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롤도스는 1979년 에콰도르 대통령 선거에서 대중의 집중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롤도스는 1차 투표 후 6개월 만에 군부가 지원하고 있다는 논란이 퍼지고 있는 보수 성향의 기독교 사회주의자 식스토 두란 바옌을[13]이겼다.[14] 이로써 롤도스는 1979년 8월 10일 에콰도르의 제 3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5. 대통령 임기

1979년 10월 11일 롤도스는 주당 근무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이는 법령에 서명한다. 1979년 11월 1일에는 근로자의 최저 생활임금을 월 4,000달러(현재 환율로는 160달러)[15]로 두 배로 인상하는 법령이 승인되었다. 한편으로 롤도스는 첫취임 이후 의회 의원들을 "야당의 방패"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그 의원들 중에는 기독사회당의 레온 페브레스코르데로 리바데네이라[16], 국민혁명당(PNR)의 카를로스 훌리오 아로세메나 몬로이[17] , 민주제도경제연합의 오토 아로세메나[18], 인민 통합당에 하이메 후르타도[19], 그리고 여당인 대중의 집중당의 당시 국회의장 아사드 부카람.[20] 1980년 3월 8일에는 국가발전계획이 시행된다. 1980년 4월 15일, 의회와의 권력 투쟁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된 회의를 열었다. 롤도스는 당시 국회를 차지하고 있던 대중의 집중의 반대표에 맞서기 위해 국민과 변화와 민주주의를 창당했으며, 결코 이 당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21]

1981년은 에콰도르 역사에서 "진보의 해"로 기억된다. 1981년 1월 말과 2월 초에는, 콘도르 산맥에서 페루와 국경 분쟁이 있었다. 분쟁은 파키샤, 마야이쿠, 마치나자 지역에서 일어났다.

긴박한 위기 속에서 외교 능력이 뛰어난 롤도스는 OAS에 영토 문제를 맡겼고 페루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분쟁의 책임을 물었다. 알폰소 바레라 발베르데가[22]를 보내 세상에 파키샤 분쟁을 알린다.

롤도스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 가장 매서운 사람은 당시 사회기독당 의원 페브레스 코르데로였는데, 코르데로는 공공 사업부 장관에 대한 정치적 재판에서 "헝겁 인형"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그 사건을 일으킨 관계자들을 비난했다. 그 후로도 계속 코르데로는 롤도스와 우르타도에 대해 비판 했고 이는 코르데로의 정치 경력에 주요한 발판이 된다. 그리고 1984년 코르데로가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중요한 커리어가 된다.

롤도스는 또한 임바부라 주와 카르치 주 사이의 경계에 엘 운칼과 같은 다리를 건설했다. 또한 극빈층의 어린이들을 위해 국가 발전 계획 중 학교 급식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뭐니 뭐니 해도 하이메 롤도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칠레의 피노체트와 같은 군사 독재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에 인권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쳤다는것이다.

1980년 11월 4일 로널드 레이건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남아메리카의 여러 좌익 단체들은 자신들의 뜻을 드러낼 기회를 얻었고, 계속 해서 게릴라 투쟁을 촉발했다. 1981년 1월 롤도스는 인권에 대한 생각이 레이건과 맞지 않아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거절하고[23] 니카라과산디니스타 정부 및 엘살바도르의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엘살바도르 민주 전선과의 연계를 강화했다. 이 시기 롤도스의 좌우명은 "항상 모든 것 위에 있는 나라"였다. 이때부터 롤도스는 롤도스 독트린이라는 원칙을 만들어낸다.

6. 롤도스 독트린

롤도스는 1980년 9월 11일 서명된 리오밤바 행동 헌장에 반영된 인권 존중 원칙인 안데스 공동체에 제안했다.

7. 비극적인 죽음

1981년 5월 24일 일요일 오후, 대통령 전용기로 인수한 하이메 롤도스 아길레라 대통령을 태운 비치크래프트 킹에어 (FAE 001A) 에콰도르 공군 (FAE) 비행기가 와이라풍고 산에 추락했다. (케추아어로 "바람의 문"). 대통령 외에도 항공기에 탑승했던 다른 승객들은 모두 사망했다. 영부인 마사 부카람, 마르코 수비아 마르티네스 국방장관,헥토르 토레스 중령, 대통령의 조종사이자 보좌관인 아르만도 나바레테, 마르코 중령 등.부조종사 갈로 로모, 중위 및 스튜어디스 솔레다드 로세로. 항공기는 파키샤 분쟁 의 참전병들이 참석한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아타후알파에서 상장 수여식이 끝난 직후 키토를 떠났다. 롤도스의 원래 목적지는 국경 도시인 마카라(Macará)였으며, 그곳에서 롤도스 대통령은 헬리콥터를 타고 인근 사포틸로(Zapotillo)도시로 이동하여 또 다른 행사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롤도스는 피친차 지방 의회 회의때문에라도 오후에는 바로 키토로 돌아가야 했다.

