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97년 외환 위기의 원인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다.원인을 정리하자면 아시아 금융위기의 공통점은 경상수지, 재정수지, 무역수지 적자가 만연했다는 것과 국내외 부채를 감축하지 않았다는 것, 부정부패·갑질 만연·정경유착·관치금융·안일한 정치 및 정책, 기업들의 독자적 기술 개발(R&D)을 안 했다는 것이다.
2. 상세
2.1. 정권 홍보 차원의 다량 외화 방출
문민정부는 1995년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였고 1996년에는 이른바 선진국 모임이라고 생각되던 OECD 가입에 성공했다. 이를 정권 차원의 치적으로 여긴 문민정부는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원화가치 고평가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1] 때문에 문민정부는 환율시장에 개입하여 수시로 다량의 외화를 시중에 방출하였다. 1997년 10월 말에 외환보유고는 305억 달러였으나 12월 말에는 204억 달러로 무려 약 1백억 달러가 줄어들었는데 원화 고평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방대한 외환보유고를 시중에 푼 것이다. 당시 외국인 투자는 일본이 가장 많이 하였는데 외환위기의 징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은행들은 채권을 회수하여 달러로 바꿔가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에 덩달아 다른 나라들도 채권회수에 열을 올려 달러 부족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를 이룩한 자신의 문민정부가 최소한 군사독재 시절보다 경제적으로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체제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내실 없는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에만 골몰했다.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 본인이 실무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위기의 순간에는 경제수석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어야 함에도 오히려 김영삼은 민간경제 악화로 정권에 대한 비난이 불거지면 곧바로 경제수석을 경질하는 행위를 수차례 반복했다.[2] 수많은 경제인들이 한국의 금융시장이 심상치 않다는 무수한 경고를 주었음에도 그는 이것을 '구시대 군사정권 적폐 잔당들의 정치적 공세'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이것의 원인은 김영삼 대통령 본인의 경제에 대한 지식 결여에 있었다.
2.2. 대기업의 차입 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화
재야 현대사학자 임영태는 1998년 저서 <대한민국 50년사>를 통해 외환위기 주범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그로 인한 금융기관의 부실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서민들의 무분별한 소비 탓이 절대 아니며 서민들이 소비를 많이 하면 그만큼 경제가 살아나면 살아났지 무너질 이유가 없다. 이른바 '과소비'를 많이 지적하는데 빚을 지지 않는 일반적인 과소비는 경기 침체로 인한 버블 붕괴로 이어지지 이런 식의 국가 단위의 빚잔치로 가지 않는다. GDP 대비 가계 부채는 오히려 외환위기 이후인 2000년대 중반부터 급증했다. 대기업이 얼마나 빚에 의존해서 경영을 했는지는 30대 재벌 기업의 평균부채 비율이 자기자본의 5배를 넘었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1998년 4월 1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총 자산을 기준으로 삼아 30대 기업집단을 새로 지정해 발표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이들 신규 30개 기업집단의 1997년 말 총 자산은 435조 3천억 원으로 1년 동안 24.96% 증가하였다. 이는 환차손에 따른 부채 증가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자기자본은 오히려 1조 8천억 원이 줄었다.이에 따라 30대 재벌 계열사 중 금융/보험사를 뺀 804개의 부채 총액은 1996년 말 269조 9천억 원에서 1997년 말에는 357조 4천억 원으로 급증하였다. 평균 부채비율이 386.5%에서 518.9%로 치솟았던 것이다. 반면 총 자산에서 자기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20.6%에서 16.2로 급하락하였다. 이 중 한라(-5천 7백억 원)와 진로(-5천 3백 60억 원)는 자기 자본이 마이너스 상태였고 뉴코아(1,793%), 해태(1,507%), 아남(1,275%) 등은 부채 비율이 1천%를 넘었다. 이에 비해 롯데는 부채 비율이 216.45%로 가장 낮았으며 동국제강, 동부, 동아, 삼성, 쌍용, 한솔, 강원산업 등이 300%대를 나타내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300%의 부채비율은 결코 건실한 것이 아니다. 부즈앨런&해밀턴의 <한국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개혁을 이룬 국가에서 우량기업은 대부분 부채 비율이 100% 이하라고 한다. 외환위기 뒤 들어선 국민의 정부조차 재벌 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출 것을 요구했는데 최소한 200% 이하로 낮춰야 무한 경쟁의 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단 얘기다. 임영태는 위 저서에서 부즈앨런&해밀턴의 기준을 바탕으로 당시 한국 대기업을 '허풍선'이라고 평했다.
