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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05:48

람리 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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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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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리 섬 전투
태평양 전쟁버마 전역투우사 작전의 일부
파일:attachment/242px-SE_002256_landings_on_Ramree_island.jpg
1945년 1월 21일. 람리 섬으로 향하는 영국군.
명칭
영어: Battle of Ramree Island
일본어: ラムリー島の戦い
시기
1945년 1월 21일 ~ 2월 22일
장소
버마국 람리 섬
목적
연합군 물자지원을 위한 비행장 건설
교전국
[[영국|]][[틀:국기|]][[틀:국기|]]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인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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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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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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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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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나카자와 카니치(長澤貫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이노마타 치카라(猪股力)†
병력 영국령 인도 육군 제26보병사단
제4여단
제21여단
제71여단
제146왕립기갑단 1개 중대
제3코만도여단 일부 지원
일본 육군 제121연대[1] 병력 일부
(1개 연대 1000명)
제 2대대
피해규모 다수의 함선 손상
사상자 숫자 불명
400~500명 사망 추정
포로 20명 가량?
결과
영국군의 승리 및 영국군의 람리 섬, 체두바 섬 탈환.
람리 섬 주둔 일본군 병력의 절반 가량만이 퇴각에 성공.
1. 개요2. 전개3. 악어의 공격?4. 기네스북 등재5.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미얀마 서부 람리 섬에 비행장을 건설해 미얀마 본토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했던 영국군과 람리 섬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사이에서 제2차 세계 대전1945년 1월 21일에서 2월 22일까지 벌어진 전투.

참고로 람리 섬은 미얀마어로는 양볘 섬이라고 한다. 다만 이 일대는 아라칸어[2][3] 사용 지역이다.

2. 전개

파일:rPam518.png
람리 섬(Ramree Island)의 대략적인 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40px-356_Squadron_RAF_Liberators_bombing_Ramree_Island_Jan_1945_IWM_C_4940.jpg
람리 섬을 폭격하는 연합군의 B-24 폭격기(이미지 출처)

1945년 1월 14일, 람리 섬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이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는 것을 확인한 영국군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1번함 퀸 엘리자베스를 필두로 한 영국 해군 함선들의 함포사격으로 람리 섬을 공격한 후 상륙하는 작전을 세웠고, 본격적인 전투는 1월 21일에 영국군의 람리 섬에 대한 함포사격과 폭격기 공습으로 시작되었으며 21일 9시 42분에 제 71 여단이 람리섬 서부 카야크퓨(캬우크피우, Kyaukpyu)의 해안에 상륙한 것으로 영국군의 람리 섬 상륙이 시작되었다.

1월 26일에는 산키 작전(Operation Sankey)으로 람리 섬 남부 약 10km 지점에 있는 체두바(Cheduba) 섬에 영국군 제3 코만도 여단이 상륙했으나 체두바 섬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체두바 섬을 점령한다.

람리 섬에 상륙한 영국군들은 1월 30일에서 31일까지 일본군들을 몰아 붙였고, 전황의 악화에 람리 섬에 주둔한 제121 연대의 본대로 미얀마 본토에 주둔한 제54 사단의 사단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중장이 람리 섬에서의 철수를 명령하고 후퇴를 지원할 수송선들을 람리 섬으로 보내지만 람리 섬 근해에 주둔한 영국 해군에 의해 다수의 수송선들이 격침당한다. 이에 람리 섬을 봉쇄하고 있는 영국 해군 함선들을 일본 육군 항공대 64전대가 공격해 보기도 했으나 람리섬에 안정적으로 수송선을 보낼수 있을만큼의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2월 18일, 선박을 통한 퇴각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람리 섬의 일본 육군은 어쩔 수 없이 람리 섬과 제54 사단이 주둔중인 미얀마 본토 사이의 16km 가량의 악취 나는 맹그로브 을 걸어서 건너게 되는데, 일본 육군이 늪지에서 헤매고 있을 때 영국군의 병력들은 늪지대를 포위하였다.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일본 육군은 열병과 독충 등으로 약화되기 시작했고, 추격하는 영국군과 퇴각하는 일본군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소규모 전투가 벌어져 대대장이었던 이노마타 치카라(猪股力) 소좌가 사망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람리 섬에 주둔한 약 900~1,000여명의 일본군 병력중 약 500여명만이 맹그로브 늪을 통과해 54사단에 합류하는데 성공했고, 영국군은 저항이 사라진 람리 섬을 2월 22일까지 봉쇄. 같은 날에 작전 종료를 선언하고 제22 동아프리카 여단을 람리 섬에 주둔시킨다.

