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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41

관중 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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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중 분지(關中盆地)는 중국에서의 옛 지명이며, 나중에 후한 13주 중에서 옹주로 편성된 바 있고 현대 중국에서는 산시성의 일부다.

지명의 유래는 소관, 무관, 진창 고도의 산관, 효함 고도의 동관 및 함곡관, 이렇게 4개 관문의 '가운데(中)'에 위치한다고 하여 '관중(關中)'이라고 불린다.
파일:금나라지도.jpg

이 '관중 분지'를 둘러싼 친링 산맥이 원형의 성벽처럼 있으며, 서쪽에는 황하, 북쪽에는 위수경수가 흐른다. 특히나 장안을 둘러싸고 보호받는 경지 면적이 생각외로 넓어 관중 평야는 낙양의 5배 넓이로써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불린 옥토의 땅이었다. 이는 만일 국가급 전쟁에서 해당 지역이 포위당했을 때 식량을 자체적으로 대량 조달해 오래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서쪽 방면의 산악지대, 황토고원은 장안의 북쪽을 든든하게 막아주는 대규모의 자연 장벽이라서 통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주변지역에서 장안으로 오려면 황하를 타고 위수로 진입하든지, 아니면 동쪽 산악지대에 있는 함곡관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관중 평야가 동서로 넓기에 남북 형태로 보면 정말 도시가 산에 끼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동쪽으로 가면 또 산과 황하가 관중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막는다.

여기서 동으로 진격하면 위수황하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기 때문에 낙양 일대까지 사실상 프리 패스나 다름없지만, 동에서 서로 공격하면 함곡관, 동관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히면 된다. 관중 분지를 얻으면 사실상 낙양까지 영향력이 미쳐, 한나라 수도권[1]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쪽은 함곡관으로, 여기서 중원과 관중이 구별된다.[2] 한마디로 말해서 방어하기 편리한 곳치고는 교통 사정도 좋다는 이야기다. 또, 인접한 양주는 강족을 비롯한 서북방 이민족의 영토와 가깝고 이민족과의 교역이나 거래가 가능하며, 기병을 양성하기 좋은 땅이었다.

중국 고사에는 관중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關中者得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려 13개 왕조의 수도가 있던 곳이다. 사실 확실한 것은 서주//전한/[3]/전조/전진/후진/서위/북주//의 11개 왕조의 고도(古都)이며, 후한서진은 후술하듯 수년간 임시 수도였다.[4][5]

진나라 진시황전한 유방, 당나라 이연은 이 관중 일대를 기반으로 천하를 얻었고, 오호십육국시대전진(前秦)과 후일 수나라의 전신이 되는 남북조시대북주(北周) 역시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화북을 통일했다. 사실상 고대 중국을 통일했던 6개 국가 중 4개의 국가가 그 시작이 관중 지방이었으니 고대 중국에 있어서 장안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6] 지금의 척박함을 생각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2. 고대 도시

3. 역사

고대 주나라부터 당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왕조가 수도를 관중 분지 내에 두었을 만큼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관중은 위치상 중원 평야에서 서쪽으로 치우쳐져있다. 또한 견융(犬戎), 귀방(鬼方), 험윤(獫狁) 등의 이민족 주거지와도 가까웠다. 그러나 중원 평야가 하북부터 강남까지 탁 트여있는 지형인 것과 달리 험준한 산맥과 관문으로 보호받는 지리적 이점이 있고, 그렇다고 익주마냥 지나치게 험준하고 멀지는 않다.

지형이 폐쇄적이면서도 평화시기에는 관문만 통과하면 중 평야원 남부와 북부로 바로 이어져서 교통도 크게 나쁘지 않고, 위수 등의 생산력 덕분에 관중 그 자체만으로도 제국의 수도를 유지할 생산력은 낼 수 있었다.

위수, 경수, 낙수가 황하와 합쳐져서 함곡관 지역을 통과하고 낙읍을 지나간다.[7]

중원 평야의 변두리인 낙양이 중요했던 이유의 경우, 관중에서 함곡관 쪽을 통해서 중원 평야를 향하면 비교적 바로 앞에 낙양이 있기 때문이다.


