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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5:39:30

동양의학/역사 및 서적

1. 개요2. 역사
2.1. 중의학
2.1.1. 근현대
2.2. 한의학
2.2.1. 현대
2.3. 일본(캄포의학)
2.3.1. 근현대
2.4. 티베트 의학2.5. 아유르베다2.6. 이슬람
3. 서적
3.1. 중국3.2. 한국
3.2.1. 삼국시대3.2.2. 고려시대3.2.3. 조선시대
3.3. 인도3.4. 티베트3.5. 이슬람

1. 개요

본 문서는 중의학, 한의학, 아유르베다, 티베트 의학, 이슬람 의학을 비롯한 동양의학의 역사와 근대 이전에 작성된 동양의학 서적에 대해 다룬다.

2. 역사

2.1. 중의학

중국의 전통의학은 흔히 중의학(中醫學)이라고 부른다. 중의학의 근간이 된 경락학설은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성립하였는데,[1]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황제내경상한론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체계를 갖추었다.

이후 외부와의 교류를 거친 중의학은 송나라 때에 역대 의서가 총정리되면서 학문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고, 금나라, 원나라 시대에 등장한 4명의 의가[2]를 거쳐 더욱 발전하였다. 어느 정도냐면 현재 시행하는 상당수의 처방법이 이 시대에서 비롯됐다.

청나라 때는 외국인의 왕래로 새로운 질병이 퍼져나가 전통의학만으로 치료가 힘들자, 현대의학을 전통의학과 접목시키는 중서회통파가 등장하고, 새로운 이론에 근거하여 유행병을 치료하는 온병학이 시도되었다.

아무래도 한의학이 본래 한(漢)의학이라 불리기도 했고, 유럽에서도 동아시아 전통 의학을 TCM[3]으로 보기도 하는 만큼, 압도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다. 완전히 해석되어 번역된 것들을 제외하면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자료 해석도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특히 황제내경처럼 요즘에는 새로 뜨는 이론들에 밀리는 감이 있는 이론이 주요 이론이 되어 다른 문화권으로 주로 전파되어서 다른 동아시아 문화권은 마음대로 자료를 구하기도 힘들다.

2.1.1. 근현대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벌어지던 당시, 마오쩌둥은 돈 없고 힘 없던 환자들이 한방치료로 건강을 되찾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당시에 전쟁중이고 의료인프라도 나빠서 서양식 약을 충분하게 공급하기 어려웠는데[4] 한의학이 유용한 대안일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중국공산당중국국민당을 제압하고 전 중국을 통일하자 마오쩌둥은 전통의학을 중의학(中醫學)이라 부르며 대대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에 힘입어 국제적으로 한의학에서는 중의학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서양에서 한의학을 주목하기 시작한 이유도 중국 때문이다. 냉전시대 핑퐁외교 당시에 미국의 고위 인사가 중국에서 충수염(맹장염)으로 수술을 받는데, 침술을 통해 마취를 한 일이 미국 일간지에서 보도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현재 국의대사와 같은 국가 명예직 노중의 제도가 있고, 국의가 되면 그 밑에 도제식 교육을 통해 처방과 치료성과가 후대로 전수되게끔 한다. 상한론의 유도주 등이 국의 대사로 대학에서 강의하거나 그 성과가 곧바로 출판되는 등, 여러모로 공헌을 하고 있다.

현재 RCT와 같은 이중맹검법과 sham침을 활용한 논문들 중, 메타 분석을 이용하여 침의 효과를 밝힌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침은 비용이 싸고 안전하여, 권고할 만한 치료법으로 등재된 경우가 제법 많다. 다만 이중맹검에서 sham침이 피부를 찌르기 때문에 실제 플라세보로 불리기는 어렵다는 서양의 침 연구자들의 의견도 있다.[5]

중국은 서의사와 중의사로 제도를 분류한 이원화 체계이나, 서로의 의료영역 침범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중의사들만큼은 아니지만 서의사들도 양약의 대체로 중약제제를 상당히 많이 활용하며, 오히려 현재 중국에서는 서의사들이 중약을 중의학식 변증 없이 사용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의사들이 한의학에 접근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기 때문에, 의사들 역시 다양한 이유로 침이나 뜸, 한약을 사용한다. 대개 현대의학적 치료만으로는 어려움을 느끼는 양약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환자들, 증후군 성향을 지녀서 양약을 다량 처방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는 경우, 만성 질환 및 노인 질환, 현대의학적 치료의 가격이 높은 경우 등에 한의학적 치료를 사용한다.[6]

