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전통의상 | ||||
한국 한복 | 한족 한푸 | 일본 기모노 | 인도·방글라데시·네팔 사리 | |
몽골 델 | 태국 쑤타이 | 미얀마 론지 | 북방 유목민 호복 | |
유대인·이스라엘 키파 |
1. 개요
시대별 한복 2D 일러스트(영어)
한복이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사례는 고구려 벽화에서다. 기본 구조는 상의, 허리띠, 하의, 모자(또는 두건)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후 차츰 변화하여 상의가 짧아지고 허리띠는 고름으로 간소화 되었으며 두건은 다른 형태의 모자로 대체하였다. 이후 만주족 복식을 수입하여 만든 마고자와 서양 복식을 수입하여 만든 조끼를 추가하여 지금의 한복 형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한복을 현대 문화에 맞게 크게 간소화한 생활한복은 고름이 단추로 대체되고 소매가 줄어드는 등 일상 생활에서도 더욱 입기 편하도록 만든 형태이다.
평복은 기존의 고유 형태를, 관복과 공복은 중국식 복식을 받아들인 이분적 복식 제도였으나 상류층도 일상에서는 고유 형태의 한복을 입었다.
한복은 역사적으로 큰 변화보다는 차츰 변화하여 현재의 형태를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한복은 기본적으로 상유하고의 형태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포(겉옷)이나 치마를 입었다.
2. 선사시대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선사시대 및 고조선의 한복구석기 시대는 가죽을 이용한 옷을 입었을 것이라 추정하며, 신석기 시대는 실이 발명되어 옷감을 짜 입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석기 시대 대표 유물인 가락바퀴는 실을 짜는데 사용하였다.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자리 잡은 국가로서 남방계 복식 근간인 한푸와 달리 북방계 복식 근간인 호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었다. 학계에서는 초기 한복이 스키타이 복식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거나, 또는 스키타이 복식 그 자체가 전래하여 고대 한민족(예맥족) 문화에 맞게 발전한 것으로 본다.
고대한국복식의 원류에 관한 연구 : 스키타이계 복식문화를 중심으로
스키타이 복식 유형 및 형태에 관한 연구 - 고대 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pdf)
유목민족 복식의 특징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남방계식 상의하상(上衣下裳) 치마[1]보다 북방계식 상유하고(上襦下袴) 바지[2] 위주로 발전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할 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저고리 섶이 왼쪽 여밈(좌임, 左衽)이다. 남녀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바지와 저고리 위에 긴 포를 입고 허리띠를 매는 형식이다. 여자는 바지를 입은 뒤 치마를 겹쳐 입었다.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부여에서는 해(日)=흰(白)이라는 뜻으로 흰 옷을 숭상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한국 전쟁 이후까지 오랫동안 이어지며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무채색 옷을 좀 더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3. 삼국시대
기본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같은 복식을 입었으며, 여기에 지역별 특색을 추가로 더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기존 한복과 더불어 중국식 의복 문화를 새롭게 수입하고,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의복 문화를 일본열도로 수출하기도 하였다.
출처: 천손의 시대 |
3.1. 고구려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고구려의 한복고구려는 기본적으로 통이 넓은 바지[3]와 소매통이 좁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긴 포를 입는 형태를 띠고 있다. 여성들은 여기에 치마를 더 입었고, 신분에 따라 저고리에 문양을 넣기도 하였으며 남성들은 바지의 종류가 달랐다고 한다.
나중에 중국식 복식을 수입한 뒤로는 소매통이 넓은 옷을 입기도 하고 저고리의 좌임과 우임을 혼용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바지는 태구고, 대구고, 적황고, 궁고 등이 있으며, 색은 자색, 적색, 적황색, 검은색, 소색, 황갈색, 고동색 등 여러가지였다.
여성들의 치마는 색동치마와 주름치마가 있었다. 두 종류 모두 중국, 일본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고구려의 국왕은 대수자포에 백라관을 썼다고 한다. 또한 귀족들이 따로 관복으로 입는 포는 중국에서 수입해온 것이기 때문에 소매통이 매우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기다란 저고리를 고정하기 위해서 끈을 허리에 맸는데 이를 대라고 부른다. 고구려의 대의 종류는 피혁대, 포백대, 과대 등이 있었다. 피혁대는 백위대, 백피소대, 소피대 등 가죽으로 된 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고분벽화 기마인물도에서 볼 수 있다. 포백대는 직물로 만든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가장 흔하게 볼수 있는 대로서 귀족들은 넓은 폭의 띠를 두르고, 서민층은 폭이 좁은 띠를 둘렀으며, 시종자나 마부와 같은 천민들은 사대를 두르고 있었다. 과대는 형대 또는 포대에 금판 장식이 달린 과판을 부착하고, 그 한쪽 끝에는 교구, 다른 한쪽 끝에는 대선금구를 달아 허리에 찬 것이다.
- 고구려 고분 벽화 속 한복입은 여인들을 보면 고구려의 화장 방식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화장은 당나라의 홍장분식(紅粧粉飾)[4]과는 다르게 연지곤지 화장을 했다.