3. 악어의 공격?


영국 해군 출신 과학자 브루스 라이트(Bruce Stanley Wright)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람리 섬의 바다악어들이 미얀마로 퇴각하는 수많은 일본 육군 병력을 공격하여 잡아먹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날(1945년 2월 19일) 밤은 해병대 보트에 타고 있던 그 어느 대원도 경험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검은 늪지에서 소총의 발사광은, 악어의 턱에 분쇄되는 부상병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중단되곤 했다. 악어들이 움직이면서 내는 흐릿하면서도 살벌한 소리는, 지상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지옥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새벽녘 독수리들이 악어들이 먹다 남은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도착했다. 람리 늪에 들어간 약 1,000명의 일본 육군 중 겨우 20여 명만이 살아서 발견되었다."

That night [of the 19 February 1945] was the most horrible that any member of the M. L. [motor launch] crews ever experienced. The scattered rifle shots in the pitch black swamp punctured by the screams of wounded men crushed in the jaws of huge reptiles, and the blurred worrying sound of spinning crocodiles made a cacophony of hell that has rarely been duplicated on earth. At dawn the vultures arrived to clean up what the crocodiles had left.... Of about one thousand Japanese soldiers that entered the swamps of Ramree, only about twenty were found alive.
-영문 위키피디어 『Battle of Ramree Island』 문서에서 발췌.

일본군이 악어에게 공격당해 대다수가 잡아먹혔다는 브루스 라이트의 증언은 1962년 발간된 'Wildlife Sketches Near and Far'에 수록되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다른 기록이나 증언은 전혀 없을 뿐더러, 2001년 3월 게재된 논문인 『Man eating by estuarine crocodiles: The Ramree Island massacre revisited』에 따르면 람리 섬에서 악어가 일본군 병력을 공격하였다는 내용의 최초 작성자인 브루스 라이트는 버마 전역에 참전하였으나 이라와디 강 인근에 주둔했을 뿐. 람리 섬 전역에는 참전하지 않았고 악어의 공격 또한 직접 목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어 해당 내용 자체에서부터 신빙성을 전혀 확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영국군 소속의 버마 상훈 위원회인 버마 스타 협회(Burma Star Association)에서도 람리 섬에서 악어의 공격이 있었다는 것만 인정했을 뿐, 일본군이 악어에 의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영국군의 공식 보고서에도 악어의 공격으로 인해 일본군이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은 없을 뿐더러, 당시 현장의 일본군이나 현지주민의 증언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1965년에 발간된 영국의 공식 역사책인 '버마의 재정복'(The Reconquest of Burma)에서도 당시 장소가 악어로 들끓는 늪지대란 내용만 있고, 악어의 공격 같은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다.

