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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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리승엽 李承燁 | Ri Sŭng-Yŏp | |
출생 | 1905년 2월 8일[1] |
경기도 남양군 영흥면 선재리 | |
사망 | 1954년 7월 30일 (향년 48세) |
평양시 중앙인민형무소 | |
본관 | 전주 이씨 |
학력 | 인천공립상업학교 (중퇴)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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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이자 언론인, 공산주의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공산당 창설에 관여했으며 조선로동당의 초대 정치위원이자 박헌영의 최측근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2] 박헌영 등과 같이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이명은 이양경(李良敬).2. 생애
경기도 남양군 영흥면 선재리[3]에서 아버지 이기선과 어머니 전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기선은 뱃사공이었으나 이후 인천부로 이주하여 여관을 경영하였다. 1920~1930년대 일본 제국의 '요시찰 인물 감시 카드'에 따르면, 부친의 부동산과 동산이 약 2만원 (현재 물가는 약 4억원 추정) 상당에 이를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어린 시절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란 것으로 보인다.[4]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5] 이후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지만, 입학한 당해[6] 7월에 알 수 없는 사유로 퇴학조치되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들어가지만 1923년 2월 중퇴한다. 이 무렵 사회주의에 심취하였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다.
'신간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가정도 꾸렸으며, 동인천역 맞은편에 있던 인천미곡상조합의 사무장으로 일했다. 리승엽이 인천미곡상조합에서 일할 때 도보로 2 ~ 3분 거리에 조봉암이 운영하던 비강조합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모아 연료로 공급하는 곳)이 있었고, 인천의 사회주의 운동 핵심에 있었던 박남칠이 그 옆에서 쌀 가게를 하고 있었다. 당시 가게들의 현위치 그러한 이유로 리강국 등 서울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자주 오가기도 했다. 훗날 이러한 인연이 시작되어 광복절 이후 인천의 미곡상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 지부의 핵심 인원이 된다.
1925년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일하였다. 한편 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여 인천 지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 창건에 관여한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석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 1930년 3.1운동 11주년 기념으로 '전조선 피압박 피착취계급에 격함'이라는 격문을 뿌린 '격문사건' 주도자로 수배당했지만, 도주에 성공하여 검거되지 않았다.[7] 이후 영남 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1932년 이른바 '반제격문사건(반제사건)'으로 체포된다. 이는 만주사변과 관련하여 반제국주의 반전 격문을 뿌린 사건으로, 대범하게도 당시 진주와 부산에 있던 일본군 주둔지에도 이 격문을 뿌렸다고 한다. 이러한 혐의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인천에서 부산까지 와서 공판을 참관했다면서, 처자식이 불쌍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후로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다가, 1940년 전향서를 쓰고 출소한다. 전향 이후 일제의 식량배급조합 이사로 있었고, 친일적인 글도 다수 썼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는다. 북에서는 이때부터 일제의 간첩으로 변모했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위장된 것이며 비밀리에 사회주의 운동[8]을 벌였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는 1945년 봄 조선건국동맹 결성에 관여했으며,[9] 해방 이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이 되고 조선공산당 결성에 가담하여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오른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무렵 박헌영의 지시에 의해 월북했으며, 북한 정권 수립 후에는 사법상에 임명되는 등 요직에 앉았다.
1949년에는 박헌영과 함께 조선인민유격대(이른바 빨치산)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6.25 전쟁으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서울특별시장 격인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인천 상륙 작전 이후에도 패잔병을 모아서 유격전과 지연전을 펼치다가 후퇴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일하게 UN군 및 국군과 대치했으며, 김일성과 장교들이 평양을 버리고 도망갈 때도 끝까지 전선을 지켰다고 한다. 고향이 인천이라서 인천 지리에 밝았고 이로 인해 UN군과 국군을 상대로 인천에서 2주일이나 개길 수 있었다.
