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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7:30:16

한일병합조약

한일 병합 조약에서 넘어옴

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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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1894년 7월 23일 갑오사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1902년 1월 30일 1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경운궁 점령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1904년 5월 31일 대한시설강령 발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1905년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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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술국치 - 한일합병조약 전권위임장.jpg
한일병합조약 전권위임장[1]

1. 원문2. 번역문3. 적법성 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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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

朕樞密顧問ノ諮詢ヲ經タル韓國倂合ニ關スル條約ヲ裁可シ茲ニ之ヲ公布セシム
御名御璽

明治四十三年八月二十九日

內閣總理大臣 侯爵 桂 太郞

外 務 大 臣 伯爵 小村 壽太郞

條約第四號

日本國皇帝陛下及韓國皇帝陛下ハ兩國間ノ特殊ニシテ親密ナル關係ヲ顧ヒ相互ノ幸福ヲ增進シ東洋ノ平和ヲ永久ニ確保セムコトヲ欲シ此ノ目的ヲ達セムカ爲ニハ韓國ヲ日本帝國ニ倂合スルニ如カサルコトヲ確信シ茲ニ兩國間ニ倂合條約ヲ締結スルコトニ決シ之カ爲日本國皇帝陛下ハ統監子爵寺內正毅ヲ韓國皇帝陛下ハ內閣總理大臣李完用ヲ各其ノ全權委員ニ任命セリ因テ右全權委員ハ會同協議ノ上左ノ諸條ヲ協定セリ

第一條

韓國皇帝陛下ハ韓國全部ニ關スル一切ノ統治權ヲ完全且永久ニ日本國皇帝陛下ニ讓與ス

第二條

日本國皇帝陛下ハ前條ニ揭ケタル讓與ヲ受諾シ且全然韓國ヲ日本帝國ニ倂合スルコトヲ承諾ス

第三條

日本國皇帝陛下ハ韓國皇帝陛下、太皇帝陛下、皇太子殿下竝其ノ后妃及後裔ヲシテ各其ノ地位ニ應シ相當ナル尊稱、威嚴及名譽ヲ享有セシメ且之ヲ保持スルニ十分ナル歲費ヲ供給スヘキコトヲ約ス

第四條

日本國皇帝陛下ハ前條以外ノ韓國皇族及其ノ後裔ニ對シ各相當ノ名譽及待遇ヲ享有セシメ且之ヲ維持スルニ必要ナル資金ヲ供與スルコトヲ約ス

第五條

日本國皇帝陛下ハ勳功アル韓人ニシテ特ニ表彰ヲ爲スヲ適當ナリト認メタル者ニ對シ榮爵ヲ授ケ且恩金ヲ與フヘシ

第六條

日本國政府ハ前記倂合ノ結果トシテ全然韓國ノ施政ヲ擔任シ同地ニ施行スル法規ヲ遵守スル韓人ノ身體及財產ニ對シ十分ナル保護ヲ與ヘ且其ノ福利ノ增進ヲ圖ルヘシ

第七條

日本國政府ハ誠意忠實ニ新制度ヲ尊重スル韓人ニシテ相當ノ資格アル者ヲ事情ノ許ス限リ韓國ニ於ケル帝國官吏ニ登用スヘシ

第八條

本條約ハ日本國皇帝陛下及韓國皇帝陛下ノ裁可ヲ經タルモノニシテ公布ノ日ヨリ之ヲ施行ス

右證據トシテ兩全權委員ハ本條約ニ記名調印スルモノナリ

明治四十三年八月二十二日

2. 번역문

짐은 추밀고문의 자문에 따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재가하여 이에 공포한다.

어명어새[2]

메이지 43년 8월 29일

내각총리대신 후작 가쓰라 타로
외무대신 백작 코무라 쥬타로

조약 제 4호

일본국 황제 폐하(皇帝陛下)한국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만 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일본국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각각 그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 위원은 회동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를 증거로 삼아 양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調印)한다.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메이지(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3. 적법성 유무[3]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한일병합의 법적 지위에 대해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already null and void)을 확인한다.'고 합의하였다.