3.1. 주나라~진(秦)나라

주나라(서주)의 도읍지 호경도 인근에 위치했는데[8], 종주(宗周)로 불리며 성주(成周)라 불린 낙읍이 동방 경영의 중심지로 기능하는 동안, 주나라의 본거지로 기능했다.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수도인 함양(기원전 350~206)[9]이 인근에 있었다.[10]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장안은 함양 외곽의 일개 향리였다. 그러나 결국 함양은 항우에게 의해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장안은 한나라(전한) 고조 유방 때 처음 도읍했던 낙양에서 천도하면서 사실상 새로 세워진 도시다. 파괴된 함양의 위수 남쪽에 아직 궁궐 등의 시설들이 남아 있었고, 여기에 기초하여 새로 도시를 지은 게 장안이었다.

주나라의 발상지이자 초기 수도였으며,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에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를 호경(鎬京, 나중에 장안으로 개명)에서 중원 평야낙읍(洛邑:뤄양, 나중에 낙양으로 개명)으로 천도했다.

항우의 경우 '진을 멸망시킨 다음 이 관중을 근거로 삼는 것을 거부하고 여전히 팽성을 근거지로 했다가 망했다.

3.2. 한나라

한나라 때의 장안은 지금 시안의 북서쪽 시가지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으며[11], 비단길의 시작점이었다. 장안의 정치경제적, 그리고 전략적 이점들이 전한의 수도가 된 원인이었다.
한고조는 처음엔 낙양을 수도로 삼고자 했다. 이때 누경으로부터 관중은 수비에 용이하고 과거 낙양을 수도로 삼았던 주나라와 한나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점을 지적받았다. 한나라는 전쟁을 하며 덕을 쌓지 못했고 따라서 유사시 관중에 들어가 천하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중은 가히 천하의 덜미를 거머쥐고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 있는 형국의 요지로서 장량 또한 누경의 의견에 지지를 보내며, 관중은 '금성천리(金城千里, 천리 땅에 걸친 견고한 성)'나 다름없으며 '천부지국(天府之國, 하늘 곳간의 나라)'이라 표현했다. 한고조는 즉각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한고조가 '중원낙양이 아니라 '관중의 장안'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유사시에 관중 땅의 험지 안에서 제후들을 제어하기에 편한 땅이라는 유경의 제안에 공감했기 때문. 삼국지를 보면 촉한이 이곳을 지속적으로 공략하고 정치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 지역의 인심을 잡으려 했으며 이민족들과의 연계를 통해 공략하려고 한 연유가 이것이다. 후세에 조선의 학자 정약용이 괜히 '고대의 전략가들은 장안, 낙양을 중심으로 전략을 짰다'라고 한 게 아닌 것. 물론 여기에는 고대, 짰다 처럼 과거형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도 포인트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관중+파촉만으로는 힘들고, 한수를 따라 내려와서 형북(남양, 양양)까지 장악해야 천하통일이 가능해진다.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완성을 넘어'라고 직접 언급한 게 이부분이다. 관중을 기반으로 통일한 세력(선진, 서한, 북주) 모두 최소한 남양까지는 확보했다. 단순히 파촉+관중만으로는 적의 침입 경로가 제한되어 있어(함곡관, 백제성) 방어에는 편하지만 바꿔 말하면 공격할 때 진출로도 제한되어 있다는 소리.[12]

특히 유방의 경우 형주 전역(임강국)이 초한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우의 제후(임강왕 공오)였던 터라 남양(그나마도 직할 봉지가 아니라 왕릉의 '세력권' 정도였음)을 제외하면 형주가 아예 적지나 마찬가지였고 형양과 성고에서 고생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한신의 북벌이 성공했기에 저 사수 전선이 무의미해진 것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결국 항우가 자리를 비우면 뺏고, 돌아오면 뺏기는 순환이 무한 반복되었을 것이다.

제일 처음 지어진 건축물인 장락궁(長樂宮)이었는데, 원래 진나라 때의 건물이었던 흥락궁(興樂宮)을 토대로 개축한 것이었다. 서쪽으로는 상국 소하(蕭何)의 강력한 주장에 힘입어 미앙궁(未央宮)이 건설되었다. 한 고조 시절 장안은 주로 이 두 궁궐로 이뤄졌고, 아직 성벽이 완전히 세워지지 못한 상태였다. 혜제 시절에 성벽을 완공함으로써, 장안이 도시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혜제 이후 즉위한 한문제한경제 시절에는 근검절약을 강조한 두 황제의 치세에 걸맞게 마땅한 토목공사는 없었다.

