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 | |||||||||
19세기 초반~19세기 중반 |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 20세기 후반 | 21세기 | 한계와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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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틴아메리카는 16세기 에르난 코르테스를 위시한 이베리아의 콩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잉카와 마야, 아즈텍, 기타 중남미 원주민 문명들의 멸망한 이후 줄곧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가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힘이 약해진 19세기 초 대부분 지역이 독립했다. 라틴아메리카 각국은 독립 후 저마다의 정치적 발전과정을 겪었으며 공통적으로 20세기 초 미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최후의 스페인령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였던 쿠바 또한 미국-스페인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세력권에 들어갔다.사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남북으로 1만 3,000km, 동서로 5,000km, 육지 면적 2,000만㎢[1]에 달하는 거대한 지역이고 인종구성과 지형지리에서 서로 상이한 지역이므로 서로 발전 과정도 상이하여[2] 하나의 '지역사'로 묶고 일반화하여 서술하기가 힘들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라틴아메리카는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언어(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를 쓰고 경제적으로 1차산업 의존이 상당하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서로 다르다.[3] 그러므로 본 문서의 내용과 하위 문서는 이러한 한계점을 유념하고 읽어내려야 한다.[4]
라틴아메리카로 분류되는 나라들은 20개, 속령은 14개 있지만 그 중에서 브라질, 멕시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가 가장 중요하다. 이 네 나라는 2023년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GDP의 70%, 인구의 67%를 차지하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문화 각 부문에서 핵심적인 나라들이었다.[5] 그러므로 19세기 이후 라틴아메리카 역사 전반을 훑으려면 브라질, 멕시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에 중점을 두고 나머지 국가들은 부수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옳다.
2. 독립 원인
19세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차례로 독립한 원인은 4가지를 요약할 수 있다.- 크리오요에 대한 페닌술라레스의 차별 등에 의한 크리오요들의 불만
- 지배국이었던 대영제국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미국 독립 전쟁
- 기존의 질서를 몽땅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이티 혁명
-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본국(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왕국). 이로 인해 스페인 제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2.1. 태동
스페인 식민지의 인종별 계급 | |
페닌술라르 (이베리아 반도 출신 귀족) | |
크리오요(=크레올) (페닌술라르의 후예) | |
메스티소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 | |
물라토 (백인과 흑인의 혼혈) | |
인디오(=아메리카 원주민) | |
아프리카 흑인 노예 |
대항해시대 콩키스타도르, 반데이란치스들이 아메리카 대륙 각지를 정복한 것을 계기로 아메리카 대륙 상당부분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치/사회/문화가 해당 지역에 이식되면서 해당 지역은 이른바 라틴아메리카로 불리게 되었다. 식민지는 본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운영되었다. 스페인은 식민지 내에서 자국 본토 지주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산업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올리브와 포도 재배를 제한한 것을 들 수 있다. 스페인은 미사용으로 사용되는 포도주 생산을 위한 소량의 포도 재배만 허락하고 그 이외에 포도와 올리브 재배를 완전 금지했는데, 당시 안달루시아 지주들의 주 수입원 중 하나가 올리브유와 포도주였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페인은 본토에서 라틴아메리카로 수출되는 포도주와 올리브유에 고율의 관세를 매겼다. 누에바에스파냐의 미겔 이달고 신부가 돌로레스 교구 내 농민들의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스페인에서 배워온 올리브와 포도 농사를 농민들에게 가르치자, 누에바에스파냐 식민 당국은 이를 제지하였고, 여기에 분노한 이달고 신부는 1810년부로 자신을 따르는 메스티소 10만여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의 상층 크리오요들은 '돌로레스의 외침'이 자신들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생각하여 식민 당국과 협력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하지만 후일 이들 크리오요들은 멕시코 독립의 주역이 되는데, 이는 라틴아메리카 각지의 독립은 현지 기득권을 장악한 이해 관계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 편 스페인 본토의 카디스 항구에서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로 수출되는 상품 중 스페인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된 상품은 드물고 이 가운데 대부분이 프랑스나 네덜란드, 영국 상품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력자들 입장에서는 스페인 정부가 식민지를 대상으로 이중삼중으로 물리는 관세를 내지 않고 유럽 여타국가들과 직거래를 트는 경우의 이익을 계산하고 영국 측과 접촉을 늘려나갔다.