- 고려시대 한복과 비슷하게 허리띠를 하지 않은 모습도 보인다.
3.2. 백제, 가야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백제와 가야의 한복백제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미의식이 발달하여 유물 등을 보면 삼국 중 가장 여성스러운 특징이 많이 나타난다.
또한 반비나 배자 등은 남북국시대 때부터 생겼다고는 하지만, 벽화나 유물들을 추측해 보았을 때 이미 겉옷을 입는 복식 문화는 이전부터 등장했음을 할 수 있다.
백제의 갑옷은 일본의 갑옷과 큰 차이가 없는데 이것을 보아 두 국가의 교류 상태를 알 수 있다.
천수국만다라수장에서 발견된 백제의 여성 복식을 보면 층층이 단을 이루는 치마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치마는 다른 어느 국가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백제의 특징으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의 신발 중에서는 일본의 게다와 같은 ㅠ자형 나막신이 있다.
백제의 여성들이 고구려의 여성들처럼 연지곤지를 발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백제의 화장품 제조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가야는 백제, 신라의 복식 문화와 유사성을 띤다. 두 국가보다 소박하지만, 섬세한 면이 강하다.
3.3. 신라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신라와 발해의 한복신라는 지리적인 위치상 백제와 고구려보다 비교적 해외 교류가 늦었기에 좀 더 토착적인 문화가 오래 발전하였다.
다른 두 국가보다 화려했으며 금세공이 발달하였다. 김춘추의 복식 개혁으로 당나라식 의복을 대거 수입하였고, 귀족들 사이에서 당나라풍이 유행해 당나라식 한푸처럼 저고리를 치마 안쪽으로 집어넣어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기다란 숄같은 표를 두르는 복식을 입기도 했다.[5] 동시에 기존 형태의 한복도 여전히 공존했으며 반비나 배자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한국이 남북국시대이자 중국이 당나라이던 시기는 한중일이 모두 비슷한 형태의 의복 문화를 보인다. 그런데도 동시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보다 확연하게 북방계 의복 문화의 특징이 꾸준히 나타난다.
- 신라 귀족 여성의 한복. 숄이나 목도리에 해당하는 표를 둘렀는데 보온성 보다는 장식성이 강하다.
3.4. 발해
네이버 블로거가 그린 발해 복식고구려의 복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하며, 별개로 당나라의 복식도 수입하였기 때문에 당나라와 유사점을 띄는 복식도 별도로 존재했다.
4. 고려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고려의 한복고려는 새롭게 송나라 복식을 수입하였으며 기존 한복과 같이 공존하는 형태로 입었다. 또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평상복으로 백저포(白紵袍)를 애용하기도 했다. 백저포는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흰색 모시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더불어 고려 여인들은 노란 치마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원나라와 접한 뒤로는 몽골 복식이 일부 들어왔으며 이 때부터 저고리가 짧아지고 고름이 생겼다. 옷고름 문서 참고.
여담으로 고려는 원나라와 협상하며 '문화와 풍속을 간섭받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냈기 때문에 몽골풍 양식들은 고려에서 필요로 인해 직접 수입한 것이거나 또는 교류로 자연스럽게 전해진 것이 대부분이다.
출처
- 고려시대의 여성용 한복. 고대의 한복과 기본 형태는 비슷하다. 고려 여성들은 노란색 치마를 즐겨 입었으며 치마가 길고 풍성할수록 좋게 여겼다고 한다. 중국식 유행을 따랐을 경우 치마는 저고리 위에다 입으며(#)[6] 가장 위에는 포를 둘렀다.(#) 허리에는 금방울이나 향낭(향주머니)을 차 장식하기도 하였다. 머리에는 몽수라는 일종의 베일을 썼는데(#) 이 역시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가장 큰 변화인 저고리 길이가 점차 짧아짐에 따라 허리띠 대신 옷고름의 원형이 되는 여밈끈을 달기도 했다.
고려 복식은 불화 덕분에 이전 시대에 비해 복식 재현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다.
남북국시대부터 기존의 전통적인 한복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일상적으로 입으며 고려의 왕도 일상에선 평민들과 같은 저고리와 바지 차림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의 포가 변형되었다는 백저포를 신분과 성별을 막론하고 즐겨 입었으며, 중국에서 들여온 복식은 별개의 관복 위주로 쓰였고, 고려의 관복은 시기별로 중국에서 들여온 장복, 적의와 몽골 복식으로 나눈다.
고려도경에서는 상류층 부녀자들의 의복이 서민과 다를 바 없으며, 어떤 사람에게서는 '왕이 올 때에야 비로소 왕족들이 비단 옷을 입는다'고 들었다는 내용을 언급한다. 출처
5. 조선
5.1. 조선 전기
-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전후 때까지 약 200년 간 입었던 치마저고리로, 저고리가 무척 크고 길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부터 기존의 크고 긴 저고리를 조금씩 줄여입기 시작하는 동시에[7] 이 때부터 노리개를 특히 애용하기 시작한다.