한무제가 즉위하자 장락궁 북쪽에 명광궁(明光宮)을 더했고, 미앙궁 북쪽으론 북궁(北宮)과 계원(桂原)을 추가했다. 무제는 상림원(上林苑)을 지었는데, 그 둘레는 약 300리에 달했다. 무제는 이 모든 궁궐 단지들을 장안 내외에 걸쳐 지었지만, 서쪽 교외에 위치한 건장궁(建章宮)이 가장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한무제 시대 장안은 제국의 수도로서 가장 번영했다. 당시 장안성의 대부분은 장락궁과 미앙궁 등의 궁궐과 관청들이 차지하고 있어, 황제와 고급 관료들을 위해 설계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13] 이 당시 장안성의 모양은 북쪽이 북두칠성, 남쪽이 남두육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 두성(斗城)이라 불렸다. 경제 활동은 주로 도시 북서쪽의 서시와 동시에서 행해졌는데, 두 시장은 위수에 가깝게 위치했다.

왕망이 찬탈하여 전한이 멸망하고, 잠시 신나라의 수도로 상안(常安)으로 개칭되었으나, 적미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장안은 적미군의 폐허를 완전히 제대로 복구하지 않은 상태였다.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후한 시대에 장안은 경조윤(京兆尹)으로 불리었으며 좌빙익(左馮翊), 우부풍(右扶風)과 함께 묶여져 삼보(三輔)라고 칭해졌다.

또 후한 시대에는 장안은 적미에 의해 유린된 이후 복구되지 않아 사실상 폐도로서 있었다.

후한 말기 헌제동탁낙양을 불태우고 일단 우격다짐으로 대충 수도로 복구해 다시 장안으로 옮겼다. 이곳은 비교적 서량과 가까웠으며 이 때문에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이 결성되자 자신의 근거지인 서량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천도해서 병력과 물자를 쉽게 조달하려 했다.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에게 밀릴 경우 강족저족 등 서량에 사는 이민족들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 동탁이 여포에게 암살되자 이각, 곽사가 난을 일으켰고, 이 삼보의 난으로 장안은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다시 헌제는 이를 떠나 조조에 몸을 의탁했고, 조조는 허도를 수도로 삼았다. 다만 장안은 곧 도시로 복구되어 조위 서방의 중요 도시로 남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는 일화도 있으나 연의의 각색으로 실제 역사에서는 장안 근처를 휘젓기는 했으나 장안성을 점령했다는 기록은 없다.

송나라 이전까지 관중 지방과 파촉 지방을 결합하면 그 세력은 중국 통일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관중을 먹지 못한 익주 세력은 결국 중원의 물량에 밀려 멸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한중제갈량을 보유하고도 형주를 상실하고 농서와 관중을 병탄하려던 시도가 실패해 결국 에 잡아먹힌 촉한이 있다. 역으로 촉한이 그 불리한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북벌을 행한 것 역시 이 관중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작 삼국시대 당시 관중은 후한 말기의 혼란, 특히 삼보의 난으로 인해 초토화해서 그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물론 관중 자체의 잠재력은 여전했고 촉한이 관중을 목표로 한 것도 합리적인 방안이 맞지만 적어도 삼국시대 당시엔 관중의 생산력은 그 이전 및 이후와 비교해 보면 중요도가 떨어졌다.

전국시대 진나라, 한고조, 북주(와 이들의 후신 수나라-당나라)가 관중에 도읍하고 익주를 배후에 두어 천하를 제패한 케이스이며, 오호십육국시대 전진도 관중에서 일어나 이런 식으로 중국을 다시 제패하기 직전까지 갔다. 일단 관중과 익주를 동시에 먹으면 양쪽에서 진령 산맥을 축으로 한 적대 세력의 방해가 없어져, 관중의 물량을 전선으로 이동시키고 그 빈자리를 배후지인 익주의 풍부한 물자를 끌어다 보충하는 방식으로 시너지가 나는 것이다. 한고조가 전투의 승률만 보면 항우에게 밀리는데도 이런 식의 물량전으로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거기다 관중의 대도시인 장안까지 먹으면 험지에 의존해 그 안에서 천하를 제어하는 게 쉬워진다.