착륙하기 몇 분 전, 약 60km 떨어진 마카라 활주로를 향한 착륙 시도에서 대통령 전용기가 갑자기 몇 미터 떨어진 와이라풍고 언덕 꼭대기에 있는 큰 바위에 충돌했다.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도착하지 않고 연락까지 두절되자 마카라에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던 헬리콥터가 그를 찾아 이륙하여 와이라풍고 산 경사면에서 비행기 잔해를 발견했다.

충돌 현장에서 10km 떨어진 인근 셀리카 주에서 순찰대가 출발해 대통령과 수행원을 구출하기 위해 와이라풍고 산에 올랐다. 그러나 대통령을 포함한 모두는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셀리카에서 대통령과 수행원의 유해가 마찰라로[24]옮겨졌고 그곳에서 공군 C-130이 유해를 키토로 수송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롤도스는 그날 빨간 넥타이를 메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부검 결과 대통령은 충격으로 인한 다중 외상으로 즉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2006년 로하 신문에는 현장에서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대통령과 영부인의 유해라고 밝혔다.[25] 호세 볼리바르 카스티요 (José Bolívar Castillo)[26] 전 로하 시장은 이 끔찍한 사고에서 "대통령의 시신만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라고 선언했다.

대통령의 사망이 확인되자마자 부통령 오스발도 우르타도 라레아(Osvaldo Hurtado Larrea)는[27] 헌법에 따라 권력을 승계하여 텔레비전으로 국민들에게 연설했다.

키토의 카론델레트 궁전과[28] 키토 대성당에서 국가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수천 명의 키토 주민들은 대통령의 예상치 못한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애통하면서 거리로 나섰다. 코스타리카 대통령 로드리고 카라소 오디오 ( 코스타리카), 파나마 대통령 아리스티데스 로요 산체스( 파나마 )[29] , 루이스 에레라 캄핀스 ( 베네수엘라 )[30], 페루 대통령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 페루 ), 콜롬비아 대통령 훌리오 세사르 투르바이 아얄라( 콜롬비아 ) 등 일부 라틴아메리카 대통령들이 특별 귀빈으로 참석했다.

키토에서 추모식이 끝난 뒤 대통령 부부의 유해는 과야킬로 옮겨져 대성당에서 추모미사가 거행됐다. 과야킬의 장례 행렬도 엄청났다.
파일:540px-Tumba_de_Jaime_Roldós_Aguilera_y_su_esposa.jpg 과야킬 문화유산 묘지에 있는 하이메 롤도스 대통령과 영부인 마사 부카람의 묘지.[31]

롤도스와 영부인 마사 부카람은 과야킬의 일반 묘지에 묻혔다. 묘지의 14번째 구역에 두 개의 흰색 대리석 십자가가 롤도스와 마사 부카람의 무덤을 표시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치명적인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하는 서한을 보냈다.

롤도스의 마지막 연설은 롤도스가 죽기 몇 시간 전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아타후알파 시상식에서 행해졌고, 롤도스가 지난 주에 취한 경제 문제에 대한 대처 때문에 참석한 청중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파일:Ultimo_discurso_de_Roldos.png
"Hemos avanzado 21 meses, bajo un gobierno constitucional, cuando significa en países como el nuestro en los que ganar la estabilidad democrática, implica conquistarla día a día.

Ecuatorianos, fuimos serios y honestos. Seguimos siendo serios y honestos en todos y cada uno de nuestros planteamientos. Que no sean las palabras sino las obras, las que den el mejor testimonio de nuestras intenciones. Es hora del trabajo, el esfuerzo y la solidaridad, no de los paros, huelgas, amenazas, incomprensión o rumores. Probemos el amor a la Patria cumpliendo cada quien con nuestro deber. Nuestra gran pasión es y debe ser el Ecuador. Nuestra gran pasión, oídme; es y debe ser el Ecuador.

Este Ecuador que no lo queremos enredado en lo intrascendente, sino en lo valeroso, luchador, infatigable, forjando un destino de grandeza. El Ecuador heroico que triunfó en Pichincha, el Ecuador de los valerosos de hoy, heroicos luchadores de Paquisha, Machinaza y Mayaicu, inmolados en estas legendarias trincheras. El Ecuador heroico de la Cordillera del Cóndor. El Ecuador eterno, unido en la defensa de su heredad territorial. El Ecuador democrático, capaz de dar lecciones históricas de humanismo, trabajo y libertad.