인공치하 서울에서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연설 중인 리승엽.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사법상에서 해임되고 리용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2년 5월 8일, 국가검열성이 폐지되고 새로 인민검열위원회가 조직됨에 따라 초대 인민검열위원장에 임명된 것을 마지막으로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정권 전복'과 '미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이 집행되었다.
전쟁을 일으켰지만 무력 통일은 고사하고 북한 전역이 폐허가 된 채로 정전협정이 체결됐기 때문에, 김일성 입장에서는 남로당 인사들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씌울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리승엽을 시작으로 남로당 인사들은 '정권 정복 음모 및 미제 간첩'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55년경 최종적으로 박헌영이 처형되면서 북한에서 남로당계 세력은 완전히 숙청된다.
3. 여담
- 전 야구선수 이승엽[10]과 한자까지도 같은 동명이인이다. 때문에 인터넷상에서는 인민타자나 그란도숙청이라는 별명이 있다. 한자 燁(빛날 엽)은 일본에서 자주 쓰이지 않고 기타 애로가 있는 건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엽' 을 가타카나로 표기해 '李承ヨプ' 표기가 표제어로 되어있다. 물론 일본에서 이름이 李承ヨプ로 종종 표기되는 것은 야구선수 이승엽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李承ヨプ이라는 표기를 보는 일본인들 역시 대부분 야구선수 이승엽을 떠올릴 것이다.
-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내각목록에서 리승렵으로 실린 바 있는데, 이는 오타이거나 당대 유행했던 과잉수정[11]으로 보인다. 다른 버전의 북한 정부내각목록에서는 '리승엽'으로 수정되어있다.[12] 燁의 원음이 '엽'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과잉수정으로 인해 바로 원복한 것으로 보인다.
- 리승엽의 아들은 공군 제1항공사단에서 조종사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숙청된 이후 덩달아 체포되었다. 그의 친구였던 노금석 상위는 자신도 숙청될 것을 우려하여 1953년 9월 21일 귀순했다.
- 2022년에 새로 나온 북한 드라마 한 검찰일군의 수기의 메인 빌런이 리승엽이다. 곽인국이 분했다.
[1] 북한에서 밝힌 자료는 1905년생인데, 192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와 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6년 2월 8일생으로 기재되어있다. 허나, 193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와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1908년 2월 9일생으로 되어 있다. 다만 북한에선 건국 후 간부들의 자필 이력서 등을 다 쓰게 해서 기초적 신상정보를 이들에게 입수했으므로 따라서 북한에서 밝힌 1905년생은 리승엽 본인이 밝힌 생일로 가장 정확하다.[2] 애매한게, 리승엽과 박헌영 모두 전쟁이 한창이었던 1953년 3월에 체포되었다. 종전까지 4달이 남은 상태였기에 전쟁 중 총살당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3] 現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선재리[4] 이와 관련해서 북한에서는 소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하면서 '출신부터 반혁명적인 인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인사들 중 부르주아 출신들이 꽤 된다. 당장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아버지가 교육장학사 출신이였고, 이현상도 아버지가 부농에 면장까지 지낸 지역 유지였다.[5]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등에는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퇴학 당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그와 관련된 기록에서는 그가 '졸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6] 기록마다 연도가 다르다. 1921년 혹은 1922년에 입학했다고 한다.[7] 당시 격문사건 재판부에서는 격문사건으로 체포된 6명에 대해서만 형을 집행하였고, 리승엽을 포함하여 체포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8] 함경도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 지하 조직에 관여했다고 한다.[9] 따라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도 않았다.[10] 광주 이씨다.[11] 두음법칙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는데, 일제 때는 원음으로 되돌린답시고 원음이 ㅇ이나 ㄴ으로 시작하던 한자들까지도 ㄹ로 고치는 과잉수정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당대 유행했던 민요인 농부가(農夫歌)도 롱부가로 표기한 레코드판이 있다.[12] https://unamwiki.org/w/images/e/eb/1948-09-%EB%B6%81%ED%95%9C%EC%B4%88%EB%8C%80%EB%82%B4%EA%B0%81_%EC%82%AC%EC%A7%84.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