기업들이 허풍선에 불과했다는 것은 기업의 손익계산을 따져 보면 알 수 있다. 단적으로 1998년 3월 20일 증권거래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2월 결산법인 510개사는 평균적으로 1997년에 1천원어치를 팔아 10원을 손해 보는 헛장사를 했다. 이들 기업의 전체 매출은 1996년에 비해 19.5% 늘어난 441조 2,743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순이익은 1996년 3조 8천여억 원 흑자에서 4조 5천 5백 43억 원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이 중 26개 은행의 적자 규모가 3조 8천여억 원에 달해 전체 적자의 84%나 차지하였다. 기업의 차입 경영과 연속되는 부도에 따른 은행 경영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실제로 1997년 말 조흥, 한일, 제일, 상업, 서울, 외환, 신한, 국민은행 등 8개 시중은행의 무수익 여신[3]은 35조 7천 7백억 원으로 은행 총 여신 2백 52조 5천 8백억 원의 14.2%를 차지하였다. 그만큼 부실채권을 떠안고 있어 은행 대출이 위험하다는 증거이다.
한국 은행들의 부실한 경영 상태는 외국계 은행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1997년 한 해 동안 한국의 우량은행으로 손꼽히던 주택, 국민, 신한은행의 당기 순이익은 각각 1천 83억 원, 1천 44억 원, 5백 33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세 은행의 당기순이익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의 흑자를 미국계 은행인 시티은행이 냈다.
은행감독원과 금융계의 자료에 따르면 1997년 한국의 26개 은행 중 18개 은행이 무더기 적자를 낸 것과 달리 외국계 은행들은 사상 유례없는 흑자를 기록했다. 시티은행은 당기순이익이 2천 6백억 원에 육박하여 1996년에 비해 186%의 증가율을 기록했으며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당기순이익이 9백 80여억원으로 전년도 대비 307%, 체이스맨해튼 은행은 750여억원으로 46% 가까이 증가했다. 1997년 한 해 동안 기업 부도가 도미노 현상처럼 이어지고 경기와 주가가 바닥을 치는데도 외국계 은행들의 순이익이 급증한 것은 무엇보다도 달러화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영 기법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문민정부 5년 동안 국내 은행과 이들 은행의 순이익 추이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시중은행의 순이익이 1994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강한 반면 위의 외국계 은행들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유지한 것이다.
한국 은행들의 이런 경영 부실화는 기본적으로 관치금융에서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은행 등 금융권은 그 자체가 금융산업이기보다는 경제 개발을 위해 일반 기업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관치금융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WTO 체제와 같은 무한 경쟁의 국제화 시대를 맞아 한국 은행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금융산업으로서의 경쟁력과 경영 노하우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것은 곧바로 국가와 금융기관의 신인도와 연결되었고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렇듯 한국 경제의 추락은 약간 멀리서 보면 일본 노무라 증권 금융연구소 분석가 히라누마 마코토의 견해가 이를 뒷받침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1987년 6.29 선언 뒤의 자유화와 자율화 10년간 근육질의 경제 구조를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기업들이 자유화 후 국제 경쟁력을 높이지 못한 게 결정적 요인인 것이다.
또 그는 1992년 이후 재벌을 필두로 경제 전체가 단기외화 차입에 지나치게 의존한 게 중기적 요인이라고 하면서 "철강 분야의 포항제철이 한국 기업 중 세계 유일의 초일류기업일 뿐, 그 외엔 세계적 기업이 없다"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아무리 반도체나 자동차 분야가 기간산업이라고 하지만 세계적 메이커랑 거리가 멀다고 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기간산업을 재벌에 의존해 재벌들이 모든 업종에 손을 대는 이른바 '풀세트주의'로 사업을 구상하는 바람에 우량 전문화 기업을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도 주장하였다.