3.3. 위진남북조

삼국시대에는 촉한 북벌의 목표가 된 데 대비되어 조위에서는 대촉 방어 요충지 및 전진 기지로서 중요시되었다. 제갈량의 북벌의 주요 전장이 되었던 가정, 오장원 등이 장안 서쪽 근교에 해당한다. 서진 때 영가의 난으로 또다시 초토화가 되었다가 호한 정권의 유요가 거점으로 삼고, 이후 근준의 난으로 독립하면서 군주가 된 전조 정권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후조가 중원과 화북을 통일하면서 흡수되었다가 후조말 혼란기에 저족포홍(蒲弘)이 독립하면서 이 일대에 전진을 건국한다. 이후 전진은 손자인 부견 대에서 화북을 통일하며 강대해지지만 비수대전으로 몰락한 이후 강족의 요장(姚長)이 부견을 패사시키고 건국한 후진의 수도가 되었다. 다시 손자인 요홍 대에서 동진이 후진을 멸망시켜 일시 남조의 영역으로 들어갔지만 제위 찬탈에 급했던 유유의 병크로 혁련발발북하에 빼앗겼다. 정작 혁련발발은 기존 수도인 통만이 북위와 가깝고 방어가 튼튼하다고 하여 장안으로 천도하지 않았다. 이후 북위를 거쳐 동서로 분열된 서위북주, 수나라, 당나라 때 꾸준히 수도로 기능하여 낙양과 함께 북송대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 도시였다.[14]

3.4. 수당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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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장안성의 구조와 복원도[15]

수나라 문제 때 한나라의 장안성 토질이 염화되어 거주에 부적절해지자 현재 시가지가 있는 위치에 장안을 재건했는데, 이때는 수문제가 즉위 전 받았던 작위인 대흥군공에서 이름을 따와 대흥(大興)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수양제가 낙양을 재건하여 동도로 칭한 후 천도해 배도(陪都)가 되기도 했다.

장안의 두 번째 전성기는 당나라 때의 도읍지였을 때다. 당의 창업주 당고조는 618년 대흥을 수도로 정하면서 이름을 장안으로 개칭했다. 장안성은 외성의 길이가 동서 9.7㎞, 남북 8.6㎞에 달했으며 동서남북의 성벽에 각각 3개씩 총 12개의 성문이 있었다. 내부는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되어[16] 엄격한 통금이 실시되었고[17], 황성의 정문인 주작문 앞으로 곧게 뻗은 폭 150m의 주작대로를 경계로[18][19] 동서 지역인 장안현과 만년현으로 나뉘어졌다. 장안현과 만년현에는 각각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라는 상업 전용구역이 설치되었는데, 특히 서시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자 종점 역할을 해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장안성 남동쪽에는 당현종 때 준설해 생긴 곡강지(曲江池)가 인근의 부용원(芙溶園)과 더불어 명승지로 유명했다. 장안성 내에는 당나라 황실의 정궁인 태극궁(太極宮)과 당현종이 친왕이었을 때 살았던 저택을 궁궐로 증축한 흥경궁(興慶宮)이 있었다. 이외에도 지금은 폐허로 남았지만 정전이 중국 역사상 최대 크기의 건축이라는 함원전을 가진 대명궁이 장안성 외성 북쪽에 맞닿아 당고종 때 건축되었다. 최전성기에는 장안의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장안과 더불어 당시 3대 도시로 일컬어지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보다도 인구가 많았다.

당나라 장안의 도시계획을 도입하는 것은 7~8세기 동아시아의 트렌드였으며, 발해상경용천부일본헤이조쿄헤이안쿄, 신라의 금성은 다 장안성을 모방했기 때문에 도시 외양이 비슷했다. 다만 신라의 금성은 발해나 일본과 달리 원래 존재하던 도시를 개조한 셈이라 장안성의 구조를 똑같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후대 동아시아 국가들도 풍수지리의 반영 등으로 인해 조금씩 변형되긴 했지만 기본적인 도성 구조에서 당의 영향이 계속 남게 된다.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하던 장안은 황소의 난을 겪으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904년 주전충당소종을 협박해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장안의 궁전과 관청 건물을 철거해 자재를 이송하고 황실과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켜 주전충은 낙양에서 후량을 건국하였고, 장안은 대안부(大安府)로 개칭하였으며 당의 후신을 칭한 후당을 포함해서 이후의 5대 왕조는 낙양과 개봉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 때 이후로 장안은 낙양과 함께 이후 두 번 다시는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3.5. 송원시대

