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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22:52:08

권병길

권병길
權炳吉 | Kwon Byung-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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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권병근
출생 1946년 11월 5일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
(現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사망 2023년 3월 11일 (향년 76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청진삼육국민학교 (졸업)
서라벌고등학교[1] (졸업 / 10회)
신체 172cm, 60kg
종교 개신교
직업 배우, 연극배우
데뷔 1968년 연극 '불모지'

1. 개요2. 생애3. 사망4. 주요 출연작
4.1. 드라마4.2. 영화4.3. 연극
5. 수상6.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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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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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배우.

2. 생애

1946년 충남 청양군 청양면에서 당시 상업에 종사했던 유복한 집안의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성장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초대 청양문화원장 운경 권병홍(1932~1972)이었는데 뛰어난 클라리넷 솜씨에 청양에 하나밖에 없던 극장을 운영하기도 했기에 그의 연기 재능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다. 한 예로 변사 흉내를 실감나게 내거나 성탄절 때 교회 성극에서 거지 역할을 호소력 있게 펼쳤기에 동네 아이들로부터 '거지'라는 별명이 붙은 일화도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에서 문화운동을 하겠다는 큰형을 빼고 서울로 상경, 삼육중학교를 다닐 적 '임택근'이란 별명을 얻으며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거두고 서라벌고등학교 때는 연극반 활동을 하며 전국 방송드라마 경연대회에도 나갈 정도로 재능을 뽐냈다. 그러나 이런 재능에도 성장기의 그를 괴롭힌 건 초등학교 1학년 때 폐결핵 선고를 받아 약을 먹었음에도 위장장애를 앓았던 점인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식물조차 섭취하면 속이 쓰려서 식사량도 줄어 기력이 쇠진해져 1학년 때 중퇴했다. 입원 후 도중에 다른 병원으로 옮겨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생후 몇개월 된 시점에 백일해를 앓아 기관지에 흔적을 남긴 게 엑스레이로 찍혀서 이를 근거로 결핵으로 판명되어버린 것이다. 그 영향인지 오기로 등산을 취미로 삼게 되었으며 이런 암울한 정서적 환경이 내성적이고 공상을 좋아하는 성격을 형성시킨 것이다. 더욱이 이 시기 시골 집을 판 돈으로 충무로 1가에서 장사하던 식당의 규모가 점차 줄고 큰형 역시 1959년 도의원 선거에서 낙선해서 가세가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권병길 자신도 고장난 위장과 허약한 신체, 저학력, 가난한 집안 등을 지닌 채 다시금 출발해야 했는데, 건강 회복을 위해 광화문 동아일보 앞에서 청진동을 거쳐 미도파까지 걷는 걸 일과로 삼고 형의 권유로 영어회화까지 다녔으나 한달을 못 넘겼다. 이 시기 동안 연극과 영화에 심취하여 1968년 신문 광고를 보고 배우학원으로 가서 연기 공부에 매진, 그 해 차범석 작품 '불모지'로 데뷔, 1971년 극단 '기적'을 창단하여 대표를 맡아 <수난기>, <제4상한의 인간들>, <즉흥시인> 등을 공연했으나 재정 문제로 해체, 1974년 '신협'으로 옮겨 <윤지경전> 등에도 나왔지만 2년 전에 맏형이 지방에서 올라와 사업하다 실패한 후 40세로 세상을 떠났기에 집안이 더 어려워져 연극을 중단, 청계천 5가에서 어머니와 함께 노점상을 차려 껌과 신문을 팔기도 했다. 이를 통해 노점상 근처 성업 중이던 도너츠 가게를 인수하려고 200만원을 목표로 계를 부었으나 이마저도 깨지고 돈조차 떼였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까지 신문 가판에 나서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런 아픔의 절정은 오히려 생에 대한 본능적인 열정에 불을 지피는 기폭제가 되어 1975년 극단 '자유'에 입단하여 연기에 다시 매진, <무엇이 될꼬 하니>, <대머리 여가수>, <따라지의 향연>,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 <거꾸로 사는 세상> 등 130여 편의 작품에 숱하게 나왔으며 1990년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시초로 은막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흥사단 강좌에 나간 후 <씨알의 소리> 등을 읽으며 양서협동조합에도 가입하고 기독교회관 농성에도 참여, 이 과정에서 조남기 목사(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1987년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연극인 시국선언을 주도하기도 했고 시위에 참여하다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1992년 민중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에 나오고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사회고발 활동에도 열의를 보였다.

영화 공공의 적에 출연하여 위와 같이 인상 깊은 장면이자 유행어를 만들기도 하였다.

2010년에는 국예술평론가협의회 예술가상 시상식 연극부문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을 받았다. 경기도 문화의전당 이사장을 지냈다.

2020년에는 자신이 직접 쓴 희곡으로 모노뮤직극 '별의 노래'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3. 사망

2023년 3월 11일 밤 10시 노환으로 인하여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근황올림픽에 출연했을 때, 코로나19 때문에 영화 활동을 못하고 있는게 아쉽지만, 지금 나와서 찍으면 안성기가 벌벌 떨 거라며 자신있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한지일 배우가 쓴 회고와 촬영한 장례식장 전경.

4. 주요 출연작

4.1. 드라마

4.2. 영화

4.3. 연극

5. 수상

6. 참고 자료



[1] #[2]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