그는 재벌 그룹들이 기술자립을 위한 독자적 연구개발(R&D) 대신 "기술은 사오면 된다"식의 손쉬운 기술도입[4]을 통한 성장전략을 택한 것 역시 대기업 실패의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으며 더불어 재벌들의 방대한 상호지급 보증과 재벌총수에 의한 봉건적 경영이 파탄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하였다.[5]
2.3. 원화 가치 고평가와 경상수지 적자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미국의 금리인상과 이에 따른 달러인덱스의 동향은 원화 가치 하락을 예상케 했는데 당시 문민정부는 원화 가치를 방어하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화 가치를 방어한다는 말은 외환보유고를 내다 팔아 시장에서 원화 가치를 지킨다는 것이었고 외환보유고는 결국 무역수지 흑자와 외국자본의 투자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금리인상은 기본적으로 달러의 유출에 무게를 얹는 신호였다.[6]이는 투자자들로 하여금 '원화의 평가절하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회의적 예측을 하게 만들었다. 또 원화가치 고평가는 한국 기업들의 대외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수출 부진에 따라 현금흐름에 위기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의 경상수지는 1996년말 237억달러의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7] 이러한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은 외국 투자자들이 국가경제의 펀더멘털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당시 한국의 경제적 펀더멘털이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1997년 말과 같은 경제파탄에 이를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회의감이 누적된 차에 태국의 바트화 위기가 심리적 트리거로 작용하면서 투자 자금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었고 이에 한국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원화 가치 붕괴와 연쇄도산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2.4. 정부의 비상식적 외환보유고 운용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한국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돈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앨런 그린스펀(美연방준비위원회 의장)
각국의 중앙은행은 갑작스러운 대외결제의 증가에 대비하여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행은 보유외환을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지 않고 시중은행에 예치하였고 시중은행 역시 이를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운용하지 않아 한국은행이 이를 국제결제에 사용할 수 없었으며 신용공급이 중단되자 갑작스런 외환 부족에 대처할 수 없었다. 이 문서의 윗 문단에도 나오듯이 김영삼정부는 정권홍보 및 경제성장을 위해서 외환보유고를 시중에 뿌렸다.[8]- 앨런 그린스펀(美연방준비위원회 의장)
2.5. 종합금융회사들로 인한 외화자산과 부채의 만기갭(maturity gap)
당시 난립했던 비은행금융기관, 이른바 종금(종합금융회사)[9]들은 단기차관을 도입하여 장기차관의 형태로 자금을 운용하였다.[10] 1976년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6개 종금사체제가 유지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서 문민정부의 금융자유화정책에 따라 30개의 종금사가 난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자금의 조성과 운용의 만기가 불일치하는 것을 자산-부채 미스매치라고 하는데 이때 단기차입자금의 만기가 도래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만기불일치는 당시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종금사들의 경험부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장기 외화차입보다 단기 외화차입이 금리가 싸고 차입이 쉬웠기 때문에 단기 차입금의 리스크도 제대로 모르고 닥치는 대로 차입해서 다시 수익성이 높은 장기대출사업에 사용했던 것이다. 외화유동성 부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가 한국으로 다가올 때 종금사들의 자금난은 한국 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은행들의 단기차입마저 끊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종금사들은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 문을 닫았다.3. 발생원인에 대한 다른 견해들
3.1. 민간경제 책임론
투자만능론에 눈이 먼 민간, 기업이 큰 책임을 가진다는 주장. 비슷한 견해가 힘을 얻은 사례의 예로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들 수 있다.위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거대 기업들은 마구잡이로 확장을 남발하면서 문어발식 경영을 하고 다녔고 이렇게 덩치만 불리는 무모한 행보가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대로 무너졌다. 해태그룹이 그런 식으로 한방에 가 버렸고 크라운제과도 그렇게 가 버릴 뻔하다가 아득바득 재기해서 간신히 기사회생했다.
오죽하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은 대마불사, '정부가 해주겠지' 따위의 마인드를 가지고 안이하게 대처했다가 망했을 정도였다. 포스코 제외한 대한민국의 제조업 기업 대다수가 세계은행 등에서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판정을 받았다.
3.1.1. 과소비?
당시 교과서 등에선 이와 비슷하게 민간의 과소비가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으나[11] 이는 당연히 강한 비난을 받고 묻혔다.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몽땅 국민들에게 전가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데다 1990년대까지 그런 명목 아래 국민들을 통제하려 했던 프로파간다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런 프로파간다 자체는 꽤나 성공적이었는지 2010년대 중반까지도 민간의 과소비 때문에 IMF 구제 금융 사태가 일어났다는 잘못된 주장이 교과서나 교육 자료에 실린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러한 교육 자료들의 사진이 커뮤니티 등을 통해 확산되면서 크고 작은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언론에서 이를 팩트체크하고 비판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후에도 전기요금, 난방비 같이 기업의 영향력이 큰 부분에서도 국민에게 짐을 부담시키는 행보는 계속되었다.
심지어 2024년, 해외직구 급증에 따른 소비자 안전 강화 및 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옹호하는 데에도 이 논리가 등장하고 있다.