Este Ecuador Amazónico, desde siempre y hasta siempre. ¡Viva la Patria!".

"헌법 정부 하에서 민주적 안정을 쟁취하는 것이 날마다 정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우리 같은 국가에서는 21개월이 앞당겨졌습니다.

에콰도르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진지하고 정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접근 방식 하나하나에 계속해서 진지하고 정직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되도록 하십시오. 파업, 위협, 오해, 소문이 아닌 노력과, 연대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조국에 대한 사랑을 증명합시다. 우리의 위대한 열정은 에콰도르이고,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열정이여,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의 열정은 에콰도르이고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에콰도르가 하찮은 일에 얽매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고, 지치지 않으며 위대한 운명을 개척하는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피친차에서 승리한 영웅적인 에콰도르와, 오늘날의 용감한 에콰도르를 원합니다.파키샤, 마치나자, 마야이쿠의 영웅들이 전설적인 참호에서 불타오르고. 콘도르 산맥의 영웅적인 에콰도르를 원합니다. 영토유산을 수호하기 위해 뭉친 영원한 에콰도르와. 인본주의, 노동, 자유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줄 수 있는 민주적인 에콰도르를 원합니다.

우리의 아마존 에콰도르는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조국에게 만세를!!"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아타후알파 에서 한 연설 中

