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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0:54:05

사충신

김해성 전투에서 넘어옴

송 빈
宋 賓
김득기
金得器
이대형
李大亨
류 식
柳 湜


1. 개요2. 상세(김해성 전투)
2.1. 임진왜란 발발과 송빈, 이대형, 김득기2.2. 치열한 싸움과 도망간 우두머리2.3. 류식이 물길을 찾다2.4. 마지막 혈투2.5. 양업손이 이 이야기를 전하다2.6. 의의
3. 관련 문화재4. 여담5. 관련자료

1. 개요

사충신은 임진왜란김해를 지킨 네 명의 의병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을 칭하는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김해평야와 김해성을 4일 동안 사수하며 임진왜란 초기에 시간을 벌어주고, 진주와 경상도 서쪽의 의병이 모이게 하였던 전투이자 수성전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이기도 하다.

2. 상세(김해성 전투)


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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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1592년 <colcolor=#f0ad73,white>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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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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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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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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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석주관 전투[日]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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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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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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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성 전투
金海城戰鬪
시기 1592년 5월 27일 ~ 1592년 5월 30일
(음력 1592년 4월 17일 ~ 1592년 4월 20일)
장소
김해읍성
원인 일본의 내륙 침공 교두보 확보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지휘관 송빈[1]
김득기
이대형
류식
이령
서예원[2]
이유검[3]
구로다 나가마사
오토모 요시무네
모리 카츠노부[4][5]
병력 불명 약 1만명
피해 김해읍성 내부의 양민들의 사망 및 포로로 붙잡힘. 약 150여명
결과 김해읍성 함락, 대규모 양민 학살 발생
영향 일본군 북상

2.1. 임진왜란 발발과 송빈, 이대형, 김득기

1592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일본군은 부대를 3개로 나누어 3방향으로 진격 하였는데, 그 중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은 4월 14일 다대포를 경유해 죽도(가락면)에 도착했다. 제3군은 내륙의 관문이자 호남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 김해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이 김해에 전해지자 김해부사 서예원은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조대곤에게 이 상황을 알렸고 의령군, 함안군, 합천군 등지의 지방관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또, 김해지역의 유지인 송빈과 이대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송빈서예원이 일본군의 침략문제를 함께 의논하기를 청하자 장남에게 집안을 맡기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김해부사는 송빈을 중군도총으로 삼아 해서문(서문)을 지키게 하였다.
"김해는 영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을 잃게되고, 영남을 잃으면 나라가 모두 의 것이 될 것이니,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켜야 한다."
<송빈이 김해성으로 들어가며>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보이며 마지막까지 고려의 신하로 살다간 이오의 6대손은 이대형은 빈번히 과거시험에 떨어지자 신어산 아래에 관천재를 짓고 살며 양친을 봉양하고 있었다. 이후 서예원의 청을 받은 뒤 마을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4월 15일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김해부사는 이대형에게 공진문(북문)을 지키게 하였다.
"나는 비록 벼슬이 없으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나라가 지금 위급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
<이대형이 두 아들에게 남긴 말>

일찍 무과에 급제했으나 당시 당쟁이 난무하고 있어 중앙 관직에 뜻을 두고 않고 농사를 짓던 김득기는 친구인 이대형과 송빈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김해성으로 향하였다. 김해부사는 김득기에게 해동문(동문)을 지키게 하였다.

합천에서 초계군수 이유검이 병사를 이끌고 오자 중위장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2.2. 치열한 싸움과 도망간 우두머리

4월 17일 일본군이 김해성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죽도에서 강창과 불암창으로 나뉘어 들어왔다. 김해성은 성곽이 높고 탄탄하며 해자가 깊어 일본군은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 오후가 되어서 일본군은 조총화살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밤이 되자 송빈과 조선군은 군사 수백명을 이끌고 나가 김해성을 포위한 일본군 수백 명을 죽이고 죽도(가락)까지 추적하였다. 이때 김해부사와 초계군수는 일본군이 수만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동요한다.