브라질 식민지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브라질 식민지를 운영하던 포르투갈의 경우 페닌술라르와 크리오요를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식민지 운영 및 무역으로 얻는 수입은 왕실이 독점하는 봉건적 구조가 유지되었다. 당연히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는 주식회사 등 근대적인 방법으로 투자와 운영이 이루어지던 네덜란드나 프랑스, 영국 식민지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18세기 브라질 금광 개발 붐이 일자 포르투갈 본토에서 엄청난 수의 인구가 인생 역전을 노리고 브라질로 이주하였는데, 이 가운데 금광으로 때부자가 되어 포르투갈 본토로 금의환향한 인원은 소수에 불과하였고 결과적으로 금광 개척에 실패해서 브라질에 잔류한 대부분은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1776년 미국의 독립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우리도 독립해야 하는 거 아냐?"라는 의식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1776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과 식민지 내 예수회를 전부 추방할 것을 명령하고, 이후 즉위한 카를로스 4세는 1805년부로 식민지의 성직자들의 여러 특권을 폐지했다. 당시 사회 인프라가 빈약하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성직자들은 교육계와 언론에 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축소시킨 스페인 정부에 불만을 쏟아내면서 라틴아메리카 사회를 동요시켰다.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은 크리오요와 페닌술라레스, 물라토와 메스티소, 흑인과 원주민 등을 그나마 서로 싸우지 않게 조정을 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스페인에서 이들의 권위를 축소시키자 가톨릭 성직자들부터 스페인 중앙 정부에 반항하기 시작했다.
성직자들 외에 라틴아메리카 주민들에게 독립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사람으로는 프로이센 왕국 출신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들 수 있다. 다재다능한 과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훔볼트는 1799년에서 1804년 사이 오늘날의 멕시코와 베네수엘라, 쿠바에 해당하는 지역을 여행했으며, 이어 여행에서 기록한 것과 수집해 갖고 돌아온 물건들을 수십 년간 공들여 연구했다. 훔볼트는 식민주의와 노예제를 공개적으로 비도덕적이라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초청해준 스페인 정부를 고려하여 삼갔지만 그렇기에 그의 냉정한 분석은 더욱 날카롭게 실상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평가받았다. 주로 프랑스어로 쓰인 훔볼트의 방대한 저작에는 에스파냐 식민지 멕시코와 쿠바에 집중된 두 개의 중대한 연구가 있는데, 이는 사회학의 초기 고전으로 꼽힌다. 멕시코에서 훔볼트는 권력과 부, 피부색 같은 복잡하고 다양한 기준에 따라 층을 이룬 사회에 대면했다. 그는 유럽에는 없는 사회 형태를 연구하면서 20세기 사회학에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는 계급과 종족 간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루었다. 다른 한편으로 쿠바에서는 (상술한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흑인 노예제가 지배적인 제도였다. 이는 훔볼트 이전에는 사실상 전혀 깊이 분석되지 않았다.
식민지의 현지 유력자 크리오요들은 본국 정부에서 자기들이 식민지를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그렇잖아도 매우 불만이었다. 이를테면 쓸데없이(?) 원주민 보호 조치 따위를 만들어 이것저것 걸리적거리게 하거나 말이다. 이미 스페인 지배 시절 번영하던 누에바에스파냐나 누에바그라나다, 페루 부왕령 같은 지역에서는 원주민 보호 조치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스페인 식민 지배 시절 저개발 상태였던 라틴아메리카 남부 지역이었다. 리오데라플라타, 코노 수르 일대의 크리오요들 입장에서는 원주민들을 싹 쓸어버리고 팜파스나 파타고니아 지역의 꿀땅을 개발하면 부자가 될 것이 확실한데, 괜히 스페인 본토에서 옛날의 약속을 들먹이며 원주민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막으니 열통이 터지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순순히 복종할 듯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노예 세력도 점차 일어나 크리오요의 특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투팍 아마루 반란에, 아이티 혁명 등 원주민이나 흑인 세력이 크리오요를 다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쓸어 버리려 했던 것까지, 똥줄이 타는 상황이 지나갔다. 본국의 보르본 왕조도 카를로스 3세 시대부터 시작된 개혁을 통해 식민지 출신 스페인인들의 세력을 확 줄여 고위공직자로 가는 길을 막기 시작하고 있었다. 페닌술라레스(이베리아 반도 출신 스페인인)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2.2. 대스페인 크리오요 반란
1800년 초반, 나폴레옹이 스페인에 침입하여 스페인 왕을 갈아치우자 식민지의 크리오요들은 왕이 없으면 민중이 권력을 돌려받는 것이라면서 자치회를 결성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 민중이란 크리오요 귀족집단을 일컫는 것이지 원주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원주민은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걸림돌로 여겼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원주민이 유럽인도 아니다. 이 땅의 합법적인 소유자와 스페인 침략자 사이 중간 쯤에 위치한 메스티소다. 태생으로는 아메리카인이며, 법적으로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소유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반면, 침략자에 맞서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갈등 상태에 놓여 있다."
