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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8:41:03

해태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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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21c2a><colcolor=#fff> 해태
HAITAI
파일:해태그룹 로고(1986-2000).svg파일:해태그룹 로고(1986-2000) 화이트.svg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창립 1945년 10월 3일([age(1945-10-03)]주년)
해체 2001년([age(2001-01-01)]주기)
창업주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규모 대기업
유형 기업 집단
사업 분야 식품, 음료, 건설, 오디오, 중공업, 전자
모회사 해태제과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72길 3 (남영동)[1]

1. 개요2. 역사3. 역대 그룹 임원4. 오너 4가계 일가5. 기업 정신6. 계열사 목록7. 기타8.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1945년부터 2001년까지 존속했던 기업 집단. 롯데제과와 top 2로 경쟁하던 대형 제과 업체인 해태제과로 시장 인지도를 높였고 1980~1990년대 KBO 리그의 절대 강자였던 해태 타이거즈 등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영동에서 창업을 했고 본사도 여기에 있었는데도[2] 금호아시아나, 교보생명, 삼양그룹, 대상그룹, 쌍방울, 하림, 부영, 아남[3] 등과 더불어 전라도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4] 이 때문에 호남 출신 방송인 김병조는 해태그룹이 무너질 때 "일부러라도 부라보콘만 먹고 초코파이 대신 오예스를 꼭 사먹게 하곤 했는데!"라며 당시 비통한 마음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존속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haitai.com'이었다.

2. 역사

소비더머니의 영상

1945년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등 4명이 적산기업 나가오카(永岡)제과 용산공장을 인수해 '해태제과합명회사'를 세운 게 이 그룹의 시초이다. 1958년 해태산업을 세워 사세 확장을 시작해 1973년 해태식품을 세워 음료사업에도 진출했고, 다른 한편 농어촌개발공사로부터 한국산토리, 감귤냉장판매, 메도골드코리아까지 인수했다. 이후 1978년 해태관광, 1978년 해태상사, 1979년 신방전자, 1982년 코스코, 1986년 무궁화식품 등을 각각 인수/설립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거의 식품 위주로만 사업을 확장했다.

60년대를 거치며 해태제과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특히 호남 사람들의 열렬한 애향심을 바탕으로 전라도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60년대 이후 호남 사람들이 대거 서울로 상경하면서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에서도 엄청난 판매량을 보였다. 당시 호남 사람들이 많이 살던 서울 변두리 지역 슈퍼 마켓에는 100% 해태제과 제품만 취급하고, 롯데, 빙그레, 크라운 등 다른 회사 과자는 아예 팔지 않는 가게도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1977년 공동창업주 박병규가 급서하자 공동창업주들 간에 경영권 분쟁이 생겼다. 박병규의 장남 박건배 기획과장이 부친 사망 직후 상무로 긴급 승진했다. 이후 1978년 전무, 1979년 부사장을 거쳐 1981년 해태제과 등 3개사 사장이 되어 사실상 경영권을 잡았다. 반면 신덕발의 아들 신정차는 1981년에 해태관광을 들고 먼저 분가했고, 민후식의 아들 민병헌도 1988년에 해태유업을 들고 독립해 동거 시대를 끝냈다.

1981년 박건배는 회사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1983년부터 그룹회장에 취임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사업다각화에 열의를 보였다. 1981년 코래드를 세워 광고업에 진출했다. 이어 1981년 프로야구 출범 직전에 운좋게 참여하여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를 창단했다. 당시 해태는 규모가 작아 프로야구단 창단 기업 대상에 들지 못했지만 호남 연고 기업으로 야구단을 창단할 마땅한 기업이 없어 막판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한국커피, 대아상호신용금고, 미진금속을 잇달아 인수하여 금융업중공업에도 뛰어들었다. 미진금속은 나중에 해태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같은 해 계열사 자율경영체제로 전환했고, 이듬해인 1984년 회장 부속실을 '종합조정실'로 개편해 본격적인 그룹의 형태를 갖추었다.

1994년에는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하지만 저물어가던 사양 산업이었던 오디오 사업에 뛰어들어 인켈을 인수했다. 당시 인켈이 해태를 인수했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인켈의 브랜드 파워와 규모가 컸었다. 그러나 문제는 MP3의 도래로 오디오 산업이 급격히 몰락했다는 점이다. 인켈은 당시 부동의 국내 1위 오디오 제조사였지만 서서히 몰락해고 있었다. 해태는 이를 기회로 인켈을 저렴하게 인수하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인켈 인수 얼마 후 오디오 산업 자체가 와해되었다.