3.2. 야권 책임론
대한민국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책임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행정부 관련 인사들이 DJ와 야당의 정리해고 같은 관련 법안 보이콧 때문에 초동 대응을 놓쳤다는 불만을 여러 경로로 표출한 적[12]이 있다. 굳이 따지자면 김대중이 신한국당의 "1996년 노동법 날치기를 막지 못한 결과물"이 예전 군사정권도 금지하던 "비정규직" 합법화와 인력업체의 창궐로 대한민국 노동계의 큰 해악을 끼쳤다는 막지 못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그러나, 1996년 12월 26일 새벽 여권에서 정리해고안이 포함된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단독 표결로 날치기 통과가 가능했을 만큼 의석 다수를 점유하며 단독 표결 통과가 가능할 정도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야당 및 무소속 의원을 다수 영입하여서 여대야소 정국을 만든 여당(신한국당)이 그저 야당의 반대로 인해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애초부터, IMF 사태가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보면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것이다.[13] 1997년 9월 이인제 경기지사가 의원 6명을 이끌고 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50석으로 근소하게나마 과반을 넘었고, 이후로 민주당과의 합당으로 165석으로 의석을 늘려서 77석의 국민회의 + 43석의 자민련을 뛰어넘는 과반수 정당 지위를 유지한 게 당시 여당이었다.
1997년 6월 16일에 발표한 "중앙은행제도-금융감독체계 개편안"에 대한 금융개혁위원회 권고가 있었다. 한국은행의 은행감독권과 재정경제원의 증권/보험 감독권을 일원화한 금융감독원과 상위기구로 금융감독위원회를 총리실 산하로 출범, 금융감독 관련규정에 관한 제정/개정 권한과 금융기관 설립 인허가권은 재정경제원이 가지며, 특정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요구권/공동검사권과 금융통화위원회 의장 권한으로 통화 신용정책과 물가관리 목표 제시는 한국은행이 맡게 하는 금융개혁 법안이며 당시 대한민국의 금융제도 정비로 건전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는 목표가 담겨있었다. 대다수의 내용이 IMF가 제시한 개혁안과 동일하다.
금융개혁위원회에서는 구제금융 요청 직전까지 위기가 일어날 수 있으며 개혁이 필요하다는 경고를 수차례나 국회나 교섭단체에게 보냈다. 이 개편안은 여권 단독표결로 밀어붙여도 통과가 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준비로 인한 대다수 의원들의 불참으로 법안 통과에 실패했다. 같은 해 봄부터 국회 안의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은 위험하다고 주장하며 세미나도 했지만 외면이나 무시를 당하였다.
더군다나 1997년 11월 18일에 열린 국회본회의는 극도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당시 김수한 국회의장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지금 계속 나오지 않는 의원들, 정말 명단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정기국회 마지막에 지금 뭡니까?" 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14][15] 이로 인해 자치적인 개혁으로 인한 극복을 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IMF 구제금융을 받은 직후 권고안에 따라 다시 통과되었다. 대한민국의 금융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내부 조정 메커니즘과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보다 법안에만 매달렸던 점과 국민과의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한 것이 곧 실패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DJ의 재택근무 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날치기 여파로) 여론이 먼저 뒤집어져서 야당이 굳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애초에 IMF 위기는 원화의 고평가, 외환보유고의 부실한 운용, 종금사의 채권운용 미숙 등으로 인해 발생한 금융위기에 가깝다. 그리고 당시 재경원이나 한국은행 등지의 관료들의 노력으로 일본에서 1,000억달러 규모의 자금지원을 끌어들일 기회를 얻었지만, IMF 내 일본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철회된 건이 더 큰 사안인데 야권을 탓하는 건 선거국면을 감안한 떠넘기기 성격이 강하다는 의혹을 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한국개발연구원에서 97년 초에 위기 가능성을 시사한 보고서를 발간해 시중에 내놓은 걸 전량 회수한 게 강경식 부총리 산하의 재정경제원이다. 이 일과 외환위기 건이 빌미가 되어 강 전 부총리의 한나라당 입당이 거부되었다.