2001년 한일합방의 국제법적 적법성을 논의하는 주제로 한국국제교류재단에 의해 마련된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학술회담이 있었다. 2001년 1월과 4월, 그리고 11월에 열린 서양의 학자들과 국제법전문가들이 동참한 그 회담에서 더비 대학교의 교수, 앤서니 카르티(Anthony Carty) 교수는 "제국주의가 극에 달하던 시절, 특정 조약의 합법/비합법적 유무를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였다. 국제법에 관련한 그의 저서 'Asian Yearbook of international Law'에서 카르티 교수는 한국 측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조약과 관련 법적 근거들을 보기보다는 서양 열강들에 지배되었던 그 시기 다른 나라의 상황을 고려한 관점에서 한일관계를 보았다.#

코네티컷 대학교의 교수 알렉시스 더든(Alexis Dudden)은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4]의 식민정책관련 논점을 정리하였다. 더든 교수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학:담론와 권력(Japan's Colonization of Korea:Discourse and Power)'의 저자이며 그 저서에서 더든교수는 어떻게 일본의 정치가들이 합법적으로 한국을 합병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국제법을 연구하고 이것을 적용하였는지를 검토하였다.#

기무라 칸(木村 幹) 교수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식민통치 적법성에 대한 한국인들의 병합이 불법이었다는 주장은 제임스 크로포드(James Crawford)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크로포드 교수의 주장 요지는 문명국과 문명국에게 국제법이 통하지, 문명국의 관점에서 비문명국에게 국제법상의 절차는 꼭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5][6] 반면, 같은 회의에 있던 하와이 대학교 국제법 학자 반 다이크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병합과 하와이와 미국의 병합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책을 제안했다. 그는 두 병합을 비교 분석해 두 병합이 모두 강압에 의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특히 한국의 병합과정에서 자행된 만행은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강조하며, “중요한 것은 하와이 병합이나 한국 병합은 모두 강자가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했고 그래서 잘못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한일병합 학술회의결산]한일병합 부당성 국제학계 공감

외국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조약 자체의 부당성[7]보다는 그 이후에 해당 지배국의 법이 실효성을 띠었느냐가[8] 중요하다고 보며 이에 대한 부분은 이 문서에서도 후술되어 있으나, 한국 학자들 및 일본 일부 학자들이 여기서 지적하는 건 강제로 인한 조약의 부당성보다는 그 당시 국제법적 논리로도 이 조약이 불법이었음이며, 이는 실효성이나 강제로 인한 부당과는 전혀 별개 문제다. 그 당시 국제법으로도 강제로 인한 부당성은 불법성을 구성하는 주요 원리 중 하나였다.법학자들 "한일강제병합, 국제법상 원천무효"

2009년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일본의 한국병합 효력에 대한 국제법적 재조명' 국제학술회의에서 에드워드 슐츠 하와이 대학교 태평양아시아연구학부장은 "일본은 한국이 반대했는데도 강제로 병합한 만큼 불법적"이라면서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독도 영유권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한-일 병합도 美-하와이 병합처럼 불법적"

2010년 7월 28일 한일 양국의 1000명의 지식인들은 한일병합조약이 원천 무효임을 합의하고 서울과 도쿄에서 공동선언했다. 주요 참가자로는 백낙청·이태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강만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장관, 김창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학 명예교수, 나마무라 마사노리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 등이다.한·일 지식인 “한일병합 무효” #

한일병합조약의 비준에 앞서 양국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자들이 과연 전권을 적법하게 위임받았는지가 관건인데, 일본 측은 일본 천황의 비준을 사전에 받아 전권을 적법하게 위임받은 반면 대한제국 측 전권을 위임받은 이완용은 사전에 그러한 권한을 고종 태상황 혹은 순종 황제에게서 받은 것이다.

이 외에 일본 측은 국가와 국가간 맺는 모든 조약이 꼭 국가원수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며 그건 그 시대 국제법적 관행으로도 유효하다고 주장하지만, 그 당시 국제법적 이론으로도 국가의 기본적 권한 자체를 제한하거나 아예 박탈하는 수준의 대단히 중요한 조약에는 국가원수의 비준을 꼭 필요로 한다. 당대 일본에선 그러한 수준의 대단히 중요한 조약도 비준 없이 전권 위임 받은 자가 체결하는 것도 합법이었지만 대한제국에서는 아니였다.