5.2. 조선 후기
병자호란 이후의 복식으로, 심익창의 첫번째 부인인 성산 이씨(1651~1672)의 묘에서 출토된 의복과 여러 장신구를 착용한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진 그림이다.
아래쪽의 모습.
- 계월향 초상에서 묘사되는 18세기의 저고리. 계월향 본인은 임진왜란 시기인 조선 초기의 인물이지만 초상화는 먼 훗날에 들어서야 그려졌다. 이 때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저고리의 길이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가슴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슴가리개를 하게 된다.
- 전체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18세기 양식 도포
- 소창의
16세기 후에는 남자 바지의 형태가 지금의 사폭바지로 달라졌다. 이전에는 여자 속바지와 같은 형태였다. 위의 조선 이전 한복들을 봐도 사폭바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근현대 및 현재
- 근현대의 여성용 한복. 정확히는 예식용 한복의 형태로, 개화기에 입었던 일상용 한복은 흰 저고리 검은 치마의 경우처럼 서구식 스커트의 영향을 받아 치맛폭도 비교적 짧고 작은 형태였다. 아무튼 한복은 구한말에 이르러 오늘날 한복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근접하게 되었고 옷고름이 부각된 동시에 양복이 들어오며 붕어배래가 유입된다. 70년대로 들어서는 옷깃과 동정의 폭이 좁아져 v자 형태를 이루게 되어 2000년대 초까지 유지된다.
- 2000년대 후반 이후 옷깃의 폭이 넓어지고 직배래와 목판깃, 당코깃과 같은 전통적인 디자인이 복고하여 유행하는 동시에 이를 기존의 근현대식 저고리로도 적용시키는 등 여러 디자인 변화가 일어났다.
- 2020년대에는 전통적인 한복 요소와 더불어 다양하고 선명한 컬러, 혹은 모던한 톤을 사용하며 불필요한 장식이나 자수를 줄이고,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으로 스타일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7. 제주도
일제강점기 당시 한 제주도민의 사진 |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
제주도(탐라국) 지역은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지형적 특색으로 인해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적이고 원시적인 복식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서해에 있는 큰 섬에 주호국(제주의 옛 명칭)이 있는데,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은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으며 소와 돼지를 기르며 배를 타고 한(韓)과 교역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제주 전통 모피·피혁류 복식 연구라는 논문에서는 '제주 중간 산간지역에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1900년대 출생 제주도민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상당히 최근까지도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이전 등의 기록을 통해 남방계의 영향이 짙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한반도에서 북방계 복식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일본 복식과도 유사성이 있으며, 일각에서는 호복, 한푸의 영향을 받기 이전 한국의 원시 복식의 형태를 제주도 복식을 통해 추론하기도 한다.
제주도의 전통 의상 중 하나로 갈옷이 있다. 갈옷은 제주 서민층들이 자주 입었던 노동복이자 일상복으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에서 갈옷은 자주 보이는 의상이었으나 60년대부터 화학 섬유로 만든 옷이 대중화 되면서 점차 그 자취를 감췄다. 유물이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감물 염색과 갈옷에 대한 조선시대 후기 문헌 기록 등을 통해 최소 3세기 이상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90년대부터 제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늘어나게 되었고, 현대화 된 갈옷이나 감물 들이기 등이 유행하면서 갈옷은 제주의 대표적인 상징물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 초기 한푸는 남자도 치마를 입었다.[2] 초기부터 후기까지 한복은 여자도 바지를 입었다.[3] 벽화를 보면 통이 넓지 않은 바지 차림도 있다.[4] 백분을 바르고 붉게 화장한다는 뜻으로, 검은 눈썹 화장인 미대(眉黛)(눈썹 화장을 중시해서 십미도(十眉圖)도 있었다.), 이마 가운데에 그림 그리는 화전(花鈿),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부분을 황색으로 염색하는 액황(額黃), 볼을 붉게 칠하는 홍장(紅粧), 보조개가 있는 것처럼 그리는 면엽(面靨), 볼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그리는 사홍(斜紅), 이마, 콧등, 턱을 하얗게 칠하는 삼백(三白) 등이 있었다. 사진 사진2 사진3 중국 시대별 입술 중국 시대별 눈썹 당나라 시대별 눈썹1 당나라 시대별 눈썹2(앞과 이어짐) 당나라 눈썹 화전 화장 순서 홍장 재현[5] 일본에서도 동시기 당나라 한푸와 같은 복식을 보인다.[6] 고려는 왕족의 복식이 고려풍과 몽골풍으로 따로 나뉘어 있었다. 다른 귀족들도 비슷하게 이전 시대들과 마찬가지로 이분적 복식제를 유지하여 크게 자국식과 중국식으로 나누어 분류했다.[7] 어느정도 줄어드냐면 병자호란 이후 골반 근처까지 올라갔던 저고리가 그 이후에는 허리 길이까지 올라가고, 영조, 정조 대에 이르러서 가슴 부근만 가리는 정도로 짧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