3.3. 펀더멘탈 문제론
경제 펀더멘탈(fundamental)이라는 어구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IMF 이후인데 당시 아시아 금융위기 가운데 한국 경제는 근본적으로 튼튼하다며 위기의 확산 가능성을 부인하려던 경제관료들의 수사가 언론을 타면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강만수 장관의 책에서 인용하자면 이렇다.[16]경상수지 개선과 경제 구조조정을 위한 대책을 추진한 것은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다는 인식을 갖고있었다는 반증이다. 확실히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고 특히 경제수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 (중략) …대외신인도의 유지를 위한 전략 측면에서는 외국금융기관들이 급속하게 자금회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펀더멘틀은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 말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 (중략) …내부에서도 펀터멘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간부를 불러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도인 것은 사실이지만 외환사정이 날로 어려워가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다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물었다. … (중략)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는데도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고 비극이었다. |
이것은 강씨나 한국 관료들의 창안은 아니고 외국의 평가이기도 했다. 외국 연구자들의 경우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한국은 산업구조가 튼튼하고[17] 무역수지 흑자가 누적되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초중반 미국 연방준비제도에서 벌인 금리정책의 연쇄효과에서 비롯된 변동과 이에 따른 역내 외환시장 불안정에 금융부문의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지 한국 경제 전반의 부실의 문제는 아니었기에 인도네시아 등 다른 주요 피해국들에 비해 해외악성채무가 장기화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진단하는 것이 통설이다. 과도한 레버리지가 낳은 자본수지 왜곡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지만 (IMF 구제금융의 빠른 상환이 증명하듯) 단기적 유동성 악화의 초크포인트를 지나서라면 딱히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같은 신흥국으로 도매금으로 얻어맞은 측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연결되는 것이 IMF의 처방이 아닌 차라리 고정환율로 묶어 놓고 여유자금을 방어에 쏟아부은 '말레이시아 방식'이 나았다는 자성론이다. 하지만 이는 더 나았을지는 모르더라도 말레이시아의 상황은 한국과 정반대였다. 1998년 1월에 외환보유고가 36억 달러만 남았고 그나마 1/4분기에 대부분 지출될 예정이었던 대한민국과는 달리, 말레이시아는 180억 달러를 환율방어에 쏟을 만큼 외환보유고에 여유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환보유고 대비 외채비중도 1.3배로 한국(3.5배)의 절반도 안되는 상황이었다.[18] 즉 하고 싶어도 말레이시아 방식은 불가능했다는 얘기. 추가적으로 말레이시아는 외환보유고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긴축재정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과는 반대로 오히려 양적완화를 통한 내수진작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했다. 더불어 말레이시아의 경우 보르네오섬 땅속에서 외환을 뽑아낼 수 있는 경제구조임에 반해 한국은 그런 자원이 없어 거의 모두 수입해 가공해서 팔아 이윤을 남겨야 하는 대외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라 외환의 부족으로 인한 모라토리엄 선언은 말레이시아보다 더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회의[19] 중 잠시 짬을 내어 강경식 한국 재정경제원 장관을 만났을 때도 나는 같은 우려를[20] 내비쳤다. 하지만 그는 (태국시장에 뛰어든) 외환투기꾼만 비난할 뿐 근본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또 대선이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어서 집권당이 어떤 정책적 변화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관료들은 눈덩이 부채를 상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금융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윌리엄 R. 로즈 전 시티은행 부회장(1997년 당시 국제채권의원단 의장)
- 윌리엄 R. 로즈 전 시티은행 부회장(1997년 당시 국제채권의원단 의장)
4. 참고 자료
- 대한민국 50년사 2권 - 임영태 저. 들녘. 1999. p442~445.