송나라 시대부터는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이때부터 중국 역사의 중심지는 관중보다 동쪽으로 이동한다.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분분한데, 당 말기인 서기 8~9세기에 소빙하기가 관중 분지에 도래하면서 연 평균 기온이 뚝 떨어져 기후 변화로 건조해지면서 중국 동부 해안과 강의 하류가 더 중요해졌다는 설, 실크로드의 출입구인 관중은 해상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반대로 실크로드를 통한 육상 무역의 중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설, 장강 하류의 강남 지역이 개발되면서 경제적 중심지가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설, 이민족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진 시기에 관중이 동쪽 중원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서쪽과 북쪽에서 들어오는 이민족의 공격에는 취약한 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송 태조 조광윤이 장안을 도읍으로 물색했던 것은 북방 이민족의 방어가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의 선견지명이 맞아 떨어졌다는 점에서 이 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만 위수 이북은 여전히 말을 기르기 좋은 곳이었으며, 송나라가 이곳을 잃어버린 이후에는 기병 양성에 큰 어려움을 겪어 북방 방비가 어려워졌다.

북송 때는 송태조 조광윤이 천도를 논한적이 있는데 976년, 송나라가 개국한 지 16년이 지났을 때, 송태조가 낙양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다. 제사를 마치고도 낙양에 머물며 개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신하 이회충이 개봉에는 운하가 있고, 곡식이 수백만 석씩 올라오는데, 도성을 지키는 수십만 병력들은 그걸 먹고 살고있다고 하며, 폐하가 낙양에 머물면, 수십만 병력들은 뭘 어떻게 먹고 사느냐며 낙양 천도는 불가하다고 했다.

이에 송태조는 낙양 천도는 장기적인 것이 아니고, 가장 좋은 것은 장안으로 천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태조는 자신이 서쪽으로 천도하려는 것은, 산과 강의 험준함을 이용해 주나라, 한나라의 일을 본받고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줄여 용병하는 일을 막기 위해 장안으로 옮겨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송태종 조광의는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덕에 있지, 험준한 지형에 있지 않다며 조운이 갖추어져 물자가 풍부한 개봉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광윤은 "진왕(당시 조광의의 왕작)의 의견은 훌륭하나 백년이 넘지 않아 천하 백성들의 힘이 고갈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송태조가 붕어하면서 이렇게 송나라 때의 장안 천도 논의는 유야무야 되었고 개봉이 계속 송나라의 수도가 된다. 그리고 송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난 후 잔존세력은 남송을 건국하였으며, 경제력이 좋은 강남에 가깝고 방어에도 난징보다 나은 강남 동부 해안의 임안(항저우)로 수도를 옮긴다.

이후 남송이 몽골에 의해 끝내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 들어선 몽골인원나라, 그리고 다시 한족명나라, 만주족청나라 왕조들을 거치며 서안은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일개 지방도시로 전락했다. 북방계 민족으로 나라를 세웠던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들은 자신들이 기원한 내몽골이나 만주와 인접한 베이징을 도읍으로 삼았고, 금나라가 도읍을 정한 때부터 현재까지 800여 년간 베이징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 왕조들은 베이징은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수도가 있었던 곳이라 연경이라 칭했는데, 이는 연경 일대가 자신들이 진출해야 할 중원 대륙과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관중 분지가 디시 중심지가 되지 못한 건 후한 말부터 이어진 계속된 전란과 환경 파괴로 인한 섬서, 산서 일대의 토지 염화 때문이었다. 장안은 한국사로 치면 경주시와도 비슷한 특징을 가지는데, 중원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중국 영역 전체에서는 다소 한쪽에 치우친 위치이며 주변 지형도 험준한 산지에, 한정된 입구만이 존재하는 폐쇄적인 분지 지형이나 그 안의 분지가 비옥하다. 즉, 지키기 좋으면서 중장기적 세력 확장의 기반으로서도 유용했다. 전성기에는 이 앞마당의 부양력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었는데 수천 년간 중국의 중심지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번영은 화북을 통일한 정권이거나 혹은 천하를 완전히 통일한 정권에서나 가능했지, 전란이 터지면 당연히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후한 말부터 이어진 계속된 전란으로 관개 시설이 파괴되는 일이 잦았고, 여기에 수천 년간 계속된 농사 및 산림벌채로 섬서, 산서 일대의 강수량이 감소했다. 또한 장안을 포함한 관중 분지의 생산력은 토지 염화로 인해 감소, 식량 자급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이미 진과 한나라 시절에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라던 관중 지역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농사에 치명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잠시 화북을 통일한 북위는 관개 시설을 복구하는 한편 물을 적게 사용하는 밀농사로 대체해서 지으며 버틸 수 있었다.[20] 북주 - 수나라는 이 지방의 역량으로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후 수-당나라 시기에는 부양해야 할 인구가 이전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늘었고 섬서와 산서 일대의 토지 염화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문제 때부터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황제라는 의미인 축량천자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결국 수나라는 대운하 개발을 통해 강남 지역의 물자를 관중 지역으로 수송하기 위한 개발 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물론 운하 문서에도 나오지만 수양제의 운하는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관중지역으로의 수송도 한계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래도 이 시기까지는 그럭저럭 100만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지만 당나라 말기에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버틸 수 있을 만큼의 토지, 관개시설 관리가 이뤄지지 않으며 농업 인프라가 붕괴했다.[21]

