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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1:56:51

김재봉(독립운동가)

파일:조선공산당 마크.png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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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재봉(1928년).png
1928년 1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1년 5월 19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오미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1] 248번지)[2]
사망 1944년 3월 22일[3] (향년 52세)
경상북도 안동군
본관 풍산 김씨(豊山 金氏)[4]
주서(周瑞)
근전(槿田)
학력 안동 광명학교 (전학)
대구 계성학교 (전학)
중동학교 (졸업)
경성공업전습소 (염직과 / 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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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3.1 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고 제1차 조선공산당 결성을 주도해 책임비서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1891년 5월 19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오미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248번지)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문섭(金文燮, 1871 ~ 1938.4.16.)[5]과 어머니 진성 이씨 이인화(李仁和, 1872 ~ 1931.10.23.)[6] 사이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7년 17세 때 진주 정씨 정재황(鄭在凰, 1891 ~ 1970.1.15.)[7]과 결혼하였다. 1908년 고향에서 광명학교를 다니다가 대구 계성학교에 전학하였고, 1909년 상경하여 중동학교로 다시 전학한 뒤 1911년 졸업하였다. 1912년 경성공업전습소 염직과[8]에 진학하여 1914년 12월 졸업하였다. 이후 귀향하여 오릉학술강습회를 열어 신교육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뒤 같은 집안 사람인 김지섭·김만수·김응섭(金應燮, 1878.11.15. ~ 1957.5.29.)[9] 등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다시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청진동[10] 302번지 진일(進一)여관에 주소지를 두었다.[11] 이후 만주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근무하는 한편, 비밀 공산주의 단체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1919년 음력 8월에 고향 사람으로서 전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안상길(安相吉)과 경성공업전습소 동창 이준태(李準泰)와 만났는데, 안상길은 지난 음력 7월 초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상북도 교통부장 겸 애국금(愛國金) 수합위원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안상길을 경상북도 교통부장에 임명한다는 사령서, 대한민국 임시헌법, 교통부 규칙, 교통부 원 사령서, 애국금 수합위원 사령서, 애국금 영수증 철, 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조선 내 기독교회당 및 천도교 교구실 앞으로 보내는 통지서 등 여러 서류들을 보고 안상길에게서 지난 달 자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날 당시 상황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이 서류들을 받아왔다는 설명을 들은 뒤 독립신문 1부를 건네받았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계획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1920년 10월 말 안동군 안동면 율세동[12]에 있던 안상길의 첩 하성경(河成卿)의 집에 갔다. 그리고 안상길에게 애국금 영수증 용지 10여 장을 나눠달라 제의하여 건네받고는 대구부로 가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 계획을 착수하고자 하였으나, 1921년 1월 조선독립단의 문서를 전달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1921년 6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13] 수감되었고, 같은 해 9월에 출옥하였다.[출처] 이후에는 방직공으로 근무하였고,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15] 67번지에 거주하였다.[16]

이후 조선노동대회 대표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1922년 1월 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여운형·김규식 등과 함께 조선노동대회 대표자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회의가 끝난 뒤에는 치타에 가서 사회주의를 공부했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 참여하였고, 대회가 결렬되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22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꼬르뷰로, 즉 고려공산당 중앙총국이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청년회 대표에 취임하였다. 1923년 2월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고려공산당 중앙총국 국내 파견원에 선임되어 귀국하였고, 같은 해 5월 신용기와 상해파(上海派)의 이봉수(李鳳洙), 조선노동연맹회의 윤덕병(尹德炳), 신백우, 북성회김약수, 무산자(無産者)동맹회의 원우관(元友觀)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중앙총국의 국내부를 결성한 뒤 8월에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3년 7월에는 사회주의 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여 조선 각 지방을 돌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강연을 통해 일반인에게 계급의식과 항일의식을 설파하였고, 조직확대를 위해 각 지역에 있던 다른 사상단체들과 연대해나갔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는 한편, 서울콤그룹 휘하의 서울청년회에 대응하기 위하여 1924년 2월 무산자청년회와 토요회(土曜會)를 통합하여 신흥청년동맹으로 발전시켰다. 1924년 3월에는 서울콤그룹의 제의를 받아들여 고려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를 해산한 뒤 '13인회'라고도 하는 '조선공산당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고려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 출신자들을 비롯하여 북성회파, 상해파, 서울 콤그룹의 대표자들이 모두 참가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서울콤그룹 지도자 김사국(金思國)은 먼저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뒤 코민테른에 가입하자고 주장하였고, 김재봉은 국내부와 상해파는 국내, 국외를 가리지 말고 하나의 역량으로 결집하여 코민테른의 지도 하에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견해 차이가 더이상 좁혀지지 않은 중에 1924년 9월 13인회의 핵심 인물들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김재봉 또한 1924년 10월 7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자 결국 13인회는 와해되었다.