[1] 원화의 거품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2] 문민정부 출범 이후 총 6명의 경제수석이 역임했는데 초기 경제수석(박재윤, 한이헌)을 제외하면 경제수석의 평균 재임기간은 7개월에 불과했다. 더 심한건 IMF 구제금융 발표(1997년 12월 3일)를 열흘 앞둔 11월 19일에 경제수석과 장관을 동시에 경질하는 이미 11월 초부터 IMF로 가야 하니 하면서 우왕좌왕하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경제수석을 경질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3] 돈을 빌려줬다가 이자를 받지 못한 대출금.[4] 링크는 김우중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 모든 재벌 총수들이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삼성의 이건희도 "기술이 없으면 기술을 사 오든지 기술자나 고문을 데려오면 되는 거"라면서 괜히 독자개발 운운하면서 시간낭비하고 있다고 부하직원들을 질책했다는 언론기사들이 숱하게 남아있다. 단지 삼성은 금융계열사들의 방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외환위기 직후에 생존에 성공하면서 R&D를 강화해서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미화된 것이다. 다른 재벌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외환위기 속에서 모두 죽다 살아난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든 기술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5] 법적 지위도 불투명한 재벌 총수 일가족에 의한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금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6] 원-엔 환율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으로 정해지지 않고, 그냥 한국 시장의 원-달러 환율과 일본 시장의 엔-달러 환율을 가지고 재계산한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원-엔 직접 거래 시장을 개설하려는 노력은 2000년대에 들어서도 꾸준히 있었지만 일본에서 시장 조성에 호의적이지 않아 무산되었다. 엔화가치의 하락이 한국의 원화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이를테면 한일 공통의 최대 경쟁시장인 미국에서 더 싸진 엔화 때문에 일본산 상품의 수출경쟁력이 오르는 와중에 원화 가치가 비싼 채로 있으면 한국산 경쟁상품이 덜 팔리고 한국이 달러를 못 벌(것 같으)면 원화 가치도 싸진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돌아온다.[7] [경제위기 이대로 둘 수 없다] 무역적자 사상최대[8] 물론 이러한 돈풀기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 것은 맞다. 그러나 문제는 갑자기 경제에 문제가 발생하여 유동성이있는 현금이 갑자기 필요할 경우 외부의 충격에 경제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동성 위기가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9] 기업에 대한 종합금융지원을 원활하게 하고 금융산업을 균형있게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회사로서 예금·대출업무와 투·융자업무, 증권중개업무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회사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육성정책으로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되면서 외화자금 수요가 확대되고 기업의 자금수요가 점차 복잡·다양화됨에 따라 이를 충족하기 위하여 민간 중심의 외자 조달의 창구를 마련하고, 기업에 대한 복합적인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미국의 투자은행제도를 모델로 하여 설립되었다.[10] 그러니까 상환기간이 금리가 낮은 (이자가 저렴한) 1년 미만의 단기차관을 외국에서 대출받은 뒤 만기가 올때마다 상환기간을 롤오버하여 연장하는 식이었다. 이런식으로 외자를 대출받을 경우 상환기간이 다가왔을 때 은행들이 단체로 한꺼번에 만기를 연장해 주지 않을 경우 흑자도산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한국 국적의 은행이라면 금융감독원이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외국 국적의 은행은 금융감독원이 통제할 수 없다. 이것은 외교부의 역할이다. 특히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대한민국의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은 무려 211%였고, 97년 당시에는 241%에 달했다. 외환보유액보다 2배나 더 많은 단기외채가 있었던 것이다.[11] 당시 유행하던 레퍼토리는 해외여행 자유화로 인해 외국에서 무분별하게 달러를 써대서… 달러가 떨어졌다는 식의 서술이다.[12] YS "IMF 맞은 책임의 65%는 DJ에게 있다"[13] YS의 차남 김현철이 정책 연구 및 여론조사를 담당할 여의도 연구소를 설립, 가동해 공천에 적극 관여해 성과를 거뒀는데 입김이 점점 강해지자 이권으로 악용하는 기업들이 나타나면서 정권 말에 악재로 작용하기도 했다.[14]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국회의원 총의석수가 299석이었는데 16차 본회의 개회 당시 128명만 출석하였고 저 발언이 나올 당시 겨우 30명이 더 나왔을 뿐이었다. 회의록을 보면 자꾸만 회의장으로 들어와 달라, 나가지 말아 달라는 말이 계속 등장하는데 얼마나 어수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15] 같은 날 예결위도 개최되었는데 저 발언 직후 김고성 의원(당시 자민련)이 예결위 간다고 하는 발언이 나왔다. 하지만 예결위 회의록을 보면 당시 예결위는 18시 57분에 개회되었는데 당시 저 발언이 등장한 시각은 대략 17시 30분 무렵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에 김수한 국회의장이 예결위원장(장영철 의원, 당시 신한국당)도 못 간다는 엄포를 놓은 다음에야 의사진행이 이루어졌다.[16] 자세한 내용은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강만수 저 - pp.438-439를 참고[17] 제조업 중심의 대규모 생산, 고용이 이루어지는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18] 마지막으로는 외환위기 사실을 대통령이 인지한 시점도 너무 늦고 말았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1997년 8월 말에 자본통제, 고정환율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김영삼 대통령은 모건스탠리가 '모든 투자자는 한국을 떠나라'는 보고서를 띄운 이후인 1997년 11월 7일에 처음으로 외환위기 관련 보고를 받았다.[19] 1997년 5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회의[20] 금융시스템 유동성 과잉 문제. 자본이 밀물처럼 유입되지만 빠져나갈 때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