이완용이 위임받았던 전권이 유효했다고 하더라도 비준이 제대로 되었는지가 문제다. 여기에는 황제의 옥새가 제대로 찍힌 게 아니라 고종이 평소 일상행정을 위해 아무렇게나 파놓았던 행정용 도장 중 하나가 찍혀 있을 뿐이다. 당연히 일본측이 그냥 자의적으로 찍은 것이다. 또 다시 백 번 양보해서 이완용의 전권 위임도 비준도 모두 유효했다고 한들, 그 시대 국제법적 논리로도 국가대표나 국가에 대해 무력으로 위협해서 얻어낸 비준은 무효이므로 어떻게 해석해도 한일병합조약은 그 당대부터 지금까지 원천무효가 맞다. 전권이 제대로 위임되지 않았거나, 옥새가 제대로 찍혀 있지 않거나, 비준 과정에 위협이 있었거나 이 세 가지 항목 중 하나라도 걸리면 그 당시 국제법으로도 위법하다. 이완용이나 이재면이 찍었다고 자동으로 한국 정부가 동의했다는 게 되진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대한제국일본 제국에 대항해 전쟁같은 적대적인 군사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가 무력을 동원해서 협박하지 않았다고 하나 일제가 그 당시 대한제국의 모든 군사력을 해체하고 대규모 부대를 서울 및 주요 요지에 주둔시켜 놓았고, 의병들을 한반도에서 탄압하였다. 또한 전권이 제대로 위임되지 않았거나, 옥새가 제대로 찍혀 있지 않거나, 비준 과정에 위협이 있었거나 이 세 가지 항목 중 하나라도 걸리면 그 당시 국제법으로도 위법이라는 건 '일각의 주장'이 아니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정리한 그 당시 국제법 이론에 의거한 사항이다. 이러한 국제법 이론은 조약이 성립된 1910년과 그 이후에 해당 주장에 부합하는 조약의 불법성을 정의하는 국제조약이 있어야만 정해지는 게 아니다.

한일병합조약의 당대 국제법적으로도 불법인 이론적, 형식적 미비는 조약이 성립된 1910년과 그 이후 국제법상에서 해당 주장에 부합하는 조약의 불법성을 정의하는 조약은 없는 사실 및, 1969년 체결되고 소급적용이 되지않는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소급적용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와 같은 사항은 한일병합조약이 해당 조약의 이론적 불법성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았던 것, 그리고 당시 국제 현실에선 이런 위법부당한 행태는 이론적으로만 안 되는 것이었을 뿐 실제로는 별로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는 것과 연관이 있을 뿐이다. 학술적 법적 측면에선 원천무효가 맞지만, 실제 냉엄한 약육강식의 그 당시의 국제적 현실속에서는 국가간 정치논리에 따라 암묵적으로 기능했던 건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9] 결정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한일병합조약이 부당하긴 했어도 위법하진 않았다는 걸 전제로 하여 체결된 정황이 역력하며, 가장 반일 감정이 강했던 이승만 정권도 한일병합조약이 그 시작부터 원천 무효라곤 주장하지 않았고 박정희 정권도 그러한 입장을 계승하였다.

일단 미군정의 법률고문이었던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 1898~1975)은 미군정이 한반도를 점령한 것과 미군정이 유일한 적법 정부임을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우며 정당화 하였다.
1. 조선의 해방이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의 파기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았음.
2. 조선의 해방이 조선인들에 의한 혁명적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음.
3. 조선의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와 연합국의 결의에 따른 것이므로 현재 한반도는 어떠한 세력도 영향력이 없는 무주지(無主地)임.

연합국제2차 세계 대전 승리 이후 한반도를 지배한 미군정미국은 1910년 미국이 지지한 한일병합조약을 부정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해 입국전 해산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측과 주로 다투었던 부분은 한일병합조약의 위법성이 아니라 그것의 정당성 여부였다. 당시 일본 정부의 생각은 한일병합조약이 이른바 합법정당했다는 것이었다. 즉 한일병합조약이 대한제국 측의 요청에 따른, 대한제국에 크나큰 이익을 준 정당한 조약이었다는 것인데, 요즘도 일본의 적지 않은 정치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적어도 무라야마 담화 이후 공식석상에서 그 조약의 정당성까진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1965년 체결된 한일조약에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이미 무효'라는 문구가 한일 양측에 해석의 여지를 달리 하게 하기 위한 교묘한 정치적 의도로 들어간 건 맞고, 박정희 정권도 한일병합조약의 이런 이론적인 정밀한 기초에 대해선 미처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한일병합조약이 원천무효적 성격이 짙은 사기극이었음 정도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2001년도 시점에서도 정밀한 반론이 어려웠는데, 그보다 30년도 더 전인 당시 열악한 현실에서 학문적 역량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회경제군사적 지표에서도 월등히 입장이 강했던 일본에 밀릴 게 자명하였다.