또한 람리 섬 전투 당시 람리 섬에 주둔했던 일본군 병력인 보병 제 121연대의 보충대인 제 47부대에서 기관총병으로 복무하며 람리 섬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 출신자인 오하라 히로미(小原 博美)도 람리 섬 탈출 당시의 악어 공격에 대해 부정하며 "람리 섬에 주둔할 때 거북은 본 적 있지만 악어는 본 적이 없다"고 덧붙인 것은 물론,[4] 보병 제 121연대 자체도 각각 보병 제121 연대 제3 기관총중대(歩兵第121連隊第3機関銃中隊), 1944년 보충된 보충병으로 구성된 보병 제121 연대 통신중대(歩兵第121連隊通信中隊), 보병 제121 연대 11중대(歩兵第121連隊第11中隊) 등 3개 중대 출신자로 구성된 전우회 3개의 존재가 확인되는만큼 브루스 라이트의 "일본군 20여명만이 생존했다"는 서술은 사실과는 크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게다가 2016년 말에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방영한 6부작 다큐멘터리 'Nazi weird war two'[5]의 4편인 'Crocodile Massacre'[6]에서 자문을 구한 악어 농장 측에서는 악어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자기 체중의 5~7%만을 먹기 때문에 1,000여명에 가까운 사람을 먹어치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몸길이 5m 이상의 악어 1,500마리 가량이 있어야 하지만, 넓은 영역을 가지고 사는 악어가 제한된 공간에 그렇게 많이 모일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등. 브루스 라이트의 주장은 악어의 생태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증언했다.(#)[A]

영국의 역사학자 프랭크 맥린(Frank McLynn)는 자신의 저서 The Burma Campaign: Disaster into Triumph, 1942-45에서 "만약 브루스 라이트의 주장대로 일본군을 학살한 악어가 수천 마리였거나 혹은 일본군 수백 명을 잡아먹거나 죽일 정도로 많았다면 그 늪지대의 생태계는 훨씬 이전에 파괴된 상태였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현재 역사학자들은 이 악어에 의한 학살 이야기를 도시전설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람리 섬 전투 당시 바다악어가 일본군 병사들을 공격했다는 일화에 대한 근거는 람리 섬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고 자신이 주장한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 조차 아닌 브루스 라이트의 서술 단 하나뿐으로서 신빙성이 부족한데다 브루스 라이트의 주장과는 다른 실제 람리 섬 전투 참전자의 증언 및 많이 먹지 않는데다 넓은 영역을 가지고 서식하는 바다악어의 습성, 상위 포식자인 바다악어가 과하게 많을 시 발생했을 생태계의 문제 등 이를 방증하는 근거 또한 충분히 존재하는만큼 브루스 라이트가 주장한 람리 섬 전투당시 악어 공격에 대해서는 과장 내지는 사건 자체의 허위성을 검토하는 등. 다양한 시점에서 살펴보아야할 재고(再考)의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본 문서 또한 오랫동안 악어의 공격을 단정하는 투와 더불어 사실과는 다른 단순 흥미 위주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8] 악어의 공격에 대한 반론적 근거가 작성된 이후의 본 문서를 참고하여 작성·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의 몇 매체에서도 브루스 라이트의 주장과 후술된 람리 섬 전투의 기네스북 등재만을 내세우고 이를 반증하는 근거를 배제하여 악어의 공격을 단정하는 것에 치우친 확증편향적인 서술을 보이고 있는만큼, 람리 섬 전투의 취급에 대해서는 주의를 요한다.[9]

그나마, 전투 와중에 죽은 수백여명 시체를 악어가 먹을 가능성은 있긴 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직접 람리 섬으로 가니 악어에게 산채로 먹혔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했지만, 해당 늪지는 사람이 들어가면 나오기도 힘든 와중인데 이 상태로 전투를 했다면 무수히 죽어나갔을 것이고 시체를 악어나 다른 동물이 처리했을 가능성은 꽤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투 와중에 사람도 제대로 움직이기 어려운데 죽은 동료 시체를 챙길 틈은 더더욱 없었기에. 악어가 아니라도 밀림에 사는 온갖 도마뱀에서 별별 동물들에게 사람 시체는 그저 좋은 먹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4. 기네스북 등재

1999년도 기네스북에 『동물에 의한 가장 큰 재앙(The Greatest Disaster Suffered from Animals)』이라는 기록으로 등재되었다.