4월 19일 일본군 1만 3천여 명이 김해성을 침략하였다. 김해성에는 1천여명의 군사와 백성밖에 없었지만 의병장들은 결사항전을 다짐하였다. 첫 번째 전투에서 일본군은 해자를 건너지 못하여 물러갔다. 두 번째 전투에서 일본군은 무기와 사다리를 들고 해자에 뛰어들었는데, 일부는 허우적거렸으나 일부는 해자를 건너와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지켜보던 조선의 백성과 의병들은 을 던지고 끓는 을 퍼부으며 저항했다. 그래서 성벽을 오르던 수많은 일본군이 아래로 떨어졌다. 결국 일본군은 물러갔다. 이때 김해부사가 진남문에서, 초계군수가 해서문에서, 의병장들이 해동문과 공진문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공성으로 큰 피해를 입자 구로다는 김해성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고 여기서 시간을 끈다면 한양까지 진격하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사들을 김해성의 북쪽으로 보내어 성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호계천(현 호계로)의 상류를 흙가마니로 막았다. 물길이 막히자 성안의 개천과 우물이 말라가기 시작하였고, 김해성의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후 세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고 다시 일본군 병사들이 성벽을 타고오르자 조선군은 모두 하나되어 끓는 물을 뿌리고 돌을 던졌다. 세 번째 전투에서도 일본군이 물러갔다. 그러자 일본군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쉬는 것을 방해하였다.

세 번째까지 막아냈으나 식량은 바닥나고 물길은 막혀있었다. 게다가 원군을 기다렸지만 오지도 않았다. 초계군수 이유검은 해서문을 지키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고 김해부사 서예원은 "외로운 성에 군사는 약하다"쓰레기라 하며 강동에서 배를 타고 달아났다. 우두머리가 떠나자 조선군은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각자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흩어졌다. 이대형과 김득기는 송빈으로 하여금 총대장직을 맡게 하고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2.3. 류식이 물길을 찾다

류식은 과거에 과거공부를 하였으나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벼슬의 뜻을 버렸다. 그러던 중 일본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공진문을 통해 집안의 장정노비 100여명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왔다. 류식은 의병과 김해성 백성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류식이 김해성에 들어가며>

송빈은 류식에게 해서문을 맡기고, 이대형에게 공진문을, 김득기에게 해동문을, 본인은 진남문을 맡았다. 류식은 우물이 말라버렸다는 말을 듣고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망루로 올라가 지형을 살폈다. 그리고 객관앞의 마당을 파게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객관 마당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모두가 기뻐했고 함안에서 이령이 수십 명의 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에 입성하자 사기는 더욱더 올라갔다.

2.4. 마지막 혈투

구로다는 들판의 풋보리를 베어 성호를 메우게 하였고 조선군이 눈치를 못채게 밤새도록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안으로 던지는 등의 교란작전을 펼쳤다. 4월 20일 아침에 김득기와 병사들은 성벽 아래 성호와 해자가 보릿단으로 메워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보릿단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김득기는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중과부적이었고 류식이 있는 해서문으로 물러났으며 해서문도 무너지자 김득기와 류식은 해동문으로 갔고 해동문에는 이미 북문에서 밀린 이대형이 있었다. 의병들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싸웠는데, 혈투가 벌어지면서 조선의 군사와 백성들이 일본군의 칼날 아래에 무참히 쓰러져갔다.

이대형, 김득기, 류식은 객사(연화사 부근)까지 밀려 났다. 이들의 강렬한 저항에 일본군 장수도 차마 세명의 의병장을 죽이지 못하고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나 세명의 의병은 무기를 버리지 않았고 결국 일본군 병사들의 창과 칼에 찔려 객사에서 전사했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진남문에 있던 송빈에게 몸을 피하기를 권했으나 송빈은 듣지 않고 성내의 서상동 고인돌 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송빈은 벽에 자신의 충절을 담은 시 한편을 남겼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께서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후손이 어찌 선조를 배반하고 오랑캐에 항복 하리오/ 힘은 다 하고 성은 외로우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먼저 두 적장을 베어 충성을 다 하리라/ 남의 절개 세울 것을 남이 어찌 권하리오/ 자네들은 이제 스스로 헤아리기 바라네/ 나라에 보답하고자 순신(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림) 하기를 나는 이미 결심하였네/ 북쪽을 향하여 백 번 절하고 우리 임금님께 하직 하노라."

