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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20:27:44

1983년 시카고시장 선거

1983년 시카고시장 선거
1983 Chicago mayoral election
파일:Chicago_Mayoral_election_of_1983.png
지역별 선거 결과
{{{#!wiki style="margin: -7px -12px" 1979년 4월 3일
1979년 선거
1983년 4월 12일
1983년 선거
1987년 4월 7일
1987년 선거
}}} ||
투표율 82.07%
선거 결과
후보


해럴드 워싱턴



버나드 엡튼
득표율
51.72% 47.99%
득표수 668,176 619,926
당선인
파일:해럴드 워싱턴.jpg
민주당
해럴드 워싱턴
1. 개요2. 양당의 경선3. 선거 과정4. 결과5. 평가6. 여담

[clearfix]

1. 개요

1983년 치러진 시카고시의 시장 선거.

2. 양당의 경선

2.1. 민주당

파일:시카고83토론.jpg
1983년 시카고시장 민주당 예비선거 토론회
현직 시장 제인 번은 몇몇 업적을 남겼지만 실정과 부패 정치인들과의 유착, 인종차별 논란[1] 때문에 4년 전 선거에서의 압승이 무색하게 저조한 지지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한 자는 현직 쿡 카운티[2] 검사장이자 前 시카고시장 리처드 J. 데일리의 아들 리처드 M. 데일리였다. 그는 아버지 시대의 향수에 기대 높은 지지율을 얻어 초기 여론조사에서 번 시장에 앞섰다. 월터 먼데일 前 부통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3세같은 유명한 전국 정치인과 지역 양대 언론인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 시카고 선-타임즈(Chicago Sun-Times)의 지지를 받아 선거의 프론트러너로 올라섰다. 하지만 데일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머신이었다. 시의원 50인 중 33인이 번 시장을 공개 지지했고, 그 중에는 번이 79년 시장 선거에서 공격한 에드 브르돌랴크(Ed Vrdolyak)도 있었다. 게다가 민주당 진보파의 대부인 테드 케네디도 번 시장을 지지했다.

한편 두 경쟁자들 사이 소수인종 표심은 자신들을 배신했던 번과 유색인종에게 불친절했던 아버지를 둔 데일리 중 차악이 누구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백인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도중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현직 초선 연방하원의원인 해럴드 워싱턴이었다. 그는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 주 상원의원을 총 16년이나 역임한 잔뼈 굵은 인물로 연방하원에서도 투표권법 연장을 위해 열성적으로 투쟁했다. 워싱턴은 1977년 시장 보궐선거에서 저조한 득표율을 얻은 적이 있었기에 출마를 주저했지만 5만명 이상의 지지자들이 지지 서명을 제출하자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제시 잭슨도 그의 선거 기금 모금을 도왔고 흑인 커뮤니티에게도 풀뿌리 자금 지원을 받았다. 또한 지지층의 외연 확장을 위해 비슷한 처지였던 시내 히스패닉, 주로 오대호 연안에 거주하던 진보적 백인층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3자 토론회에서도 워싱턴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시내 정치 머신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개혁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양자 구도였던 선거가 워싱턴의 급부상으로 3자 구도로 재편되자 번과 데일리도 그를 현실적인 위협으로 인식하고 자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특히 번의 동맹이자 쿡 카운티 민주당 의장이었던 에드 브르돌랴크는 데일리에게의 투표는 워싱턴에게 투표와 똑같다고 주장하며 백인 유권자들의 지지 결집을 바랬다. 반면 데일리의 선거운동은 그의 미숙함으로 점점 무너져 지지자들이 번과 워싱턴 지지로 이탈하게 만들었다. 예비선거일 하루 전, 에드 브르돌랴크의 이번 선거는 인종의 문제라는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발언이 폭로되자 흑인, 히스패닉, 일부 리버럴 백인 표가 워싱턴으로 막판 결집했다.
파일:1983_Chicago_mayoral_election_by_ward_(D_primary).svg.png
1983년 시카고시장 민주당 예비선거 결과
치열했던 3자 경쟁에서 백인 표가 번과 데일리에게 분할되는 효과를 톡톡히 본 워싱턴이 36%의 득표를 받아 각각 34%, 30%를 득표한 번과 데일리를 제치고 예비선거에서 승리했다. 인종별 투표가 크게 양극화되었는데, 워싱턴은 흑인들에게 80%라는 몰표를 얻았지만 백인들에게는 고작 17%만 얻었다. 지역적으로도 다수 인종이 어느 쪽인지에 따라 지지 성향이 갈렸다. 워싱턴의 승리를 뒷받침한 토대에는 번과 데일리의 분열 외에도 10만명이 넘는 신규 유권자 등록이 한몫했다. 한편 2위로 낙선한 번은 기명 투표[3] 캠페인을 벌이려 했으나 브르돌랴크, 버크 등 시의원들의 경멸과 무관심으로 인해 곧 포기했다.