상기된 2016년 말에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방영한 6부작 다큐멘터리 'Nazi weird war two'의 4편인 'Crocodile Massacre'에서 2017년도 기네스북에 악어 공격으로 인한 가장 많은 사람의 사망?(Most human fatalities in a crocodile attack?)이라는 기록으로 람리 섬 전투가 등재되어있는 것이 방영되었는데,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일부가 공개되었던 2017년도 기네스북에서는 람리 섬 전투에 대해 "하지만 그 일화 내지는 적어도 사망자의 규모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10]라고 기재해 악어의 공격이나 그 규모를 완전히 확정하지는 않고 있으며 한국어판 2017년도 기네스북에서 해당 부분은 "그런데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새롭게 조사해보니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지거나 적어도 죽은 사람의 숫자가 과장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11]라고 번역되어 있다.

5. 참고 문헌



[1] 제54사단 산하로서 돗토리현 출신자로 구성된 연대이다.[2] 라카인어 라고도 하는데 아라칸어는 미얀마어와 매우 가까워서 어느정도 말이 통하기 때문에 미얀마어의 방언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원래 중근세까지는 같은 언어였는데 이후에 아라칸 산맥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 역할을 해 갈라졌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미얀마어는 언어 순화를 많이 거쳐서 약간의 중국어, 태국어, 산스크리트어 표현 외에는 없지만 아라칸어는 전통적으로 인도 특히 벵골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영국에 먼저 점령되어 영어의 영향도 많은데다가 언어 순화 역시 거치지 않고 표준화도 되어 있지 않다.[3] 참고로 미얀마어와 아라칸어의 차이점은 음운 변화의 유무인데 가령 '깨끗하다'라는 뜻의 'ကြည် (krañ)' 의 경우 버마어에서는 음운 변화 때문에 '찌' /tɕì/(아웅 산 수 치 이름의 '치'가 이 단어.)로 발음하나, 아라칸어에서는 음운 변화 없이 문자 각각의 발음 그대로 '끄라잉' /kràɪɴ/으로 발음된다.[4] 第2大隊がビルマ本土に渡る時(注 2月19日)に、日本兵約千名が大きな爬虫類(イリエワニ)に食べられて凄惨な死に方をしているのを見たという英兵の証言があり、現在ギネスブックに「動物がもたらした最悪の災害」として登録されているそうだが、渡河中はワニではなく英兵に撃たれてやられた。また、ラムレ島にいた時はカメは見たがワニは見なかった。(출처)[5] 영국인 역사학자 샘 윌리스와 한국계 미국인 방송인 로버트 조가 진행하였다. 샘 윌리스는 자신의 조부가 미얀마 전역 때 참전했다고.[6] 러시아어 더빙 버전이다.[A] 삭제됨[8] https://namu.wiki/w/람리%20섬%20전투?rev=371[9]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물’에게 잡아 먹힌 사건, 악어에게 전멸 당한 일본군 '람리 섬 전투', 기네스북에 기록된 동물에 의한 가장 큰 재앙 람리섬 전투,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을 몰살시킨 악어 대학살 사건, 악어에게 전멸 당한 일본군 '람리 섬 전투'.뉴스 링크된 페이지 모두 람리섬 전투 당시의 악어 공격을 단정하고 있으며, 해당 링크들의 서술을 본 문서의 r377버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일부 문단의 서술이 일치하거나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물론. 링크된 페이지들의 개제 시점이 본 문서의 r377버전 작성 시점(2017/02/26) 이후인 만큼 해당 링크들은 모두 본 문서를 기반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10] however, has cast doubt on the story, or at least on the extent of the deaths.[11] 기네스 세계기록 저. 공민희, 엄성수 역. 기네스 세계기록 2017: Guinness World Records 2017 p. 54[A]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