게다가 당나라 말기의 정치적 불안은 외부 물자를 수송할 대운하 통제의 상실로 이어져 장안이 수도로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주전충당소종을 움직여 낙양으로 천도했으며 이후 장안에서 멀지 않은 낙양도 비슷한 이유로 중국사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무대는 차차 경제력이 풍부한 강남 동쪽(해안)지역으로 옮겨가거나 중원 대륙 진출의 필요성을 느낀 거란, 여진, 몽골 등 흥기한 북방 민족이 중원 대륙을 거처갈 요충지인 베이징을 택하였다. 여기에 송나라가 정강의 변으로 강남 동해안 일대로 도망가면서, 장안과 낙양은 정강의 변 이후로 완전히 도시 기능이 파괴되면서 더 이상 중국사에서 수도로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22]

한편 다음 시대인 북송은 낙양과 장안에서 멀지 않고, 수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수운이 용이한 개봉부를 수도로 삼기도 했으나 역시 오랫동안 이어진 토지 염화로 인해 농업 생산력이 더 감소되어서 경제력이 좋았던 송나라도 이건 아예 손을 놓았다. 그리고 때마침 금나라가 중원 대륙을 치면서 송나라는 그러든지 말든지 경제력이 풍부한 강남 동쪽 해안으로 옮겼으며, 요, 금, 원, 청을 비롯한 북방계 왕조는 중원 대륙 진출을 위해 베이징 일대에 본거지로 삼았다. 그래서 이후에 중국의 정치 중심지는 베이징을 중심했고 경제 중심지는 상하이시푸젠성, 광저우시, 홍콩 등 강남의 동부, 남부 해안 지역으로 넘어가게 된다.[23]

3.6. 명청시대~

한편 명나라 초기, 1391년 감찰어사 호자기가 홍무제(주원장)에게 올린 상서에서는 "서안(장안)이 속한 관중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지세를 갖추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가납하여 주원장은 서안(장안) 천도를 검토하기 위해 태자 주표[24]를 보내 관중을 살피게 한다. 주표는 남경으로 돌아와 섬서성 지도를 바쳤으나, 이듬해 주표는 병사하고 만다. 태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홍무제는 당시 60이 넘은 노인이었던지라 업무 의욕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천도 같은 큰 일을 행할 의지도 사라졌다.

당시 이곳은 오이라트에 맞서는 명나라의 최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국방의 요충지였다. 원나라 시절부터는 베이징이나 난징 같이 해안에 가까운 중국 동부 도시들이 역사의 주역이 되지만, 이곳은 오이라트, 내몽골과 맞닿은 명나라 서부의 요충지였고, 서역과의 교통로로서 중시되었다.

명나라 말엽에 이르러 다시금 17세기의 소빙하기가 도래하여 기후가 다시 변화하자 관중을 포함한 섬서성 일대는 곡창지대에서 황무지가 되었으며, 거듭되는 흉작까지 겹치자 대규모 유랑민이 발생한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명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그 사건이 명나라를 사실상 멸망시킨 이자성의 난이다.

