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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23:59:03

마크 대처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마크 대처 경
Sir Mark Thatcher
Bt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5040418531530003600-001.jpg
본명 마크 대처 경, 제2대 준남작
Sir Mark Thatcher, 2nd Baronet[1]
출생 1953년 8월 15일 ([age(1953-08-15)]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첼시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가족 마거릿 대처 (모)
데니스 대처 (부)
학력 해로우 스쿨
직업 사업가
1. 개요2. 생애 초반3. 적도 기니 쿠데타 개입4. 쿠데타 실패 이후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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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의 아들이며 사업가이다.

영국 정치계 거물의 아들이라는 점을 내세워 영국 및 해외의 이권에 개입하는 측근비리를 저지르거나 부적절한 처신을 해서 여러 번 물의를 빚었으며, 특히 2004년에는 적도 기니에서 일어난 쿠데타 시도에 가담하기도 했다.

2. 생애 초반

마거릿 대처와 데니스 대처(Denis Thatcher, 1915~2003) 사이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형제관계로는 이란성 쌍둥이 누나인 캐롤 대처가 있다. 어릴 적은 첼시에서 보냈으며, 해로우 스쿨을 졸업한 후 회계학을 공부했으나 회계학 시험에 3번이나 불합격하고는 홍콩으로 이주하여 중동과 자동차 경주에서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어머니의 총리 재임기였던 1982년 1월 9일에 카레이서로서 다카르 랠리에 참가했다가 실종되어서 1월 14일에 구조된 적이 있다. 그런데 모국인 영국을 뒤집어 놓고 아프리카 현지에서도 많은 인력이 자신을 찾느라 고생했건만, 구조된 후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든지 하는 말은 안 하고 이런 대환영은 처음이라고 비꼬는 투의 말을 해서 영국 내 여론을 악화시켰다.

사실 마크 구조 비용(1,191 파운드)을 대처가 개인 재산으로 전액 지불했기 때문에, 마크가 처신만 잘 했어도 마크 개인의 작은 구설수 정도로만 남거나, 잘만 했다면 총리를 하는 어머니를 향한 국민들의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인데도 이랬다는 것이 마크의 안 좋은 인성 및 무능함을 보여준다.

이후 마크 대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자기 회사를 차리고 중동아프리카 대륙 전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무기 밀매와[2] 용병단을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던 자기 회사가 사채업자 고용 혐의로 남아공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마크 대처는 1987년에는 자신의 거래의 중재인이던 와픽 사이드[3]가 관리하는 역외회사가 자신을 위해 런던 벨그라비아에 있는 집을 100만 파운드에 대신 구매해줬다는 일을 부인하지 않았다.

1987년에는 다이앤 부르크도르프[4]와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고, 1996년에는 미국의 금융 스캔들 때문에 남아공으로 이주했으며, 2003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크 대처는 아버지에게 수여되었던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3. 적도 기니 쿠데타 개입

참고자료

그러다가 마크 대처는 2004년 3월 7일에 일어난 적도 기니[5]쿠데타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다. 이 쿠데타를 주모한 사람은 SAS 장교 출신의 용병 사이먼 만(Simon Mann, 1952~)이었으며, 만은 당시 적도 기니 대통령이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6]를 퇴진시키고 당시 스페인에서 따로 망명정부를 차리고 있던 적도 기니의 야당 대표인 세베로 모토 은사(Severo Moto Nsá, 1943~)를 옹립하기로 했다.

이 쿠데타를 조사한 검찰은 모토가 쿠데타에 연루된 기업들에 석유 특혜권을 주는 대가로 대통령에 취임할 것이었다고 추정했는데, 실제로 레바논 출신의 영국의 석유 사업가 엘리 칼릴[7]도 이 쿠데타에 75만 달러를 지원했다고 한다.

