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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4 17:02:57

짐(대명사)

1. 개요2. 지역별 쓰임
2.1. 중국2.2. 한국2.3. 일본
3. 외국어의 유사 표현4. 기타5. 사용 인물

1. 개요

()은 황제를 지칭하는 일인칭 대명사다. 상고중국어에서 소유격 한정으로 사용된 1인칭 대명사였으나,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이 황제만 쓰는 1인칭으로 하도록 명한 뒤로 굳어졌다.

2. 지역별 쓰임

2.1. 중국

청나라 무렵 짐은 문어적 표현에 국한되게 된다. 예를 들면 강희제는 일상적으로 기록하고 대화할 때는 짐을 쓰지 않고 보통 자신을 '아()'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나 아 자는 현대 중국어에서도 일반인들이 평소에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1인칭 표현이다.

2.2. 한국

의외로 한국에서 짐이 쓰인 기간이 안 쓴 기간보다 훨씬 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 이사금조에 따르면 이 "짐"이란 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는 신라 왕조의 유리 이사금 때이다. 유리 이사금 이후 여러 신라 임금(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문무왕 등.)들이 "짐"을 사용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삼국사기뿐 아니라 당시의 금석문 기록인 진흥왕 순수비에도 진흥왕이 스스로를 짐으로 칭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백제고구려, 발해는 짐을 썼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백제의 칭호 "대왕 폐하", 고구려의 연호 "영락", 발해의 존칭 "황상" 등을 보면 신라 외 다른 고대 국가들도 "짐" 표현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짐"이란 표현은 고려에서 보이는데 고려는 잠시 황제를 칭했을 정도로 자주성이 강했기에 원 간섭기 이전까지 임금들이 "짐" 표현을 써왔다.

조선은 제후국을 자처한만큼 "짐" 표현을 쓰지 않다가[1] 왕권이 강력하던 영조 시절에 잠시 쓰였다.[2] 이후 고종이 자주적인 독립국가로써 "대조선국"을 칭하면서 "짐"이란 표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3] 그리고 대한제국을 개창하고, 순종 황제까지 쓰이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을 당한 이후 칭호가 다시 왕실급으로 격하되면서 더 이상 쓸 일이 없게 되었다.

다만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짐 또는 과인이라고 했지만 일상적으로 기록할 때는 일반인과 같이 평범하게 '나'를 의미하는 '여(余)'를 사용했다고 한다. 신라 경명왕이 직접 작성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의 비문에서도 '내가 지었다(余製)'라고 쓰여 있고[4] 조선왕조실록 상에서도 왕이 내리는 명령서인 교지 등에서 평범하게 '나'를 의미하는 '여(余)'를 많이 사용했다.

2.3. 일본

일본어의 인칭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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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쓰는 인칭대명사는 # 표기 }}}}}}}}}


일본에서도 이 글자를 1인칭으로 쓰곤 한다. 일본식 독음은 チ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을 가리켜 짐이라고 일컬었고,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 "천하가 이제 짐(히데요시 자신)의 한주먹 안에 있노라."라는 글귀를 적어서 보내 조선 조정을 경악하게 한 일도 있었다. 당시 일본의 정식 군주는 고요제이 덴노였고, 히데요시는 어디까지나 천황의 신하인 신분이었기 때문. 히데요시가 스스로를 가리켜 짐이라고 일컬는 것은 일본 국내에서도 불경죄에 가까운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고요제이 덴노는 아무런 힘이 없는 허수아비 신세였고,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권력자는 히데요시였다. 그래서 당시 이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현대 일본천황은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짐이라고 칭한 마지막 천황쇼와 천황으로, 옥음방송이나 일본국 헌법같은 공식 문서에서는 朕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대화할 때는 일반적인 1인칭 대명사인 '와타시()'를 사용했다. 전후에는 공식 문서에서도 와타시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아키히토나루히토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어 번역 시 '여(余)'를 '짐'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많지만 엄밀히 말해 두 가지는 다른 것으로, '여'는 '나'를 문어적으로 고풍스럽게 표현한 것일 뿐, 실제로 신분이 높은 이만 쓰는 1인칭이 아니다. (특히 구한말 문헌을 보면 넘쳐난다.) 문맥에 따라 '여'를 '짐'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나'로 옮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경우도 많으니 주의를 요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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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국어의 유사 표현