한편 중의학은 현대 의학과의 연계를 통해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대륙의 기상으로 다양한 기구를 지금도 만들어내며, 경혈도 계속 찾아내고 있고 새로운 치료법도 계속 시도하고 있고 이러한 치료법 중 괜찮다 싶은 건 한국에도 수입된다.

중의사는 대략 한국의 한의사의사가 7:3 정도로 섞여 있다는 느낌이다.[7] 중의병원 내부에서 진단검사의학이나 영상의학 등의 서포트 파트는, 순수 중의가 아닌 현대의학을 배우고 세부분과과목을 전공한 의사[8]가 서의습중의(西醫習中醫) 과정이라는 2-3년의 추가교육을 받은 이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중의사는 진맥비를 따로 받는다.

중국 정부 주도하에 여러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한국에서도 SCI급 학술지에 실릴 만큼 제대로 된 연구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아직 표준화 문제와 적은 연구비 등으로 인하여 제약사항이 많다. 그러나 중의대 1곳에 1천억, 전체적으로는 몇 조가 되는 연구비를 중의학 연구에 쏟아붓고 있으니 곧 이른 시일 내에 가시적 성과가 나올 전망이다. 왜냐하면 중국이 중의학을 세계화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한국의 경우, 엄격한 논문 검증 과정을 거친다. 물론 중국내에서도 한양방논쟁이 없지는 않아서 일선의사들이 중의학을 사이비라고 폄하하고 다닌다는 일이 있기도 하기때문에 사회적으로 논쟁거리가 되는것은 한국과 마찬가지이며,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후반부터 지속되어온 해묵은 논쟁거리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20세기 중반기까지 중국의 서양식 의료보건체계가 많이 열악한데다가 의료체계가 정비된 현대에 와서도 중국의 병원의료체계가 서방선진국에 질적인 측면에서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는지라 보완용으로 쓸만하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 중의학을 계속 밀어주고있다.

중국 내의 연구 결과 99프로의 결과가 긍정적이라고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해당 사실이 있는 논문을 읽어본 적이 있는지가 의문이다. 해당 분석에 쓰인 대조군의 대다수는 가짜침과 아예 치료를 하지 않은 경우이다. 다시 말해 진짜 침술이 가짜 침술이나 아예 처치를 하지 않는 경우와 비교해서 효과가 있다고 하면 문제라는 말이다. 처음부터 효과가 없다고 결론을 지어놓고 보니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

최근 메타 분석들은 중국뿐 아니라 북미에서도 연구가 되며 계속해서 침에 관한 연구가 나오고 있는 중이며 한의학 외에 많은 전통의학이나 대체의학과의 교류도 넓혀나가고 있다.

2.2. 한의학

삼국시대 이전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이에 따라 삼국 시대의 의학에 관련된 기록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신라군이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 싸울 때 병참 보급품으로 우황, 인삼 등 약재를 갖고 다니거나 머리카락, 자석 등 응급처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물자를 운용하기도 했으며, 나당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사 최초의 국립의과대학인 '의학(醫學)'을 효소왕 재위기인 692년 설립해 의료인을 배출하는 산실을 일구었다. 신라의 의학에서는 본초경(本草經), 갑을경(甲乙經), 소문경(素問經), 침경(針經), 맥경(脈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을 기초 교재로 삼고 2명의 박사를 두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본의 옛 역사 기록에 백제신집방, 신라법사방신라백제의 처방이 기록되거나 의사의 행적이 기록된 것을 찾을 수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당시 의술은 불교도교의 영향을 받아 주술적 행위와 혼합되어 시행되었으며, 일본에서 의학을 집대성할 때 바다 건너 한국의 처방을 일부 소개할 정도로 한국 의학의 인지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도 의학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의서, 약재의 수출과 수입이 다양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작성된 향약구급방은 현재까지 존재하는 의서 중 가장 오래된 책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한국의 한의학은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서, 세종 대에는 당시 국내에 존재하던 처방을 모두 모은 향약집성방이 완성되었으며 당시 의학의 백과사전 격인 의방유취 또한 세종조에 만들어졌다. 의방유취는 양이 방대하여 현재 조금씩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작업은 역시 동의보감이었으며, 이후 한국의 한의학은 이론의 발전보다 대중화를 초점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다 19세기 말 사상의학의 등장으로 한국의 한의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구한말 현대의학이 들어오면서, 한의학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현대의학을 수용하면서 점진적으로 현대의학으로 이행시킬 기회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경성의학교 교장이자 종두법을 최초로 소개하고 시행한 지석영한의사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한국 한의학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한의학을 시대에 맞지 않는 의학으로 생각하였으며[9] 한의사들은 의생으로 격하되었으며, 현대의학과 한의학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 또한 격렬하였다.[10]