마크는 쿠데타에 필요한 자금을 25만 달러 정도나 지원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용병을 공수해오기로 하고 헬기에 만을 포함한 용병 70명[8]을 실어서 적도 기니로 이동시키고 있었으나 이동하던 도중 용병을 실은 보잉 727기가 무기를 사기 위해 경유지로 삼으려 했던 짐바브웨 하라레에 억류되는 바람에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용병들은 이민법, 화기법,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마크는 그 길로 도주했으나 2004년 8월 25일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자택에서 인터폴에게 체포당했고, 음모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부주의하게 제공한 것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이에 마거릿은 부랴부랴 있는 돈 없는 돈을 탈탈 털어서 아들의 보석금을 마련했고 결국 16만 5천 파운드(약 3억 2천만원)이라는 거액의 보석금을 낸 뒤 마크는 유죄 인정 대신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중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치계 최대의 거물의 가족이자 영국 왕실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사람이라서 이 정도까지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 내에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마크 대처는 2005년 1월 13일에 남아공 법원에서 쿠데타 시도에 참여한 용병들에게 28만 5천 달러를 송금했다는 것이 인정되어 4년 집행유예와 56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고, 미국에서는 입국불허자 명단에 등록되었다. 이제 마크는 미국 정부에서 입국불허자 명단에서 본인의 이름을 삭제해주지 않는 이상 영원히 미국에 갈 수가 없다. 문제는 마크의 아내와 자녀들이 죄다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이후 사이먼 만은 2004년 9월 10일에 짐바브웨에서 7년형을, 비행기 조종사 2명은 16개월형을, 나머지 용병들은 이민법 위반으로 1년형을 선고받았으며, 2007년 5월 2일에 만 한정으로 적도 기니로 송환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고, 2008년 1월 31일에 적도 기니로 송환되어 아프리카에서 가장 악명높은 감옥인 '블랙 비치' 수용소에 수감된 후 2008년 7월 7일에 징역 3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009년 11월 2일에 사면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쿠데타 미수 시도를 무사히(?) 넘긴 오비앙 응게마 적도 기니 대통령은 용병들이 체포될 당시에 적도 기니 연안에 스페인 전함이 2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들며 '쿠데타 시도를 스페인 정부가 지원했다'고 주장했으며, 2017년 12월 24일에 야당 인사들의 쿠데타 미수 시도가 발각되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랄한 진압을 가했고[9]. 2023년 현재까지도 44년째 집권하고 있다. 그리고 세베로 모토는 쿠데타 실패 3일 뒤에 스페인의 라디오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응게마가 정적들의 인육을 먹었다'는 충격적인 의혹을 제기했고[10], 상술한 쿠데타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궐석재판에서 징역 59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4. 쿠데타 실패 이후

이 우여곡절 후 마크 대처는 2005년 9월에 이혼을 해 상술한 것처럼 아내와 자식들을 미국에 두게 되었고, 본인은 모나코스위스를 전전하다가 지브롤터에 정착하여 2008년 3월에 부동산 개발업자의 딸인 사라-제인 러셀(Sarah-Jane Russell)과 재혼했고, 2024년 현재까지 큰 말썽 없이 조용하게 사는 중이다.

이후 마크 대처는 바베이도스에서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고, 2013년 4월 17일에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린 어머니의 장례식에 상주 자격으로 영국으로 돌아와 오래간만에 가족들과 재회했다.

2016년 4월에는 파나마 페이퍼즈 사건 때도 언급되었는데, 마크 대처는 신탁의 수혜자로서 바베이도스의 집을 보유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5. 기타

6. 관련 문서



[1] 어머니가 총리를 사임한 뒤 아버지가 받았던 대처 준남작위를 아버지 사후 세습했다.[2] 주로 영국군에서 사용하는 무기를 자신이 총리의 아들이라는 직함을 이용해서 밀반출한 뒤(총리인 마가릿 대처가 적극적으로 비호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걸 탈레반 같은 테러단체에게 팔아넘겼다. 대표적인 사업은 알 야마마 무기거래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 이라크장거리 곡사포를 팔았다.[3] Wafic Saïd, 1939~. 시리아 출신의 캐나다의 금융가, 사업가 겸 자선가. 마거릿 대처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대처가 총리로 집권할 동안 최소 35만 파운드를 그녀에게 건냈다.[4] Diane Burgdorf, 1960~. 아버지가 자동차 판매상이었다.[5] 방대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으로 유명한데, 이 덕에 아프리카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2008년에는 1인당 GDP가 한국보다 높은 나라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6] 다만 이 사람도 멀쩡한 사람은 아니다. 애당초 오비앙 응게마는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잔혹한 것은 물론이고 부정부패가 워낙 극심해 1인당 GDP가 22,000달러에 육박하던 2011년 기준으로 빈곤선 밑에서 사는 국민이 44%였던 것과 달리 본인은 부통령인 아들과 함께 초호화 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많기 때문.[7] Ely Calil, 1945~2018. 2010년 기준으로 재산이 3억 5천만 파운드에 달한 영국 최대 갑부 중 하나였다.[8] 이들 대부분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서 싸우던 특수부대인 제32 버팔로 대대 출신이었다고 한다.[9] 어느 정도로 악랄했냐면, 이 쿠데타가 사실은 정적 탄압을 위한 자작극 아니었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10] 다만 이 의혹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11] 대처가 여왕과 접견하면서 평소와 다르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아들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는다. 이때 대처가 아들을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표현한다. 여왕은 나중에 자기 남편인 필립공에게 "자식이 둘 뿐이고 더구나 쌍둥이인데 어떻게 한 명을 노골적으로 편애할 수 있느냐?"며 놀라움을 나타낸다.[12] 실제로 토미 수하르토는 단 4년만 감옥살이를 하고 가석방된 것도 모자라 그 4년도 호텔 수준의 감방에서 자유롭게 외출이 가능하는 등 있으나마나한 감방생활에 그쳤다.