여하튼 그런 흐름에 힘입어 남쪽의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산 마르틴이, 북쪽의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시몬 볼리바르가 등장한다. 산 마르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같은 이들이 만든 프리메이슨 조직 '로히아 라우타로'도 무시할 수 없다.볼리바르가 지휘한 그란 콜롬비아의 독립을 시작으로 1821년, 멕시코의 독립을 통해 크리오요들은 카리브해 지역을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페닌술라레스 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스페인 왕이 법으로나마 지켜주던 원주민 땅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토지에서 자유롭게 해 주겠다면서 말이다. 스페인 왕과 협약을 맺고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스페인 지배권 밖의 원주민(이를 테면 마푸체 민족)들은 토착화된 크리오요 세력의 확장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원주민의 삶은 스페인 왕이 지배하던 시대보다 더 힘들어지게 된다. 멕시코 작가 리우스(Eduardo del Rio "RIUS")는 2010년에 낸 독립도 아니고 혁명도 아냐(2010 ni Independencia ni Revolución)란 책에서 이러한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원주민은 오늘날도 금발벽안들을 '정복자'로 보며 믿지 않는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라틴아메리카 백인 입장에서 본다면 '독립혁명'이지만 원주민 입장에서 본다면 백인 귀족계급 내전에 지나지 않았다. 호세 데 산 마르틴은 라틴아메리카의 영웅이며 아르헨티나 5페소 지폐의 얼굴 마담이다. 하지만 볼리비아의 아이마라 역사학자 로베르토 초케 칸키(Roberto Choque Canqui)는 'Un hacendado mas(대지주 한 놈 더)'라 가볍게 정리했다.
라틴아메리카 반군은 스페인을 견제하려는 영국과 유럽세력 축출을 원하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싸울 수 있었다. 특히 영국 예비군(전시에는 영국군으로 복무하고, 평화시에는 연금 조금을 받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상당수가 독립군에 고용되기도 했다.
크리오요인 시몬 볼리바르는 1807년,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의 원대한 야망을 품고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의 희망은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 전체를 통일하여 미합중국과 같은 하나의 단일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어권 지역의 총 면적은 독립 당시의 미국보다 7배는 넓었다. 다른 한편으로 독립 당시 미국은 북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운하와 하천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어서 교통과 통신이 용이했던 것에 비해서 라틴아메리카는 고원 지대가 많은 것은 물론 하천 지대가 열대우림으로 뒤덮인 경우가 많아 교통이 불편하였다.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는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서로 회담을 갖지만, 합중국을 주장하는 볼리바르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산 마르틴의 의견 차이로 회담은 실패한다. 콜롬비아에서 볼리바르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란 콜롬비아는 현재의 라틴아메리카 지도대로 사분오열되고 만다.
3. 19세기 초반~19세기 중반
자세한 내용은 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19세기 초반~19세기 중반 문서 참고하십시오.4.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자세한 내용은 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문서 참고하십시오.5. 20세기 후반
자세한 내용은 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20세기 후반 문서 참고하십시오.6. 21세기
자세한 내용은 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21세기 문서 참고하십시오.7.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한계
자세한 내용은 라틴아메리카/근현대사/한계와 비판 문서 참고하십시오.8. 참고자료
- 이성형, 민선정부하의 경제정책: 알폰신 정부의 아우스트랄 계획에서 메넴정부의 경제개혁에 이르기까지, 지역연구, 1992
- 카를로스 푸엔테스, 서성철 옮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까치, 1997
- 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자본의 시대』, 한길사, 1998
- 마이크 데이비스, 정병선 옮김,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2008
- 김준년, 국경의 틈새에서 '명백한 운명'을 욕망한 희생양과 사생아 —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다시 읽기, 한국영어영문학회, 2011
- 세바스티안 에드워즈, 이은진 옮김, 『포퓰리즘의 거짓 약속 - 라틴아메리카, 희망에서 좌절의 대륙으로』, 살림, 2012
- 티모시 C. 와인가드, 서종민 옮김, 『모기』, 커넥팅, 2019
- 이리에 아키라, 이동기, 조행복, 전지현 옮김,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945 이후』, 민음사, 2018
- 존 다우어, 정소영 옮김,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창비, 2018
- 제바스티안 콘라트, 위르겐 오스터함멜, 이진모, 조행복 옮김,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750~1870』, 민음사, 2021
[1]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면적이다.[2] 예를 들어 오늘날 멕시코는 고원지대에 인구가 집중되어있고 주민 대부분이 메스티소이며, 미국 바로 옆에 있는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저가 노동력을 토대로 공업화를 어느정도 진척했으나 농업에 불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공산품과 석유가 수출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르헨티나는 평원지대에 인구가 집중되어있고 주민 대부분이 백인이며,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데 비옥한 팜파스 평원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곡물과 축산물이 수출 대부분을 차지한다. 멕시코의 수출과 무역상대국, 아르헨티나의 수출과 무역상대국에 대한 OEC 자료를 참고하라.[3] 심지어 역내 왕초로 인식되는 미국에 의존하는 정도도 서로 다르다. 애초에 미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면 라틴아메리카만 미국에 의존한다고 폄하하기도 그렇다.[4] 물론 보다 거시적으로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도 서로 공통점을 공유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사라는 보다 거시적인 맥락에서 찾은 공통점이므로 지역사에 부합하는, 즉 다른 지역에서 관찰되지 않고 라틴아메리카 역내 국가들이 가진 공통점이라고 보긴 힘들다.[5] 순전히 정치 부문만 감안하면 잉카 제국과 페루 부왕령의 중심지였던 페루도 중요하겠지만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는 앞의 네 나라들에 많이 뒤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