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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08:04:05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 공연 압사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사건 정황3. 사고 이후4. 유사 사고5. 여담

1. 개요

1992년 2월 17일올림픽체조경기장(현 KSPO 돔)에서 뉴 키즈 온 더 블록내한 공연을 하던 중에 일어난 압사 사고.

2. 사건 정황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90년대 초 월드 투어엔 대한민국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1992년 2월 17일에 서라벌레코드[1]의 초청으로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내한 공연을 진행했다. 뉴키즈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이전 마지막 메이저 팝스타 세대를 장식한 팀이기도 하다. 현재와 같이 K-POP이 음원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메가히트를 이루고 듀스, ZAM 등이 데뷔하면서부터이며 이듬해인 1993년 이무송의 '사는 게 뭔지', 김수희의 '애모'를 끝으로 트로트는 서서히 하향세로 접어들고 김건모의 2집 '핑계'가 대히트를 하면서 음원 시장은 완전히 K-POP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공연 안전에 대한 개념이 미비했기 때문에 주최측의 안일함과 팬들의 무질서함이 겹쳐서 결국 여고생 한 명이 숨지고[2] 약 50명이 기절하거나 부상하여 병원으로 실려가는 참사가 일어났다. 공연은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최측에서 안전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지 않고 관객을 한 명이라도 더 받을 욕심에 무대 바로 앞까지 빽빽하게 관객을 받은 것부터 문제였다. 게다가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공연 시작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아 관객들이 기다리다가 지쳐 불만을 터뜨리며 항의하는 등 공연 전 분위기도 안 좋았는데, 마침내 이들이 등장하자 흥분한 뒷자리 관객들이 한꺼번에 무대 쪽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앞자리 관객들이 쓰러지고 밟히며 눌리는 등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이 소식이 그날 저녁 TV로 보도되자 놀란 부모들이 아이들을 찾아 공연 장소로 달려갔지만 21세기처럼 흔하게 휴대폰을 들고 다니던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가 삐삐를 쓸 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 아이 이름만 부르며 무작정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쓰러져서 신음하는 아이들에, 울면서 자기 아이를 찾는 부모에, 사태 수습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119 대원들에, 당시 9시 뉴스에 나온 화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부상자들이 실려간 후 중지되었던 공연은 재개되었고 이 사고로 1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을 당했다.#

3. 사고 이후

이 사고로 인해 인해 정부, 학교, 부모 등 기성세대는 큰 충격을 받았고 며칠 동안 신문, 뉴스 할 것 없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겨레신문 독자 코너에서는 한 교사가 정부의 상업성과 집단 이기주의 조장이 큰 피해를 불렀다고 지적하였다. 이 기사는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공연 중 안전 조치에 불성실한 사업자 및 이를 감시, 감독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면 모를까 '상업주의'에서 '극단적 이기주의', '향락주의'로 넘어가는 논지가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 생뚱맞아 보이지만 사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문화예술, 특히 상업적 문화예술에 대한 비용 지불을 곱게 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고 특히 외국 예술인의 방한 공연 등에는 '귀한 외화를 쓸데없는 데 내다버린다'는 비판이 항상 따라붙었다.[3]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방한 공연 역시 공연 중 대참사와는 별개로 애초에 내한 공연 계획이 발표된 직후부터 "무슨 외국 가수를 큰 돈 주고 불러오냐, 돈(그것도 소중한 외화인 달러)이 썩어나냐, 미친 짓거리다"라는 비판이 사회에서 전방위적으로 터져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안 그래도 달갑잖은 공연에 청소년들이 열광하고 기꺼이 고가의 티켓을 사서라도 공연을 보러 몰려들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애들이 타락했다, 퇴폐적 서구 문화에 빠져들었다"는 개탄도 함께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안 그래도 안 좋게 보고 벼르고 있던 사람들이 많던 공연에서 대형 안전사고로 사망자까지 발생하니 말 그대로 온 사회가 달려들어 여론의 뭇매를 치게 된 것이다.

90년대 초반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무조건 타락한 청소년들(말하자면 버릇 없고 개념 없는 요즘 애들)의 잘못이라고 욕하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교육계에서 아이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니 저런 것에 빠져든 것이 아니냐"고 구조적 책임과 개혁 필요성을 논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꽤나 개방적인 관점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모 종교 만화지[4]에서 연재된 한 명랑 학습만화에서도 일상 파트에 이 사건이 언급될 정도였다. 사망자까지 나온 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에서 해당 사건을 희화화해서 개그 소재로 써먹기도 했다.[5] 한 마디로 완전 총체적 난국인 참사였다.

한편 인터넷 상에는 이 사건 당시 소녀팬들이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서 집어던졌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이 소문은 1969년에 있었던 클리프 리처드 방한 공연 때 벌여졌던 광기의 업보라고 할 수 있겠으며 무질서로 압사 사건이 벌어진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그런 일이 없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 가야할 일이 있다. 클리프 공연 때 여성 팬들이 무대 위로 팬티를 던졌느니 속옷을 던졌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꽃과 손수건을 던졌고, 일부 팬들은 미리 준비한 선물 보자기를 던지기도 했다. 선물과 손수건 등은 우리 주최 측 사람들이 모두 수거를 했기 때문에 팬티를 벗어 던졌다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임을 입증 할 수 있다.
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5> 클리프 리차드 한국공연 소동

이 사건으로 인해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초청해서 공연을 추진한 서라벌레코드 대표 홍현표가 구속되었으며 서라벌레코드도 9월 23일에 부도나고 2004년에 완전히 폐업했다. 다음달에 잡혀 있었던 잉베이 말름스틴의 내한 공연은 취소되고 방한 기자회견으로 대체되었으며 같은 해 폴라 압둘의 내한 공연은 학생의 경우 학부모 동반 관람으로 치러졌으며 1992년에 추진하기로 계획되었던 마이클 잭슨의 내한 공연도 이 사태로 인해 취소되었다가 4년 후인 1996년에야 비로소 성사되었다.[6]

4. 유사 사고

5. 여담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청소년이 즐길 만한 한국 문화가 없었다.'[7]는 평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할로윈과 같은 젊은이들이 즐길 명절이 대한민국에 몇 없었다는 점이 공통점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 사고로부터 30년 후에 이태원 압사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이 사고가 언급되기도 했다.


[1] 노찾사 1집과 신촌블루스 2~3집, 현진영 1~3집, 시나위 1집, 백두산 1~2집 음반 등도 이 회사에서 나왔다. 그러나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음반은 주로 지구레코드가 수입했다.[2] 사고 당일 중태였으며 32시간만인 19일 새벽에 요절했다. 참고로 그녀는 서울 청담고등학교 초대 입학생이었다.[3] 이는 수년이 지난 후인 IMF 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아서 당시 영화 타이타닉은 미국 배급사의 직접 배급이었기 때문에 관람 반대 운동이 펼쳐졌는데 한국 영화 점유율이 떨어지던 시기에 스크린 쿼터제를 통해 한국 영화 의무상영 기간을 늘리려고 했던 영화계의 움직임과 맞물렸다.[4] 하지만 종교 계열이라 그런지 '그럴 줄 알았어...'라던 반응도 많았다.[5] 대표적인 예로 1992년 2월 24일자 KBS2 <한바탕 웃음으로> '봉숭아학당'에서 반장 역의 배동성이 인사 전에 언급했다.[6] 미국 정부 차원의 공연 허가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이 외교문서로 드러냈다.#[7] 뉴키즈 사태는 훗날 아이돌 산업을 부흥시킨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불과 한 달 전쯤에 일어난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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