일제강점기에는 서양의사가 부족해 기존 의료인력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기존에 존재하던 의생을 적극적으로 없애려고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점진적으로 새로운 의생의 배출은 억제함으로써 도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11] 이로 인하여 의생 규칙이 시행된 지 1년 뒤인 1914년 말 당국에 등록된 의생 수는 5,827명이었는데, 해방 직전인 1943년에는 3,337명으로 30년 사이에 40% 이상 감소했다.

2.2.1. 현대

해방 이후에 잔존한 의생들이 모여 의생협회를 설립하고 동양학관이라는 한의학 강습소를 설립하였고, 1951년 국민의료법에 의원(醫療, 의사), 치과의사를 1종, 한의사(漢醫師)를 2종의료인으로 구분하였다.1962년 이래 이러한 구분은 사라졌다.

한의사와 의사의 "사"자의 한자표기가 국민의료법 제정 과정에서 처음에 한의사를 漢醫士로 다르게 표기했던 것은 맞았다. 그러나 제2독회 과정에서 漢醫士가 漢醫師로 바뀌었다. 법제처 국민의료법. 또 흔히 잘못 알고 있듯 '士' 자가 비하의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의사를 규정한 법률인 대한제국 '의사규칙(醫士規則)'에서 의사를 醫士로 표기하고 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학교정비령에 따라 동양의학관이 폐교위기에 몰렸으나 로비로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그러나 1963년 경영난에 빠져 폐교 위기에 처하고, 동양의과대학은 이후 경희대학교에 흡수 합병되어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이 되었다. 이후 경희대는 한의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한의학과와 한약학과, 한방재료가공학과 등 학과도 다양하다. 근래에는 한의학과 현대의학의 융합을 추구해 경희의료원에 의사와 한의사가 동시에 진료하는 동서(東西) 협진센터도 운영 중에 있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의학을 발전시키려 노력 중이다.

2.3. 일본(캄포의학)

일본의 고대 한의학은 '캄포의학[12]'으로 불린다. 7세기부터 9세기 사이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들이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대륙에서 전수받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5세기 초에 한반도에서 의사가 온 기록이 있으나, 일본의 한의학 보급에 실질적으로 관여한 부분은 없다. 또 대륙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와 그걸 기록한 서적이 원활하게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한나라 시대의 상한론을 기초로 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타게된다.

본격적으로 일본의 한의학이 발전한 건 16~17세기 이후로, 명나라 유학파인 의사 타시로 산키(田代 三喜)와 제자 마나세 도산(曲直瀬 道三)이 금원의학(金元医学)을 보급하면서 의학과 종교의 분리가 이루어진 뒤부터이다. 이시기의 의학을 '후세파'라고 부른다.

한편 상한론을 중시하던 '고방파' 측에서는 음양오행론같이 실증성이 부족한 추상적인 개념을 들고 온 후세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또 외부 세력, 즉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양 의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같은 16세기에 초기 서양식 병원이 설립될 정도였다.[13]

18세기의 요시마스 도도(吉益東洞)는 그러한 일본의 한의학 역사에서도 큰 획을 그은 사람으로, 상한론 연구의 대가였으며 이후에 그 아들이 일본의 독자적 이론인 기혈수 이론 등을 수립하였다. 그 외에 18세기에는 서방의학의 영향을 받아 해부학, 마취학 등이 발달하고 있었다. 사형수를 해부한 장지는 다소의 오류는 있으나 옛 해부 이론의 오류를 지적한 '해부서'로 꼽힌다. 거기에 일본에는 네덜란드 해부학 서적번역해체신서도 있었다.

