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6 Meunier A6 뫼니에 | |||
원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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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빈형 | |||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종류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반자동소총 | ||
원산지 | 프랑스 | ||
{{{#!folding 【펼치기 · 접기】 | 이력 | ||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역사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1914년~1916년 | ||
개발 | 에티엔 뫼니에 | ||
개발년도 | 1890년~1910년 | ||
생산 | 튈 군수공장 | ||
생산년도 | 1914년~1916년 | ||
생산수 | 1,013정 | ||
사용국 | 프랑스 | ||
사용된 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 ||
제원 | |||
탄약 | 7×57mm 뫼니에 | ||
급탄 | 5, 10, 15발 짜리 내부탄창[1] | ||
작동방식 | 롱 리코일 | ||
총열길이 | 715mm (원형), 516mm (카빈형) | ||
전장 | 1,295mm (원형) 1,096mm (카빈형) | ||
중량 | 4.03kg | ||
탄속 | 800m/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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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orgotten Weapons의 리뷰 영상
프랑스군이 사용했던 반자동소총이다. STA No. 8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2. 상세
프랑스군은 1886년 르벨 M1886소총을 제식소총으로 채택했고 짧은 시간동안 기존의 그라 소총을 대체했지만 얼마 안가 독일에서 위원회 소총이 채택되자 르벨 소총의 8×50mmR 탄이 마우저사의 7.92×57mm 탄 보다 약하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소총탄과 그 소총탄을 사용할 소총을 개발할 계획을 세운다.1890년부터 나케-라로크 장군의 지휘로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프랑스 정부 소속 연구기관 4곳[2]이 달려들어 7개의 신형 탄약과 22개의 시제형을 만들어 냈다.
2.1. 탄약 개발
6×58mm 뫼니에 18976×60mm ENT, 1900
6.5×60mm CAP 1905
6.5×61mm STA 1910
6.5×55.5mm 베르티에 1910
7×59mm STA 1912
7×57mm 뫼니에1912
이 중에서 채택된 탄환은 7×59mm STA 1912이다.
2.2. 소총 개발
1894년부터 1913년까지, 수 많은 소총이 개발되었고 시험을 제식 채택을 위한 경쟁을 치렀다.포병 기술지원국 (STA)
A 1 [3]
A 2 STA 5
A 3 STA 6
A 4
A 5 STA 7
A 6 STA 8
국제 사격 훈련소 (ENT)
B 1, ENT 1901
B 2
B 3
B 4
B 5
B 6
B 7
B 8
베르사유 기술위원회 (CTV)와 퓌토 기술지원국 (APX)이 공동 개발
Forgotten Weapons의 C6 리뷰 영상
C 1 CTV 1
C 2 CTV
C 3 APX 3
C 4 APX 4
C 5
C 6
C 7
C 8[4]
이 중에 가장 뛰어난 성능을 보인 소총이 A6 STA 8이었고 약 3,000발을 잔고장 없이 사격했다고 한다.
3. 채택
소총의 채택 자체는 1910년에 이미 끝났지만 탄환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고 탄피의 길이와 탄환의 발사속도를 두고 생산공장 간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고 하며, 결국 기나긴 싸움 끝에 1913년 7×57mm 탄을 채택하는 것으로 끝났다.[5]이 병림픽스러운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군은 1차대전이 시작했을 즈음인 1914년 8월 정도에는 전체 병력의 절반에 다다르는 군사들에게 뫼니에 소총을 보급했을 것이고 프랑스군의 피해도 크게 줄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볼트액션 소총에 비해서 반자동소총이 정비하기 힘든 것도 있고 당시 일반적인 교리는 기관총이 화력을 담당하고 일반 소총수들은 보조를 담당했기 때문에 큰 필요를 못 느끼기도 했었다. 영국도 비슷한 논리로 리-엔필드를 이용한 반자동소총을 개발했지만 제식화하지 않았다.
카빈형 관련 설명
4. 실전
생-테티엔 군수공장은 1914년 봄부터 매달 약 5,000정의 뫼니에 소총을 생산 할 거라는 계획을 세웠으나 전운이 도는 시기에 독일에게 최신기술의 소총이 보여지면 큰 문제가 일어날 거라는 군부의 생각 때문에 대량생산은 무산되었고 결국 튈 군수공장에서 1,013정 정도의 뫼니에 소총이 생산되었다.튈 공장에서 생산된 수량중 843정이 최전선으로 보내졌으나 총 자체가 복잡했고 과열이 자주된다거나 하는 잔고장이 있었고 무엇보다 개전 초기 독일의 압도적인 공세 때문에 대부분 전장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결국 군부는 뫼니에 소총의 한계를 실감했고 뫼니에 소총을 대체할 반자동 소총을 다시 개발하기 위해 세 명의 총기 개발자[6]에게 의뢰했고 그렇게 나온 소총이 RSC 소총이다. 뫼니에 소총보다 생산률도 더 높고[7] 총 자체도 르벨 소총을 재활용 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내구성도 준수한데다가 야전에서도 다루기 쉬우며 무엇보다 신형 탄약이 아닌 르벨 소총에서도 쓰이던 8×51mmR 르벨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뫼니에 소총은 아주 빠르게 RSC 소총으로 대체되어갔다.
5. 둘러보기
보병장비 둘러보기 | |||
근대 (~1914) | 대전기 (1914~1945) | 냉전기 (1945~1991) | 현대전 (1992~) |
[1] 5발짜리 탄 클립으로 장전[2] 포병 기술지원국 (STA), 국제 사격 훈련소 (ENT), 베르사유 기술위원회 (CTV), 퓌토 기술지원국 (APX)[3] 이후에 카빈형으로 개조되어 아래의 A 4의 이름을 부여받고 다시 경쟁을 치른다.[4] 짧은 길이 덕분에 인도차이나의 원주민 군사들에게 보급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인도차이나 소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5] 우연히도 같은 해에 스페인군에서 채택한 7×57mm 마우저 탄의 스피처 개량형과 구경과 탄피 길이는 물론 탄두 무게(9g)와 총구탄속(850m/s)까지 같았다.[6] 폴 리베롤, 샤를 쉬테르, 루이 쇼샤[7] 약 86,000정으로 1차대전에서의 반자동 소총 중에서는 가장 많은 생산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