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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8:41:16

과인

1. 寡人
1.1. 문헌 자료1.2. 용례1.3. 미디어에서
1.3.1. 과인을 1인칭으로 사용하는 캐릭터
1.4. 관련 문서
2. 3.

1. 寡人

惟予寡人, 非敢曰憫恤我元元, 懷保我元元, 克盡憂民之方, 而至若時雨、時暘之或愆, 冬寒、夏暑之曰咨, 耿耿一念, 實未嘗暫弛于中。

오직 과인(寡人)은 감히 나의 백성들을 돌보아 구휼하고 나의 백성들을 잘 보존시킬 것을 생각함에 있어 능히 백성을 위해 걱정하는 방도를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없지만, 때로 비와 햇볕이 정상에 어긋나거나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가 이변을 일으키는 데 대해서는 잊지 않고 걱정하는 한 마음이 실은 일찍이 잠시도 가슴 속에서 해이된 적이 없었다.
《정조실록》 7권, 1779년(정조 3년) 1월 1일 병술 2번째 기사.



조선왕 또는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사용한 1인칭 대명사.

맹자 양혜왕편에 나오는 "寡德之人"(과덕지인)의 준말로 '덕이 적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백성을 잘 돌보지 못하여 곡식보다 못하다'는 불곡(不穀)과도 일맥상통한다. 고(孤) 또한 마찬가지로 왕과 제후들이 스스로를 낮추어 이르는 겸칭이다.

마찬가지로 임금이 자신을 가리키는 짐(朕)과 혼동되기도 하나, 짐은 천자황제가 사용하는 호칭이었으므로 제후국 왕은 사용할 수 없는 말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신라고려 때는 외왕내제를 했으므로 과인과 짐을 혼용해서 사용했고[1] 고려 말 원간섭기조선 시대에 과인을 쓰게 되었다. 다만 조선의 영조는 말년에 짐이란 표현을 공공연히 썼다. 그만큼 왕권이 강력했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외의 왕과 제후들은 앞서 말한 과인, 불곡, 고와 같이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표현이어야 비로소 사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말인만큼 한국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무분별하게 조선의 국왕들이 과인(대한제국 이후로는 짐)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것은 아니었다. "과인이 부덕(不德)하여…"나 "과인의 불찰(不察)이도다!"에서 보이듯 주로 자책을 하거나 겸양할 때 등 스스로를 낮춰야 하는 상황에서 주로 쓰고, 평소에는 '나' 를 많이 썼다.[2]

조선왕조실록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는데 보통 '과인'이라는 표현은 주로 위에 언급한 것처럼 자책을 하거나 겸양을 할 때 쓰였다. 아래 사례처럼 오랜 공이 있는 신하에게 상을 내리거나 노신이 사망하여 제사를 지낼 때 내리는 교서 등에 주로 나오는데 '너희들 같은 훌륭한 신하들이 있어서 부족한 내가 정치를 잘할 수 있었다'라는 뜻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영의정 황희, 중추원 사 이정간(李貞幹)에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희(喜)에게 내린 교서에 이르기를, "정승인 신하가 이미 나이가 많고, 학문과 덕행이 높으니, (중략) 진실로 국가의 주춧돌이며, 과인(寡人)의 고굉이노라. 의지하고 의뢰함의 깊음에 어찌 노성의 아름다움을 정표(旌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궤장을 내려 일어서고 앉는 것을 온편(穩便)하게 하고자 함이니, 경은 기체(氣體)를 보전하여 화기를 기르고, 심력(心力)을 다하여 정치를 보필하라."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7월 9일 병자 2번째 기사

그 외에는 거의 다 나(予/나 여)로 기록되어있다. 당장 맨 위 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오직 나 과인'이라는 표현에서 惟寡人이라고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이 予 표기는 임금이 아닌 사신이나 평범한 관리들이 '나'라고 말할 때도 쓰는 표현이므로 조선 왕의 경우 평소에는 그냥 '나', '내가'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드라마나 일본 서브컬쳐에서 쓰이는 '고(孤)는', '여(余)는'같은 표현은 실록 상으로는 보이지 않으므로 쓰이지 않았던 셈이다.
장물 죄인 최맹온이 해주에서 옥사하다. 영의정 이직(李稷)·좌의정 이원(李原)·우의정 유관(柳觀)·형조 판서 권진·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이조 판서 허조(許稠)·참찬 이지강(李之剛)·호조 판서 안순(安純)·참찬 탁신(卓愼)·예조 판서 신상(申商) 등을 불러 장물 죄인 최맹온(崔孟溫)의 죄를 처단할 것을 의논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마땅히 형조에서 아뢴 대로 하여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다."(上曰: "更詳審。")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 5월 19일 무자 3번째 기사

고종이 대한제국을 창건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고(孤)라고 칭했다는 설이 있는데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으며 다른 왕들도 그런 사례가 없다. '孤'로 검색해봐도 대부분 환과고독과 관련된 정책적인 기사만 나온다.

고과(孤寡)라는 표현 역시 조선왕조실록 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바이두백과에서는 확인이 되므로 [3] 중국의 친왕[4]들이 본인을 낮출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1. 문헌 자료

諸侯見天子曰, 臣某侯某, 其與民言, 自稱曰寡人, 其在凶服曰, 適子孤 - 『禮記』「曲禮下」
제후견천자왈, 신모후모, 기여민언, 자칭왈과인, 기재흉복왈, 적자고 - 『예기』 「곡례하」
→ 제후가 천자를 볼때 말하는 말이 '신 모후 모'[5]라고 하고, 백성들에게 이야기 할 때는 자칭해서 "과인" 이라고 칭한다. (또), 흉복에 처할때는 "적자고"라고 말한다.

1.2. 용례

1.3. 미디어에서

1.3.1. 과인을 1인칭으로 사용하는 캐릭터

1.4. 관련 문서

2.

직역하면 '열매를 맺은 사람'. 불교에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부처, 연각(緣覺)[7], 아라한을 통들어 이를 때 더 자주 쓰이는 듯하다.

3.

능력이나 재주, 덕망 따위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 '과인하다'의 어근. 하지만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다.

[1] 진흥왕 순수비 중에 짐이라고 적은 경우와 과인이라고 적은 경우가 모두 전한다. 고려사 성종9년의 기록을 보면 성종(고려)이 스스로를 칭할때 과인과 짐을 혼용하였다. 예종(고려)은 자신의 동생인 왕효의 묘지명에 스스로를 칭할때 짐과 과인을 혼용해서 사용하였다. 출처[2] 중국 사극에서는 이를 잘 반영하여 제후왕들이 스스로를 낮출때만 과인이라 칭하고 평소에는 고(孤)를 많이 쓴다. 비슷하게 청나라 황제들도 일상적으로는 짐보다는 현대 일반인의 중국어와 같이 나(我)라고 말했다.[3] 孤寡: 古代王侯自称[4] 조선의 적실왕자들이 대군 칭호를 받는 것처럼 중국의 적실왕자들은 친왕 칭호를 받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명나라 연왕[5] 여기서 첫번째 某는 영지 이름, 두번째 某는 제후 본인의 이름이다. 예를 들어 진문공이 주 천자에게 본인을 '신 진후 중이'라고 하는 것.[6] 정조가 즉위일 앞에 대신들 앞에 나아가 한 말로, 실록에 정확히 '과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7] 부처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뜻하며, 보살의 아래로 취급받는다. 벽지불(僻支佛)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