1924년 11월 19일 이준태·김찬(金燦) 등과 함께 신사상연구회를 발전시켜 화요회를 결성한 뒤 전국적인 기초 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1925년 1월에는 김남수를 앞세워 고향 안동군에 화요회 안동지회를 표방한 화성회를 조직하게 하였고, 같은 달 화화사(火花社)를 설립하고 사상운동 잡지 '불꽃[火花]'을 발간하였다. 1925년 4월에는 풍산소작인회 대표 권오설을 경성부에 초빙하여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하였다.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에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1정목[19] 중국음식점 아서원(雅敍園)에서 조선공산당 창당을 합의한 뒤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이튿날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초대 비서부 책임자, 즉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5년 7월 21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8월 6일 석방되었다. 이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조선형평사 회원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실천위원으로서 사건 진상을 조사하고 희생자를 위문하였으며, 사건의 전말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또한 조동호조봉암을 코민테른에 파견하였고, 1925년 11월 조선노농총동맹 제6차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분리를 결정하여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분리시켰으며[20], 조선공산당의 조직을 확대하는 등 대내외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1925년 11월, 이른바 '신의주 사건'으로 조직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1925년 12월 체포되었고, 평안북도 신의주부에서 일본 제국 경찰의 취조를 받았다. 1926년 2월에는 신의주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고, 1926년 6.10 만세 운동 직후인 7월에는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된 권오설·강달룡 등과 연계되어 조사를 받았다. 1927년 3월 31일 예심이 종결된 뒤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 통산)을 선고받아[21] 독방에 수감되었다.

1931년 11월 8일 아침 출옥한 뒤[22][23] 경기도 경성부 인사동[24] 낙세(樂世)여관에서 요양하다가, 고향에서 칩거하며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1931년 12월 2일에는 어머니가, 1932년 11월 5일에는 셋째 남동생 김재홍(金在鴻, 1908 ~ 1932.11.5.)이, 1938년 4월 16일에는 아버지가, 1942년 3월 25일에는 첫째 제수 예안 김씨(? ~ 1942.3.25.)[25]가, 1942년 10월 3일에는 막내 남동생 김재란(金在蘭, 1913 ~ 1942.10.3.) 등 10년 사이에 여러 차례 상을 치렀다. 다만, 1937년 8월 금강산으로 유람을 다녀온 뒤 여행길에 지은 시 11편을 담아 1937년 9월 14일 엮은 『동해안주공소첩(東海岸走笻小帖)』이 저서로 남아 있다.

1944년 3월 22일 안동군에서 사망하였다.[출처]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풍산 김씨(豊山 金氏)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구현·김만수·김지섭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이 지번에 1984년 1월 14일 중요민속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된 학암고택(鶴巖古宅)이 있다. 이 고택은 학암(鶴巖) 김중휴(金重休, 1797 ~ 1863.2.8.)가 1800년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김재봉은 김중휴의 5대 주손(胄孫)이다. 김중휴가 철종제릉(齊陵) 참봉을 지내 본 고택을 참봉댁이라 부르기도 한다.[3] 음력 2월 28일.[4] 심곡공파(深谷公派) 28세 재(在) 재(載) 재(裁) 항렬.[5] 자는 장언(章彦).[6] 이원호(李元浩)의 딸이다.[7] 정경세의 12대손으로, 임당(林堂) 정연묵(鄭演默, 1871.4.30. ~ 1918.3.4.)의 딸이다.[8]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재료공학부[9]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차 임시의정원 의원 및 법무차장을 지냈다.[10]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11] 1921년 6월 2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2]안동시 율세동[13] 1921년 6월 2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출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15]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16] 1928년 1월 21일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가[20] #[21]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 수형인명부[22] 1931년 11월 19일 동아일보 기사[23] 본래는 1933년 2월 20일 석방될 예정이었다.1928년 1월 21일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24]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25] 김휘석(金輝錫)의 딸이다.[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