명나라 말기 동시 다발적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날 때, 이자성의 난의 중심은 이곳이었고, 그렇게 다시 한 번 장안이 중국 통일왕조의 수도가 될 뻔한 기회는 지나가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말 이자성의 난 때 순나라의 일시 수도(서경(西京)가 된 적도 있었었다. 이자성군은 명나라를 멸망시켰지만,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패하고, 이곳은 결국 만주족이 장악한다. 만주족은 이곳을 기지로 삼아 서역으로 원정을 행했고, 결국 건륭제는 신장 지역을 모조리 제패하여 중국의 영역을 크게 늘린다.

그 이후로도 의화단 운동광서신정 시기 청이 한때 임시수도로 삼으려고 했다는 설도 있고, 실제로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 당시 서구 열강에게 베이징을 빼앗기자 시안으로 피신했다. 20세기 들어서는 펑위샹옌시산이 시안의 지배권을 놓고 다퉜으며 1차 장풍전쟁, 2차 장풍전쟁, 중원대전의 주요 전장이 되기도 했다. 1934년 제5차 초공작전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멸망하고 중국공산당홍군의 생존자들이 대장정에 올라 섬서성으로 퇴각하자 이를 섬멸하기 위해 공산당 전선을 시찰온 장제스를 초비 부사령관 장쉐량과 시안 수정공서 주임 양후청이 감금시켜 제2차 국공합작을 강요했던 시안 사건 등 역사에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지금은 중국 서북 지방의 중심지이자 관광도시의 이미지가 강하며, 의외로 학문과 과학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공계, 특히 토목 분야에서 중국 수위권의 대학인 시안 대학이 이 곳에 있다. 중국 정부에서 허구헌날 자랑하는 시친링터널의 토목기술을 뒷받침한 도시이기도 하다.