[1] 이래 보여도 에콰도르에서는 명문에 속한다. 당장 이학교를 설립한 인물이 "후안 호세 플로레스" 에콰도르 초대 대통령이며 이름인 비센테 로카푸에르테는 과야킬 주지사로써 대통령에게 이 국립학교의 설립을 요청한 인물로써 참고로 후안 호세 플로레스가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온 후 다음 대통령을 맡은 인물이다.. 당장 이곳에서 배출한 대통령도 하이메 롤도스를 포함해 10명이 넘는다.[2] 에콰도르에서 중등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모임[3] 마찬가지로 에콰도르에서 가장 큰 대학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서울대라고 보면 된다.[4] 에콰도르 대학생들의 모임[5] 실제로 롤도스의 연설을 들어보면 남성의 목소리보다 약간 톤이 낮다는 걸 알 수 있다.[6] 하이메 롤도스는 신체적으로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카리스마에 열정을 보였던 것.[7] 하이메 롤도스의 형제였던 레온 롤도스가 창립한 정당[8] 그러나 상대는 바로 그 라파엘 코레아.. 결국 47.66%로 압도적으로 패배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다.[9] 1976년 써진 후 1978년 발표된 에콰도르 헌법이다. 독재자였던 기예르모 로드리게스는 1945년 헌법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천세 만세 대통령직을 하려고 했는데 1975년 쿠데타가 벌어지면서 대통령직에서 강제로 퇴임을 당하고 그 이후 군부가 에콰도르 최고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국정을 잡으면서 육군과 공군 해군의 각 대표들이 에콰도르를 통치하는 삼두정이 시작된다. 이 때 에콰도르 최고 위원회의 회장이자 해군 대표인 알프레도 포베다 제독이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이후 1979년 에콰도르 헌법이 발표되고 하이메 롤도스가 최초의 민주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20년 넘게 지속됐던 군부독재가 종결을 맺고 민선시대로 들어서게 된다.[10] "아사드 부카람(Assad Bucaram)" 롤도스가 소속되어 있던 대중의 집중당 대표이자 마사 부카람의 삼촌이다. 즉 롤도스에게는 백부라고 볼 수 있다..[11] 에콰도르의 전직 대통령으로 무려 4번 넘게 연임을 한 정치계의 전설로 유명하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대통령이다.[12] 하원의장과 상원의장을 역임하고 이바라 정권 하 부통령에서 대통령까지 간 인물이었지만 피델 카스트로쿠바 혁명을 지지하는 등 반미적인 의향을 보였기에(미국 정부뿐만 아니라 자국 에콰도르 주재 미대사까지 욕한 적도 있다.) 미국의 묵인 하에 쿠데타로 대통력직에서 퇴임한다.[13] 기예르모 로드리게스 정권 하에서 키토 시장을 맡으면서 로드리게스의 지원으로 시장을 계속 재임했었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14] 식스토 두란 바옌이 23.86% 하이메 롤도스가 27.70%로 겨우 4.16%차였다. 2차 투표를 해보니 롤도스가 68.49% 두란 바옌이 31.51%로 완벽하게 37%차로 롤도스가 완승했다.[15] 한화로는 2101만 8640원[16] 훗날 35대 대통령이 된다.[17] 원래 국민혁명당은 대통령 임기 중에 아로세메니스타 국민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결성했지만 리즈 시절이 끝나고 대통령직에서 쫓겨나자 자신이 만든 당의 이름을 국민혁명당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재림을 노리기 시작한다.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18] 제 32대 대통령. [32] 바로 앞에서 소개한 아로세메나를 퇴임시켰던 라몬 카스트로 히혼 군사정권 지도자와 싸워서 이기고 대통령까지 갔던 인물이다.퇴임 이후 계속 정치에 참여하다가 1979년 의회로 돌아왔는데 보수당 의원 파블로 다발로스와 회의 중 파블로 다발로스에게 총을 쏘게 되고 여기에 연루되어 징역을 한 달 치르게 된다.[19] "하이메 리카우르테 후르타도 곤살레스(Jaime Ricaurte Hurtado González)"아프리카계 에콰도르인들의 변호사이자, 에콰도르 최초의 아프리카계 의회 의원이다.20년 후 국회의사당과 가까운 건물에서 총에 맞아 암살당한다. 평소에 좌파적인 경향을 보인 적이 있기에 미국이 암살에 가담했다는 의견도 있다.[20] 아사드 부카람은 실제로 롤도스가 대통령이 되는데 많은 지원을 해줬으며 실제로 "롤도스에게는 대통령을 부카람에게는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은 부카람이 제의한 것이며 사실 롤도스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롤도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부카람은 의회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의장을 해먹었다고 한다. 또한 국정에도 자주 간섭했기에 실제로 슬로건이 이루어질까봐 롤도스는 부카람과 조금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말년에 사이는 그럭저럭..[21] 이를 통해서 롤도스가 부카람을 얼마나 경계시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부카람은 선거 슬로건만 봐도 알듯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이에 롤도스가 부담스러워 했다. 국정에 계속 간섭했으며, 자신의 정당인 대중의 집중을 통해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 롤도스를 통해 에콰도르를 지배하려고 했다. 하지만 롤도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부카람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었고 롤도스는 항상 국정에 참견을 했던 부카람을 그래도 곧 내일 모레가 환갑이고 언제 죽어도 모를 백부이기에 봐줬지만 자신이 가려는 길을 막고 자꾸 위로 기어올라오려 하자 결국 인내심이 폭발. 롤도스가 대중의 집중을 탈당하는 일까지 생기고 만다.[22] (Alfonso Barrera Valverde) (1929년 3월 29일 – 2013년 9월 6일) 원래는 아르헨티나 대사를 맡았지만 1980년 외무장관에 임명이 되며 파키샤 분쟁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로는 여러 소설과 시를 쓰며 작가로 지내다가 자신의 자택에서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23] 이로 인해 롤도스는 미국에 매우 단단히 찍히게 된다.[24] 에콰도르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엘오로 주의 주도이며 과야킬만의 비옥한 저지대에 위치한다. 그렇다 보니 바나나가 잘 자란다. 그래서 별명이 "세계 모든 바나나의 도시"이다.[25] 그 이외의 시체는 형제 조차 알아볼 수 없을만큼 끔찍하게 훼손이 됐기 때문이다.[26] 당시 로하의 시장.세번이나 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시장직은 네번이나 역임했다[27] 롤도스의 러닝메이트이다. 사이도 많이 좋았다고 전해지는데. 얼마나 좋았냐면 부통령직에 롤도스가 오스발도를 덥석 앉힐 정도다.[28] 대통령 궁.키토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29] (Arístides Royo Sánchez) (1940년 8월 14일~현재) 파나마 제 38대 대통령. 임기 도중 교육,관광,주택,인프라 및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관료주의와 빛도 증가하기도 했다. 결국 군부의 압력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현재는 파나마 운하를 담당하는 파나마 운하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활동중이다.[30] (Luis Antonio Herrera Campíns) (1925년 5월 4일~2007년 11월 9일) 베네수엘라 제 43대 대통령. 베네수엘라 문화에 중요한 공헌을 해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도 있다.임기 도중 그 유명한 베네수엘라 검은 금요일이 벌어진다.이 양반 치세에 볼리바르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베네수엘라에는 심각한 경제 위기가 불어온다.이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신부전,당뇨병,알츠하이머병등 여러 질병에 걸려 걸어다니는 병원으로 전락한 후 정계에서 물러나 82세의 나이로 자신의 주택에서 사망한다.[31] 합장해서 묻힌 묘지다. 묘비는 두개지만 석판은 하나임을 볼 수 있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