2.2. 공화당

파일:버나드 엡튼.jpg
버나드 엡튼
공화당은 이때나 지금이나 시카고시에서의 당세가 너무 약해서[4] 유대인이었던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 출신 버나드 엡튼(Bernard Epton)이 경선에 단독 출마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엡튼은 자유주의 공화당원으로 1950년대는 매카시즘에 반대하며 당내 예비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한 적이 있었다. 1968년 마틴 루터 킹의 사망으로 전국적으로 폭동과 소요가 번지자 추모 행진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 뒤 시카고 북부 하이드 파크를 지역구로 14년간 주 하원의원을 지내며 지역구 주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유의미한 경쟁 후보가 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3. 선거 과정

파일:너무 늦기 전에 엡튼.jpg
엡튼을 시장으로...너무 늦기 전에
선거 직후 워싱턴 진영은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다. 시카고시는 지난 시장 선거에서 번이 82%의 득표율로 당선된 민주당 초강세 지역에다 공화당의 지지율은 지리멸렬했기 때문이다.[5] 하지만 브르돌랴크를 필두로 한 백인 시의원들 다수가 자당 후보를 버리고 엡튼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활기를 얻은 엡튼의 선거운동은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RNC) 의장 폴 랙설트, 현직 일리노이 주지사 제임스 R. 톰슨(James R. Thompson)의 선거운동 관리자였던 제임스 플레처(James Fletcher)의 유세, 자금 지원을 받으며 지지율을 늘려갔다. 워싱턴의 소득세 신고서 4년 연속 미제출과 경범죄 전과도 공화당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백인 지지율의 저하로 쉬워 보이던 선거가 접전이 되어버리자 워싱턴 선거운동측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백인 민주당원 표심을 되찾기 위해 전 부통령 월터 먼데일폴란드계, 이탈리아계, 아일랜드계 중산층들이 많이 거주하는 시카고 북서부에 위치한 성 파스칼 성당(St. Pascal's Church)에서 합동 유세를 했으나 호응받지 못하고 주민들에게 둘러쌓여 인종차별적인 비난과 조롱, 야유를 들었을 뿐이었다.[6] 엡튼 선거운동측은 악명높은 엡튼을 시장으로...너무 늦기 전에(Epton For Mayor...Before It’s Too Late) 라는 슬로건으로 이것를 인종차별적 공격이라고 생각한 워싱턴을 격노하게 만들었다.[7] 그 결과로 지지자들 간의 갈등도 악화되었고[8] 워싱턴은 엡튼의 정신 건강 의혹을 물어뜯었고 또한 그를 시카고시에서 인기 없는 레이건의 부하로 프레이밍했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워싱턴은 시내 거의 유일한 중도층인 리버럴 성향 오대호 연안 백인을 포섭하기 위해 "머신" 소속 시의원들을 비난하면서 유세에 총력했다.

4. 결과

<rowcolor=#000> 1983년 시카고시장 선거
후보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파일:민주당(미국) 엠블럼.svg 해럴드 워싱턴
(Harold Washington)
668,176 1위


51.72% 당선
파일:공화당(미국) 엠블럼.svg 버나드 엡튼
(Bernard Epton)
619,926 2위


47.99% 낙선
에드 워런
(Ed Warren)
3,756 3위


[[무소속(정치)|
무소속
]]
0.29% 낙선
총 투표수 1,291,858


유지
선거 당일 투표율은 80%를 돌파했고 투표 종료 30분 전까지 워싱턴은 유세를 이어갔다. 개표 초반부터 워싱턴이 앞서갔으나 엡튼과 크게 표차를 벌리지 못해 밤 늦게까지 당선 확정이 발표되지 않았다. 치열한 선거전의 결과는 최종적으로 워싱턴의 3%p차의 근소한 승리였다. 선거 직후 결과와 무관하게 시민 통합을 위해 워싱턴과 만나기로 한 약속과 달리 엡튼은 패배가 발표되자 플로리다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4년 뒤 시장 선거에 재도전했지만 당내 후보 지명에도 실패했고 그해 사망했다.