엄밀히 말하자면 서양권에서는 '짐'에 해당하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권의 군주들이 스스로를 평범한 1인칭으로 지칭한다면 '나는' 혹은 '저는'으로 번역하는게 맞으며 '짐'으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다.[6] 다만 '짐'으로 의역할만한 3인칭화 표현은 존재한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군주가 자신을 취하는 대명사로 We를 쓰거나 혹은 "He said "..."와 같이 그는 말하노라, ~하노라와 같이 자신의 권위를 나타냈다. 이렇게 복수형으로 자신을 칭하는 것을 두고 '장엄적 복수'(majestic plural / pluralis majestatis)이라고 한다. 3인칭으로 칭하는 경우는 카이사르에서 유래하는데, 갈리아 전기를 쓸 때 꼭 자신을 3인칭으로 칭했으며 이런 방식은 훗날 로마 황제들의 관습으로 굳어졌다. 이 관습은 훗날 유럽의 군주들에게도 계승되어 군주가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풍습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조지 워싱턴도 이를 본받아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기도 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워싱턴은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며 자신을 군주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의 제안을 거부했다.[7][8]

4. 기타

이와 반대로 황제보다 낮은 (孤)나 과인(寡人)이란 표현을 쓴다. 그중 과인은 왕이 자신을 낮추는 표현으로 주로 잘못을 인정하거나 겸양할 때 쓴다. 예를 들면 "가뭄이 심한 것은 과인이 부덕한 탓이로다."는 식이다. 그 외의 1인칭 표현도 자신을 낮추는 의도가 많다.

5. 사용 인물


[1] 간혹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호칭은 전하라고 하면서 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완전히 재현 오류이다. 왕의 1인칭은 '나'를 의미하는 '여(余)' 아니면, 덕이 적은 사람을 뜻하는 '과인'이고 신하들이 황제를 호칭할때는 전하가 아닌 폐하를 쓴다.[2] 이는 왕권뿐 아니라 다른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는데, 영조는 청 사신 앞에 먼저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명나라 황제의 위패에 먼저 절을 한 뒤에 청 사신에게 나아간 적도 있었다. 다시 말해 오로지 천자만이 쓸 수 있는 칭호를 영조가 사용했다는 것은 묵시적으로 청나라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스탠스이기도 하다.[3] 이 때 칭호를 "대군주 폐하", "왕후 폐하", "왕태자 전하" 등으로 바꾸었다.[4] 보통 신라/고려의 다른 여러 고승비는 최치원, 최언위한문 문장을 잘 쓰는 신하에게 쓰라고 시켜서 '신하된 누구누구가 왕명을 받아 썼다'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반면 이 비문은 임금이 직접 지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내가 지었다고만 썼다.[5] 예를 들어 슈로대쥬데카 곳초 시리즈 같은 경우 '나'가 더 적절하다.[6] 가령 "짐이 곧 국가다"라는 번역으로 유명한 프랑스어 어구 L'État, c'est moi 역시 프랑스어로는 평범한 1인칭이다.[7] 워싱턴은 초대 미국 대통령이었으며, 국민들과 주변 인물들의 지지를 꾸준히 받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었다면 연임 혹은 종신집권을 별다른 반대도 없이 할 수 있었겠지만 두 번의 임기 이후 권력을 깨끗하게 내려놓고 물러나 후대에 모범을 보였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인재가 없으니 제발 더 해달라'는 요구조차 수 차례 거절했다. 이러한 행보와 업적으로 그는 미국사세계사에 영원히 남을 명성을 얻었다.[8] 워싱턴이 굳이 3인창화를 사용했던것은 당시 대통령제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예법이나 관습을 군주제에서 차용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 시기의 미국 대통령제는 선거군주제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9] 일본판은 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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