오늘날 일본 정부의 이 조약에 대한 입장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합법부당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이 조약의 불법부당성에 대한 한국측의 지적은 계속되고 있다.

한편, 국내법적으로는 대한민국 제헌헌법이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상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 명시하였고, 현행 제10호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 명시하고 있어, 일본의 한반도 통치 그 자체에 불법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10] 또한, 대한민국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한일 병합이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확인하면서,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였다.#

[1] 사진 속 순종의 서명은 진짜가 아니라 위조된 것이다.[2] 일본국 황제의 서명과 날인[3] 이 문단은 경술국치 문서의 r673 버전에 있는 내용이다.[4] 5000엔 구권에 실려있는 사람으로 농학, 철학자, 존스 홉킨스 대학교출신.[5] そもそも当時の国際社会においては、国際法は文明国相互の間にのみ適用されるものであり、この国際法を適用するまでの文明の成熟度を有さない国家に適用されるものではない。言い換えるなら、文明国と非文明国の関係は、文明国相互においてと同様に国際法によって規定されるようなものではなく、それ故、前者においては、後者において必要とされるような手続きは必ずしも必要とされる訳ではない。極論するなら、通常、そのような文明国と非文明国との関係の一類型として登場する、植民地化する国と植民地化される国の関係においては、その最終段階 - 即ち、植民地化 - そのものにおいて必ずそれが「条約」の形式を必要とする、とさえ言うことができない。当時において寧ろ重要であったのは、このような特定の文明国と非文明国との関係が、他の文明国によってどのように受け止められていたかの方であり、単純化していうなら、植民地化において「法」が存在していたのは、正にそこにおいてのみ、であった。そのような意味において、日本による韓国併合は、それが英米をはじめとする列強に認められている以上、仮令、どのような大きな手続き的瑕疵があり、また、それが非文明国の主権者の意志にどれほど反していたとしても、当時の国際法慣行からするならば、「無効」と言うことはできない[6] 해석: 원래 당대(1940년대 이전)의 국제사회에서 국제법은 문명국과 문명국의 관계에서만 유효했으며, 문명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 후진국들에게는 국제법이 성립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문명국과 비문명국(문명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 후진국)의 관계는 문명국과 문명국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제법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문명국의 관점에서 비문명국에게 국제법상의 절차는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극단적인 표현으로 논하자면, 보통의 경우에 문명국과 비문명국의 관계들 가운데 하나의 유형으로 등장하는, 식민지화하는 강대국과 식민지화되는 약소국의 관계에서는 마지막의 단계로서 식민지화 그 자체에 있어서 반드시 그것이 조약의 형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당대의 중요한 요소는 이런 특정 문명국과 특정 비문명국의 관계가 다른 문명국의 관점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는가였고,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식민지화 과정에서 법제가 존재한 것은 바로 거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합병한 것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이 한일합방조약을 인정하는 마당에 절차적 측면에서 매우 큰 하자가 존재한들 비문명국 정부의 의지에 정반대로 결정했어도 당대의 국제법의 관행에서 본다면 무효라고 판정할 수는 없다.[7] 에초에 조약은 약소국보다 강대국에게 유리하게 적용될수밖에 없다.[8] 서구 열강국들의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식민지 지배 및 법 발효 등과 국제적인 지위.[9] 비슷한 사례로는 1940년 소련발트 3국 점령을 꼽을 수 있다.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소련의 발트 3국 합병이 강압적이고 위법적이었다는 이유로 1991년 8월 소련이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순간까지도 소련의 발트 3국 합병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서방 국가들도 발트 3국을 소련의 영토로 간주하고 지도상으로도 이 지역을 소련의 영토로 표기했다.[10]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68620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