현대에는 중일전쟁 때 전투가 벌어져 중국군과 일본군은 시안에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시안을 위시한 섬서성 일대에 대기근이 들어 수백만 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일대일로로 중국이 중앙아시아로 눈을 돌리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시안 시는 개방 도시로 지정되어, 유라시아 대륙의 연결통로이자 중국이 추진하는 서부대개발의 교통요지로서 중국 서부 최대의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25] 개혁 개방 이전에도 시안은 중국 경제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 왔지만, 최근에는 경제발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성 안의 공업에서 중공업의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크고, 국방 산업 등의 특수 공업을 기반으로, 경공업이나 기술 개발력을 중시한 공업 정책의 결과이며, 최근에는 하이테크 신기술 산업 개발구, 경제 기술 개발구, 곡강 신구, 생태구, 염양국가 항공 하이테크 기술 산업 기지의 「4구 일기지」를 설치해, 첨단기술의 개발과 산업화를 추진하는 경제정책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와 중국 정부의 투자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한국의 삼성 반도체 메모리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2017년 THAAD의 역풍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내고 있다. 다만 이러한 중공업 위주의 개발 정책과 내륙 지형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도시의 환경은 좋지 못한 편이다. 미세먼지와 매연이 심하며 교통 체증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게다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도 많고, 국제적인 관광 도시치고는 낙후된 지역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 치안은 좋은 편인데, 대부분의 중국 지역이 그렇지만 관광지나 호텔 등을 제외하고는 영어 사용도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출장 및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1] 전·후한 당대에도 이 지역은 "사예"라고 해서 9주 36군과는 별도로 구분했다, 조조가 젊은 시절 사예교위를 지냈는데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 겸 경기도지사이면서 수도방위사령관과 감사장을 겸직한 셈이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 이를 본떠 설치한 것이 바로 경기(京機)인데, 개성 일대를 경기, 평양 일대를 서경기로 구분했다. 이 경기는 조선 시대로 넘어와 경기도가 설치되며 현재 대한민국까지 이른다.[2] 여담으로 함곡관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흔히 알고 있는 함곡관으로 시안과 뤄양의 사이에 있으며(후한-삼국시대의 홍농에 있다. 지금 지명으로는 링바오 시의 북쪽.), 사실은 이게 관중과 중원을 구분하는 경계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후한시대 낙양이 수도가 되면서 수도 방위용으로 옛 함곡관과 낙양 사이에 함곡관을 새로 만든 것이다.[3] 시안 사람들은 때때로 한나라 역사 중의 일부로서 '왕망의 신정'이라고 격하하기도 한다.[4] 황소의 난이자성의 난도 비정통 단명 왕조였지만 이들 정권도 장안을 수도로 하였다. 참고로 몇 개 왕조의 수도냐는 논란에 대해서는 다음 문서를 참고할 것.#[5] 주대부터 당대까지 2천년 간 낙양이 수도면 장안은 배도이고, 장안이 수도면 낙양이 배도인 것이 천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6] 나머지 2개의 국가, 즉 후한(後漢)과 서진(晉), 거기에 더해 진의 전신이자 후한의 후신인 위(魏)는 낙양을 기반으로 하였다. 그런데 후한과 서진은 말기에 임시로 장안을 수도로 두긴 했으니 장안은 고대 내내 주요 도시였다고 할 것이다.[7] 비슷한 예시로 익주에서 장강을 타고 선박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 형주라서, 이 2곳 또한 서로 중요하게 연관되었다.[8] 현재 시안의 남서쪽에 있는 호현이라는 곳이 호경이 있던 곳이다.[9] 전국시대 중기 때까지는 옹(雍)을 수도로 삼고 았었으나, 효공 때 천도했다.[10] 위수 건너편 북쪽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 자리에 셴양이 있다.(함양을 중국어로 읽으면 셴양이 된다) 정확히는 진나라 당시보다 서쪽에 있다. 시안 기준으로는 북서쪽. 아방궁은 현재의 서안과 호경 사이쯤에 있었다.[11] 위성 지도로 보면 회색빛인 시안 시가지와 달리 묘하게 방형의 녹색빛이 도는 곳이 있는데, 한대의 장안성 모양과 일치한다. 성벽의 모양새도 일부는 길과 가로수로, 남동쪽은 해자가 온전히 남아있다. 다만 위성지도에서 녹색으로 보인다는 것은 이 곳이 논밭이 많다는 이야기로, 한나라 시기 문화재는 상당수가 파괴되어 있고 황제가 살던 궁궐 터가 겨우 발굴되고 있는 중이다.[12] 양양이 중요한 이유가 한수를 끼고 있는 천연 요새이면서 양양 이북으로 진출하기에 편할 뿐만 아니라 공격로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번성을 넘어가면 사수관까지는 방어선을 형성할만한 지형지물이 없다.[13] 그래서 인구 자체는 낙양이 훨씬 많았다. 장안이 속한 경조윤의 인구는 대략 70만 명 정도였는데(이 중에서 장안의 인구는 25만 명가량), 낙양이 속한 하남군의 인구는 170만을 훌쩍 넘는다.[14] 후한 이후 위, 서진, 호한, 전조, 후조, 전진, 후진, 동진, 호하, 북위, 서위, 북주, 수, 당의 정권이 거쳐갔으며 이중 서진(민제때 임시), 전조, 전진, 후진, 서위, 북주, 수, 당의 수도였다.[15] 서북쪽에 있는 시가지는 한대의 장안성이다.[16] 각 방은 내부에 난 십자형 도로에 의해 네 구역으로 구획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각 방마다 약 9,000명 내외의 인구가 생활했다고 한다.[17] 당나라 중기부터 통금제도가 해이해지기 시작해 후기로 가면 유명무실화되었다. 다음 왕조인 송나라는 수도 개봉부에 통금을 공식적으로 두지 않아 불야성을 이루었다.[18] 얼마나 폭이 넓은지 비교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폭이 넓은 도로인 서울특별시 세종대로의 폭이 100m이다.[19] 주작대로는 당대 중국의 특징적 도로체계로 보기도 한다. 일례로 발해 상경에 있는 주작대로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를 묻는 선택지가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 자주 등장한다.[20] 삼국지를 보면 촉한과 조위가 이 지역에 풍부하게 자라는 보리를 두고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21] 이미 측천무후 시대부터 식량문제 때문에 황제들이 종종 낙양에서 기거하는 일이 잦아지는 형편이었다.[22] 낙양도 장안보다는 중원 및 해안에서 좀 더 가깝긴 하지만 입지가 좁아 이전 시대에 비해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에 역부족인 것은 마찬가지였다.[23] 이후 왕조들이 항주(남송), 남경(초기의 중화민국)과 베이징(, , , 명(영락제 이후 남명 이전까지), 및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도읍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24] 명나라 2대 황제 건문제의 아버지.[25] 이에 대해서는 일대일로 문서를 참조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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