동시대 인접국가의 경우 청나라 왕청임이 쓴 의림개착이 거의 유일한 해부서이고, 조선은 없었다. 실제로 한의학에서 사용되던 그림 등은 '해부도'가 아니라 장부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그림으로 설명한 개념도에 가까우며, 실제 기능도 이러했다. 하지만 '해부학'이라는 의학의 한 부분을 그저 어리석은 사람들의 삽질로 치부하고 아예 무시하였다.

조선통신사가 방문할 때 일본의 의가 중 하나였던 기타야마쇼우와 조선의 의사였던 남두민의 대화는 양국의 의학 발전에 있어서 후대, 특히 한의대생들로 하여금 어이가 없어할 정도로 인식과 개방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시였다. 대화는 다음과 같다. 기타야마 쇼우가 "우리나라 어떤 의원이 죽은 사람의 배를 갈라 장기 등을 자세히 살피니 옛 그림과 다른 부분이 많더라. 이를 교정하고 도 지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고 하자 남두민은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고 꾸짖듯 대답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한의학의 경우 고대부터 상한론을 금과옥조로 떠받든다는 잘못된 사실이 퍼져있다. 사실 17세기경에 화란 의학이 전래된 이후로, 그 이전까지의 내경의학과는 별도로 상한학파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요시마스 도도와 같은 경우에는 우리나라의 이제마와 같은 독특한 이론을 설파한 존재로 여겨진다. 실제로 상한학파가 융성하였다 하더라도 일본 한의학에서도 3체질론이나 기타 내경계열 의학자들은 계속 있어 왔으니 이는 사실무근이다. 일본 내 시판중인 한약제제의 원전은 만병회춘 등의 명대 의서인 경우가 많다.

2.3.1. 근현대

근대에 이르러 메이지 정부에서 군사 목적으로서의 의학의 수요가 커지게되고 한의학을 배제하였다. 1874년 의사면허제도를 지정했을때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에게만 의사자격을 주고 기존의 한의사들에게 자격증을 주지않았다. 이 때문에 한의학이 구세대의 산물로 여겨지며 한 동안 쇠퇴하였다. 다만 침구사 제도는 시각장애인의 얼마안되는 생계 수단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존속했고, 또한 양방만으로 해결할수없는 질병에 대한 수요도 있었던지라 한의학 자체를 완전히 배제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일본에서 한의학의 위치가 급속히 퇴락한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후로 의사들이 전문의 과정과 같은 느낌으로 한의학을 공부하며, 이 때문에 의학적 관점에서 한의학을 탐구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한의학이 어느정도 복권이 되기 시작한것은 1930년대부터의 일이고 1950년대에 와서는 그 흐름이 확연해졌지만 역시 한국이나 중국, 대만만큼의 위상은 못된다.

한의학 연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의사가 한의학 연구를 통해 한약 처방을 내릴 수 있게 하고 내부적으로도 1950년 일본동양의학회를 수립하였다. 이후 1976년에는 한방Ex제제[14]의 보험 적용을 계기로 일본 한의학은 제도권에 공식 진입하고, 1991년에는 일본동양의학회가 일본의학회에 공식 가입함으로써 완전히 의학으로 다시 인정받게 된다.

현재 일본 제약시장에서 한약제제가 차지하는 비율은 2% 정도이다. 일견 상당히 낮은 수치이나 일본의 한약제제들은 한국의 첩약과는 달리 일반의약품보다도 싼 저가의 약품들이며, 여러 종류가 함께 처방되는 양약과 달리 대개 단일 처방되기 때문에 그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실제로 일본 동양의학회에서 연구한 내용 중에서 동일한 질환에 비슷한 효과를 내는 양약과 한약을 비교했을 때 한약의 의료비 절감 효과가 더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가 제법 된다.