이 시는 현재 충절단성(忠節丹誠)의 대표적인 시로 꼽히고 있다.

2.5. 양업손이 이 이야기를 전하다

송빈의 부하였던 양업손은 시체들 사이에서 숨어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전투가 끝난후 일본군이 잠든 사이에 성을 빠져나와 당시의 전투상황과 네 의병장의 순절 소식을 전했다. 이후 이 일이 조선의 조정과 온 백성에게 알려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에 송빈과 류식은 이조참판에, 이대형과 김득기는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2.6. 의의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당시에 부산포와 동래성은 한나절 만에 함락되었는데, 김해성의 의병과 조선군은 18배 이상의 일본군에 강렬히 저항하여 무려 4일을 버텨냄으로써 일본군이 진격할 시간을 지연시켰다. 당시 김해부사와 초계군수가 도망간 김해성에서 진열을 가다듬고 끝까지 싸운 의병과 조선군의 마음가짐과 정신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3. 관련 문화재


파일:20161118_113355.jpg송빈이 이 위에 올라가 끝까지 싸웠다. 아래 돌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고 위의 비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송빈이 이곳에서 순절한 것을 기념하여 1964년 후손들이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문자는 이조참판청주송공순절기적비(曹參判淸州宋公殉節紀蹟碑)이다. 고인돌 위에 세겨진 문자는 송공순절암 이다.

파일:류공정.jpg호계천이 막혔을때 류식이 팠던 우물위에 후손들이 비석을 세웠다. 현재 동상시장 내부에 있으며 과거에는 표지판 하나만 있었지만 현재는 주변이 잘 정비되어있는 상태이다.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 왜군이 축조한 성이다. 니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가쓰시게 부자(父子)가 쌓았다. 죽도왜성을 쌓을 때 인근의 백성 약 4만 명 정도를 동원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선조 28년 2월조의 기록을 보면, 죽도왜성은 3면이 강에 임하여 있어 선박이 쉽게 정박할 수 있으며, 목책(木柵)과 토루(土壘), 석벽(石壁) 등 3중으로 성벽이 둘려져 있고, 성 내에는 높은 건물과 크고 작은 집들이 즐비하며, 많은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4. 여담

삼방동의 이름은 이대형의 가족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대형의 큰아들 이우두는 아버지의 시신을 찾다가 왜군에게 살해 당했고 그의 조카딸은 왜군을 만나 절개를 지키기 어려워지자 스스로 물에 빠져 죽기를 택하였다.

사람들은 한 집안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났다며 이대형이 살던 관천재가 있던 마을을 세명의 꽃다운 사람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삼방이라 붙여졌다.

충무공 이순신의 현손인 부사 이봉상1708년 「주지(州誌)」를 보다가 송빈의 공적을 발견하고 너무 감격하여 충렬사(忠烈祠)를 짓도록 건의하였다고 한다.

송빈의 아우 송관(宋寬), 송우(宋宇), 송주(宋宙)또한 임진왜란에 참여하여 진주성, 창녕성에서 분전하다 순절하였다.

진주성으로 도주한 김해부사 서예원은 이후 진주성 전투에서 가족들과 함께 전사한다.

5. 관련자료

"나라의 은혜를 입고 살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 - 송빈·김득기·이대형·류식 임진왜란 때 김해를 지킨 충신 4인방 사충신
고인돌 위에 세운 임진왜란 의병장 비석
송빈
[1] 중군도총[2] 김해부사 (전투 도중 달아났다.)[3] 초계군수 (전투 도중 달아났다.)[4] 제3군 소속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 오토모 요시무네와 달리 모리 카츠노부는 제4군을 이끄는 사령관이었다. 그럼에도 3군과 함께 김해에 상륙한 이유는 4군의 주력인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가 집결이 늦어져 제 시간에 합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리 카츠노부는 한성까지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과 동행해야 했다.[5] 참고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병력 집결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배까지 돈 주고 빌려 타 음력 5월 3일에야 부산에 상륙했는데 이날은 한성이 왜군에 함락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