접전이었던 선거 결과와 달리 선거구별 결과에서는 몰표 현상이 두드러졌다. 흑인 다수 거주 지역이던 6구에서는 워싱턴이 무려 99.2%를 득표했고 반대로 백인 다수 거주지역이던 13구에서는 엡튼이 95.7%나 득표했다. 총 득표수와 달리 승리한 지구 수는 엡튼이 28개로 워싱턴의 22개를 앞섰다. 사회주의 성향의 제3후보인 에드 워런은 0.3%의 부진한 득표율을 얻었다.

워싱턴의 승리와는 달리 시장 선거와 동시에 치루어진 시의회 선거에서는 반 워싱턴 시의원이 29명,[9] 친 워싱턴 시의원이 21명[10]이 당선되어 사실상의 여소야대를 이루었다. 브르돌랴크 29라고 불리던 "야당" 시의원들은 1986년까지 워싱턴의 시정을 사사건건 발목잡는 "의회 전쟁"을 벌여 시카고의 별명을 "호수 옆 베이루트"로 만들었다.[11] 브르돌랴크 29이 구성원들의 낙선 및 전향으로 해체된 뒤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에드 브르돌랴크는 1987년 시카고시장 선거에 지역정당인 일리노이 연대당[12] 소속으로 출마했지만 현직 시장인 워싱턴에게 밀려 낙선했고 이후 공화당에 입당했다.

5. 평가

파일:It's Washington.jpg
It's Washington
워싱턴은 추잡했던 선거 과정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유색인종 시카고시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시카고의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 실질적으로 시내 머신 정치에 의존하지 않은 첫 시장이기도 했다.[13] 시의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시정은 고평가를 받았고, 4년 뒤에는 백인, 흑인 지지율을 모두 높이며 경선에서 재도전한 제인 번 시장, 본선에서는 브로들랴크를 넉넉한 차이로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비록 워싱턴은 재선 임기 중 심근경색으로 급사했고 시카고 시장직은 보궐선거에서 리처드 M. 데일리가 차지했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시카고시 지역정당인 해럴드 워싱턴 당을 만들어 활동했다.이후 시카고가 속한 일리노이에서도 1992년 주에서 처음으로 흑인 상원의원이 선출되었다.

버락 오바마가 정치계에 진출한 계기도 바로 이 선거였다.[14] 워싱턴 지지자로 정계에 입문한 오바마는 캐롤 모즐리 브라운의 당선을 도왔고,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2004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임기 중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유력한 당내 경쟁자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본선에서도 존 매케인에게 승리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6. 여담


[1] 소수인종의 대표성이 줄게 선거구를 게리멘더링, 흑인 인사 축출[2] 시카고가 위치한 일리노이주카운티[3] 투표지에 없는 인물의 이름을 적어서 제출하는 방식의 투표로 미국 일부 주에서는 효력이 인정된다. 스트롬 서먼드리사 머코스키가 이 방식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된 적이 있다.[4] 전국적으로 공화당이 압승한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쿡 카운티에서는 닉슨 53.4% vs 맥거번 46.0%로 격차가 크지 않았다. 이마저도 쿡 카운티 내 교외 지역 때문이었지 시카고시만 따지면 맥거번이 승리했다.[5] 1년 뒤 민주당이 대패한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시카고에서는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이 65%를 득표했다.[6] 먼데일 또한 검둥이 애호가(Nigger Lover)라는 욕설을 들었다. 이 에피소드 또한 워싱턴 측의 선거 광고로 이용되었다.[7] 물론 엡튼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파산 위기에 처해 있어서 그러한 슬로건을 사용했다고 말했다.#[8] 엡튼 지지자들은 하얀 단추와 깨진 수박이 그려진 뱃지를 상징으로 삼았다.[9] 백인 28명, 히스패닉 1명[10] 흑인 16명,백인 5명[11] 당시 레바논내전이 한창이었다.[12] 애들레이 E. 스티븐슨 3세가 1986년 주지사 선거에서 이 정당 소속으로 출마했었다.[13] 제인 번도 반 머신 정치를 외치며 당선되었고 자신이 시내 머신 정치를 이겨냈다고 발언하기도 했으나 그녀는 근본적으로 리처드 J. 데일리 시장의 계파 소속이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머신에 의존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14] 실제로 해럴드 워싱턴 상을 의회 블랙 코커스로부터 수상받기도 했다.[15] Paul Vallas, 미국의 교육인이자 정치인으로 2014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일리노이 부지사 후보로 출마하였다가 낙선했다.[16] 폴 발라스도 공화당원이 아닌 중도 성향 민주당원이었다.[17] 1931년 안톤 서맥 당선 이래 지금까지 시카고 시장직은 민주당이 독식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