현재도 일본에는 한의학을 연구하는 의사들이 많다. 단, 미국도 그렇지만 일본 내에는 침구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어서, 은 침구사들이 주로 사용하고 의사들은 주로 한의학 중 한약을 많이 연구한다. 일본 한약들은 주로 탕제보다 엑스산제를 많이 사용하는데, 산제 특성상 주로 며칠 내에 치료 효과를 보는 것보다는 1-2개월 이상 장기복용시키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한약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인정을 받는 편이다. 따라서 8주, 12주, 32주 이상의 장기 복용이 선호되고 있으며 부작용도 특별히 보고된 바가 없다. 소시호탕과 같은 일부 약재가 간염 치료에 있어서 면역 글로불린과 병용 투여 시 폐렴 발생 등이 보고된 정도다.

2009년 일본한방생약제제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의사 중 80% 이상이 한약을 처방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주로 한약처방이 쓰이는 부분은 산부인과, 외과와 부정수소, 갱년기 장애 같은 부분이라 한다. 다만 한약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수의 의사(16.5%)는 진단과 사용의 어려움, 증거의 부족 등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진단의 경우도 47.8%가 현대의학식 진단법을 사용하며, 서양 의학 진단을 기본으로 한방도 고려한다는 응답도 36.1%로 나타났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 약사일보 기사 참조.

이를 살펴보면 일본에서는 한약제제를 통해서 보완대체의학으로서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한의학이 자리를 잡았다.

재밌는 점이라면 일본 한의학의 4대가로 불리는 유모토 큐신(湯本求眞), 오오츠카 게이세츠(大塚敬節), 야카즈 도메이(矢數道明)는[15]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의사 출신으로서 한의학을 부흥시킨 인물들이라는 점. 여기서 출발하여 현재 일본 한의학을 재정비하고 토대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의사들이고, 한약제제 급여 활성화 및 한방 EBM 연구를 진행한 것도 모두 의사들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일본에서는 한약 처방들 중 여러 처방이 일본 내과 메뉴얼집에 근거가 있다고 판정이 되어 실리고 있고, 일본 의대 교과서에도 한약물에 대해 나오기도 한다. 때문에 일본 한의학 자료들은 국내에도 번역이 많이 되어있다. 주로 경희대학교 조기호 교수가 번역하여 출판이 되었는데, 일본 동양의학회의 공식 자료들과 기타 한방 전문의들의 저서들도 국내에 들여왔다. 또한 이러한 출판물의 다양화 덕으로 현대 중의의 고방파의 발전에도 도움을 주었다. 중의 고방파의 대표적 인물로 황황 교수가 꼽히는데 이분의 저술의 상당 부분이 일본의서를 참고해서 이룩한 결과다.

한국 한의학 연구원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일본 종합병원의 80%가 넘는 곳에 한방과가 설치되어 있으며, 한방약은 내과의사나 혹은 한방 전문의에 의해 투약되고 있다. 일본 교포 등에 의하면 "한약인지 모르고 처방을 받아서 먹어보니 무슨 가루약 등이 들어있더라"라는 말을 한다. 이만큼 이미 일본에서 한방은 토착화되어 있어, 현지에서 구분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국내에서는 일본의 한의학이 황한의학이라고 불린다고 퍼져있는데, 이는 근대일본의 한의사 유모토 큐신(湯本 求真)의 서적 「황한의학(皇漢医学)」에 대한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한자 표기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 제국을 뜻하던 황국(皇国) 한방의학의 줄임말에 불과하며, 그냥 똑같이 한방의학(漢方医学:かんぽういがく:칸포우이가쿠) 또는 줄여서 한방(漢方:かんぽう:칸포우)[16]라고 부른다.

2.4. 티베트 의학

티베트 의학 문서의 "역사" 문단 참조.

2.5. 아유르베다

아유르베다 문서의 "개요" 문단 참조.

2.6. 이슬람

이슬람 황금기 당시 이슬람 세계의 의학 기술은 동시기 서유럽, 동로마를 압도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중세 이슬람 의학은 당대 및 후대의 서구 의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세한 사항은 이슬람 제국 문서의 '의학' 문단 참조.

