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전투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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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다대포진성 전투 多大浦 戰鬪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 1592년 (선조 25년) 5월 23일 ~ 24일 (음력 1592년 4월 13일 ~ 4월 14일)[1] | |
장소 | 조선 경상도 부산 다대포 | |
원인 | 부산진 함락 후 일본의 다대포 진공 | |
교전국 | 일본 (공세) 승 | <rowcolor=black> 조선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 지휘관 윤흥신 † 윤흥제 † |
병력 | 일본군: 18,700 명 | 조선군: 약 800 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방어군 전멸 |
결과 | 일본의 승리 | |
영향 | * 다대포 진성 함락 * 동래성 전투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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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중인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부산진 전투 끝에 부산을 함락하고 다대포와 서평포를 공격하였는데 다대포를 지키는 장수는 다대포 첨사[2]인 윤흥신이었다. 참고로 윤흥신은 중종 ~ 명종 때의 권신인 윤임의 아들로, 을사사화 때 아버지가 역적이 되어 멸족당할 때 너무 어려서 노비로 살 수 있었으며 수십년 뒤 선조가 윤임을 신원하면서 자신도 노비에서 풀려나 무신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다.2. 다대포 전투의 전개 및 결과
징비록이나 윤흥신 비문에 의하면 4월 13일[3]부터 서평진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치러 처음에 격퇴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지연시켰으나 4월 15일에 일본군이 대규모로 몰려오면서 전세가 뒤집어졌다. 윤흥신은 800명의 병력으로 열심히 싸웠지만 스무배가 넘는 적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고 결국 다대포가 함락되고 말았다.[4] 윤흥신은 일본군을 격퇴한 날 부하가 그에게 피하라고 했으나 이를 듣지 않고 다음날 나가 싸우면서 전사[5]하였으며 그의 이복동생 윤흥제[6]도 이복형을 따라 싸우다 전사하였다고 한다.3. 여담
현재 다대1동 행정복지센터 옆에 제사를 올리는 '윤공단'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윤흥신을 기리는 곳이다.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충렬사도 원래 송상현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송공사'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충렬사로 개명되고 정발, 윤흥신의 위패도 같이 모시게 되었다. 다대포진성 전투와 첨사 윤흥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무려 171년이 걸렸다. 영조 때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우연하게 다대포진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접하고 조정에 알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과 대조하면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