이듬해인 1995년에는 가정용 무선전화기로 유명한 나우정밀을 인수했다.

이러한 활발한 인수합병 덕분에 해태그룹은 1996년 말 기준 재계 24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본업과는 전혀 무관한 비식료품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문어발식 경영, 총수의 대외활동 편중 등이 화를 불렀다.[5] 그의 과감한 사업 확장은 별로 안목이 좋지 않았는데 사양 산업인 오디오 산업과 휴대폰이 태동하던 시기에 사양산업인 가정용 무선전화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물론 해태는 나우정밀을 바탕으로 휴대폰 사업에도 진출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이미 나우정밀은 해당 분야에서도 다른 대기업 계열사들에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게다가 겉보기와 달리 가정용 무선전화와 장거리 무선통신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이쪽에는 이미 삼성, LG 같은 전통의 대기업은 물론이고 팬택같은 벤처 기업들이 해당 분야에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태는 해당 기업들을 인수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차입했는데, 결국 1997년 외환 위기 때 유동성 자금난을 겪게 되었고, 결국 2001년 프로야구단 해태 타이거즈와 해태제과 중국법인을 매각하면서 그룹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3. 역대 그룹 임원

4. 오너 4가계 일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국의 기업 가문 문서
3.3번 문단을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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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업 정신

(1절)신선한 새맛을 창조해주는 조국의 산업계의 빛나는 성좌
해태여 해태여 정직과 성실로 다져진 신용있고 정다운 우리의 해태

(2절)넉넉한 즐거움 마련해주며 세계의 시장마다 감동을 심는
해태여 해태여 창의와 봉사로 다져진 보람차고 정다운 우리의 상징

(후렴)찬란한 내일로 해태가족과 번영을 누리며 손을 맞잡고
줄기차게 뻗어가는 해태그룹 해태그룹 만만세

6. 계열사 목록

7. 기타

8. 참고 자료



[1]크라운해태그룹 본사[2] 해태그룹이 종말을 맞던 1990년대 후반에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에 그룹 사옥이 있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마포역 4번 출구와 마포대교 북단 사이에 있는 대형 건물(現 불교방송 사옥)이 해태그룹 마포 사옥이었다. 용산구 남영동의 해태제과 본사는 지금도 있다. 다만, 크라운제과가 해태제과를 인수한 이후 크라운해태제과의 본사 건물로 간판을 바꿨다.[3] 앞서 언급된 기업은 모두 창업주가 각각 나주시(금호), 영암군(교보), 고창군(삼양), 정읍시(대상), 익산시(쌍방울, 하림), 순천시(부영) 등 호남지역 도시에서 출생했으며 각 기업의 기틀을 다진 창업지도 대부분 호남이었다. 다만 대상의 경우는 창업지가 부산이었고 초기에는 부산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만큼 70년대 이전에는 부산 향토기업이라는 인식도 강했다.[4] 해태를 호남 연고 대기업으로 분류하는 배경에는 야구팀이 가장 크기도 했지만, 송당 박병규 창업주가 광주광역시 출신이라는 점 때문도 있다. 다만, 공동창업주 아당 민후식 전 회장은 황해도 연백군, 동릉 신덕발 전 부회장은 경기도 안성시 출신이었다.[5] 후술하겠지만 제과업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전자 사업이나 건설 사업 등에 손을 댄 것이 경영난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6] 실바니안 패밀리의 카피제품.[7] 규모가 큰 일부 매장은 이마트 메트로로 운영되고 있다.[8] [되돌아 본 재계 '실패에서 배운다'] (4) '무리한 짝짓기' M&A[9] 재미있는 것은 애큐온저축은행은 해태 타이거즈의 후신인 KIA 타이거즈가 아니라 OB 베어스의 후신인 두산 베어스를 후원하고 있다는 점이다.[10] 옛 해태산업의 수입주류 전문 자회사로 설립됐다가 1999년 해태 부도 이후 직원들이 퇴직금으로 주식을 인수해 독립했다. 회사의 최대주주는 박건배 회장의 아들인 박재범 대표였지만, 박건배 회장의 후원이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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