3. 서적

3.1. 중국

한국처럼 상당수의 서적과 자료들이 소실 및 훼손되어 그 장대한 역사에 비해 온전히 보존된 서적이 많지는 않다.

3.2. 한국

3.2.1. 삼국시대

3.2.2. 고려시대

3.2.3. 조선시대

3.3. 인도

3.4. 티베트

3.5. 이슬람



[1] 이에 대한 내용이 마왕퇴 한묘에서 발굴되었다.[2] 흔히 금원사대가라고 부른다.[3] Traditional Chinese Medicine[4] 의사인 노먼 베순도 의약품 부족으로 패혈증을 제때 치료하지못해 세상을 떴을정도였다.[5] 한약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이중맹검법이나 무작위 대조군 연구를 시행해서 효과성을 보인 처방이 다수 있다.[6] 그래서 중국의 서의대나 일본 의대 모두 한방 관련 교육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일본 의대의 경우 일본 의과대학 학장들의 협의로 16시간 이상의 한방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실제 80개 대학 중 60개 이상이 16시간 이상의 한의학 교육을 받고 있다. 이 수치는 웬만한 한의대의 기초 의학 교육과 비슷한 수치다.[7] 위에서도 언급했듯, 실제 권한으로도 한국의 의사 권한을 포함해서 갖고 있다.[8] 중국은 아직 전문의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다.[9] 일본으로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최신 지식인 현대의학을 조선인에게 교육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요 거점도시 위주로 일본인들의 진료를 위한 현대의료기관을 설립하고, 산간벽지나 오지에는 기존 한의사들을 활용하여 의생이라는 이름으로 의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일본이 한국에 현대 의학이라는 신식 문물을 "베풀어'' 줌으로써 호감을 얻음과 동시에, 한국 의학계를 일본이 독점하려는 의도 역시 숨어있었다.[10] 의생으로 격하된 것이기도 하지만, 의사라는 명칭은 현대의사들이 도입되면서 시작된 용어이며 이전에는 의원이라고 주로 불렸다. 공무원인 의원에서 해고된 상태로 그냥 일반 의생으로 바뀐 것이고 새로운 현대의학을 학습한 의료인을 의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11] 일본 본토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50여 년 이상 새로운 전통의사 배출을 막아서 수요와 공급이 자연스럽게 소멸하였다.[12] '캄포'는 '한방'의 일본식 발음이다.[13] 다만 이 시기엔 서양도 근대적인 해부학, 생리학과는 거리가 먼 4체액설을 따르는 갈레노스의 의학을 기초로 하였다.[14] 지금도 과립상 Ex제제의 생산 품질은 일본이 좀 더 뛰어나다. 일본의 엑스산 제품 질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국내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현재 국내 한약재의 품질기준치가 명확치 못하여 같은 이름이 붙은 약재라면 모두 같은 취급을 받아 고품질한약재의 사용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 한 문제이고, 이외에 한의원에서 사용하는 엑스산제와 약국에서 사용하는 엑스산제의 구분을 인위적으로 시켰다는 문제도 있다. 한의원과 약국 간의 구분을 위해 약국에 공급되는 엑스산제는 한약전체를 한꺼번에 전탕하여 산제를 만드는 방식을 취하고, 한의원의 엑스산제는 한약탕제를 구성하는 각 약물을 각각 산제를 만들어 이를 비율대로 섞는 방식을 취한다. 이 경우 나중에 특정 약물을 추가하여 약제 구성을 할수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한약이 섞여 탕전되면서 생기는 합성의 효과를 무시하는 문제가 생긴다. 또 현재의 엑스산제는 부형제를 포함시키도록 되어 있는데(보통 부형제 70% 약물 30%정도) 이 때문에 1회 복용량이 쓸데없이 많아져 복용 시 불편하고 심한 경우에는 소화장애 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문제점을 개선한 백산제(일본엑스제와 같은 방식)도 현재 나와 있으나, 제작 비용 때문에 늘어난 비용을 건강보험 측에서 인정하지 않아 비용 문제로 보험 적용이 현재 되지 않고있다.[15] 나머지는 요시마츠 도도[16] 한약(한방약)을 부를 때도 이렇게 줄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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